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간을 잔뜩 찌푸린 강하리는 구승재가 자신을 어디로 데리고 가려는지 알 것 같았다.“승재 씨, 전 가고 싶지 않아요.”그러자 구승재는 눈썹을 찡그렸다.“연회에 가려는 게 아니에요, 강 부장님. 그냥 킹스 클럽에 놀러 가는 거라고요. 진짜예요.”강하리는 구승재가 대체 무슨 의도로 찾아왔는지 몰랐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흥미도 없었고, 놀러 갈 기분도 아니었다. 강하리의 이런 모습을 본 구승재는 마음이 답답해졌다.“강 부장님, 내가 강 부장님을 해치는 일은 없을 거예요. 날 한 번만 믿어봐요, 네?”강하리는 자신을 설득하는 구승재를 보고 결국 동의했다. 구승재야말로 지금까지 그녀를 제일 잘 챙겨준 사람이었다.강하리는 간단히 화장하고 치마로 갈아입었다. 그저 심플한 옷차림이었지만, 구승재는 넋 놓고 그녀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강하리 같은 여자를 옆에 두고도 형은 어떻게 송유라를 바라볼 수 있는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송유라보다 몇 배는 더 예뻤다.“가요.”깊은숨을 들이마신 강하리는 그를 따라갔다. 구승재는 정말로 그녀를 데리고 킹스 클럽으로 갔다.그러나 룸 문을 열던 강하리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연회장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 전부 이 룸 안에 있었다. 구승훈과 그의 어중이떠중이 친구들도 말이다.강하리를 본 구승훈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는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손에 담배를 들고 있었는데 기분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특히 강하리를 보았을 땐 순간 얼굴에 싸늘한 냉소가 번졌다.“강 부장이 여긴 왜 왔어?”남자는 무심한 태도로 물었다.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야유가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 안주인 같은 자태로 앉아있던 송유라도 강하리를 보자 안색이 싹 변했다.구승재는 강하리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강 부장님, 미안해요. 나도 정말 어쩔 수가 없었어요. 뭐가 문제인지 형이 어젯밤 갑자기 생일 축하연을 취소한다고 통보했거든요. 그리고 오늘 하루 종일 기분이 안 좋아 보였어요. 그
구승훈의 목소리를 들은 강하리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발걸음을 옮겨 밖으로 걸어 나갔다.여기에 단 일 초라도 더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에 가는 것이 몹시 우스워 보일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오자마자 다시 가면 그녀는 진짜로 여기에 있을 자격이 없는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정말 이 한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안현우도 강하리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지만, 강하리 또한 그를 좋게 보지 않는다. 그런데도 굳이 여기에 남아서 불쾌감을 자초할 필요가 없었다.그리고 구승훈은...강하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첫사랑을 옆에 두고 있으면서 강하리 더러 여기 남아서 첫사랑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역할이라도 하란 말인가?허리를 곧게 편 강하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밖으로 걸어 나갔다. 계속 가려고 하는 그녀를 보자 구승훈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구승재는 그 상황을 보고 얼른 뛰어가서 강하리를 붙잡았다.“강 부장님, 여기까지 와서 왜 벌써 가려고 그래요.”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승재 씨, 미안하지만 난 이곳이 정말 싫어요.”승재는 눈썹을 찌푸리고 구승훈을 흘끗 쳐다봤다. 구승훈이 그녀를 잡길 바랐지만, 구승훈은 그저 어두운 눈빛으로 강하리를 바라만 볼 뿐, 더는 말할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이때 강 건너 불구경하는 식으로 보고 있던 안현우가 불쑥 끼어들었다.“승재 씨, 가는 사람 붙잡지 말고 그냥 보내요. 애초에 저 여자가 낄 자리가 아니었어요. 기분 잡치게 하려고 데려온 거예요?”보다 못한 노민우는 끝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안 대표, 그만해요. 강 부장님이 안 대표를 보러 온 것도 아니잖아요.”그러자 안현우는 쯧, 혀를 차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노민우를 힐끔 쳐다봤다.“노 대표, 언제부터 강 부장이랑 사이가 그렇게 좋았어요?”노민우는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이왕 온 김에 좀 놀다 가요, 강 부장님. 오늘 승훈이 생일이잖아요
