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자고 있으니까 네가 올라가도 소용없잖아. 나랑 같이 출근하러 갈래?”강하리는 고개를 저었다.“아뇨, 올라가서 자료 준비해야죠. 며칠 뒤면 B시에 가야 해요.”“또 가?”강하리는 피식 웃으며 다가가 그의 입술에 짧게 입 맞추었다.“얌전히 있어요, 내가 돈 벌어서 당신 먹여 살릴 테니까.”구승훈의 목울대가 움찔하더니 강하리의 허리를 잡고 그대로 키스했다.“먹여 살릴 필요 없어. 그냥 나 만족만 시켜줘.”강하리는 얼굴이 살짝 붉어진 채 남자를 밀어냈다.“얼른 가요, 난 연지 보러 올라가야 해요.”구승훈은 마지못해 그녀를 보내주었다.손연지는 하루 동안 집에서 자고 다음 날 바로 출근했다.강하리는 그녀와 다시 얘기하고 싶었지만 손연지가 노민우를 언급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 입가에 차오른 말을 다시 삼켰다.강하리가 아래층에 내려왔을 때 구승훈이 기다리고 있었다.거즈와 약을 손에 들고 있던 남자는 강하리가 내려오자 인츰 건네주었다.“강 대표님이 수고 좀 해줘.”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물건을 건네받고 감긴 거즈를 조심스럽게 풀었다.손에 난 흉측한 상처 때문에 그녀의 손도 흠칫 떨렸다.구승훈은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그러쥐며 말했다.“오늘 밤에 올 거야? 네가 없으니까 씻는 게 너무 불편해. 어제 손에 물 닿았는데 그대로 둘 수밖에 없었어.”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물며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잠시 후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근데 나 오늘 밤 야근해야 할지도 몰라요.”구승훈이 바로 미소를 지었다.“괜찮아, 야근하는 시간에 맞춰 데리러 올게.”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구승훈에게 약을 발라준 뒤 누군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구 대표.”구승훈이 돌아보니 밖에 서 있는 장진영이 보였고 순간 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내가 했던 말은 깨끗이 잊어버렸네.”장진영은 얼굴에 멍까지 들어 있었다.“구 대표, 제발 우리 송씨 가문 좀 봐줘. 그 사람이 잠깐 어떻게 됐나 봐, 그 사람도 속은 거야!”구승훈
장진영은 밖에서 차창을 두드리며 여전히 울부짖었고 구승훈은 시동을 걸고 곧장 차를 출발시켰다.차 안에서 구승훈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을 꺼냈다.“하리야, 송유라는...”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하리가 입을 열었다.“설명 안 해도 돼요, 방금 들었으니까.”구승훈은 그녀를 힐끗 바라보고는 자신의 다친 손을 그녀의 손에 밀어 넣었다.“더 이상 문제 일으키지 않게 잘 지켜보라고 했어.”강하리는 자신의 손에 들어온 손을 잠시 쳐다보다가 그대로 잡았다.가는 내내 그녀는 말을 하지 않았다.“오늘 밤에 데리러 올게.”차에서 내리기 전 구승훈은 그녀를 달래는 어투로 낮게 말했다.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차에서 내렸다.강하리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구승훈은 휴대전화를 꺼내 구승재에게 전화를 걸었다.“송유라 쪽은 어떻게 됐어?”구승재는 한숨을 쉬었다.“여전히 똑같아. 하루 종일 울고, 다리 부상도 의사 말로는 수술하면 일어설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최고의 전문가가 아니면 안 된대. 우리가 찾아줘?”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일단 며칠 누워있으라고 해.”구승재는 잠시 침묵했다.“형, 차라리 죽게 내버려두는 게 낫지 않아? 이제 강하리랑 화해했는데 그 여자를 데리고 있는 건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야. 언젠가 강하리가 송유라 때문에 또 형을 떠날지도 몰라.”구승훈은 미간을 찌푸린 채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잘 지켜봐, 문제 일으키지 않게, 송동혁 일은 알리지 말고.”구승재는 대답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강하리는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바삐 돌았다.북교 프로젝트가 요 며칠 공개될 예정이고 그녀는 정주현에게 업무를 넘기기 시작했다.정주현은 인수인계 과정에서 내내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일을 하기 싫은 건 아니었지만 강하리를 보내는 건 아쉬웠다.“정말 가야 해요?”강하리가 피식 웃었다.“아니면요?”정주현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회사에 오래 있을 줄 알았는데 6개월 만에 떠날 줄은 몰랐네요.”
