LOGIN제6화. 불청객의 초대
하늬가 성진 그룹의 상무로서 사교계에 안착해갈 무렵,
예상치 못한 곳에서 균열이 시작되었다.
성진 그룹 강 회장의 저택에서 열린 자선 경매 파티.
하늬는 이제 제법 익숙해진 태도로 하객들 사이를 누비고 있었다.
하객들에게 가벼운 눈인사도 주고 받고, 간단한 인삿말도 나누는 등 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가식적인 미소를 띄고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으나,
타고난 연극 배우로서의 갈고 닦은 실력으로 참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등 뒤에서 들려온 날카로운 목소리에 하늬의 걸음이 얼어붙었다.
"서연아! 너 한국 왔다는 소식 듣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니? 왜 연락이 없었어?"
고개를 돌리자, 화려한 핫핑크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과장된 몸짓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누구???"
조 실장이 준 블랙리스트에는 없던 얼굴이었다.
하늬는 심장이 요동치는 것을 느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임기응변으로 하늬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낯선 이를 어쩔 수 없이 아는 체를 했다.
"아.오랜만이네. 그런데 미안해, 내가 최근에 사고가 좀 있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하거든."
"에이. 그래도 나를 기억하질 못하다니...섭섭한데?"
"...그런가? 미안해. 내가 좀 경황이 없어서..."
이럴때는...뻔뻔함이 최고다. 상황 모면하는 것은...
하늬는 조 실장이 가르쳐준 만능 방어기제인 '사고로 인한 기억 혼선' 카드를 꺼냈다.
하지만 낯선 여자는 눈을 가늘게 뜨며 하늬의 안색을 살폈다.
"나야, 나! 파리 국립고등음악원 시절에 우리 매일 같이 붙어 다녔던 채린이.
너 그때 나랑 약속했잖아.
한국 가면 같이 듀엣 연주회 열기로 말이야."
"내가? 듀엣을? 너랑?? 그럴리가??"
"너. 벌써 까먹은거야? 철석같이 나하고 약속을 해놓구서는?"
"...아...응...그래"
하늬는 본능적으로 살갑게 다가오는 이 채린이라는 여자가 위험 인물이란걸 느꼈다.
얼굴이 너무 가식적이었기 때문이다.
'뭐지? 이 여자는...내가 사고로 피아노를 못친다는 것을 모르는 건가? 아니면...일부러?'
재벌들의 말투와 표정들은 이해하면 할 수록 더욱 어려웠다.
어느새 하늬의 손바닥에 식은땀이 고였다.
하늬의 머릿 속에는 하나도 입력되지 않은 캐릭터였다.
조 실장이 준 사전 지식 자료에는 없는 캐릭터.
그리고 피아노.
하필이면 강 회장이 가장 엄격하게 금지했던 그 키워드였다.
주변의 시선이 채린, 하늬 두 사람에게 쏠리기 시작했다.
어쨋든 이 상황을 타개하기로 하늬는 생각했다.
더이상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 채린이었구나. 미안해, 아직 컨디션이 안 좋아서 연주는 무리야."
"에이, 무슨 소리야! 너 프랑스에서 졸업 연주회 때 쳤던 그 곡,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 말이야.
그때 네 연주 보고 교수님이 극찬하셨잖아.
여기 마침 피아노도 있는데, 한 소절만 보여주면 안 돼?"
"그건 좀....내가...몸이 많이 안좋아서..."
"에이...그래도...서연아..한번 너의 실력을 보여줘봐. 응?"
"그래도...난...아직..."
"너 설마...피아노 치는 걸 까먹은 건 아니지???"
"..."
'뭐지? 이 여자는 강서연이가 피아노 트라우마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지는 않을텐데...왜 이러지?'
하늬가 주저하며 망설이는 동안, 소란스런 그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하나둘 피아노 근처로 모여들었다.
채린의 눈빛은 반가움보다는 일종의 '확인'을 바라는 악의에 가까웠다.
그녀는 서연의 오만함에 늘 밀려 살았던 과거의 라이벌이었고,
변해버린 서연의 분위기에서 미묘한 위화감을 감지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서연을 군중들에게 물 먹여보리라 마음 먹었던 것이다.