“차에서 기다려.”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바로 차에 탔다. 구승훈은 코트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송유라에게 건넸지만, 그녀는 받으려 하지 않았다.한숨을 토해 낸 구승훈은 어쩔 수 없이 손을 들어 직접 송유라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차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하리는 씁쓸하게 웃었다.오늘 여기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 강하리는 고개를 떨구고 더는 차창 밖을 쳐다보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구승훈은 드디어 차 문을 열고 올라탔다. 그는 강하리를 흘끗 쳐다보더니 조롱 섞인 말투로 말했다.“강 부장 진짜 점점 대단해져 가네.”강하리는 그가 자신이 그의 앞에서 노민우 쪽으로 걸어간 것을 말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 일에 대해 딱히 설명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그땐 확실히 구승훈 옆에 앉기 싫었을 뿐이다.시선을 아래로 한 강하리는 그 문제로 더 논쟁하지 않고 얼른 말머리를 돌렸다.“저 여기 오지 말았어야 했어요.”순간 구승훈의 눈살이 잔뜩 찌그러졌다.“왜? 억울해?”강하리는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아니요.”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구승훈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아파트로 돌아온 구승훈은 케이크도 없는 텅 빈 식탁을 보고 차갑게 웃었다.“강 부장, 올해는 밥 차릴 생각도 없나 봐?”강하리도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어차피 차려도 안 드실 거잖아요.”눈을 가늘게 뜬 구승훈은 한참 조용히 있다가 다시 말했다.“가서 국수 한 그릇 끓여줘.”말을 마친 그는 옷을 벗으며 욕실로 향했다. 제 자리에 서서 한참 고민하던 강하리는 결국 주방으로 걸어갔다.국수를 다 삶자 구승훈도 욕실에서 나왔다. 식탁 위에 놓인 그릇을 보니 이번에도 강하리가 매해 그에게 해주었던 잔치국수였다.구승훈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더니 안색이 드디어 밝아졌다. 그는 천천히 걸어와 식탁 앞에 앉아 잔치국수를 먹었다.한편 강하리는 돌아서서 욕실로 향했다. 다 씻고 나오자 구승훈은 이미 침실에 들어와 있었다.그는 창문 앞에 서서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강하리의
다음 날 아침 강하리가 눈을 떴을 때 구승훈은 옷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채로 침대 옆에 서서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피곤하면 하루 쉬어도 돼.”어젯밤 구승훈은 강하리를 거칠게 몰아붙였고 그녀는 새벽이 되어서야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강하리는 고개를 저으며 바로 일어나 앉았다. 회사에 처리해야 할 업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 쉴 수가 없었다.구승훈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그럼 나랑 같이 갈래?”그러나 강하리는 재차 거절했다.“괜찮아요. 전 버스 타고 갈게요.”하지만 구승훈은 그녀의 말을 전혀 듣지 못한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문 옆에 기대서서 그녀를 기다렸다.그를 흘끗 쳐다본 강하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으려던 찰나 무언가 떠오른 듯 손가락을 움찔하더니 서랍에서 작은 박스 하나를 꺼냈다.그 안에는 얼마 전 그녀가 안전을 지켜달라고 기원하며 받았던 염주가 들어 있었다.사실 구승훈의 생일 선물로 주려고 했지만, 어제 그가 물을 때 갑자기 그 슈트가 생각나더니 이내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구승훈에게 또다시 마음을 주었다가 무참히 짓밟히는 짓은 더는 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그에게 이런 선물 따위는 필요하지도 않을 테니 말이다. 강하리는 고개를 떨구고 그 박스를 다시 서랍 속 깊숙이 집어넣었다.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구승훈은 여전히 문 앞에 서있었다. 강하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물었다.“대표님, 그 일은 어떻게 됐어요?”눈빛이 급격히 어두워진 구승훈은 잠시 침묵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강 부장은 진실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야?”강하리는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적어도 저한테는 아주 중요해요.”구승훈은 어두운 안색으로 한참을 있다가 다시 말했다.“그 일은 확실히 누군가 계획적으로 한 게 맞아.”입술을 굳게 다문 강하리는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몸 옆에 떨어뜨린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입술을 바르르 떨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송유라예요?”구승훈은 강하리를 바
