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승훈은 문 앞에 서 있었고 몹시 난감한 표정이었다.구승훈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는 부인하고 싶었다.하지만 그때 그런 상황에서 강하리가 얘기해도 자신은 듣지 않았을 것이다.구승훈은 지금 머릿속에서 이 일이 도대체 언제 발생했는지 끊임없이 회상하고 있었다.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그 일이 떠올랐다. 송유라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와서 강하리가 자신을 때렸다고 했다.구승훈은 그때 자신이 뭐라고 했던지 생각해 보았다.아마도.강하리에게 당장 사과하라고 말했던 것 같았다.구승훈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그때 나에게 미리 말했다면...”강하리는 아무 말이 없었고 그때 손연지가 옆에서 걸어 나왔다.“그때 말하면 뭐가 달라질 게 있어요? 승훈 씨가 하리보고 송유라에게서 꺼지라고 다시 한번 말하게요? 구승훈 씨, 도대체 나쁜 짓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스스로 생각해 봤어요? 그동안 줄곧 하리 뒤를 따라다녔고 하리와 주해찬 씨의 관계를 망쳤죠. 승훈 씨는 화해하려고 부드럽게 말했지만 실질적인 일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잖아요. 승훈 씨의 송유라는 아직 멀쩡하죠. 심지어 송유라는 어쩌면 지금도 어떻게 하리를 해칠까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어요. 구승훈 씨, 송유라가 왜 이렇게 무서운 게 없이 행동하는지 생각해 보셨어요? 승훈 씨가 방관해서 그런 거라고요!”손연지는 말을 마치고 바로 가서 강하리를 와락 끌어안았다.강하리를 생각하니 손연지는 마음이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 왜 강하리가 이렇게 괴롭힘을 당해야 하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구승훈은 제자리에 서 있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강하리는 서운함을 참으며 손연지를 토닥였다.“난 괜찮아.”구승훈도 강하리의 이런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구승훈은 예전에 자신이 정말 나쁜 놈이었다고 생각했다.그래서 강하리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하지만 미안하다는 말은 그녀의 상처를 전부 치료해 주기에 너무 부족했다.구승훈의 손에 핏줄이 불끈 솟았고 마음속에는 후회가 가득했다.후반 재판은 송유라의
얼마나 익숙한 장면인가.그 당시 강찬수가 정서원을 밀어 던질 때 강찬수의 대리 변호사도 막판에 이런 정신 진단 증명서를 제시했다.손연지도 당연히 이 일을 알고 있다. 그녀는 욕설을 퍼부으며 말했다.“X발, 강찬수의 상황과 똑같잖아. 천한 사람은 다 이런가?”현장에 있던 기자는 송유라의 정신병 진단 증명서를 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송유라가 정신병이 있다고?오늘 이 소송은 정말 치열하게 진행되었다.하지만 휴게실에 있던 강하리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지금 매우 복잡했다.지나친 우연의 일치 아닌가?구승훈도 이 모습을 보고 안색이 어두워졌다.이때 손연지가 다급하게 말했다.“어떡하지? 강찬수처럼 무죄로 풀려나는 건 아니겠지?”강하리가 입술을 꽉 깨물고 대답했다.“나는 심 변호사님을 믿어.”심준호는 상대방이 제시한 정신병 진단서를 보고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피고인에게 정말 정신질환이 있습니까?”그러자 상대방 측 변호사가 대답했다.“그럼요. 당사자는 연예인이기 때문에 이런 일로 죄를 피하지 않을 겁니다. 또 아까도 보시다시피 당사자의 정신 상태가 이상했잖아요.”그 말을 듣자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아까 송유라의 행동을 곰곰이 되새겨보았다. 정말 정상인 것 같지는 않았다.심준호는 그윽한 눈빛으로 송유라의 변호사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모든 사람이 그가 반박할 것이라고 예상했을 때 심준호는 뜻밖에도 이를 인정했다.“피고인이 정신상태는 확실히 정상인 것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폭력적인 경향이 심하기 때문에 제 당사자의 안전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강제로 정신질환 감시 치료를 진행할 것을 요청합니다.”그 뜻인즉 강제로 정신 병원에 입원시키는 것이다.정신 병원은 감방보다 사람을 더 망가뜨리게 할 수 있다.특히 송유라는 유명인이자 연예인이기에 더 고통스러워할 것이다.사실 이번 소송이 정상적으로 진행되면 기껏해야 3개월에서 6개월의 판
