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그녀의 눈은 순식간에 분노로 가득 찼다.“고이선!” 그녀는 고함을 지르며 그대로 와인병을 집어 들어 고이선을 향해 내리쳤다.하지만 고이선 옆을 지키는 사람이 있었기에 그녀가 맞기도 전에 병은 옆으로 튕겨 나갔다.고이선이 비웃었다.“왜, 이깟 상자 하나 부쉈다고 이러는 거야?”말을 마친 그녀가 뒤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움직여, 뭘 멍하니 서 있어!”고이선의 말 한마디에 몇 안 되는 남자들은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며 룸 안의 물건을 부쉈고 내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나문빈은 강하리를 보호하기 위해 다가와 구석에 숨을 수 있도록 그녀를 끌어당겼지만 강하리는 붉어진 눈으로 망가진 상자를 바라보았다.밖으로 나온 구승훈은 복도 끝으로 향했다.“할아버지 몸은 좀 어때?”“아직 혼수상태야.”구승훈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일단 가족들부터 안정시켜. 내가 오늘 밤 돌아갈 테니까 특히 네 큰아버지가 이 상황을 틈타 소란 피우지 않도록 지켜봐.”대답을 마친 구승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형, 큰아버지일까?”구승훈은 한참 동안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말했다.“모르지.”그의 아버지일 수도 있고 구정우나 문씨 가문 사람일 수도 있었다.강하리를 죽이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가능했다.할아버지의 손을 빌려 강하리를 건드리려는 거다.통화를 마친 뒤 고개를 숙인 채 담배에 불을 붙이고 두 모금 들이마시고는 뒤돌아 걸어가려는데 몇 걸음도 못 가서 누군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저기서 싸움이 난 것 같아. 한 여자가 야구 방망이를 든 남자 여러 명과 함께 복수를 하려는 듯 룸으로 달려가더라. 레스토랑 경비원들도 못 막았어.”순간 멈칫하던 구승훈이 그대로 뒤돌아 뛰어갔고 가는 동안 그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그가 룸 앞으로 달려갔을 때는 밖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들도 달려 들어온 뒤였다.안은 난장판이었다.강하리는 창백한 얼굴로 전화를 걸고 있었고 구승훈이 달려가 그녀를 등 뒤로 보내며 보호했다.강하리는 구승훈
구승훈은 잠시 멈칫했다.“어떻게 된 거야?”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리더니 그제야 말했다.“어깨가 좀 아파. 별거 아니니까 가서 약 바르면 돼.”나문빈도 그제야 이를 떠올렸다.“참, 그 여자가 야구 방망이로 강하리 씨 어깨를 때렸어요.”그 말을 듣는 순간 구승훈의 얼굴이 순식간에 가라앉았고 그는 강하리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강하리는 고개를 저었다.“심각한 거 아니야.”어깨는 아팠지만 뼈나 근육이 다친 건 아닌 것 같았다.고이선이 독하게 내리치긴 했어도 힘은 작았다.지금 그녀를 더욱 화나게 한 것은 이 사람들이 주변 사람들을 연루시킨 것도 모자라 정서원이 그녀에게 남겨준 팔찌까지 부러뜨렸다는 사실이었다.“심 변호사님 전화 왔어?” 강하리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구승훈은 이를 무시한 채 곧장 강하리를 치료실로 끌고 들어갔다.강하리는 그가 화가 났다는 걸 알았기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사가 강하리의 어깨를 감싼 옷을 치우자 구승훈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원래 하얗고 부드러웠던 어깨는 이제 멍이 들어 보라색으로 변했다.의사도 덩달아 얼굴을 찡그렸다.“뼈가 무사한지 사진 찍어봐야겠어요.”구승훈은 대답을 하고 강하리를 영상의학과 쪽으로 이끌었다.강하리가 들어가서 사진 찍는 동안 심준호가 도착했다.“강하리 씨 다쳤어?”“어깨 좀 다쳤어.” 구승훈은 표정이 어두웠고 심준호는 얼굴을 찡그렸다.“고이선이 요 며칠 문연진과 연락하더니 이번 일도 그쪽에서 남의 손을 빌려 건드린 건 아닌지 모르겠네. 고이선 일당은 내가 처리할게.”심준호가 구승훈을 슬쩍 보았다.“문씨 가문 쪽엔 네가 해. 준비한 증거들로 이미 충분하잖아?”구승훈은 여전히 굳어진 표정으로 한참이 지나서야 답했다.“그래.”강하리의 진단 결과가 나왔고 다행히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구승훈은 천아름에게 연락했고 안예서에게 간병인을 찾아준 뒤 강하리를 데리고 호텔로 돌아왔다.그날 밤, 강북 시장을 꾸준히 장악하던 문씨 가문은 갑자기