“유라 한동안 좀 쉬라고 해.”...안예서는 회사로 출근한 강하리를 보자마자 이상한 점을 감지하였다.“부장님, 무슨... 일 있어요?”강하리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별거 아니야, 저녁에 잠을 잘 못 잤나 봐. 연말 실적 보고서 준비는 잘 돼가?”“네, 거의 다 완성됐어요.”여전히 시름이 놓이질 않는지 안예서는 강하리를 계속 살피며 얘기했다.“부장님,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저한테라도 말씀 해주세요. 뭐 제가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그래도 혼자 끙끙 앓는 것보다 누가 옆에서 아이디어라도 내주면 좋잖아요.”안예서의 마음 씀씀이가 너무 기특하여 강하리는 저도 몰래 웃음이 새어 나왔다.“고마워, 예서 씨.”“에이, 그런 말씀 마세요.”안예서는 갑자기 가까이 다가서며 목소리를 낮춰 다른 얘기를 꺼냈다.“근데 부장님, 혹시 들으셨어요? 어제 대표님이 약혼을 안 했대요.”강하리는 고개만 살짝 끄덕일 뿐 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다.사실 지금 제일 듣기 싫은 얘기가 바로 구승훈과 송유라에 관한 소문이었지만, 조잘대는 안예서를 그냥 내버려두었다.흥, 콧방귀를 뀌며 안예서가 말을 이었다.“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결국 이런 날이 온다니깐요. 부장님은 모르시겠지만 저번에 송유라가 대표님과 약혼식 올린다고 SNS에서 자랑질을 얼마나 해댔는데요. 하, 이번에 코가 제대로 납작해지겠네요. 난 또 우리 대표님이 송유라를 얼마나 좋아한다고... 뭐 결국은 별거 아닌 거였네요.”강하리는 한번 웃어 보이고는 업무 모드로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됐어, 이제 그만하고 업무보고서나 가져와 봐.”혀를 살짝 내두르며 안예서는 서둘러 강하리의 지시대로 보고서를 챙기러 가버렸다.끝내 조용해졌다.강하리는 책상 위에 놓인 서류철을 보며 넋을 잃었다.어젯밤에 구승훈이 송유라와 약혼식을 올리지 않았다고 했을 때, 솔직히 말해 그녀는 매우 기뻤다. 그 둘이 약혼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그것이 그녀의 사심에서 비롯된 것이든 송유라와의 원한 관계에서였든, 이유는 중
강하리는 무어라 답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구승재도 그녀를 생각해서 하는 말인 줄 아니 삐딱하게 들리진 않았다. 구승훈이 수호신처럼 송유라를 감싸고 도는데 내려놓지 않으면 또 어떡하겠나.하지만 마음속으로 달갑지는 않았다. 서류봉투의 끄트머리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그러고는 그 대화를 이어나가지 않았다.식사만 간단히 하고 다시 회사로 돌아왔는데, 때를 맞춰 휴대폰이 울렸다.“올라와.”구승훈의 서늘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휴대폰에서 흘러나왔다.제자리에서 몇 초 못 박혔다가 돌아서서 올라가는 계단을 탔다.대표 사무실에 들어가니 구승훈은 창가에 서서 창밖을 보고 있었다.저런 뒷모습이면 얼굴색은 보나 마나 가라앉아 있겠지.강하리는 그가 기분이 안 좋음을 감지했다.“대표님, 부르셨어요.”구승훈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짙은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봤다.“식사 끝났어?”“네.”담담한 표정으로 그는 강하리의 앞으로 걸어와 얇은 입술을 열었다.“그럼 얘기해 봐. 밥 먹는 것 외에 또 뭘 했는지.”강하리는 눈살을 찌푸렸다.“죄송한데, 무슨 말씀 하시는지 모르겠어요.”구승재랑 밥만 먹었는데 뭐가 더 있어야 하는가. “진짜 모르겠어? 그럼 이거, 설명해 봐.”구승훈은 서류 몇 장을 그녀한테 툭 던졌다.살펴보니 무슨 카톡 대화 기록을 캡처한 것이었는데 그녀의 프로필 사진과 아이디로 누가 파파라치한테 송유라가 그녀를 유산하게끔 만들었다는 과정을 폭로한 제보 내용이었다.아주 잠깐 어리둥절하였다가 금세 머리가 지끈지끈해지는 것만 같았다.한참 후에야 눈을 들어 구승훈을 바라보며 강하리는 물었다.“그럼 대표님은 이게 제가 한 짓이라는 거죠?”“강 부장 아니야?”매우 당연하다는 듯 그는 되물었다.눈앞에 남자를 조금 넋이 간 채로 쳐다봤다. 그리고 잠시 뒤엔 픽 웃음이 터져 나왔다.“맞아요, 내가 한 거. 이렇게 하고 싶어서 근질근질했어요. 송유라가 내 배 속의 아이를 해쳤는데 난 그 여자가 한 짓 폭로하면 안 돼요? 왜 안되는데요?”“강하