팬들이 LED 전구로 만든 응원판이 구승훈의 등에 쾅 하고 내리꼰졌다.강하리가 화들짝 놀라며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불렀다.“승훈 씨!”부르고 나서야 강하리는 자기가 실수했음을 알아챘다.응원판에 맞은 구승훈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돌려 그 팬을 노려봤다. 눈빛이 차가운 게 섬뜩할 정도였다.이에 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대, 대표님, 저, 저희는 그냥 저 파렴치한 여자를 손봐주려고 그랬던 거예요. 저 여자 때문에 우리 언니가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데요! 대표님, 우리 언니를 대신해 꼭 복수해 주세요.”이 말에 구승훈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죠?”법원에 들어오려면 소지품 검사가 필요했다. 응원판 같은 물품은 절대 반입이 불가한 물품에 속했다.팬들은 너무 무서워 다리가 떨릴 지경이었고 구승훈이 캐묻자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전 그냥 저 여자가 너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랬어요. 분명 대표님은 우리 유라 언니랑 천생연분인데, 저 여자는 그냥 중간에 끼어든 나쁜 년일 뿐이라고요!”팬은 말하면 말할수록 흥분하기 시작했다.구승재가 얼른 사람을 데리고 와서 그 팬을 제압했다.“형, 괜찮아?”구승훈은 질문에 대꾸하지 않고 오히려 강하리를 바라봤다.“어디 다친 데 없지?”강하리가 고개를 저었다.“없어요.”강하리가 잠깐 고민하더니 다시 물었다.“고마워요.”강하리는 아직 얼굴이 하얗게 질린 상태였다.사실 아까 송유라가 정신질환 진단서를 꺼내 들었을 때부터 심드렁한 상태였다. 하여 팬이 응원판을 휘두른 것도 모르고 미처 피하지 못했다.구승훈은 강하리가 고맙다고 하자 마음이 먹먹했다. 꼭 이렇게 내외해야 할까?구승훈이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뭐 날아오는 것도 모르고.”구승재가 이를 듣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은 이런 질문을 할 때가 아니라 위로를 건넬 때인데 말이다.“강 부장님, 형 다쳤으니까 케어 좀 해줘요. 나는 가서 팬들 좀 처리할게요.”팬들은 송유라가 법원에서
구승훈은 장진영을 뿌리치고 밖으로 나갔다.밖에 있는 팬들은 이미 거의 정리되고 없었다. 차 옆에 서 있는 강하리는 아무 표정 없이 덤덤하게 서 있었다. 손연지가 옆에서 뭐라 말하고 있었다.구승훈이 두 사람 앞으로 다가가자 손연지가 그를 힐끔 노려보더니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구승훈은 그런 손연지를 보며 할 말을 잃었다. 하여 자기도 모르게 강하리에게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도울 생각 없어.”강하리는 이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일단 가요.”강하리가 차에 오르려는데 구승훈이 이를 막았다.“내 차로 가자. 이 차는 이따 승재가 끌고 오면 돼. 팬들이 또 따라오기라도 하면 어떡해?”강하리는 구승훈과 한 차에 타기가 싫었지만 구승훈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기에 잠깐 고민하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구승훈의 차는 병원으로 향한 게 아니라 바로 아파트로 향했다.강하리는 이내 노선이 이상하다는 걸 발견하고는 얼굴이 굳어졌다. 이에 구승훈이 얼른 해명했다.“병원까지 갈 필요 없어. 이따 약 좀 발라주면 돼.”강하리는 구승훈을 힐끔 쳐다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구승훈이 덧붙였다.“오늘 본 그 팬 내가 잘 조사해 볼게. 우연히 들어간 건 아닌 거 같아.”한참 침묵하던 강하리가 알겠다고 대꾸했다.차 안은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구승훈은 강하리를 힐끔 쳐다보더니 아무 노래나 틀었다. 잔잔한 클래식이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자 강하리가 눈까풀이 살짝 흔들렸다강하리가 아파트로 들어오자 도우미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하리 씨 왔어요?”하리가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네, 일이 좀 생겨서 왔어요.”“식사하시고 가실 거죠?”도우미가 강하리와 구승훈을 번갈아 쳐다봤다.강하리가 대답했다.“아니요. 곧 갈 거예요.”도우미는 어딘가 실망한 눈치였다. 두 사람이 아직도 화해하지 못한 걸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구승훈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강하리가 남아서 식사끼지 할 거라는 기대는 애초부터 없었다.강하리는 익숙하게 약상자를 가
응원판에 맞을 때도 끄떡없던 구승훈은 강하리의 응징에 자기도 모르게 낮은 신음을 냈다.“강하리!”구승훈은 단번에 강하리의 손목을 잡고 몸으로 그녀를 소파에 눌렀다. 구승훈은 지금 위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었다. 맞닿은 피부는 마치 불덩이처럼 뜨거웠다.강하리의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했다.“승훈 씨, 움직이기만 해봐요. 바로 성폭행으로 고소할 테니까!”“하리야.”구승훈의 목소리가 점점 갈라지고 있었다.“나 건강해. 여자랑 스킨십한 지 꽤 됐으니까 조금만 건드려도 반응이 오는 건 정상이야. 널 보고도 아무런 느낌이 없어야 만족해?”강하리가 빨개진 얼굴로 성질냈다.“승훈 씨가 고자가 된다 해도 나는 괜찮을 거예요!”