원래는 저쪽에서 돈을 벌 때까지 기다렸다가 적자를 메우고 싶었는데 갑자기 일이 터져버린 거다.반면 상대방은 현재 연락이 닿지 않는 상황이었다.밖에서 경찰이 사무실 문을 두드릴 때까지 문영호의 얼굴은 하얗게 질린 채 전화를 계속 걸었다.문원진은 인터넷을 통해 문영호가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뉴스를 본 순간 머리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지더니 눈앞이 캄캄해지며 다시 한번 기절했다.문씨 가문이 수천억의 공금을 횡령하고 둘째가 불법 자금 세탁에 연루되었다는 뉴스는 하룻밤 사이에 화제를 불러 모았고 동시에 문원진이 외국 무기 밀매상과 결탁해 대량의 폭발물을 구입했다는 소식까지 인터넷에 퍼졌다.이 뉴스는 보도되자마자 큰 파장을 일으켰다.문씨 가문이 돈을 세탁하든 적자가 나든 그것까지는 문씨 가문 내부의 일이고 기껏해야 이사회를 소집해 해결하면 그만이었다.네티즌들이 떠들어대도 기껏해야 잠깐의 관심일 뿐인데 폭발물 구매는 공공의 안전과 관련된 문제였기에 여론은 순식간에 공격적으로 바뀌었다.문원진은 실신 후 뇌출혈 진단을 받고 바로 수술실로 이송되었는데 수술실로 이송되자마자 문 앞에서 경찰이 대기했다.나오면 바로 데려갈 기세였다.이 장면을 지켜보던 문연진은 그제야 문씨 가문이 정말 끝장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수십 년 동안 B시에서 버텨온 문송그룹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것 같았다.강북 시장 역시 하루아침에 최하영에게 삼켜져 버렸다.구정우도 인터넷 뉴스를 보며 분노를 금치 못했다.전에는 문씨 가문이 아무리 그를 우습게 여겨도 문연진과 실질적인 관계만 발생하면 그쪽에서 문연진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그와 결혼시킬 것 같았다.문씨 가문은 그에게 큰 힘이 되어주니까.그런데 문연진이 시집오기도 전에 문씨 가문이 무너졌고 구정우가 너무 화가 나서 집안 곳곳을 부수자 밖에 있던 도우미가 서둘러 들어왔다.“도련님, 문연진 씨 전화입니다.”구정우가 다가가서 전화를 받았다.“구정우, 우리 좀 도와줘. 문씨 가문 좀 도와줘, 응?”구정우는 비웃었다.“이제
인터넷은 문씨 가문 이야기로 떠들썩했지만 호텔 방은 유난히 조용했다.강하리가 창문 앞에 서서 B시의 야경을 바라보고 있을 때 구승훈이 밖에서 약을 들고 들어왔다.“아직도 어깨가 아파? 내가 약 발라줄게.”강하리는 대답하지 않고 손에 쥔 팔찌를 내려다보기만 했다.구승훈은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이미 연락했으니까 팔찌는 고칠 수 있을 거야. 내일 바로 가져가자.”팔찌의 부러진 쪽을 만지던 강하리의 손가락이 살짝 하얗게 변했다.“문씨 가문 쪽은 어떻게 됐어?”원래 문씨 가문 쪽에 그렇게 빨리 손을 쓸 생각은 없었다.그 정도로 큰 가문은 단번에 눌러버리지 않으면 앞으로 두고두고 위험할 테니까.그런데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구승훈은 그녀가 뭘 걱정하는지 알았다.“걱정하지 마, 이번엔 문씨 가문이 절대 재기하지 못할 거야. 우리뿐만 아니라 준호도 절대 가만히 두지 않아.”강하리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심준호에게 온 전화였다.강하리가 전화를 받자 심문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하리야, 준호 말로는 너 다쳤다던데?”강하리의 가슴에 갑자기 따스한 기운이 흘렀다.“할아버지,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상대가 허허 웃었다.“걱정하지 마. 이 할아버지가 반드시 혼내줄게!”강하리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할아버지, 고마워요.” “할아버지한테 뭔 예의를 차려? 네 몸 회복하는 게 제일 중요해.”강하리가 대답하자 상대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구승훈은 넋이 나간 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강하리가 이렇게 웃는 모습을 오랫동안 본 적이 없었다.사실 그와 만나면서 강하리는 별로 웃지 않았고 전에는 그의 차갑고 냉담한 성격 때문일지 몰라도 나중엔 아기 일로 그녀가 웃는 일이 거의 없었다.그나마 그녀가 많이 웃었던 때가 아마 그들이 다시 만났던 그 잠깐의 시간이었을 거다.구승훈은 옆에서 그런 그녀를 지켜보다가 잠시 후 갑자기
