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승훈은 그 메시지를 보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정주현은 옆에서 구승훈을 바라보며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 같은 자리에 구 대표님도 오시나?”구승훈은 그를 흘끗 쳐다봤다. “여자 친구가 이렇게 잘나가는데 정주현 씨는 내가 빠질 줄 알았나 봐?”정주현은 피식 웃었다.“여자 친구? 본인 상상 속 여자 친구?”구승훈은 그를 슬쩍 보며 말했다.“조만간 그렇게 될 텐데.”정주현의 얼굴에 머금었던 웃음이 옅어졌다.“구 대표님 자신감이 넘치시네.”구승훈은 애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아직 무대 위에 있는 여성을 바라보며 말했다.“강하리에 대해선 내가 늘 한발 빨랐던 거 정주현 씨도 잘 알지 않나?”정주현은 씁쓸한 감정이 치솟았다. 둘이 아직 정식으로 관계를 확정 지은 건 아니지만 적어도 강하리가 이미 그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마음속으로 짜증이 났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과 강하리는 불가능하다는 걸 잘 알았다.저 영감탱이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계동회가 끝나고 강하리는 구승훈을 따라 행사장을 빠져나갔다. 그런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정양철의 눈빛이 무척 어두웠고 옆에서 정주현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후회하세요? 후회하는 거면 내가 지금 쫓아가고요. 강하리는 아직 구승훈 마음 안 받아줬거든요.”그러자 정양철은 그를 노려봤다. “괜히 소란 피우지 마!” 구승훈과 강하리는 행사장을 나와 곧장 시청으로 향했다.“사실 첩자가 누군지 이미 알 것 같아요.”구승훈의 눈빛이 번뜩였다.“그래도 증거는 있어야지.” 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시청에 도착하니 저쪽에는 이미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었다.구승훈을 보자마자 그 남자는 이번 입찰의 모든 입찰서를 건네주었고 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였다.“수고했어요.”그리고는 강하리를 사무실로 데려갔다.입찰서를 살펴보기 전 강하리가 낮게 중얼거렸다.“입찰 전날 밤에 프로젝트팀원들에게 전화를 돌려서 입찰서를 바꾼다고 했어요. 누가 유출했는지 파악하기 쉽도록 각자 금액을 다르
강하리가 두 눈을 깜빡였다.“아직은 비밀이에요.”구승훈은 속이 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그동안 강하리는 자신의 일에만 집중하며 기회를 준다고 말해놓고도 그에게 할애한 시간은 극도로 적었지만 차마 그녀를 곁에 붙잡아 둘 이유가 없었다.“며칠 정도 가 있는 거야?”“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한 달 정도요.”구승훈은 속이 상했지만 겉으로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그 기간에 외부인은 만날 수 있나?”“잘 모르겠어요.”구승훈은 우울함이 잔뜩 밀려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그럼 통화는 할 수 있겠지.”강하리는 그의 표정을 보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최대한 받으려고 노력해 볼게요.”구승훈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문득 자신도 예전에 그녀에게 같은 말을 했던 게 떠올라 순간 화를 낼 기운조차 사라졌다.강하리는 손에 든 입찰서를 보며 말했다.“전 사무실로 돌아가서 이번 일 처리해야 하는데, 당신은요?”사실은 나랑 같이 가지 않겠냐고 말하고 싶었다.두 사람이 제대로 함께 시간을 보낸 지 꽤 오래된 건 사실이었으니까.하지만 말이 채 나오기도 전에 구승훈의 전화벨이 울렸다.그는 휴대폰을 쳐다보다가 무의식적으로 강하리를 올려다봤다.Y국에서 걸려 온 전화는 두 사람 모두에게 예민한 번호였다.강하리는 시선을 피하며 못 본 척했고 구승훈은 곧바로 전화를 끊더니 그 번호도 차단해 버렸다.그러고 나서야 이렇게 말했다.“이제 걔 전화 안 받을 테니 걱정하지 마.”강하리는 짧게 대꾸할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잠시 후 구승재의 전화가 걸려 왔고 구승훈은 전화를 받고 그저 두 번 대꾸할 뿐이었다.“나도 처리할 일이 좀 있는데 이따 밤에 공항에 데려다줄까?”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구승훈은 그녀를 회사까지 데려다준 다음 떠났고 강하리는 한참 동안 그의 차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안으로 들어갔다.사무실에는 이미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었다.사무실에 들어가기 전, 강하리는 휴대폰 녹음기를 켰다.안으로 들어간 그녀가 입찰