구승훈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강하리, 그래도 우리 그쪽 궁합은 잘 맞았잖아! 근데 이렇게 저주한다고?”강하리의 몸이 순간 굳더니 이렇게 반박했다.“혼자만 그렇게 생각하는 걸 수도 있죠.”구승훈이 강하리를 노려보며 물었다.“뭐라고? 지금 내 스킬에 도전하는 거야?”두 사람의 자세는 지금 매우 위험했다. 강하리는 구승훈의 소중한 무언가가 아직도 꿋꿋하게 그녀를 찌르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그녀는 더는 이 화제를 이어가기 싫었다.“승훈 씨, 여자가 고프면 지금 당장 나가서 찾아요. 여기서 발정 난 푸들처럼 굴지 말고. 난 이미 질렸다고요!”구승훈의 이마에 순간 핏줄이 섰다.“질렸다고?”강하리가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어갔다.“당연하죠. 매일 그렇게 정신없이 해대는데 질리지 않는 게 이상하죠. 떠올리기만 해도 역겨워요.”구승훈은 어두운 표정으로 강하리를 보며 말했다.“안 믿어. 해보기 전엔 절대 안 믿어.”“저리 가요!”강하리가 발버둥 치며 일어나려 했다.하지만 이게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왔다. 강하리가 발버둥 치면 칠수록 구승훈의 눈동자는 점점 어두워졌다.“그만, 하리야, 움직이지 마.”구승훈이 순간 강하리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더 움직이면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장담 못 해.”강하리는 화가 치밀어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을 눈싸움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먼저 갈게요.”그러다 강하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구승훈이 강하리의 손목을 잡더니 이렇게 말했다.“샤워하고 올게. 잠깐 기다려. 할 얘기가 있어.”하지만 강하리는 남아있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구승훈이 한발 빨리 막아서더니 덧붙였다.“저번에 말한 강찬수 사건 내가 힌트 찾았다고 했잖아. 그거 진짜야. 계좌에 문제가 있었어.”강하리가 그제야 걸음을 멈추었다.“무슨 문제요?”구승훈이 이렇게 말했다.“일단 밥 먹으면서 얘기하자.”강하리가 받아쳤다.“그럼 구승재 씨더러 전달하라고 하세요.”구승훈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이렇게 말했다.“내가 알아낸 걸 왜 걔가 전달해?”강하리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심 변호사님과 만나기로 했어요. 여기서 이럴 시간 없다고요.”강하리는 심준호와 같이 밥을 먹고 어머니 정서원을 만나러 가기로 약속한 상태였다.구승훈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걔는 왜 맨날 한가해?”강하리는 더는 대꾸하기 싫어 몸을 돌렸다. 하지만 구승훈이 이번에도 따라왔다.“같이 가자. 준호는 개의치 않을 거야.”“내가 싫어요.”구승훈이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마침 강하리의 핸드폰이 울렸다.심준호가 걸어온 전화였다.“하리 씨, 예진이한테 일이 생겨서 잠깐 보경시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뒤에 다시 연락할게요.”심준호의 목소리가 매우 다급했다. 강하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전화를 끊었다.구승훈은 이런 상황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왜? 준호가 약속을 깨기라도 했나 보지?”강하리가 입꼬리를 당겼다.심준호의 말투가 너무 다급해 보였다. 그런 심준호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강하리는 혹시 무슨 큰일이 난 게 아닐지 걱정되기도 했다.잠깐 고민하던 강하리는 카톡으로 심준호에게 메시지 몇 개를 보냈다.구승훈은 강하리가 심준호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걸 보고 마음이 불편했다.강하리는 누구든 잘 지내지만 유독 그와는 그러지 못했다.심지어 아직도 구승훈의 전화번호는 강하
레스토랑에서 나가자마자 간병인 아줌마도 전화를 걸어왔다.간병인의 목소리가 매우 다급했다.“하리 씨, 얼른 병원으로 오세요. 사람들이 마치 미친 것처럼 달려들고 있어요.”강하리가 전화를 끊자마자 구승훈이 그녀의 손목을 잡더니 차에 태웠다.“이미 근처 경찰서에 연락해서 인력들 그쪽으로 보냈어. 민우도 이미 보디가드들 보냈고. 아무 일 없을 거야. 일단 걱정하지 마.”강하리의 안색은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엔 한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정서원에게 힘은 되지 못할망정 폐를 끼쳤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찢어졌다.강하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마음속엔 비통함과 분노만 남았다. 심지어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송유라와 싸우지 말 걸 그랬나?하지만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왜 참고 지내야 하지? 왜 송유라에게 당하고만 살아야 하지?