그때 위기의 순간, 수군대는 군중을 헤치고 승준이 나타났다.
멀리서 그 당황하는 하늬의 모습을 보니, 자신이 뭔가 해결해줘야 할 것 같았다.
동화에서 나오는 백마탄 왕자님처럼 말이다.
그는 하늬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채린을 차갑게 응시했다.
"서연이가 사고 이후로 건반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군. 예의가 없네, 채린 씨."
"아, 승준 본부장님. 하지만 서연이 실력이 아깝잖아요. 손가락이라도 좀 풀면 어때서..."
"그만해. 서연이는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그치만...안정이요? 서연이가 많이 다쳤었구나. 에구."
가식적인 표정을 짓는 채린이. 누가봐도 가식적이었다.
전혀 걱정하는 표정없이...
승준의 단호한 목소리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채린은 분한 듯 입술을 깨물더니, 하늬의 귓가에 다가와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상하네. 서연아, 너 예전에 나랑 술 마시면서 그랬잖아.
죽어도 피아노 덮개는 안 덮을 거라고. 네 손목의 그 흉터, 피아노가 준 훈장이라며 자랑할 땐 언제고."
"뭐라고?"
채린의 시선이 당황해하는 하늬의 매끄러운 손목을 스치듯 지나갔다.
하늬는 본능적으로 소매를 끌어내렸다.
채린이는 일부러 강서연의 트라우마르 일으키려고 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당연히 강서연이 아닌 하늬였기에 트라우마가 있을리 만무했다.
채린이가 오히려 놀란 듯 물었다.
"뭐야? 서연아. 이제 상처는 괜찮은 거야?"
"상처?"
아차 싶었다.
강서연이는 피아노 건반에 의해 상처가 생겼고 그로 인해 트라우마가 있다는 것을...
승준의 눈동자가 그 찰나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채린이 물러난 뒤, 파티장의 소음이 다시 이어졌지만 하늬의 머릿속은 하얗게 비워졌다.
승준은 하늬를 데리고 조용한 테라스로 나갔다.
"고마워요, 도와줘서..."
"고맙기는...당연히 약혼자인 내가 도와줘야지. 안그래?"
"네? 아...네."
하늬가 간신히 입을 뗐다.
승준은 그녀의 손목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런데...그 흉터, 정말 수술로 지운 거야? 아니면... 처음부터 없었던 거야?"
승준의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질문은 칼날보다 날카로웠다.
하늬는 순간 숨을 멈췄다.
'헉'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고, 이제는 그 거짓말이 그녀의 목을 죄어오고 있었다.
승준의 의심은 이제 '짐작'이 아닌 '확신'의 단계로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뭔가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제13화. 박제된 공주의 반격성진 그룹 회장 자택에 있는 강 회장 서재의 불빛은 새벽이 깊도록 꺼지지 않았다. 강 회장은 조 실장이 가져온 치앙마이의 사진을 아주 천천히, 한 장씩 넘겼다. 그의 표정은 호수처럼 고요했지만, 사진과 서류를 쥔 손끝에는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그리고, 한장의 사진을 들어올렸다.이하늬와 판박이로 닮은 이가 망원렌즈로 찍혀 있었다."서연이가... 서연가 살아 있었군."강 회장의 목소리는 낮고 깊었다. 분노보다는 허망함, 그리고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핏줄에 대한 지독한 원망이 서려 있었다.어렸을때부터 해달라는 것은 무조건 해주었다.해를 따달라면 해를 따오고, 달을 따달라면 달을 따오고...그랬던 것이 서연이를 망친 것 같아, 독이 된 것 같아 심한 자괴감이 드는 강 회장이었다.차곡차곡 그룹의 일을 맡겼다면, 이렇게 무책임한 아이가 안되었을 것을...'내가...너를...이리 만들었구나...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다음날 성진 그룹 회장실에 출근한 강 회장이 조 실장을 불렀다.