“괜한 생각이야. 나랑 그 댁 어르신은 오래 알고 지낸 사이고 구 대표와는 부딪힐 일이 없는데 내가 왜 구 대표를 노리겠나?”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정양철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래도 외교부에 가고 싶나?”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양철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좋아, 그 선택 존중하지.”강하리는 정양철의 사무실에서 나오면서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정양철의 말한 것 중에 뭐가 진실이고 뭐가 거짓일까?’오후 내내 인수인계를 마치고 강하리가 회사에서 나왔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구승훈의 차가 갓길에 세워져 있었고 강하리가 그쪽으로 가려는데 안예서가 그녀를 불렀다.“부장님.”강하리의 발걸음이 멈췄고 저쪽에는 이미 구승훈이 차에서 내린 뒤였다.안예서도 깜짝 놀랐다. “구 대표님 또 오셨어요?” 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쪽으로 걸어왔다.“이번에는 무슨 일로?”구승훈이 웃으며 말했다.“여자 친구 데리러요.”안예서는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강하리의 팔을 꽉 잡았다.“부장님, 방금 들었어요? 구 대표님께서 여자 친구 데리러 왔다고 하셨어요!”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구승훈을 바라보았다.“응, 들었어.”안예서는 강하리를 바라보았다.“부장님, 놀랍지도 않아요? 구 대표님께서 여자 친구가 있대요, 그것도 우리 회사에!”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뭐가 놀라워, 구 대표님 나이도 있는데 연애할 때도 됐지.”안예서는 여전히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구 대표님, 여자 친구가 누구예요? 제가 아는 사람일지도 모르잖아요.”구승훈은 강하리를 바라보았고 강하리의 얼굴에 어색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예서야, 네 차 왔어.” 안예서가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강하리가 그녀를 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안예서의 차가 멀어지고 강하리가 뒤를 돌아보자 어두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구승훈을 발견했다.그가 다가와 강하리를 차 쪽으로 끌어당기더니 차에 올라타자마자 강하리를 거칠게 품에 가두었다.“강 대표님께선
강하리는 그의 갑작스러운 키스에 깜짝 놀랐다.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그를 밀어냈지만 구승훈은 점점 더 거칠게 깊숙이 파고들었다.“하리야, 내 말 듣고 있어?”주해찬의 목소리가 귀에 들리자 구승훈은 전화기를 들고 곧바로 상대에게 쏘아붙였다.“주해찬 씨, 남 일 방해하지 마시죠?”말을 마친 그가 곧바로 전화를 끊었고 강하리가 서둘러 말했다.“구승훈 씨, 뭐 해요?”구승훈은 그녀의 허리를 꼬집으며 안아 들었다.“주해찬 멀리 해, 하리야.”강하리는 다소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업무적인 얘기 말고 연락 안 해요.”구승훈은 여전히 굳은 표정이었다.“다른 사람하고도 업무상 연락할 수 있는데 왜 매번 주해찬이 연락하는 거야? 외교부에 다른 사람은 없어?”강하리가 얼굴을 찡그렸다.“구승훈 씨, 업무적인 건 나도 그 사람도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일 말고 다른 일 없을 거라고 약속할 테니까 그만 좀 해요, 네?”구승훈은 피식 웃기만 했다.“넌 아무 일 없을지 몰라도 그 자식은 모르지.”“그렇게 선 넘는 사람 아니에요.”“선 넘는지 아닌지는 옆에서 보는 사람이 더 잘 알지.”그녀가 뭐라 말하려는데 구승훈이 이미 그녀의 입술을 막고 있었다.강하리가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구승훈은 어디선가 넥타이를 꺼내 그녀의 손목을 묶었다.“하리야, 지금은 딴생각하지 말고 나만 봐.”구승훈은 말하며 큰손으로 그녀의 치마 밑을 들추었다.그와 하기 싫은 건 아니지만 지금은 그녀도 화가 난 상황이라 하면서도 버둥거릴 수밖에 없었다.하고 나니 손목에 붉은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구승훈은 묶었던 넥타이를 풀고 뻔뻔하게 손목에 입을 맞췄다.“아파?”강하리가 그를 발로 찼다.“구승훈, 이 개자식!”구승훈은 여전히 그녀의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하리야, 전에 할 때 임정원 전화는 잘 받더니 지금은 왜 이렇게 신경 써?”강하리는 자신의 몸을 누르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화를 냈다.“구승훈 씨, 주해찬 씨랑은 일 때문에 연락하는 거라고 여러 번 말