송유라도 그렇고 구승훈도 그렇고 잘난 사람이었다. 서로 첫사랑이었고 서로가 서로에게 빛과도 같은 존재였다. 두 사람은 애매한 관계를 유지하며 줄다리기를 계속했다.강하리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 희생양이 되기 싫었다.구승훈은 그런 강하리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핸들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가자 핏줄이 서서히 드러났다.구승훈은 알고 있었다. 만약 이번에 강하리의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와 강하리는 정말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걸 말이다.강하리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정서원이 있는 층을 달려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강하리는 넋을 잃었다. 밖은 아수라장이었고 바닥에는 사진이 적잖이 흩뿌려져 있었다. 어떤 팬은 그녀의 사진을 프린트해 전단을 만들었다. 위에 적힌 X 년, 세컨드 같은 단어들이 강하리의 눈을 찔렀다.팬들은 이미 정리되고 없었지만 복도에는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로 가득했다.강하리가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 사람들의 눈길이 그녀에게로 쏠렸고 이내 손가락질하며 수군대기 시작했다.강하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듯 정서원의 병실로 향했다.구승훈이 그 뒤를 바짝 따라갔다. 안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얼굴
구승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손연지 씨, 오지랖이 너무 넓다는 생각 안 해요?”손연지가 구승훈을 노려보며 말했다.“오지랖이 좀 넓으면 어때요? 그 오지랖에 누군가 걸려들었나 보죠.”구승훈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지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구승훈은 강하리를 보호할 생각이었다. 그녀를 모욕한 사람도 처리하고 차마 들어줄 수 없이 역겨운 말들도 사라지게 할 것이다.하지만 송유라는…구승훈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무 도움도 주지 않는 것뿐이었다. 심지어 모르는 사람처럼 지나칠 수도 있지만 정말 그녀를 응징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손연지는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불쌍한 우리 하리, 보는 눈도 없지. 이런 사람한테 10년이라는 시간을 바쳤다니, 이런 과분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인데.”손연지는 이렇게 말하더니 안고 있던 물건을 전부 구승훈에게 던졌다. 그 바람에 구승훈 옆에 서 있던 노민우에게도 불똥이 튀고 말았다.억울하게 매를 맞은 노민우가 노발대발했다.“나랑은 아무 상관이 없는데 왜 나까지 맞아야 하죠?”손연지가 그런 노민우를 째려보며 말했다.“유유상종이라고, 저런 사람이랑 같이 노는 사람이 성품이 좋으면 얼마나 좋겠어요.”노민우는 어이가 없었다.“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지?”노민우는 화가 치밀어올랐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구승훈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멍한 눈빛으로 손연지를 바라보며 물었다.“아까 뭐라고 했어요?”사실 손연지는 구승훈에게 이런 말을 해줄 생각이 없었다.전에 강하리가 끝내기로 했으면 깔끔하게 끝내야 한다고 했던 게 떠올라서 가만히 있으려다가 강하리가 너무 불쌍해서 그럴 수 없었다.구승훈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게 너무 괘씸했다. 강하리가 10년이라는 시간을 갖다 바쳤는데 구승훈은 소중한 줄을 모르고 있으니 말이다.“하리가 구승훈 씨를 10년이나 좋아했다고요! 10년! 근데 구승훈 씨는 우리 하리한테 어떻게 했어요? 첫사랑을 보호한다고 우리 하리한테 무슨
구승훈은 강하리의 턱을 쥔 채 엄지로 그녀의 분홍빛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입술이 붉게 충혈되자 강하리는 구승훈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구승훈 씨, 그만해요. 연정이 보러 가는 길에 추태 부리고 싶지 않아요.”구승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럼 조시욱은 안아도 되고 난 안 되는 거야? 조시욱은 널 만져도 되고 난 안되는 거냐고!”“그래요!”강하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앞으로 누구든 가능할 수 있어도 구승훈 씨 당신만은 절대 안 돼요!”그녀는 이 말을 하면 구승훈이 분노하며 문을 박차고 나갈 줄 알았다. 사실 그걸 바라기도 했다.하지만 뜻밖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구승훈은 몸을 낮춰 무릎을 꿇었다. 