다행히 노진우의 운전 실력이 현란해 급히 방향을 틀어 엇갈리게 되었다.상대도 실제로 부딪힐 생각은 없었는지 1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 정차했다.이윽고 송동혁이 생채기 가득한 얼굴로 화를 내며 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송동혁은 충돌할 의도는 없었고 누군가를 들이받을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그저 강하리를 만나고 싶었을 뿐이다.하지만 강하리가 지난번에 대양그룹에 한 발짝도 들어가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이곳에서 그녀의 앞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송동혁을 보자 강하리의 표정이 일그러졌고 노진우는 고개를 돌려 강하리를 바라봤다.“강하리 씨, 괜찮아요?”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그쪽은요?”“나도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강하리, 내려와 봐. 할 말 있어.” 밖에서 송동혁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노진우는 인상을 찌푸렸다.“내가 내려가서 처리할게요.”노진우가 차에서 내리자 송동혁이 갑자기 이쪽을 향해 소리쳤다.“강하리, 그때 네 엄마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지 않아?”강하리의 얼굴은 순식간에 싸늘해졌고 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더니 결국 차 문을 열고 내려왔다.“송동혁 씨, 아는 게 뭐예요?”“둘이 얘기하지!”강하리의 얼굴이 굳어졌지만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말했다.“노진우 씨는 차에서 기다려요.”노진우는 불안했지만 차로 돌아가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어차피 이곳은 도처에 카메라도 있으니 송동혁은 무슨 짓을 하고 싶어도 할 배짱이 없을 것 같았다.“강하리 씨, 조심하세요.”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고 노진우가 차에 돌아가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아는 게 뭐예요?”그러자 송동혁은 문득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그때 네 엄마를 해친 사람이 누군지 알지.”강하리는 당황했다.“우리 엄마가 누군가에게 해를 입은 거라고요?”송동혁의 얼굴에는 조롱이 가득했다.“그때 내가 네 엄마를 주웠을 때는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었어. 그러다 실수로 발을 헛디뎌 산 아래로 떨어졌을 때 내가 구해줬는데 안타깝게도 깨어나서 기억을 잃었지.
“이년이 감히 날 협박해!”강하리는 마음속으로 비웃었다. 역시 송동혁은 또 그녀를 속일 생각이었다.강하리는 피식 웃었다.“이게 무슨 협박이에요. 송동혁 씨, 그냥 당신이 저지른 일 아닌가요? 게다가 그쪽 S제약 회사를 어떻게 세운 건지는 본인이 그 누구보다 잘 알 텐데요!”당시 장씨 집안은 기껏해야 의약품을 파는 자영업자에 불과했고 S제약은 송동혁이 정서원에게서 가져온 보석을 발판 삼아 지금의 모습으로 성장한 회사였다!“전 다만 우리 모녀에게 빚진 것을 갚으라고 하는 것뿐이에요!”송동혁의 얼굴이 추악하게 변했다.“내가 너희 모녀에게 빚을 졌다니 무슨 소리야? 강하리, 아무리 그래도 난 네 아빠야! 아버지와 딸 사이에 무슨 빚을 지고 말고 할 게 있어!”강하리는 문득 그의 말이 우습게 느껴졌다.“아버지? 어떻게 그런 말을 뻔뻔하게 하지, 송동혁 씨 당신이 아버지라고?”송동혁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말을 하기까지 한참이 걸렸다.“알고 있었어?”강하리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송동혁 씨, 당신이 우리 엄마를 만났을 때 엄마는 이미 임신한 상태였죠? 그때 이미 장진영이랑 만나고 있으면서 엄마한테 있는 보물이 탐나서 속인 거죠?”송동혁은 순간 찡그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이미 알고 있으니까 더 숨길 것도 없겠네. 그때 내가 구해줬을 때는 이미 임신한 상태였어. 그래도 어쨌든 내가 목숨을 살려줬으니 대가를 받아야 하지 않겠어?”강하리는 손가락이 떨릴 정도로 화가 났다.살면서 이런 터무니없는 말을 이렇게 뻔뻔하게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자신의 이기적인 욕망 때문에 정서원 인생의 반을 송두리째 날리고 자신만의 행복은 얻지 못한 채 오랜 세월을 견디게 만들고 강찬수 같은 나쁜 놈까지 만나게 했다.강하리는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홱 손을 들어 송동혁의 뺨을 때렸다.“송동혁, 이 따귀는 당신이 우리 엄마한테 진 빚이야. 나머지는 내가 천천히 갚아줄게!”송동혁은 따귀를 맞고 눈이 뒤집혔다.“이년이 감히 날 때려!” 송동혁이 반격을 하려