“내가 널 지켜주지 못했어.”문연진이든 고이선이든 전부 그 때문에 강하리를 찾아온 거다.그리고 오늘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 그녀가 수없이 받은 상처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구승훈의 입맞춤이 그녀의 눈가에 닿았고 강하리는 멈칫하다가 웃음을 터뜨렸다.“구승훈 씨, 그럼 이제부터 날 보호해 줄... 읍...”강하리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구승훈의 입술은 이미 강하리의 입술에 닿아 있었다.강하리는 갑작스러운 그의 키스에 당황하다가 이내 발끝을 들고 그에게 화답했다.구승훈은 눈에 띄게 당황하다가 빠르게 그녀의 뒤통수를 잡고 깊게 입을 맞추었다.강하리는 뜨거운 그의 열기를 분명히 느낄 수 있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구승훈은 행동을 멈추고 강하리를 안은 채 욕실 밖으로 데려와 그녀를 침대로 덮쳤다.“강 대표님, 또 원하는 건가?”강하리는 민망한 듯 그의 시선을 피했고 구승훈이 낮게 웃으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일단 참아. 다 나으면 그때 내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응?”강하리의 얼굴이 갑자기 화끈거리며 자기 위에 있는 남자를 밀어냈다.“당장 소파로 가서 자!”구승훈이 웃으며 몸을 일으키자 강하리가 이불을 끌어당기며 수면제에 손을 뻗으려는데 구승훈이 다시 돌아와 그녀의 허리를 잡고 침대에 눕혔다.강하리가 무슨 말을 하려는데 차가운 연구가 어깨에 닿았고 고개를 돌리니 구승훈이 조심스럽게 약을 바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며 나지막이 말했다.“고마워요.”구승훈은 그녀를 바라보며 큰 손으로 연고를 부드럽게 문지른 후 돌아서서 욕실로 들어가서 헤어드라이어를 들고 안에서 나왔다.그는 강하리의 머리를 말리는 것을 도와주더니 곧바로 강하리를 품으로 끌어안았다.“약 먹지 말고 그냥 이렇게 자. 잠이 안 오면 얘기하자, 하리야. 약 그만 먹어.”강하리는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다가 그의 품에 안겨 고개를 끄덕였고 어느샌가 그렇게 잠이 들었다.어슴푸레 날이 밝아질 무렵 구승훈은 연민이 가득한 눈빛으로 품 안에서 잠든 여자를 바라보았고 고개를
강하리는 욕실에서 흐르는 물소리에 잠에서 깼다.그녀는 침대에 누워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일어났다.전에도 수면제를 먹지 않으려고 시도한 적은 있지만 매번 밤새 잠들지 못했는데 어젯밤엔 편히 잠이 들었다.“무슨 생각해?”구승훈은 타월만 허리에 감고 있었는데 이 순간 남자의 완벽한 몸매가 모두 드러나 있었다.그가 아무 생각 없이 머리를 말리는데 어깨에 맺힌 물방울이 가슴 근육을 타고 내려가 복근까지 미끄러져 수건 속으로 떨어졌다.일어나자마자 이런 모습이라니.강하리도 아찔한 모습이 유혹적이라는 건 인정했다.고개를 들어 남자의 시선을 마주하자 어젯밤 화장실에서 나눴던 격정적인 키스가 떠올랐다.문씨 가문이 무너져서일까, 구승훈이 했던 말 때문일까 그녀는 참을 수가 없었다.그동안 줄곧 버티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것을 갈망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녀 자신만이 알고 있었다.그의 따뜻함과 그가 주었던 편안함을 그리워하고 있었다.“구승훈.”강하리는 침대에 기대어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 저쪽에서 누가 봐도 자신을 유혹하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이리 와.”그녀가 말하자 구승훈의 얼굴에 번지던 미소가 순간 얼어붙더니 그의 시선이 갑자기 짙어졌다.남자의 목울대가 두 번 움찔거리다가 침대 쪽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몸을 숙여 강하리를 덮쳤다.“아침부터 남자를 유혹하면 안 되는 거 몰라?”강하리는 그의 시선을 마주하며 웃었다.“그래서 싫어?”구승훈 그의 눈에서 불길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싫냐고?그걸 질문이라고 하나.싫을 리가 있을까.그녀가 임신한 이후 지금까지 딱 한 번 했다.“어깨는 버릴 거야? 후유증이라도 남고 싶어?”강하리의 어깨는 어제보다 더 아팠지만 그래도 그녀는 손을 들어 남자의 목에 둘렀다.“당신이 조심해.”구승훈은 숨이 턱 막혔다. 이래도 참으면 남자가 아니지.그렇게 달아오른 방안의 열기는 점심이 되어서야 사그라들었고 구승훈은 그녀의 어깨를 건드릴까 봐 내내 조심하며 움직였다.모든 게 끝나고 그가 나지막이 물었