강 회장은 한동안 창밖을 초점없는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긴 침묵이 흘렀다.그때 조 실장이 말했다.조 실장은 자신을 왜 불렀는지 직감했다.어제 진짜 강서연의 존재를 보고했기에 그와 관련돼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회장님, 당장 경호팀을 보내 실종 신고된 상무님을 모셔올까요?""흠..."조 실장의 물음에 강 회장은 창밖의 무표정한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단순히 사랑하는 딸을 찾는 아버지가 아니었다.그는 무너져가는 성진 그룹이라는 제국의 마지막 성벽을 지탱하는 최후의 보루이자 설계자였다.피 보다는 그룹의 생명을 더 중히 여기는 이성론자였다.지금 성진 그룹은 창립 이래 최악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야심차게 그룹의 역량을 총동원한 투자가 몇년째 빛을 못 보고 있는 상황에서,그룹의 자금 유동성이 급격히 악화됐기 때문이다.지금 한주 그룹과의 빅딜이 성사되질 않으면, 성진은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는 위기였던 것
제12화. 조명이 꺼진 무대 위에서 성진 그룹의 승리로 끝난 MOU 기술 협약식 이후, 승준은 차가운 침묵으로 하늬를 대했다. 하지만 비즈니스 파트너로서의 예우를 갖추기 위
제11화. 체스의 말, 사냥터의 꽃 성진 그룹 회장실 강 회장의 집무실. 강 회장과 조 실장이 나즈막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제10화. 붉은 연기하늬에게 찾아 온 절체절명의 위기.승준의 손가락 끝에 묻어난 검붉은 파운데이션. 정적이 감도는 대기실 안에서 승준의 서늘한 시선이 하늬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꿰뚫었다. 하늬의 심장은 폭주하는 엔진처럼 날뛰었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차갑게 식어갔다. 여기서 무너지면 엄마도, 자신도 끝이었다.“서연아, 설명해 봐. 이 상처가 왜 네 손가락 끝에서 지워지는 거지?”"네? 그건?"승준이 묻어난 검붉은 파운데이션 자국을 보여주며 압박해 왔다. 하늬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마음을 다잡으려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의 얼굴에는 조소와 서러움이 뒤섞인 기이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오히려 승준의 손을 거칠게 쳐내며 찢어진 드레스 자락을 더 크게 찢어발겼다.“후련해? 내 추한 바닥을 확인하니까 속이 시원하냐고! 승준싸”"뭐?"하늬의 갑작스러운 고함에 승준이 주춤했다.하늬는 거울 앞에 놓인 클렌징 워터를 집어 들어 자신의 손목을 미친 듯이 문지르기 시작했다. 반쯤 번져 있던 가짜 흉터가 닦여나가며 매끄럽고 하얀 살결이 드러났다.“그래, 이거 가짜야! 내가 직접 그렸어. 잘 봐.만족해?”"그렸다고?"승준의 눈에 경악이 서렸다.“직접 그렸다니, 그게 무슨···.”“남들은 다 잊었어도 난 못 잊으니까! 거울을 볼 때마다 그날의 비명소리가 들리는데, 내 몸은 너무 깨끗해서··· 그게 더 소름 끼쳐서!”하늬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승준의 가슴을 밀쳤다.“의사가 그러더라, 이건 몸의 상처가 아니라 마음의 상처라고. 흉터는 사라졌어도 내 뇌가 그 고통을 기억해서 환상통을 만들어내는 거래. 그래서 그렸어! 차라리 눈에 보이는 상처가 있으면 덜 미칠 것 같아서! 내가 미친년 같지? 흉터까지 연기하는 미친년!”"아니. 그게 아니라..."이것은 하늬가 배우 시절 배운 ‘신체 이형 장애(Body Dysmorphic Disorder)’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교묘하게 섞은 고도의 심리 연기였다. 승준