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한참을 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이제부터 콘돔 끼면 안 돼요? 나 지금 되게 괴로워요.”구승훈은 피식 웃었다.“흘러내려? 어디 봐.”그렇게 말하며 그가 강하리의 치마를 들어 올리려는 순간 강하리가 발로 세게 걷어찼다.“비켜요.”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안아 들었다.“내가 씻겨줄게.”“아뇨, 내가 알아서 할게요!”“얌전히 있어, 내가 씻겨 줄게.”...한편, 손연지가 병원에 막 도착해 차를 주차하고 있을 때 노민우가 옆에서 걸어왔다.그의 이마에는 여전히 멍이 들어 있었다.손연지는 그를 힐끗 보고는 차 문을 쾅 닫고 입원 병동으로 걸어갔다.그 눈빛에 담긴 경멸과 혐오가 너무 짙어서 노민우는 차마 못 본 척할 수 없었다.그는 다소 격앙된 표정으로 뒤를 따랐다.“손연지, 이건 무슨 뜻이야?”손연지의 발걸음이 멈추며 그녀가 노민우에게 다가가 어깨를 토닥였다.“노민우 씨, 난 의사니까 내 앞에서 못 한다고 인정하는 게 부끄러운 일 아니야.”당황한 노민우는 그녀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발끈했다.“손연지, 누가 못한다는 거야!”“여기 당신 말고 다른 사람 있어?”노민우는 순식간에 분노했다.“못 해? 밤새 좋다고 소리 지른 게 누군데? 그날 몇 번이나 했는지 알아? 자기가 술에 취해서 필름 끊겨놓고 나보고 못 한다고?”손연지는 비웃으며 돌아섰다.“노민우 씨, 헛소리하지 마. 내가 필름이 끊겨도 그런 일은 절대 안 잊어!”노민우는 너무 화가 나서 황급히 그녀를 끌어당겼다. “안 돼, 이 일 제대로 얘기해.”다른 건 몰라도 남자로서 자존심이 걸려 있었기에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손연지가 피식 웃었다.“무슨 얘기를 해, 선배한테 증명해 달라고 할까?”노민우가 씩씩거렸다.“한 번 더 자, 너 정신 멀쩡할 때!”손연지는 발을 들어 그를 홱 걷어찼다.“꿈 깨, 너 때문에 첫 경험도 버렸는데 두 번째도 버리라고?”노민우는 이를 악물고 화를 꾹 참았다.“버리다니?”“당신이랑 하는 건 그냥 버리는
강하리는 그 후 이틀 동안 정주현에게 업무를 넘기면서 외교부에 제출할 자료를 준비했다.그녀는 지금까지의 추측대로라면 정양철이 그렇게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인수인계 마지막 날까지 정양철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강하리는 자신이 정말 괜한 생각을 한 건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업무 인계가 끝났으니 구승훈에게 연락한 다음 퇴근하고 곧장 공항으로 가려고 했다.그런데 회사 아래층에 있던 한 남자가 그녀를 막았다.“강하리 씨, 안녕하세요.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강하리는 미간을 찌푸린 채 앞에 서 있는 예쁘고 상냥한 여자를 바라보았다.“누구세요?”“저 승훈이 엄마예요.”강하리는 잠시 당황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요, 옆에 있는 카페로 가요.”여초연은 강하리를 본 순간부터 강하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강하리 씨 정말 예쁘네요. 이러니까 승훈이가 그렇게 좋아하죠.”강하리는 여초연의 의도를 알 수 없어 그저 담담하게 웃기만 했다.“칭찬 감사합니다.”여초연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눈으로 바라보았다.“걱정하지 마요, 긴장도 하지 말고. 귀찮게 하려는 것도 아니고 승훈이 떠나라는 말도 안 해요. 그냥 그 자식 정신 차리게 한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서요.”강하리는 약간 놀란 표정이었다.구승훈의 엄마도 그의 할아버지와 같은 생각인 줄 알았는데 이런 태도를 보일 줄은 몰랐다.여초연은 커피를 강하리 쪽으로 밀었다.“승훈이 성격이 워낙 유별나서 평소에 힘든 부분이 많죠?”강하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그래도 절 잘 챙겨줘요.”여초연은 커피를 들고 가볍게 한 모금 마신 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강하리 씨, 승훈이는 어렸을 때부터 엄마인 나를 포함해서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어본 적이 없어요. 아마 하리 씨가 처음일 거예요. 그래서 부탁 좀 할게요. 인내심 갖고 지켜봐 줘요. 사랑을 몰라도 내가 보기엔 하리 씨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같으니까.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영감탱이가 문씨 가문이랑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강하리도 알아들었다.구승훈은 웃으며 말했다.“약속할게, 파티에서 문연진이랑 절대 가까이 있지 않을게, 알았지?”강하리는 왠지 씁쓸함이 밀려왔다.그에게 안 가면 안 되냐고 묻고 싶었다.가까이하든 말든 구동근은 분명 문연진을 구씨 가문의 예비 며느리로 소개할 것이다.하지만 입가에 차오른 말을 그대로 삼켜버렸다.구승훈은 어쨌든 구씨 가문 사람인데 본인 할아버지 생신에 무슨 이유로 가지 말라고 하겠나.구승훈은 그녀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손을 뻗어 얼굴을 어루만졌다.