구승훈이 그런 짓을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하지만 그가 움직이는 순간 그녀는 무아지경에 빠져 불현듯 기억을 떠올렸다.야릇하고 축축하지만 극강의 부드러움으로 그녀에게 최고의 쾌락을 선사했다.“하리야, 좋아?”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묻자 강하리의 얼굴에 불이 붙은 것처럼 화끈거렸다.“마음에 들어?” 하지만 남자는 계속해서 집요하게 물었고 강하리는 얼굴을 붉히며 그의 어깨를 물었다.“조용히 해. 그만 물어봐.”“하리야, 방금 날 몇 번이나 불렀는지 알아?”강하리는 붉어진 얼굴로 그를 밀어냈고 구승훈이 피식 웃었다.“옷 갈아입고 나가서 밥 먹자.”문 뒤에서 강하리는 몇 번 심호흡을 한 뒤 서서히 마음을 진정시켰다.역시 뻔뻔함으로는 구승훈을 이기지 못한다.강하리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을 때 구승훈은 이미 식사를 차려놓은 상태였다.식탁은 그녀가 좋아하는 요리들로 가득 찼다.하지만 두 사람이 식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구승훈의 휴대폰이 울렸고 구승훈은 전화가 걸려 온 것을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들어갔다.강하리는 구승훈이 일부러 그녀를 피해 전화 받는 것을 알았지만 더 묻지 않았다. 지금 두 사람의 관계는 솔직히 말해서 조금 애매했고 확실히 정해진 게 없었다.사업적으로는 숨기는 것 없이 말하라고 했지만 사적인 일은 그렇게 할 자격이 없었다.전화를 받고 돌아온 구승훈의 얼굴에는 어두운 기색이 감돌았다.할아버지가 깨어나서 직접 가정부에게 캐물었지만 가정부는 여전히 강하리를 지목했다.그는 서늘한 눈가로 차갑게 웃었다. 강하리가 그렇게 독한 마음을 품었다면 지금 그들은 아이도 둘이나 낳았을 텐데 아내도 없이 그가 이렇게 지낼 리가 있겠나.강하리가 지시했다는 건 터무니없는 소리였고 어떻게 된 건지는 그가 직접 가서 확인해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구승훈이 예약한 액세서리 가게로 향했고 강하리는 조심스럽게 반으로 쪼개진 팔찌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팔찌를 보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10년 가까이 가게를 운영
점원은 깜짝 놀라며 무의식적으로 팔찌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궁금해했다.“팔찌에 문제라도 있나요?”남자는 고개를 저었다.“문제가 있는 건 아닌데 이 물건을 보니 아는 사람이 떠올라서.”그는 기억에 사로잡힌 듯 손에 쥔 팔찌를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점원은 감히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나지막이 대꾸했다.“강씨 성을 가진 아가씨가 가져온 거예요. 참, 오늘 특별히 저한테 맞이하라고 지시한 구 대표님도 계셨어요.”남자는 당황했다.“구승훈이 가져온 거라고?”점원은 고개를 끄덕였다.남자는 잠시 침묵하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괜한 생각이겠지.이 팔찌는 소재나 품질로 봐도 보기 드문 최상품인데 구씨 가문이라면 이런 재질의 팔찌를 갖고 있는 것도 이상하진 않았다.잠시 생각하다가 무슨 말을 하려는데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고 심준호에게 전화가 왔다.그는 점원에게 눈치를 주었다.“제대로 고쳐.”말을 마친 그가 전화를 받았다.“준호야, 무슨 일이야?”심준호는 웃으며 말했다.“다음 달이 엄마 생신인데 물건 좀 준비해 줘. 시간 나면 가지러 갈게.”남자가 웃었다.“그래.”...강하리와 구승훈은 가게에서 나와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안예서의 부상은 크지 않았지만 의사는 하루 정도는 입원해 있으라고 했다.강하리와 구승훈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안예서는 침대에 기대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거즈를 목에 두른 채 큰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지만 입으로는 쉴 새 없이 문씨 가문을 욕하고 있었다.