구승훈은 강하리와 헤어진 후 곧바로 로열 클럽으로 향했다.그는 차를 세워놓은 다음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저 창문을 내린 채 담배에 불을 붙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류덕구가 직원들과 함께 내부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구승현도 그중 한 명이었다.구승훈은 그를 힐끗 보고는 시선을 거두고 느긋하게 담배까지 피워댔다.구승현은 구승훈을 발견하고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너야, 네가 날 해친 거야! 구승훈, 너 두고 봐. 할아버지가 너 가만 안 둘 거야! 할아버지가 이제부터 구씨 가문은 나한테 넘겨준다고 했어, 구승훈 너 딱 기다려!”옆에 있던 직원이 이를 보고 곧바로 바닥에 눌러 그를 제압하며 그렇게 수갑이 채워졌다.그제야 문을 열고 걸어온 구승훈의 발이 구승현의 손을 짓밟았고 구승현은 곧바로 비명을 질렀다.구승현은 몸을 숙인 채 손에 쥔 담배꽁초를 그의 팔에 대고 비볐다.“구승훈! 이거 놔, 네가 뭔데 날 잡아!”구승훈은 웃으며 그의 팔을 힘껏 밟은 뒤 자리를 떴다.류덕구가 구승훈에게 다가갔다.“우리가 들어갔을 때는 이미 몇 사람이 함께 흡입 중이어서 현장을 잡았습니다만, 그 댁 어르신께서 곧 아실 테고 그러면 오래 못 붙잡고 있을 것 같습니다.”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였다.“수고하셨습니다.”류덕구는 웃으며 말했다.“수고는 무슨, 덕분에 실적이 쌓이는데요.”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인 뒤 구승재를 힐끗 돌아보았다.“팔다리를 부러뜨려서 노인네한테 보내.”구승재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럼 할아버지한테는...” 구승훈이 피식 웃었다.“약쟁이가 환각에 취해 자기 팔다리를 부러뜨린 걸 누구 탓을 해?”“구승훈, 웃기지 마. 나 건드리기만 해!”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구승훈이 발로 그의 팔을 밟았고, 우두둑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구승현의 얼굴은 순식간에 고통으로 하얗게 질렸다.“앞으로 그따위로 말하지 마. 승현아, 형 처음 보는 거 아니잖아?”구승훈은 느긋하게 발을 치우고 돌아서서 차에 탔다.노진우가
강하리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둘이 짜고 치는 걸 모를 줄 알고?하지만 구승훈이 그사이 살이 빠진 것은 사실이었기에 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며 가정부를 돌아보았다.“이따가 이 사람 좋아하는 요리 보내드릴 테니 그대로 따라 해 보세요.” 가정부가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하리 씨. 사실 하리 씨가 집에 오는 게 그 어떤 요리보다 도움 돼요. 오늘 대표님 얼마나 행복해하시는지 봐요.”강하리는 말 속에 담긴 의미를 못 들은 척 젓가락을 움직이며 밥을 먹기 시작했다.구승훈은 많이 먹지 않고 이따금 음식을 집어주며 그녀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강하리의 그릇이 가득 차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강하리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흘겨보았다.“내가 알아서 먹을 수 있으니까 얼른 먹기나 해요!”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난 배 안 고파.”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그에게 갈비 한 조각을 건넸고 그제야 구승훈은 젓가락을 움직여 먹기 시작했다.가정부는 옆에서 몰래 웃으며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오후에 진 장관님께 전화 드렸어. 이번에 Y국으로 가지? 거긴 조금 추우니까 두꺼운 옷이랑 생필품도 준비했어. 부족하면 거기서 사면 되고 또...”강하리는 눈앞에서 쉴 새 없이 말하는 남자를 보며 왠지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졌다.그녀는 고기 한 조각을 그의 입에 넣어주었다.“그만해요, 내가 해외로 간 적 없는 것도 아니고.”말을 마친 그녀가 계속해서 먹기 시작했고 구승훈은 그녀를 바라보며 입안에 있는 고기를 천천히 씹어먹었다. 눈빛은 마치 그녀를 잠식할 것만 같았다.구승훈은 입에 넣은 코코넛 과육을 씹으며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의 눈빛은 그녀를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진태형에게 전화를 걸어 그녀가 오늘 안에 도착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면 그는 정말 그녀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공항으로 가는 길에 구승훈의 휴대폰이 계속 울리고 ‘어르신’이라는 세 글자가 계속 화면에 떴다.강하리는 그걸 보고 시선을 돌렸다.“바쁘면 전화부터 받