송유라가 나간 것을 보고 뒤이어 들어온 안예서가 강하리의 모습을 보고 얼른 물 한 잔 따라 주었다.“부장님, 괜찮으세요?”강하리는 아무 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마음속은 답답하기만 하였다.송유라의 말대로 자신은 그녀와 게임이 안 되는 거였다. 구승훈이 그녀를 아주 감싸고 도는 점에서만 봐도 이미 진 싸움이었다.씁쓸한 웃음이 터져 나왔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강하리는 패배를 인정하기로 했다. 철두철미한 패배였다.그리고 더는 이 일에 얽매이고 싶지 않았다. 구승훈과 송유라의 일에 더는 자신을 끼워 넣고 싶지 않았다. 그 일 말고도 할 일이 이토록 많은데 굳이 진 싸움에 시간과 정서를 쏟아부을 일 있는가.그 남자는 어린 시절의 꿈이었다. 하나 그 꿈을 찢어버린 사람도 그 남자였다.아마 꿈속의 그 남자는 17살 때 이미 그 해변에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바보 같이 그녀만 놓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꿈에서 깨어나 현실을 마주하니 잔인하게도 현실은 그저 눈물자국으로 얼룩진 고통뿐이었다....강하리는 눈을 깜빡이며 다시 정신을 차려 그 자질구레한 일들은 인제 그만 생각에서 제외하기로 맘 먹었다.퇴근 후, 강하리는 물건을 정리하고 회사를 나와 글로벌 투자 유치회가 진행되는 장소로 향했다.산업통상자원부와 외교부에서 공동 개최한 투자 유치회는 마침 연성시에서 열리게 되었고 강하리는 이번 행사에서 통역을 맡게 되었다. 얼마 전에 임정원한테 추천한 그 선배는 그녀가 연성시에 있다는 걸 알고 이번 회의에 나와주기를 요청하였다. 처음엔 거절했지만 결국에는 승낙했다.투자 유치회 진행 장소인 국제컨벤션센터에 도착하니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차에서 내리는데 누가 그녀를 불렀다.“강하리!”소리를 따라가 보니 한 남자가 멀지 않은 곳에서 계단 위에 서 있었다.주해찬. 현 외교부 내에서 인기가 대단하고 촉망받는 샛별.강하리는 그를 향해 걸어갔다. 주해찬도 계단에서 내려오며 몇 발 성큼성큼 걸어와 강하리 앞에 멈춰 섰다.“오랜만이야,
강하리의 웃음기가 얼어붙었다.오늘 밤 일은 구승훈한테 알리지도 않았고, 알렸으면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구승훈은 감정적으로는 자신한테 신경을 안 쓰면서 이상하게 소유욕과 통제욕은 유난히 넘쳤다. 그 남자가 대체 무슨 생각인지 머리를 한번 뜯어보고 싶어질 지경이다.그 머릿속에 송유라만 들어찼을 것이 분명한데 왜 또 하필 그녀를 곁에 묶어 두려고 하는지.사색이 또 그 둘한테로 흐르니 짜증이 뻗칠까 하였다. 애써 신경을 안 쓰려고는 했지만 답답한 속은 그리 쉽게 풀리지 않았다.얼굴색이 어두워지는 강하리를 보고 심준호는 미간이 자연스럽게 모아졌다.“다퉜어요?”그 말에 상념에서 깨어나며 강하리는 고개를 저었다.“아뇨.”심준호도 굳이 눈치 없게 캐묻지는 않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도움 필요하면 말해요. 난 친분보다 도리가 있는 편에 서는 타입이라.”강하리의 입가에 미소가 새어나오며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주해찬이 돌아왔다.심준호는 강하리를 보며 말했다.“이따 행사 끝나면 다시 얘기해요.”강하리는 알겠다고 답했다.심준호를 보내고 나서 강하리는 주해찬과 같이 통역실로 향했다.“떨려?”주해찬은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강하리는 슬쩍 웃으며 대답했다.“안 떨린다면 거짓말이겠죠.”동시통역을 해본 지도 3년이 넘는데 첫 단추를 이렇게 큰 규모의 회의로 꿰게 생겼으니 실수하게 될까 봐 속은 엄청 긴장했다.하지만 주해찬은 그저 웃기만 하며 말했다.“난 널 믿어.”그를 힐긋 보고는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미 승낙한 이상 잘 해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그녀도 전쟁을 앞두고 꼬리 빼는 성격은 아니었다.통역실에는 이미 몇 명의 통역사들이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한창 낮은 소리로 이번 행사 주제와 내용에 관해 토론하고 있었고, 주해찬이 강하리를 데리고 들어오자 일제히 그들 쪽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높은 급의 경력이 화려한 동시통역사들끼리는 보통 다 아는 사이거나 각종 회의에서 얼굴 정도는 본 적이 있었지만, 강하리
구승훈은 강하리의 턱을 쥔 채 엄지로 그녀의 분홍빛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입술이 붉게 충혈되자 강하리는 구승훈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구승훈 씨, 그만해요. 연정이 보러 가는 길에 추태 부리고 싶지 않아요.”구승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럼 조시욱은 안아도 되고 난 안 되는 거야? 조시욱은 널 만져도 되고 난 안되는 거냐고!”“그래요!”강하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앞으로 누구든 가능할 수 있어도 구승훈 씨 당신만은 절대 안 돼요!”그녀는 이 말을 하면 구승훈이 분노하며 문을 박차고 나갈 줄 알았다. 사실 그걸 바라기도 했다.하지만 뜻밖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구승훈은 몸을 낮춰 무릎을 꿇었다. 강하리는 아직 걸을 수 없는 상태였고, 발목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래서 요즘엔 털실 슬리퍼 하나만 신은 채 다녔다.아까 구승훈이 강하리를 안고 차에 태울 때 슬리퍼 한 짝이 옆으로 벗겨졌었다. 