강하리와 구승훈 사이를 알게 된 이후 안예서는 송유라를 한바탕 욕하고는 문연진이 벌인 짓까지 알고 문연진을 저주하기 시작했다.특히 어젯밤 문연진이 고이선을 종용해 룸에서 난동을 부리게 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에는 더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문씨 가문 그 역겨운 것들은 진작에 벌을 받았어야 했어요. 쌤통이에요, 아주! 게다가 폭발물까지 숨겨놓다니, 차라리 그게 터져서 확 죽어버리지. 그리고 문연진은 미친 거 아니에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놓고 어디서
구승훈은 강하리의 턱을 쥔 채 엄지로 그녀의 분홍빛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입술이 붉게 충혈되자 강하리는 구승훈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구승훈 씨, 그만해요. 연정이 보러 가는 길에 추태 부리고 싶지 않아요.”구승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럼 조시욱은 안아도 되고 난 안 되는 거야? 조시욱은 널 만져도 되고 난 안되는 거냐고!”“그래요!”강하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앞으로 누구든 가능할 수 있어도 구승훈 씨 당신만은 절대 안 돼요!”그녀는 이 말을 하면 구승훈이 분노하며 문을 박차고 나갈 줄 알았다. 사실 그걸 바라기도 했다.하지만 뜻밖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구승훈은 몸을 낮춰 무릎을 꿇었다. 강하리는 아직 걸을 수 없는 상태였고, 발목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래서 요즘엔 털실 슬리퍼 하나만 신은 채 다녔다.아까 구승훈이 강하리를 안고 차에 태울 때 슬리퍼 한 짝이 옆으로 벗겨졌었다. 구승훈은 몸을 낮춰 그 슬리퍼를 주워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에 신겨 주었다.그의 큰 손이 그녀의 발목을 감싸며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치 조금만 세게 다뤄도 그녀가 아플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순간 그 손끝에서 묘한 애틋함을 느꼈다. 하지만 곧 그런 감정을 느낀 스스로가 우스워 웃음이 난 강하리 발을 움츠렸다.그럼에도 구승훈은 손을 놓지 않고 슬리퍼를 신긴 뒤 다시 강하리를 안아 휠체어에 앉혔다.“말도 안 되는 부탁인거 아는데...”구승훈이 그녀를 휠체어에 앉히고 나서 속삭였다.“제발 나한테 너무 차갑게 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전혀 마음을 열 기색이 없었다.“그럼 적어도 다시 쟁취할 기회라도 줘, 응? 강 대표?”“구승훈 씨, 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 이렇게 헤어졌다 만났다, 당신은 안 질려도 나는 질렸어요. 그만 좀 해요. 내가 부탁할게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스스로 휠체어를 밀어 응급실 쪽으로 향했다.구승훈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 옆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대신
구승훈의 동작이 너무 빨라 강하리는 미처 반응할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차 안에 앉아 있었다.“구승훈 씨!”강하리가 소리쳤다. “나 혼자 갈 수 있어요.”구승훈이 비웃으며 말했다.“어떻게 가? 조시욱이 데려다준대? 다른 남자랑 내 딸 보러 가겠다는 거야?”강하리는 말문이 막혔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구승훈은 그녀의 휠체어를 접어 트렁크에 싣고 있었다.조시욱은 막무가내인 구승훈을 막으려다 아까 전화 받던 강하리의 불안한 표정이 떠올라 막지 않았다.“연정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나도 같이 갈게.”구승훈이 동작을 멈추고는 싸늘하게 웃었다.“조 도련님은 매일 이렇게 한가한가 보지?”말을 마친 구승훈은 휠체어를 트렁크에 던져 넣고는 차에 올라 그대로 출발했다.