제9화. 신의 한 수, 그리고 가면의 균열성진 그룹의 사활이 걸린 의류 신제품 론칭 쇼를 앞두고...메인 모델이 잠적하는 대형 사고가 터졌다. 메인 모델이자 성진의 얼굴이었던 톱배우가 상대 경쟁사의 사주를 받고 행사 직전 잠적해 버린 것이다.그것도 행사 당일날. 대신 섭외할 수도 없는 이 상황을 노린 것이다.이 행사는 단지 의류 신제품 론칭 만이 아니라, 론칭 쇼를 기회 삼아 정재계를 초청해서 성대하게 치뤄지는 행사였다.하객으로 참석한 수백 명의 언론사와 승준을 포함한 그룹 관계자들은 성진의 망신을 기다리며 웅성거리고 있었다.조 실장은 사색이 되어 강 회장에게 보고했다.아마도,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 그룹의 이미지를 해칠려는 함정에 걸린 듯 하였다."회장님, 메인 모델이 사라졌습니다. 이대로라면 오늘 론칭 쇼는 물론이고 내일 주가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누가 이런 짓을 꾸몄지? 조실장?""아마도...그룹이 흔들리기를 원하는 쪽일 것입니다.""흠...그럼 그 쪽인가? 증거를 찾아내도록 해.""네...알겠습니다. 회장님."강 회장의 미간이 깊게 파였다.그때, 분장실 구석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하늬가 천천히 분연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강 회장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제가 나갈게요. 서연 상무가 직접 모델로 나서는 겁니다. '상속녀가 직접 입는 옷'보다 더 강력한 마케팅이 어디 있겠어요?""상무님. 그건?""제가 할 수 있어요. 회장님. 저에게 맡겨 주세요. 기필코 성공 시키겠습니다.""네가 말이냐? 한번도 해보질 않은 네가 말이냐?""한번도 해보질 않았다 해서, 능력이 없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배우입니다. 철저히 연기처럼 해보겠습니다.""흠...좋아. 잘 해보거라.""네.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좋아. 기대하마."조 실장이 아직은 그런 큰 행사를 맏길 수 없다며 만류했지만, 강 회장은 도박을 거는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할 수 있겠느냐?""네."단호한 하늬의 대답에 강회장은 하늬
제8화. 완벽한 무대장치어느날, 강 회장은 하늬의 능력을 시험해보기로 했다.강 회장은 하늬를 서재로 불러 아주 차가운 미션을 던졌다.그것도 그룹의 난제 중에 난제였던 리조트 사업.아시아 최대의 테마파크로 만드는 리조트 사업이었다.하지만, 몇년째 중단된 문제가 있었으니...리조트 부지에서 제일 중요한 곳에 명문가 종갓집이 있었고, 그 어르신이 꿈쩍도 안한다는 것이었다.그룹의 임원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땅을 매각하라고 설득을 시도했으나, 이룰 수가 없었다.옹고집도 이런 옹고집이 없었다.그 종갓집 땅이 뭐라고. 거액을 준다고 해도 꿈적을 안하다니.그래서, 하늬의 능력을 시험해볼겸 불가능한 미션을 강회장은 생각해내었다. [성진그룹이 추진 중인 리조트 부지의 종갓집 어르신을 설득하라는 것.]그런데 종갓집이 하필 리조트 부지의 한 가운데에 위치해 있었다.주변의 땅들은 이미 매입했으나, 오직 종갓집 만이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종갓집만 놔두고 개발할 수도 없었다.강 회장의 머릿속을 고약하게 만들고 있었던 해결 불가능한 미션을 주기로 한 것이다.실패하면 하늬의 엄마는 당장 병원에서 쫓겨날 판이었다. 강 회장에게 하늬는 그저 도망간 서연을 대신해 욕받이가 되어줄 '정교한 가짜'일뿐이었다."네가 가진 그 미천한 연기력으로 그 노인을 속여봐라. 아니. 설득해봐.서연이가 하지 못했던 일을 네가 해낸다면, 네 엄마의 생명 연장도 고려해 보지.""약속...약속 하시는 건가요?""그래. 당연하지. 내 말을 못 믿는게냐?""알겠습니다. 회장님. 그 약속 꼭 지키시길 바랄게요."강 회장의 목소리는 비정했다. 강 회장이 말한 해결 불가능한 미션.하늬는 기필코 미션을 성공시켜야 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었다.며칠후, 하늬는 그 모욕감을 삼키며 종갓집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한주 그룹의 승준이 도착해 냉철한 수치로 어르신을 압박하고 있었다.승준은 하늬를 돕기 위해, 먼저 어르신을 설득해보기로 한 것이었다.하늬는 승준과 어르신 사이의 팽팽한 대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