강하리는 아직 걸을 수 없는 상태였고, 발목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래서 요즘엔 털실 슬리퍼 하나만 신은 채 다녔다.아까 구승훈이 강하리를 안고 차에 태울 때 슬리퍼 한 짝이 옆으로 벗겨졌었다. 구승훈은 몸을 낮춰 그 슬리퍼를 주워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에 신겨 주었다.그의 큰 손이 그녀의 발목을 감싸며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치 조금만 세게 다뤄도 그녀가 아플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순간 그 손끝에서 묘한 애틋함을 느꼈다. 하지만 곧 그런 감정을 느낀 스스로가 우스워 웃음이 난 강하리 발을 움츠렸다.그럼에도 구승훈은 손을 놓지 않고 슬리퍼를 신긴 뒤 다시 강하리를 안아 휠체어에 앉혔다.“말도 안 되는 부탁인거 아는데...”구승훈이 그녀를 휠체어에 앉히고 나서 속삭였다.“제발 나한테 너무 차갑게 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전혀 마음을 열 기색이 없었다.“그럼 적어도 다시 쟁취할 기회라도 줘, 응? 강 대표?”“구승훈 씨, 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 이렇게 헤어졌다 만났다, 당신은 안 질려도 나는 질렸어요. 그만 좀 해요. 내가 부탁할게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스스로 휠체어를 밀어 응급실 쪽으로 향했다.구승훈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 옆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대신
구승훈의 동작이 너무 빨라 강하리는 미처 반응할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차 안에 앉아 있었다.“구승훈 씨!”강하리가 소리쳤다. “나 혼자 갈 수 있어요.”구승훈이 비웃으며 말했다.“어떻게 가? 조시욱이 데려다준대? 다른 남자랑 내 딸 보러 가겠다는 거야?”강하리는 말문이 막혔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구승훈은 그녀의 휠체어를 접어 트렁크에 싣고 있었다.조시욱은 막무가내인 구승훈을 막으려다 아까 전화 받던 강하리의 불안한 표정이 떠올라 막지 않았다.“연정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나도 같이 갈게.”구승훈이 동작을 멈추고는 싸늘하게 웃었다.“조 도련님은 매일 이렇게 한가한가 보지?”말을 마친 구승훈은 휠체어를 트렁크에 던져 넣고는 차에 올라 그대로 출발했다.달리는 차 안에서 강하리는 창밖만 응시한 채 구승훈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구승훈은 조용히 운전하면서 가끔 백미러로 강하리를 살펴보았다.“아까... 아프지 않았어?”강하리는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창밖만 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물음은 공허하게 차 안을 맴돌 뿐이었다.구승훈은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의사 말로는 이제 재활 치료 들어가야 한다던데, 치료사는 예약했어?”“했어요.”강하리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딸을 보러 가는 길에 더 이상 구승훈과의 그 어떠한 불필요한 갈등도 피하고 싶었다. 잠시나마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것도 그녀에겐 너무 힘들었다.“이 차에 임 선생은 태운 적 없어.”구승훈의 뜬금없는 한마디에 강하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설명할 필요 없어요. 신경 안 써요.”그 한마디에 구승훈의 하려던 말들이 전부 목에 걸려버렸다.그는 깊게 숨을 쉬며 말했다.“임 선생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단지 여초연의 시선을 흐리려고 잠깐 곁에 뒀을 뿐이야.”강하리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한때 그녀는 구승훈이 이런 한 마디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설령 지금처럼 단순하고 허술한 변명이라도 좋았다. 그랬더라면 그녀는 혼자서 괴로워하
구승훈과 헤어진 후로 그녀는 두번 다시 그곳에 가지 않았다.“왜 갑자기 거기에 가고 싶어진 거야?”조시욱이 무심한 듯 물었다.강하리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해찬 선배가 뭐라고 말했어요?”조시욱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사실은 별말 없었어. 그냥 국내에 며칠밖에 머물지 못하니까 내게 틈틈이 널 돌봐 달라고 했지.”강하리의 눈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선배는 항상 걱정이 많아.”“하리야, 사실 나는...”“시욱 선배.”강하리가 말을 끊었다.“그만해요.”조시욱은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그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강하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왜? 