달리는 차 안에서 강하리는 창밖만 응시한 채 구승훈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구승훈은 조용히 운전하면서 가끔 백미러로 강하리를 살펴보았다.“아까... 아프지 않았어?”강하리는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창밖만 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물음은 공허하게 차 안을 맴돌 뿐이었다.구승훈은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의사 말로는 이제 재활 치료 들어가야 한다던데, 치료사는 예약했어?”“했어요.”강하리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딸을 보러 가는 길에 더 이상 구승훈과의 그 어떠한 불필요한 갈등도 피하고 싶었다. 잠시나마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것도 그녀에겐 너무 힘들었다.“이 차에 임 선생은 태운 적 없어.”구승훈의 뜬금없는 한마디에 강하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설명할 필요 없어요. 신경 안 써요.”그 한마디에 구승훈의 하려던 말들이 전부 목에 걸려버렸다.그는 깊게 숨을 쉬며 말했다.“임 선생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단지 여초연의 시선을 흐리려고 잠깐 곁에 뒀을 뿐이야.”강하리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한때 그녀는 구승훈이 이런 한 마디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설령 지금처럼 단순하고 허술한 변명이라도 좋았다. 그랬더라면 그녀는 혼자서 괴로워하
구승훈과 헤어진 후로 그녀는 두번 다시 그곳에 가지 않았다.“왜 갑자기 거기에 가고 싶어진 거야?”조시욱이 무심한 듯 물었다.강하리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해찬 선배가 뭐라고 말했어요?”조시욱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사실은 별말 없었어. 그냥 국내에 며칠밖에 머물지 못하니까 내게 틈틈이 널 돌봐 달라고 했지.”강하리의 눈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선배는 항상 걱정이 많아.”“하리야, 사실 나는...”“시욱 선배.”강하리가 말을 끊었다.“그만해요.”조시욱은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그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강하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왜? 구승훈 때문이야? 정말 구승훈에게 다시 기회를 주려는 거야?”강하리는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그 사람과는 상관없어요.”조시욱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럼 왜 자신에게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주지 않는 건데?”강하리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시욱 선배, 나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거예요. 하지만 진심으로 누군갈 다시 좋아하거나 새 감정을 쌓을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미안해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장 회장님께도 희망을 품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조시욱은 말하고 싶었다. 괜찮다고, 기다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말도 결국 삼켜야 했다. 어떤 말은, 그냥 그녀에게 부담만 줄 뿐이었다.그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알겠어. 할아버진 걱정 마, 내가 설명할게. 그럼 다른 감정은 일단 치워두고 우리 친구는 될 수 있잖아?”강하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조시욱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씁쓸했다.주해찬이 부탁했다는 건 모두 거짓이었다.처음 임무를 함께 할 때부터 그의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협상장에서 여유롭고 능숙하게 대처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시선을 뗄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에게 이미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는 마음을 접어야 했다.강하리가 어르신 생신 파티에 모습을 드러내고 아주머니의 생신 파티에 나