강하리는 도망치듯 차에서 뛰어내렸다.구승훈은 당황한 그녀의 뒷모습에 웃음을 참지 못하면서 휴대폰을 들고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내 생각 꼭 해. 며칠 뒤에 시간 나면 보러 갈게.]메시지를 보내자마자 다시 전화벨이 울렸고 구승훈은 화면에 뜬 세 글자를 바라보다가 어두운 눈빛으로 마침내 전화를 받았다.통화가 연결되자 저쪽에서 노인의 성난 고함이 터져 나왔다.“이 개자식아! 내가 화가 나서 죽는 꼴을 보고 싶은 거냐?”구승훈은 대답 대신 담배에 불을 붙이며 몸 안의 욕망을 진정시켰다.저쪽에서 구동근은 여전히 소리치고 있었다.“그깟 여자 하나 때문에 친동생을 몇 번이고 배신해? 구승훈, 잘하는 짓이다!”구승훈이 피식 웃었다.“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네요. 걔가 돌아온 이후 지금까지 할아버지가 싸고도는데 제가 어떻게 건드려요.”“구승훈, 모르는 척하지 말고 당장 이리로 와!”구승훈은 대답 대신 바로 전화를 끊었고 한편에서 구동근은 피를 토할 지경으로 화가 났다.구승현은 상처투성이로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고 구씨 가문 둘째 내외도 화가 잔뜩 난 얼굴이었다.어르신은 전화를 끊고 화를 내며 침대로 걸어갔다. 침대에 누워 있는 구승현을 바라보며 속으로 저주를 퍼붓지 않을 수 없었다. 쓰레기 같은 놈!구승현을 이용해 구승훈을 협박하려 했는데 그 정도 유혹도 못 견디다니.하지만 그렇다고 구승훈을 내버려둘 생각은 아니었다. 자신이 죽기 전에는 절대 그 여자를 절대 집안으로 들이지 않을 거다.강하리는 터미널에 들어선 뒤에야 구승훈이 보낸 메시지를 보았다.그녀는 휴대폰을 쥐고 잠시 망설이다가 답장을 보냈다.[알았어요.]구승훈은 휴대폰으로 돌아온 메시지를 보고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참지 못하고 결국 전화를 걸었다.강하리가 B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 9시가 넘은 시간이었다.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박근형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하리야, 마중 나갈 사람을 보냈어. 오늘 밤에 일이 좀 생겨서 네가 잠시 외교부로 와줘야 할 것 같다.”강하리는
강하리가 입술을 달싹였다.“알겠어요.”박근형이 이 일은 분명히 잘 처리할 수 있다고 설명했지만 강하리는 왠지 마음속으로 답답한 억울함이 밀려왔다.박근형의 말처럼 정당한 경쟁을 두려워한 적이 없지만 이런 비열한 수작은 역겨웠다.구승훈은 아마도 그녀가 비행기에서 내린 것을 알았는지 바로 전화를 걸었고 강하리는 맥없이 전화를 받았다.구승훈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녀가 지금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알았다.“무슨 일이야?”강하리는 잠시 고민했지만 곧바로 이야기를 꺼냈고 말을 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편해진 것 같았다.그녀는 오히려 구승훈을 다독이며 말했다.“괜찮아요, 정정당당하게 싸워도 난 무서울 게 없어요.”구승훈의 얼굴은 어두워졌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살짝 묻어났다.“그래, 알겠어. 우리 강 대표님 실력이야 말하지 않아도 알지.”강하리는 그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고 웃고 나니 다시 억울함이 밀려왔다.“어떻게 그런 소문을 낼 수 있죠?”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네가 지금 가진 걸 탐내는 거지. 정작 본인은 가질 수 없으니까 흠집 내려는 거고.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 가지 더 알 수 있지.”강하리가 물었다. “뭐요?”구승훈이 웃었다.“네가 뛰어나다는 거.”피식 웃던 강하리는 구승훈이 자신을 위로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웃으니 기분이 훨씬 좋아졌다.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외교부 앞에 멈췄다.“외교부 도착했어요, 먼저 끊을게요.”구승훈이 답했다.“걱정 말고 해. 잘 해결될 거야.”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래요.”구승훈은 끊어진 전화를 바라보며 표정이 다소 어두워졌다.그는 구승재에게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전용기 좀 준비해 줘, B시로 가야겠어.”구승재는 순간 당황했다.“형, 내일 아침 일찍 SH그룹 이사회가 있는데 오늘 밤에 B시로 간다고?”구승훈이 짧게 답했다.“할 일만 끝나면 바로 돌아올 거야.”구승재와의 전화를 끊은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진태형에게 전화를 걸었다.진태형은 전
구승훈은 강하리의 턱을 쥔 채 엄지로 그녀의 분홍빛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입술이 붉게 충혈되자 강하리는 구승훈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구승훈 씨, 그만해요. 연정이 보러 가는 길에 추태 부리고 싶지 않아요.”구승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럼 조시욱은 안아도 되고 난 안 되는 거야? 조시욱은 널 만져도 되고 난 안되는 거냐고!”“그래요!”강하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앞으로 누구든 가능할 수 있어도 구승훈 씨 당신만은 절대 안 돼요!”그녀는 이 말을 하면 구승훈이 분노하며 문을 박차고 나갈 줄 알았다. 사실 그걸 바라기도 했다.하지만 뜻밖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구승훈은 몸을 낮춰 무릎을 꿇었다. 강하리는 아직 걸을 수 없는 상태였고, 발목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래서 요즘엔 털실 슬리퍼 하나만 신은 채 다녔다.