구승훈은 몸을 낮춰 그 슬리퍼를 주워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에 신겨 주었다.그의 큰 손이 그녀의 발목을 감싸며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치 조금만 세게 다뤄도 그녀가 아플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순간 그 손끝에서 묘한 애틋함을 느꼈다. 하지만 곧 그런 감정을 느낀 스스로가 우스워 웃음이 난 강하리 발을 움츠렸다.그럼에도 구승훈은 손을 놓지 않고 슬리퍼를 신긴 뒤 다시 강하리를 안아 휠체어에 앉혔다.“말도 안 되는 부탁인거 아는데...”구승훈이 그녀를 휠체어에 앉히고 나서 속삭였다.“제발 나한테 너무 차갑게 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전혀 마음을 열 기색이 없었다.“그럼 적어도 다시 쟁취할 기회라도 줘, 응? 강 대표?”“구승훈 씨, 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 이렇게 헤어졌다 만났다, 당신은 안 질려도 나는 질렸어요. 그만 좀 해요. 내가 부탁할게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스스로 휠체어를 밀어 응급실 쪽으로 향했다.구승훈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 옆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대신
구승훈의 동작이 너무 빨라 강하리는 미처 반응할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차 안에 앉아 있었다.“구승훈 씨!”강하리가 소리쳤다. “나 혼자 갈 수 있어요.”구승훈이 비웃으며 말했다.“어떻게 가? 조시욱이 데려다준대? 다른 남자랑 내 딸 보러 가겠다는 거야?”강하리는 말문이 막혔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구승훈은 그녀의 휠체어를 접어 트렁크에 싣고 있었다.조시욱은 막무가내인 구승훈을 막으려다 아까 전화 받던 강하리의 불안한 표정이 떠올라 막지 않았다.“연정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나도 같이 갈게.”구승훈이 동작을 멈추고는 싸늘하게 웃었다.“조 도련님은 매일 이렇게 한가한가 보지?”말을 마친 구승훈은 휠체어를 트렁크에 던져 넣고는 차에 올라 그대로 출발했다.달리는 차 안에서 강하리는 창밖만 응시한 채 구승훈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구승훈은 조용히 운전하면서 가끔 백미러로 강하리를 살펴보았다.“아까... 아프지 않았어?”강하리는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창밖만 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물음은 공허하게 차 안을 맴돌 뿐이었다.구승훈은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의사 말로는 이제 재활 치료 들어가야 한다던데, 치료사는 예약했어?”“했어요.”강하리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딸을 보러 가는 길에 더 이상 구승훈과의 그 어떠한 불필요한 갈등도 피하고 싶었다. 잠시나마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것도 그녀에겐 너무 힘들었다.“이 차에 임 선생은 태운 적 없어.”구승훈의 뜬금없는 한마디에 강하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설명할 필요 없어요. 신경 안 써요.”그 한마디에 구승훈의 하려던 말들이 전부 목에 걸려버렸다.그는 깊게 숨을 쉬며 말했다.“임 선생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단지 여초연의 시선을 흐리려고 잠깐 곁에 뒀을 뿐이야.”강하리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한때 그녀는 구승훈이 이런 한 마디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설령 지금처럼 단순하고 허술한 변명이라도 좋았다. 그랬더라면 그녀는 혼자서 괴로워하
구승훈과 헤어진 후로 그녀는 두번 다시 그곳에 가지 않았다.“왜 갑자기 거기에 가고 싶어진 거야?”조시욱이 무심한 듯 물었다.강하리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해찬 선배가 뭐라고 말했어요?”조시욱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사실은 별말 없었어. 그냥 국내에 며칠밖에 머물지 못하니까 내게 틈틈이 널 돌봐 달라고 했지.”강하리의 눈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선배는 항상 걱정이 많아.”“하리야, 사실 나는...”“시욱 선배.”강하리가 말을 끊었다.“그만해요.”조시욱은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그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강하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왜? 구승훈 때문이야? 정말 구승훈에게 다시 기회를 주려는 거야?”강하리는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그 사람과는 상관없어요.”