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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hor: 재인
강하리는 얼음 구덩이에 빠진 것만 같았다. 그래도 구승훈의 뜻은 명확했다. 만약 그녀가 머리를 끄덕인다면 그는 절대 말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내가 떠나도 상관없구나.’

강하리는 안현우에게 딱히 관심이 없었다. 예전 같으면 무조건 단호한 말로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따라 어쩐지 받아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이제는 변할 때가 되었다. 배 속에 아이도 생겼으니 말이다.

물론 아이를 이용해 구승훈을 협박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는 애초부터 게임일 뿐이었으니, 책임을 운운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구승훈은 그녀가 협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이번에 생긴 아이는 병원에 가서 지워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처음이 있으면 다음도 있기 마련이기에 문제였다.

아이를 원하지 않았던 구승훈은 평소에 꽤 신중하게 피임했다. 번마다 꼭 콘돔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달 하도 거칠게 한 탓에 콘돔이 찢어진 적이 있었다. 비록 제때 피임약을 먹기는 했지만, 결국 아이가 생기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지금 배 속에 있는 아이는 지킬 수 없을 게 뻔했다. 하지만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계속 아이를 지우러 병원에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도 소중한 청춘과 건강을 이렇게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정서원의 병원비라면 이미 꽤 모였다. 구승훈의 냉정함에도 실망할 대로 실망했다.

그녀는 더 이상 구승훈과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원래도 결심했던 일이기는 하지만, 그의 대답을 듣고 나니 더욱 명확해졌다.

강하리는 구승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또박또박 되물었다.

“저 진짜 떠나도 돼요?”

“그렇게 묻는다는 건 너도 안 대표의 제안에 관심 있다는 건가?”

구승훈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강하리는 피식 웃으면서 평소 같으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을 했다.

“안 대표님의 조건을 들어보고 생각해 볼 의향은 있어요.”

쨍그랑!

테이블 끝에 놓여 있던 술잔은 구승훈의 다리에 걸리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끄럽던 룸에는 순식간에 정적이 휩싸였다.

구승훈의 눈빛은 아주 차가웠다. 하지만 표정은 또 한결같이 덤덤했다. 오직 최측근만 그의 분노를 보아냈을 것이다.

“마음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는 것 같은데, 그냥 말 나온 김에 바로 사직서를 내지 그래?”

“좋은 생각이네요.”

구승훈의 차가운 미소에 강하리도 마찬가지로 차가운 미소로 대답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면서 말을 이었다.

“다들 좋은 시간 보내세요. 저는 피곤해서 먼저 일어날게요.”

강하리는 구승훈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성큼성큼 멀어져갔다. 혹시라도 마음이 약해질까 봐 머리도 돌리지 않았다.

아무리 밉다고 해도 구승훈은 그녀가 오랫동안 좋아해 온 사람이다. 눈빛 하나만으로도 그녀를 들었다 놨다 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오늘 벌인 일은 용감하다고 해야 할지, 충동적이라고 해야 할지 헷갈렸다. 하지만 절대 후회하지 않으리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녀는 후회하지도, 자신이 후회하도록 내버려두지도 않을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 구승훈에게 빠지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어떤 마음을 품든 그는 제삼자라도 되는 듯이 지켜보기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강하리가 떠난 다음 룸에는 괴이한 정적이 맴돌았다. 구승훈의 표정은 얼음이 떨어질 것 같을 정도로 차가웠다. 안현우마저도 불안한 기분이 들 정도로 말이다.

구승재는 조심스럽게 구승훈의 눈치를 살폈다. 속으로는 이번에야말로 진짜 망했다고 생각했다. 구승훈의 친구들도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그의 곁에 있던 여자가 이때다 싶어 가슴을 들이밀면서 말했다.

“대표님, 말 안 듣는 여자는 버리면 그만이에요~”

“꺼져.”

담담한 목소리가 고요한 룸에 울려 퍼졌다. 여자는 잠깐 멈칫하더니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 하고 투덜거렸다.

“뭘 또 화내고 그래...”

“꺼지라고!”

평소에는 절대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구승훈도 오늘은 두 눈이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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