“나랑 같이 갈래?”강하리는 고개를 저었다.“싫어요.”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당겼다.“괜히 찾아가서 욕만 먹을 텐데요.”구승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강하리의 손을 붙잡고 낮게 속삭였다.“하리야, 조금만 더 시간을 줘.”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저녁 비행기로 B시에 가야 했고 구승훈은 공항에 그녀를 내려주면서도 보내주기 싫은 표정으로 껴안고 입 맞추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이틀 동안 겨우 즐겁게 지내나 싶었는데 다시 혼자 있으라고?”강하리가 웃었다.“나랑 같이 갈래요?”구승훈은 홧김에 그녀의 목을 힘껏 빨아당겼다.“못 간다는 거 잘 알잖아.”강하리는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흔적 남기지 마요, 일하다가 보이면 어쩌려고.”그 말에 구승훈은 그녀의 옷깃을 열고 가슴에 자국 몇 개를 남겼다.“거기 가면 주해찬이랑은 떨어져 있어, 알았지?”강하리가 그를 밖으로 밀어냈다.“알았어요.”구승훈은 이를 갈았다.“오면 나랑 밤새 같이 있어, 피곤하단 말 하지 마.”할 말을 잃은 강하리는 그를 밀어내고 곧장 차 밖으로 나갔다.강하리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걸 보고 나서야 구승훈은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었다.여초연은 구승훈의 전화를 받고도 놀라지 않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저녁 언제 먹으러 올 거야? 네가 좋아하는 거 만
주해찬은 더 이상 얘기하지 않고 회의 흐름에 맞춰 최종 확인만 한 뒤 자리를 떠났다.주해찬이 떠난 후 문연진이 강하리 옆에 나타났다.“강하리 씨, 주해찬 씨랑 아직도 그렇게 사이좋은 거 승훈 오빠도 알아요?”강하리가 그녀를 힐끗 보았다.“문연진 씨 상처는 다 나았어요?”당연히 상처는 아직 낫지 않았고 얼굴에 흉터가 남을지도 모른다.이 말을 들은 문연진은 울컥 화가 치미는 것 같았다.구승훈이 강하리를 위해 자신을 건드릴 줄은 몰랐다.문씨 가문 사람들이 구씨 가문을 찾아갔고 구동근은 그녀에게 제대로 된 보상을 해주겠다고 말했다.하지만 구승훈이 강하리를 이렇게 감싸고 도니 속에 열불이 나 견딜 수가 없었다.문연진이 피식 웃었다.“강하리 씨는 뭐가 그렇게 당당해요? 승훈 오빠가 당신 곁에 있다고 해서 승훈 오빠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아요?”강하리가 대본을 내려다보며 그녀를 무시했지만 문연진은 굴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구씨 가문에서 인정한 며느리는 나고 오빠 마음속에 있는 여자는 송유라예요. 명분이든 오빠 마음이든 다 가지지 못했으면서 뭐가 그렇게 의기양양한데요? 고작 같이 밤이나 보내는 장난감 주제에!”강하리가 마침내 시선을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문연진 씨는 통역이 아니라 이간질하는 일이 더 잘 어울리겠어요.”말을 마친 그녀가 원고를 들고 가려는데 문연진이 뒤에서 말했다.“아직 모르죠? 승훈 오빠가 송유라 걷게 하려고 의사 찾아주고 있다는 거.”강하리의 걸음이 멈칫했지만 곧 다시 제 갈 길을 갔다.자리로 돌아와 보니 손에 들고 있던 원고가 이미 구겨져 있었다.구겨진 원고를 펴고 나니 마음속의 혼란스러움도 함께 진정되었다.문연진의 도발이 아닌 구승훈을 믿어야 한다.문연진이 둘 사이를 갈라놓는다는 걸 알기에 더더욱 그녀를 믿지 말아야 했다.하지만 그럼에도 원고를 보면서 넋이 나갔고 옆에 있던 사람이 그녀를 불러서야 정신을 차렸다.곧 회의를 시작하기에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집중해 업무에 임했다.기자 회견은 총
구승훈은 강하리의 턱을 쥔 채 엄지로 그녀의 분홍빛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입술이 붉게 충혈되자 강하리는 구승훈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구승훈 씨, 그만해요. 연정이 보러 가는 길에 추태 부리고 싶지 않아요.”구승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럼 조시욱은 안아도 되고 난 안 되는 거야? 조시욱은 널 만져도 되고 난 안되는 거냐고!”“그래요!”강하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앞으로 누구든 가능할 수 있어도 구승훈 씨 당신만은 절대 안 돼요!”그녀는 이 말을 하면 구승훈이 분노하며 문을 박차고 나갈 줄 알았다. 사실 그걸 바라기도 했다.하지만 뜻밖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구승훈은 몸을 낮춰 무릎을 꿇었다. 강하리는 아직 걸을 수 없는 상태였고, 발목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래서 요즘엔 털실 슬리퍼 하나만 신은 채 다녔다.아까 구승훈이 강하리를 안고 차에 태울 때 슬리퍼 한 짝이 옆으로 벗겨졌었다. 구승훈은 몸을 낮춰 그 슬리퍼를 주워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에 신겨 주었다.