구승훈은 순간 말이 막혔다.“하리야, 제발...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수 없어?”그의 목소리엔 분명한 간절함이 실려 있었다.하지만 강하리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가요.”그녀는 다시 한번 담담하게 말했고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조용히 한마디를 건넸다.“너무 무리하지 마. 에비뉴 쪽 일은 내가 처리해 둘게.”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고 조시욱은 그대로 그녀를 밀고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몸을 돌려 진료실로 들어갔다.“강하리 씨의 상태를 좀 알고 싶습니다.”의사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했다.병원 안에선 이미 구승훈과 강하리에 관한 얘기가 돌 만큼 돌았다.사랑스러웠던 커플이 순식간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는 말들이었다.강하리가 수술할 때 구승훈은 오지도 않았고 입원하는 내내 찾아온 건 한 번뿐이었으며 오늘 깁스 푸는 날에도 옆에 있어 준 사람은 다른 남자였다.그래서 의사는 솔직히 말해 구승훈이 강하리를 완전히 내쳐버린 줄 알았다.‘이런 여자를 놓친 건 눈이 먼 건가... 양심이 없는 건가...’의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구승훈이 직접 찾아와 그녀의 상태를 묻는다는 게 당황스러웠다.“상처 회복은 꽤 잘 되고 있어요. 다만 완전 회복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재활 치료가 오래 걸릴 수도 있고요...”반쯤은 형식적인 설명이 끝난 뒤 구승훈은 반 시간쯤 지나서야 진료실에서 나왔다.그는 2층 복도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1층 로비에서 강하리는 조시욱과 함께 웃으며 조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병원을 나서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 한구석은 시리도록 쓰렸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바로 그 순간 강하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 살짝 멈춰 섰다.고개를 돌려 위층을 올려다보았지만 보이는 건 남자의 뒷모습뿐이었다.그 시선을 따라 조시욱도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
천아름은 눈을 깜빡이며 말없이 웃었고 그 반응만으로도 이미 모든 걸 인정한 셈이었다.하지만 곧 그녀는 덧붙였다.“먼저 말해두지만 나도 미리 알았던 건 아니야. 그 사진들은 우리가 올라온 직후에 구승훈이 보낸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천아름을 바라봤다.그 시선에 살짝 기가 죽으려던 찰나 강하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왜 미리 말 안 했어?”천아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말했으면... 네가 그 사진들을 제대로 썼을까?”강하리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봤다.이 각도에서 에비뉴와 정안 타워를 잇는 공중 회랑을 보는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다섯 개의 회랑은 같은 위치에 놓인 게 아니라 높낮이와 간격이 제각각이었고 그 불규칙한 배치가 위에서 보면 iw라는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이미 회랑에 심어졌던 꽃들은 시들어 있었지만 강하리는 그곳에 자란 꽃들이 전부 리시안셔스였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강하리는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이젠 더 이상 구승훈과 어떤 연결고리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로의 감정이 남아 있는 듯 없는 듯 얽히고설킨 관계... 