아까 구승훈이 강하리를 안고 차에 태울 때 슬리퍼 한 짝이 옆으로 벗겨졌었다. 구승훈은 몸을 낮춰 그 슬리퍼를 주워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에 신겨 주었다.그의 큰 손이 그녀의 발목을 감싸며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치 조금만 세게 다뤄도 그녀가 아플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순간 그 손끝에서 묘한 애틋함을 느꼈다. 하지만 곧 그런 감정을 느낀 스스로가 우스워 웃음이 난 강하리 발을 움츠렸다.그럼에도 구승훈은 손을 놓지 않고 슬리퍼를 신긴 뒤 다시 강하리를 안아 휠체어에 앉혔다.“말도 안 되는 부탁인거 아는데...”구승훈이 그녀를 휠체어에 앉히고 나서 속삭였다.“제발 나한테 너무 차갑게 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전혀 마음을 열 기색이 없었다.“그럼 적어도 다시 쟁취할 기회라도 줘, 응? 강 대표?”“구승훈 씨, 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 이렇게 헤어졌다 만났다, 당신은 안 질려도 나는 질렸어요. 그만 좀 해요. 내가 부탁할게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스스로 휠체어를 밀어 응급실 쪽으로 향했다.구승훈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 옆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대신
구승훈의 동작이 너무 빨라 강하리는 미처 반응할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차 안에 앉아 있었다.“구승훈 씨!”강하리가 소리쳤다. “나 혼자 갈 수 있어요.”구승훈이 비웃으며 말했다.“어떻게 가? 조시욱이 데려다준대? 다른 남자랑 내 딸 보러 가겠다는 거야?”강하리는 말문이 막혔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구승훈은 그녀의 휠체어를 접어 트렁크에 싣고 있었다.조시욱은 막무가내인 구승훈을 막으려다 아까 전화 받던 강하리의 불안한 표정이 떠올라 막지 않았다.“연정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나도 같이 갈게.”구승훈이 동작을 멈추고는 싸늘하게 웃었다.“조 도련님은 매일 이렇게 한가한가 보지?”말을 마친 구승훈은 휠체어를 트렁크에 던져 넣고는 차에 올라 그대로 출발했다.달리는 차 안에서 강하리는 창밖만 응시한 채 구승훈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구승훈은 조용히 운전하면서 가끔 백미러로 강하리를 살펴보았다.“아까... 아프지 않았어?”강하리는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창밖만 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물음은 공허하게 차 안을 맴돌 뿐이었다.구승훈은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의사 말로는 이제 재활 치료 들어가야 한다던데, 치료사는 예약했어?”“했어요.”강하리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딸을 보러 가는 길에 더 이상 구승훈과의 그 어떠한 불필요한 갈등도 피하고 싶었다. 잠시나마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것도 그녀에겐 너무 힘들었다.“이 차에 임 선생은 태운 적 없어.”구승훈의 뜬금없는 한마디에 강하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설명할 필요 없어요. 신경 안 써요.”그 한마디에 구승훈의 하려던 말들이 전부 목에 걸려버렸다.그는 깊게 숨을 쉬며 말했다.“임 선생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단지 여초연의 시선을 흐리려고 잠깐 곁에 뒀을 뿐이야.”강하리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한때 그녀는 구승훈이 이런 한 마디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설령 지금처럼 단순하고 허술한 변명이라도 좋았다. 그랬더라면 그녀는 혼자서 괴로워하
구승훈과 헤어진 후로 그녀는 두번 다시 그곳에 가지 않았다.“왜 갑자기 거기에 가고 싶어진 거야?”조시욱이 무심한 듯 물었다.강하리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해찬 선배가 뭐라고 말했어요?”조시욱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사실은 별말 없었어. 그냥 국내에 며칠밖에 머물지 못하니까 내게 틈틈이 널 돌봐 달라고 했지.”강하리의 눈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선배는 항상 걱정이 많아.”“하리야, 사실 나는...”“시욱 선배.”강하리가 말을 끊었다.“그만해요.”조시욱은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그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강하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왜? 구승훈 때문이야? 정말 구승훈에게 다시 기회를 주려는 거야?”