그의 큰 손이 그녀의 발목을 감싸며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치 조금만 세게 다뤄도 그녀가 아플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순간 그 손끝에서 묘한 애틋함을 느꼈다. 하지만 곧 그런 감정을 느낀 스스로가 우스워 웃음이 난 강하리 발을 움츠렸다.그럼에도 구승훈은 손을 놓지 않고 슬리퍼를 신긴 뒤 다시 강하리를 안아 휠체어에 앉혔다.“말도 안 되는 부탁인거 아는데...”구승훈이 그녀를 휠체어에 앉히고 나서 속삭였다.“제발 나한테 너무 차갑게 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전혀 마음을 열 기색이 없었다.“그럼 적어도 다시 쟁취할 기회라도 줘, 응? 강 대표?”“구승훈 씨, 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 이렇게 헤어졌다 만났다, 당신은 안 질려도 나는 질렸어요. 그만 좀 해요. 내가 부탁할게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스스로 휠체어를 밀어 응급실 쪽으로 향했다.구승훈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 옆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대신
구승훈의 동작이 너무 빨라 강하리는 미처 반응할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차 안에 앉아 있었다.“구승훈 씨!”강하리가 소리쳤다. “나 혼자 갈 수 있어요.”구승훈이 비웃으며 말했다.“어떻게 가? 조시욱이 데려다준대? 다른 남자랑 내 딸 보러 가겠다는 거야?”강하리는 말문이 막혔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구승훈은 그녀의 휠체어를 접어 트렁크에 싣고 있었다.조시욱은 막무가내인 구승훈을 막으려다 아까 전화 받던 강하리의 불안한 표정이 떠올라 막지 않았다.“연정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나도 같이 갈게.”구승훈이 동작을 멈추고는 싸늘하게 웃었다.“조 도련님은 매일 이렇게 한가한가 보지?”말을 마친 구승훈은 휠체어를 트렁크에 던져 넣고는 차에 올라 그대로 출발했다.달리는 차 안에서 강하리는 창밖만 응시한 채 구승훈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구승훈은 조용히 운전하면서 가끔 백미러로 강하리를 살펴보았다.“아까... 아프지 않았어?”강하리는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창밖만 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물음은 공허하게 차 안을 맴돌 뿐이었다.구승훈은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의사 말로는 이제 재활 치료 들어가야 한다던데, 치료사는 예약했어?”“했어요.”강하리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딸을 보러 가는 길에 더 이상 구승훈과의 그 어떠한 불필요한 갈등도 피하고 싶었다. 잠시나마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것도 그녀에겐 너무 힘들었다.“이 차에 임 선생은 태운 적 없어.”구승훈의 뜬금없는 한마디에 강하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설명할 필요 없어요. 신경 안 써요.”그 한마디에 구승훈의 하려던 말들이 전부 목에 걸려버렸다.그는 깊게 숨을 쉬며 말했다.“임 선생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단지 여초연의 시선을 흐리려고 잠깐 곁에 뒀을 뿐이야.”강하리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한때 그녀는 구승훈이 이런 한 마디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설령 지금처럼 단순하고 허술한 변명이라도 좋았다. 그랬더라면 그녀는 혼자서 괴로워하
구승훈과 헤어진 후로 그녀는 두번 다시 그곳에 가지 않았다.“왜 갑자기 거기에 가고 싶어진 거야?”조시욱이 무심한 듯 물었다.강하리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해찬 선배가 뭐라고 말했어요?”조시욱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사실은 별말 없었어. 그냥 국내에 며칠밖에 머물지 못하니까 내게 틈틈이 널 돌봐 달라고 했지.”강하리의 눈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선배는 항상 걱정이 많아.”“하리야, 사실 나는...”“시욱 선배.”강하리가 말을 끊었다.“그만해요.”조시욱은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그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강하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왜? 구승훈 때문이야? 정말 구승훈에게 다시 기회를 주려는 거야?”강하리는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그 사람과는 상관없어요.”