구승훈 때문이야? 정말 구승훈에게 다시 기회를 주려는 거야?”강하리는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그 사람과는 상관없어요.”조시욱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럼 왜 자신에게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주지 않는 건데?”강하리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시욱 선배, 나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거예요. 하지만 진심으로 누군갈 다시 좋아하거나 새 감정을 쌓을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미안해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장 회장님께도 희망을 품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조시욱은 말하고 싶었다. 괜찮다고, 기다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말도 결국 삼켜야 했다. 어떤 말은, 그냥 그녀에게 부담만 줄 뿐이었다.그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알겠어. 할아버진 걱정 마, 내가 설명할게. 그럼 다른 감정은 일단 치워두고 우리 친구는 될 수 있잖아?”강하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조시욱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씁쓸했다.주해찬이 부탁했다는 건 모두 거짓이었다.처음 임무를 함께 할 때부터 그의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협상장에서 여유롭고 능숙하게 대처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시선을 뗄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에게 이미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는 마음을 접어야 했다.강하리가 어르신 생신 파티에 모습을 드러내고 아주머니의 생신 파티에 나
구승훈은 순간 말이 막혔다.“하리야, 제발...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수 없어?”그의 목소리엔 분명한 간절함이 실려 있었다.하지만 강하리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가요.”그녀는 다시 한번 담담하게 말했고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조용히 한마디를 건넸다.“너무 무리하지 마. 에비뉴 쪽 일은 내가 처리해 둘게.”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고 조시욱은 그대로 그녀를 밀고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몸을 돌려 진료실로 들어갔다.“강하리 씨의 상태를 좀 알고 싶습니다.”의사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했다.병원 안에선 이미 구승훈과 강하리에 관한 얘기가 돌 만큼 돌았다.사랑스러웠던 커플이 순식간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는 말들이었다.강하리가 수술할 때 구승훈은 오지도 않았고 입원하는 내내 찾아온 건 한 번뿐이었으며 오늘 깁스 푸는 날에도 옆에 있어 준 사람은 다른 남자였다.그래서 의사는 솔직히 말해 구승훈이 강하리를 완전히 내쳐버린 줄 알았다.‘이런 여자를 놓친 건 눈이 먼 건가... 양심이 없는 건가...’의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구승훈이 직접 찾아와 그녀의 상태를 묻는다는 게 당황스러웠다.“상처 회복은 꽤 잘 되고 있어요. 다만 완전 회복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재활 치료가 오래 걸릴 수도 있고요...”반쯤은 형식적인 설명이 끝난 뒤 구승훈은 반 시간쯤 지나서야 진료실에서 나왔다.그는 2층 복도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1층 로비에서 강하리는 조시욱과 함께 웃으며 조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병원을 나서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 한구석은 시리도록 쓰렸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바로 그 순간 강하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 살짝 멈춰 섰다.고개를 돌려 위층을 올려다보았지만 보이는 건 남자의 뒷모습뿐이었다.그 시선을 따라 조시욱도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