강하리는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그 사람과는 상관없어요.”조시욱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럼 왜 자신에게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주지 않는 건데?”강하리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시욱 선배, 나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거예요. 하지만 진심으로 누군갈 다시 좋아하거나 새 감정을 쌓을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미안해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장 회장님께도 희망을 품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조시욱은 말하고 싶었다. 괜찮다고, 기다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말도 결국 삼켜야 했다. 어떤 말은, 그냥 그녀에게 부담만 줄 뿐이었다.그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알겠어. 할아버진 걱정 마, 내가 설명할게. 그럼 다른 감정은 일단 치워두고 우리 친구는 될 수 있잖아?”강하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조시욱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씁쓸했다.주해찬이 부탁했다는 건 모두 거짓이었다.처음 임무를 함께 할 때부터 그의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협상장에서 여유롭고 능숙하게 대처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시선을 뗄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에게 이미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는 마음을 접어야 했다.강하리가 어르신 생신 파티에 모습을 드러내고 아주머니의 생신 파티에 나
구승훈은 순간 말이 막혔다.“하리야, 제발...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수 없어?”그의 목소리엔 분명한 간절함이 실려 있었다.하지만 강하리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가요.”그녀는 다시 한번 담담하게 말했고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조용히 한마디를 건넸다.“너무 무리하지 마. 에비뉴 쪽 일은 내가 처리해 둘게.”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고 조시욱은 그대로 그녀를 밀고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몸을 돌려 진료실로 들어갔다.“강하리 씨의 상태를 좀 알고 싶습니다.”의사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했다.병원 안에선 이미 구승훈과 강하리에 관한 얘기가 돌 만큼 돌았다.사랑스러웠던 커플이 순식간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는 말들이었다.강하리가 수술할 때 구승훈은 오지도 않았고 입원하는 내내 찾아온 건 한 번뿐이었으며 오늘 깁스 푸는 날에도 옆에 있어 준 사람은 다른 남자였다.그래서 의사는 솔직히 말해 구승훈이 강하리를 완전히 내쳐버린 줄 알았다.‘이런 여자를 놓친 건 눈이 먼 건가... 양심이 없는 건가...’의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구승훈이 직접 찾아와 그녀의 상태를 묻는다는 게 당황스러웠다.“상처 회복은 꽤 잘 되고 있어요. 다만 완전 회복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재활 치료가 오래 걸릴 수도 있고요...”반쯤은 형식적인 설명이 끝난 뒤 구승훈은 반 시간쯤 지나서야 진료실에서 나왔다.그는 2층 복도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1층 로비에서 강하리는 조시욱과 함께 웃으며 조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병원을 나서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 한구석은 시리도록 쓰렸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바로 그 순간 강하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 살짝 멈춰 섰다.고개를 돌려 위층을 올려다보았지만 보이는 건 남자의 뒷모습뿐이었다.그 시선을 따라 조시욱도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