조시욱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럼 왜 자신에게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주지 않는 건데?”강하리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시욱 선배, 나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거예요. 하지만 진심으로 누군갈 다시 좋아하거나 새 감정을 쌓을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미안해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장 회장님께도 희망을 품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조시욱은 말하고 싶었다. 괜찮다고, 기다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말도 결국 삼켜야 했다. 어떤 말은, 그냥 그녀에게 부담만 줄 뿐이었다.그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알겠어. 할아버진 걱정 마, 내가 설명할게. 그럼 다른 감정은 일단 치워두고 우리 친구는 될 수 있잖아?”강하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조시욱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씁쓸했다.주해찬이 부탁했다는 건 모두 거짓이었다.처음 임무를 함께 할 때부터 그의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협상장에서 여유롭고 능숙하게 대처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시선을 뗄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에게 이미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는 마음을 접어야 했다.강하리가 어르신 생신 파티에 모습을 드러내고 아주머니의 생신 파티에 나
구승훈은 순간 말이 막혔다.“하리야, 제발...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수 없어?”그의 목소리엔 분명한 간절함이 실려 있었다.하지만 강하리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가요.”그녀는 다시 한번 담담하게 말했고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조용히 한마디를 건넸다.“너무 무리하지 마. 에비뉴 쪽 일은 내가 처리해 둘게.”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고 조시욱은 그대로 그녀를 밀고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몸을 돌려 진료실로 들어갔다.“강하리 씨의 상태를 좀 알고 싶습니다.”의사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했다.병원 안에선 이미 구승훈과 강하리에 관한 얘기가 돌 만큼 돌았다.사랑스러웠던 커플이 순식간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는 말들이었다.강하리가 수술할 때 구승훈은 오지도 않았고 입원하는 내내 찾아온 건 한 번뿐이었으며 오늘 깁스 푸는 날에도 옆에 있어 준 사람은 다른 남자였다.그래서 의사는 솔직히 말해 구승훈이 강하리를 완전히 내쳐버린 줄 알았다.‘이런 여자를 놓친 건 눈이 먼 건가... 양심이 없는 건가...’의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구승훈이 직접 찾아와 그녀의 상태를 묻는다는 게 당황스러웠다.“상처 회복은 꽤 잘 되고 있어요. 다만 완전 회복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재활 치료가 오래 걸릴 수도 있고요...”반쯤은 형식적인 설명이 끝난 뒤 구승훈은 반 시간쯤 지나서야 진료실에서 나왔다.그는 2층 복도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1층 로비에서 강하리는 조시욱과 함께 웃으며 조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병원을 나서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 한구석은 시리도록 쓰렸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바로 그 순간 강하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 살짝 멈춰 섰다.고개를 돌려 위층을 올려다보았지만 보이는 건 남자의 뒷모습뿐이었다.그 시선을 따라 조시욱도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