그녀는 그런 관계를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말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휠체어를 돌려 자료를 보러 이동했다.천아름은 커피잔을 들고 그녀 옆으로 와 책상에 걸터앉았고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솔직히 너희 둘 일에 내가 뭐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번 일은 구승훈 잘못이 맞고... 난 내 친구가 또 상처받는 꼴 못 보니까 절대 너한테 구승훈의 편을 들 생각 없어. 근데 말이야...”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이번처럼 구승훈이 뭔가 너한테 건넸다면... 넌 받을 건 받아. 그건 걔가 너한테 진짜로 빚진 거니까.”강하리는 작게 웃었다.“그 사람 도움 없이도 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왜 굳이 기대야 해?”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근데 이것 말고도 있지? 송지은이 회의에서 그렇게 된 것도... 구승훈이 일부러 남겨둔 거지? 내가 송지은을 이용해서 회사에서 위신을 올
에비뉴 그룹이 결국 강하리 손에 들어가자 송지은의 속엔 쌓여 있던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그는 몇몇 임원들과 은밀히 손을 잡고 이번 회의 자리에서 강하리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강하리는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봤다.“송 부장님, 진심으로 의견을 내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직권 남용하고 싶은 건가요?”그러자 송지은의 얼굴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강 대표님, 지금 무슨 뜻이죠?”강하리는 옆에 앉아 있던 비서실장에게 눈빛을 보냈다.비서실장은 곧바로 자료를 띄웠고 화면에 나타난 건 한 프라이빗 레스토랑에서 찍힌 사진이었다.송지은이 막 추천했다던 신인 여배우와 다정하게 식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그 여배우는 거의 그의 무릎 위에 앉을 듯 그에게 바짝 기대 있었다.송지은은 이마에 핏대가 서며 말했다.“업무 미팅하면서 밥 한 끼 먹는 게 무슨 문제죠?”강하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다음 사진이 화면에 떠오르자 회의실 분위기가 미묘하게 흔들렸다.사진 속 송지은은 그 신인 여배우의 허리를 감싸안고 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식사 후엔 호텔 코스로 이어지셨군요. 송 부장님?”강하리의 그 한마디에 누군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천아름은 다리를 꼬고 앉아 회의실 전면을 향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웃음소리가 송지은에게 더없이 굴욕적이었다.강하리는 더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회의실 안의 다른 인물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여유로웠지만 시선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또 누구였죠? 추천한 연예인들 리스트... 누구 누구있었죠”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안 사람들 사이로 묘한 침묵이 흘렀고 서로 눈치를 보던 그들은 이내 입을 닫았다.오늘 강하리는 확실히 준비하고 왔다.이번 판에서 잘 되면 본때 보여주는 걸로 끝이지만 잘못 건드리면 누군가는 직장을 잃게 될 게 뻔했다.방금 송지은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모두가 생생히 봤으니 더 이상 나설 사람은 없었다.회의실은 고요했다.강하리는 시선을 천천히 회의실을 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