조시욱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럼 왜 자신에게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주지 않는 건데?”강하리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시욱 선배, 나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거예요. 하지만 진심으로 누군갈 다시 좋아하거나 새 감정을 쌓을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미안해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장 회장님께도 희망을 품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조시욱은 말하고 싶었다. 괜찮다고, 기다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말도 결국 삼켜야 했다. 어떤 말은, 그냥 그녀에게 부담만 줄 뿐이었다.그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알겠어. 할아버진 걱정 마, 내가 설명할게. 그럼 다른 감정은 일단 치워두고 우리 친구는 될 수 있잖아?”강하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조시욱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씁쓸했다.주해찬이 부탁했다는 건 모두 거짓이었다.처음 임무를 함께 할 때부터 그의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협상장에서 여유롭고 능숙하게 대처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시선을 뗄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에게 이미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는 마음을 접어야 했다.강하리가 어르신 생신 파티에 모습을 드러내고 아주머니의 생신 파티에 나
구승훈은 순간 말이 막혔다.“하리야, 제발...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수 없어?”그의 목소리엔 분명한 간절함이 실려 있었다.하지만 강하리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가요.”그녀는 다시 한번 담담하게 말했고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조용히 한마디를 건넸다.“너무 무리하지 마. 에비뉴 쪽 일은 내가 처리해 둘게.”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고 조시욱은 그대로 그녀를 밀고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몸을 돌려 진료실로 들어갔다.“강하리 씨의 상태를 좀 알고 싶습니다.”의사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했다.병원 안에선 이미 구승훈과 강하리에 관한 얘기가 돌 만큼 돌았다.사랑스러웠던 커플이 순식간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는 말들이었다.강하리가 수술할 때 구승훈은 오지도 않았고 입원하는 내내 찾아온 건 한 번뿐이었으며 오늘 깁스 푸는 날에도 옆에 있어 준 사람은 다른 남자였다.그래서 의사는 솔직히 말해 구승훈이 강하리를 완전히 내쳐버린 줄 알았다.‘이런 여자를 놓친 건 눈이 먼 건가... 양심이 없는 건가...’의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구승훈이 직접 찾아와 그녀의 상태를 묻는다는 게 당황스러웠다.“상처 회복은 꽤 잘 되고 있어요. 다만 완전 회복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재활 치료가 오래 걸릴 수도 있고요...”반쯤은 형식적인 설명이 끝난 뒤 구승훈은 반 시간쯤 지나서야 진료실에서 나왔다.그는 2층 복도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1층 로비에서 강하리는 조시욱과 함께 웃으며 조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병원을 나서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 한구석은 시리도록 쓰렸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바로 그 순간 강하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 살짝 멈춰 섰다.고개를 돌려 위층을 올려다보았지만 보이는 건 남자의 뒷모습뿐이었다.그 시선을 따라 조시욱도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