천아름은 눈을 깜빡이며 말없이 웃었고 그 반응만으로도 이미 모든 걸 인정한 셈이었다.하지만 곧 그녀는 덧붙였다.“먼저 말해두지만 나도 미리 알았던 건 아니야. 그 사진들은 우리가 올라온 직후에 구승훈이 보낸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천아름을 바라봤다.그 시선에 살짝 기가 죽으려던 찰나 강하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왜 미리 말 안 했어?”천아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말했으면... 네가 그 사진들을 제대로 썼을까?”강하리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봤다.이 각도에서 에비뉴와 정안 타워를 잇는 공중 회랑을 보는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다섯 개의 회랑은 같은 위치에 놓인 게 아니라 높낮이와 간격이 제각각이었고 그 불규칙한 배치가 위에서 보면 iw라는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이미 회랑에 심어졌던 꽃들은 시들어 있었지만 강하리는 그곳에 자란 꽃들이 전부 리시안셔스였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강하리는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이젠 더 이상 구승훈과 어떤 연결고리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로의 감정이 남아 있는 듯 없는 듯 얽히고설킨 관계... 그녀는 그런 관계를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말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휠체어를 돌려 자료를 보러 이동했다.천아름은 커피잔을 들고 그녀 옆으로 와 책상에 걸터앉았고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솔직히 너희 둘 일에 내가 뭐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번 일은 구승훈 잘못이 맞고... 난 내 친구가 또 상처받는 꼴 못 보니까 절대 너한테 구승훈의 편을 들 생각 없어. 근데 말이야...”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이번처럼 구승훈이 뭔가 너한테 건넸다면... 넌 받을 건 받아. 그건 걔가 너한테 진짜로 빚진 거니까.”강하리는 작게 웃었다.“그 사람 도움 없이도 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왜 굳이 기대야 해?”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근데 이것 말고도 있지? 송지은이 회의에서 그렇게 된 것도... 구승훈이 일부러 남겨둔 거지? 내가 송지은을 이용해서 회사에서 위신을 올
에비뉴 그룹이 결국 강하리 손에 들어가자 송지은의 속엔 쌓여 있던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그는 몇몇 임원들과 은밀히 손을 잡고 이번 회의 자리에서 강하리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강하리는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봤다.“송 부장님, 진심으로 의견을 내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직권 남용하고 싶은 건가요?”그러자 송지은의 얼굴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강 대표님, 지금 무슨 뜻이죠?”강하리는 옆에 앉아 있던 비서실장에게 눈빛을 보냈다.비서실장은 곧바로 자료를 띄웠고 화면에 나타난 건 한 프라이빗 레스토랑에서 찍힌 사진이었다.송지은이 막 추천했다던 신인 여배우와 다정하게 식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그 여배우는 거의 그의 무릎 위에 앉을 듯 그에게 바짝 기대 있었다.송지은은 이마에 핏대가 서며 말했다.“업무 미팅하면서 밥 한 끼 먹는 게 무슨 문제죠?”강하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다음 사진이 화면에 떠오르자 회의실 분위기가 미묘하게 흔들렸다.사진 속 송지은은 그 신인 여배우의 허리를 감싸안고 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식사 후엔 호텔 코스로 이어지셨군요. 송 부장님?”강하리의 그 한마디에 누군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천아름은 다리를 꼬고 앉아 회의실 전면을 향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웃음소리가 송지은에게 더없이 굴욕적이었다.강하리는 더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회의실 안의 다른 인물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여유로웠지만 시선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또 누구였죠? 추천한 연예인들 리스트... 누구 누구있었죠”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안 사람들 사이로 묘한 침묵이 흘렀고 서로 눈치를 보던 그들은 이내 입을 닫았다.오늘 강하리는 확실히 준비하고 왔다.이번 판에서 잘 되면 본때 보여주는 걸로 끝이지만 잘못 건드리면 누군가는 직장을 잃게 될 게 뻔했다.방금 송지은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모두가 생생히 봤으니 더 이상 나설 사람은 없었다.회의실은 고요했다.강하리는 시선을 천천히 회의실을 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