천아름은 눈을 깜빡이며 말없이 웃었고 그 반응만으로도 이미 모든 걸 인정한 셈이었다.하지만 곧 그녀는 덧붙였다.“먼저 말해두지만 나도 미리 알았던 건 아니야. 그 사진들은 우리가 올라온 직후에 구승훈이 보낸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천아름을 바라봤다.그 시선에 살짝 기가 죽으려던 찰나 강하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왜 미리 말 안 했어?”천아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말했으면... 네가 그 사진들을 제대로 썼을까?”강하리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봤다.이 각도에서 에비뉴와 정안 타워를 잇는 공중 회랑을 보는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다섯 개의 회랑은 같은 위치에 놓인 게 아니라 높낮이와 간격이 제각각이었고 그 불규칙한 배치가 위에서 보면 iw라는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이미 회랑에 심어졌던 꽃들은 시들어 있었지만 강하리는 그곳에 자란 꽃들이 전부 리시안셔스였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강하리는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이젠 더 이상 구승훈과 어떤 연결고리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로의 감정이 남아 있는 듯 없는 듯 얽히고설킨 관계... 그녀는 그런 관계를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말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휠체어를 돌려 자료를 보러 이동했다.천아름은 커피잔을 들고 그녀 옆으로 와 책상에 걸터앉았고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솔직히 너희 둘 일에 내가 뭐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번 일은 구승훈 잘못이 맞고... 난 내 친구가 또 상처받는 꼴 못 보니까 절대 너한테 구승훈의 편을 들 생각 없어. 근데 말이야...”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이번처럼 구승훈이 뭔가 너한테 건넸다면... 넌 받을 건 받아. 그건 걔가 너한테 진짜로 빚진 거니까.”강하리는 작게 웃었다.“그 사람 도움 없이도 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왜 굳이 기대야 해?”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근데 이것 말고도 있지? 송지은이 회의에서 그렇게 된 것도... 구승훈이 일부러 남겨둔 거지? 내가 송지은을 이용해서 회사에서 위신을 올
에비뉴 그룹이 결국 강하리 손에 들어가자 송지은의 속엔 쌓여 있던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그는 몇몇 임원들과 은밀히 손을 잡고 이번 회의 자리에서 강하리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강하리는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봤다.“송 부장님, 진심으로 의견을 내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직권 남용하고 싶은 건가요?”그러자 송지은의 얼굴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강 대표님, 지금 무슨 뜻이죠?”강하리는 옆에 앉아 있던 비서실장에게 눈빛을 보냈다.비서실장은 곧바로 자료를 띄웠고 화면에 나타난 건 한 프라이빗 레스토랑에서 찍힌 사진이었다.송지은이 막 추천했다던 신인 여배우와 다정하게 식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그 여배우는 거의 그의 무릎 위에 앉을 듯 그에게 바짝 기대 있었다.송지은은 이마에 핏대가 서며 말했다.“업무 미팅하면서 밥 한 끼 먹는 게 무슨 문제죠?”강하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다음 사진이 화면에 떠오르자 회의실 분위기가 미묘하게 흔들렸다.사진 속 송지은은 그 신인 여배우의 허리를 감싸안고 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식사 후엔 호텔 코스로 이어지셨군요. 송 부장님?”강하리의 그 한마디에 누군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천아름은 다리를 꼬고 앉아 회의실 전면을 향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웃음소리가 송지은에게 더없이 굴욕적이었다.강하리는 더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회의실 안의 다른 인물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여유로웠지만 시선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또 누구였죠? 추천한 연예인들 리스트... 누구 누구있었죠”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안 사람들 사이로 묘한 침묵이 흘렀고 서로 눈치를 보던 그들은 이내 입을 닫았다.오늘 강하리는 확실히 준비하고 왔다.이번 판에서 잘 되면 본때 보여주는 걸로 끝이지만 잘못 건드리면 누군가는 직장을 잃게 될 게 뻔했다.방금 송지은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모두가 생생히 봤으니 더 이상 나설 사람은 없었다.회의실은 고요했다.강하리는 시선을 천천히 회의실을 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