천아름은 눈을 깜빡이며 말없이 웃었고 그 반응만으로도 이미 모든 걸 인정한 셈이었다.하지만 곧 그녀는 덧붙였다.“먼저 말해두지만 나도 미리 알았던 건 아니야. 그 사진들은 우리가 올라온 직후에 구승훈이 보낸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천아름을 바라봤다.그 시선에 살짝 기가 죽으려던 찰나 강하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왜 미리 말 안 했어?”천아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말했으면... 네가 그 사진들을 제대로 썼을까?”강하리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봤다.이 각도에서 에비뉴와 정안 타워를 잇는 공중 회랑을 보는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다섯 개의 회랑은 같은 위치에 놓인 게 아니라 높낮이와 간격이 제각각이었고 그 불규칙한 배치가 위에서 보면 iw라는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이미 회랑에 심어졌던 꽃들은 시들어 있었지만 강하리는 그곳에 자란 꽃들이 전부 리시안셔스였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강하리는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이젠 더 이상 구승훈과 어떤 연결고리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로의 감정이 남아 있는 듯 없는 듯 얽히고설킨 관계... 그녀는 그런 관계를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말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휠체어를 돌려 자료를 보러 이동했다.천아름은 커피잔을 들고 그녀 옆으로 와 책상에 걸터앉았고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솔직히 너희 둘 일에 내가 뭐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번 일은 구승훈 잘못이 맞고... 난 내 친구가 또 상처받는 꼴 못 보니까 절대 너한테 구승훈의 편을 들 생각 없어. 근데 말이야...”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이번처럼 구승훈이 뭔가 너한테 건넸다면... 넌 받을 건 받아. 그건 걔가 너한테 진짜로 빚진 거니까.”강하리는 작게 웃었다.“그 사람 도움 없이도 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왜 굳이 기대야 해?”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근데 이것 말고도 있지? 송지은이 회의에서 그렇게 된 것도... 구승훈이 일부러 남겨둔 거지? 내가 송지은을 이용해서 회사에서 위신을 올
에비뉴 그룹이 결국 강하리 손에 들어가자 송지은의 속엔 쌓여 있던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그는 몇몇 임원들과 은밀히 손을 잡고 이번 회의 자리에서 강하리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강하리는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봤다.“송 부장님, 진심으로 의견을 내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직권 남용하고 싶은 건가요?”그러자 송지은의 얼굴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강 대표님, 지금 무슨 뜻이죠?”강하리는 옆에 앉아 있던 비서실장에게 눈빛을 보냈다.비서실장은 곧바로 자료를 띄웠고 화면에 나타난 건 한 프라이빗 레스토랑에서 찍힌 사진이었다.송지은이 막 추천했다던 신인 여배우와 다정하게 식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그 여배우는 거의 그의 무릎 위에 앉을 듯 그에게 바짝 기대 있었다.송지은은 이마에 핏대가 서며 말했다.“업무 미팅하면서 밥 한 끼 먹는 게 무슨 문제죠?”강하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다음 사진이 화면에 떠오르자 회의실 분위기가 미묘하게 흔들렸다.사진 속 송지은은 그 신인 여배우의 허리를 감싸안고 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식사 후엔 호텔 코스로 이어지셨군요. 송 부장님?”강하리의 그 한마디에 누군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천아름은 다리를 꼬고 앉아 회의실 전면을 향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웃음소리가 송지은에게 더없이 굴욕적이었다.강하리는 더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회의실 안의 다른 인물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여유로웠지만 시선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또 누구였죠? 추천한 연예인들 리스트... 누구 누구있었죠”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안 사람들 사이로 묘한 침묵이 흘렀고 서로 눈치를 보던 그들은 이내 입을 닫았다.오늘 강하리는 확실히 준비하고 왔다.이번 판에서 잘 되면 본때 보여주는 걸로 끝이지만 잘못 건드리면 누군가는 직장을 잃게 될 게 뻔했다.방금 송지은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모두가 생생히 봤으니 더 이상 나설 사람은 없었다.회의실은 고요했다.강하리는 시선을 천천히 회의실을 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