천아름은 눈을 깜빡이며 말없이 웃었고 그 반응만으로도 이미 모든 걸 인정한 셈이었다.하지만 곧 그녀는 덧붙였다.“먼저 말해두지만 나도 미리 알았던 건 아니야. 그 사진들은 우리가 올라온 직후에 구승훈이 보낸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천아름을 바라봤다.그 시선에 살짝 기가 죽으려던 찰나 강하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왜 미리 말 안 했어?”천아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말했으면... 네가 그 사진들을 제대로 썼을까?”강하리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봤다.이 각도에서 에비뉴와 정안 타워를 잇는 공중 회랑을 보는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다섯 개의 회랑은 같은 위치에 놓인 게 아니라 높낮이와 간격이 제각각이었고 그 불규칙한 배치가 위에서 보면 iw라는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이미 회랑에 심어졌던 꽃들은 시들어 있었지만 강하리는 그곳에 자란 꽃들이 전부 리시안셔스였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강하리는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이젠 더 이상 구승훈과 어떤 연결고리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로의 감정이 남아 있는 듯 없는 듯 얽히고설킨 관계... 그녀는 그런 관계를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말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휠체어를 돌려 자료를 보러 이동했다.천아름은 커피잔을 들고 그녀 옆으로 와 책상에 걸터앉았고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솔직히 너희 둘 일에 내가 뭐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번 일은 구승훈 잘못이 맞고... 난 내 친구가 또 상처받는 꼴 못 보니까 절대 너한테 구승훈의 편을 들 생각 없어. 근데 말이야...”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이번처럼 구승훈이 뭔가 너한테 건넸다면... 넌 받을 건 받아. 그건 걔가 너한테 진짜로 빚진 거니까.”강하리는 작게 웃었다.“그 사람 도움 없이도 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왜 굳이 기대야 해?”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근데 이것 말고도 있지? 송지은이 회의에서 그렇게 된 것도... 구승훈이 일부러 남겨둔 거지? 내가 송지은을 이용해서 회사에서 위신을 올
에비뉴 그룹이 결국 강하리 손에 들어가자 송지은의 속엔 쌓여 있던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그는 몇몇 임원들과 은밀히 손을 잡고 이번 회의 자리에서 강하리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강하리는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봤다.“송 부장님, 진심으로 의견을 내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직권 남용하고 싶은 건가요?”그러자 송지은의 얼굴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강 대표님, 지금 무슨 뜻이죠?”강하리는 옆에 앉아 있던 비서실장에게 눈빛을 보냈다.비서실장은 곧바로 자료를 띄웠고 화면에 나타난 건 한 프라이빗 레스토랑에서 찍힌 사진이었다.송지은이 막 추천했다던 신인 여배우와 다정하게 식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그 여배우는 거의 그의 무릎 위에 앉을 듯 그에게 바짝 기대 있었다.송지은은 이마에 핏대가 서며 말했다.“업무 미팅하면서 밥 한 끼 먹는 게 무슨 문제죠?”강하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다음 사진이 화면에 떠오르자 회의실 분위기가 미묘하게 흔들렸다.사진 속 송지은은 그 신인 여배우의 허리를 감싸안고 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식사 후엔 호텔 코스로 이어지셨군요. 송 부장님?”강하리의 그 한마디에 누군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천아름은 다리를 꼬고 앉아 회의실 전면을 향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웃음소리가 송지은에게 더없이 굴욕적이었다.강하리는 더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회의실 안의 다른 인물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여유로웠지만 시선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또 누구였죠? 추천한 연예인들 리스트... 누구 누구있었죠”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안 사람들 사이로 묘한 침묵이 흘렀고 서로 눈치를 보던 그들은 이내 입을 닫았다.오늘 강하리는 확실히 준비하고 왔다.이번 판에서 잘 되면 본때 보여주는 걸로 끝이지만 잘못 건드리면 누군가는 직장을 잃게 될 게 뻔했다.방금 송지은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모두가 생생히 봤으니 더 이상 나설 사람은 없었다.회의실은 고요했다.강하리는 시선을 천천히 회의실을 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