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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Author: 끝없는 한빛
잠에서 깨어난 유준서는 약간 어리둥절했다. 아픈 머리를 어루만지며 답답한 느낌에 연신 심호흡을 하자 코끝에 익숙한 향기가 맴돌았다.

그는 순간 멈칫했다. 필름이 끊긴 사람처럼 머릿속에 자잘한 장면들이 연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 장면들이 진짜로 일어난 일들인지 아니면 꿈꾼 건지 분간이 되지 않은 듯 그의 낯빛이 극도로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정다름을 찾았다. 심지어는 정다름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는커녕 어두운 낯빛으로 침대에서 내려와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거실, 식당, 주방 그 어디에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곳에 발을 들인 사람이 없었던 것처럼 깔끔했다.

설마 내가 진짜 어제 고열 때문에 착각했던 걸까?

그 여자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걸까?

이런 생각에 유준서는 미간을 찌푸렸다.

모닝 성깔이 한발 늦게 찾아온 듯 그는 의자를 발로 걷어차더니 화가 잔뜩 나서 침실로 향했다. 그러다 현관을 지나치는 순간 눈길을 끄는 무언가에 홱 고개를 돌렸다.

은회색의 트렁크였다.

유준서는 트렁크를 빤히 쳐다보다 천천히 손님방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손님방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숨을 죽이며 조심스럽게 문손잡이를 돌려 손님방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상상과 달리 침대에 누워있는 포동포동한 여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침대 역시 누군가가 잠을 잔 흔적이 없이 깔끔했다.

“씨X!”

유준서는 힘껏 문을 열고 들어가 믿기지 않는 듯 손님방의 욕실로 달려 들어갔다. 그는 노크도 없이 거칠게 문을 열었지만 역시나 아무도 없었다.

유준서의 낯빛은 소름 끼칠 정도로 어두워졌다.

이곳에 트렁크가 있는 것을 보아 그녀가 돌아온 것은 분명했다.

어제 분명 내 곁을 지키라고 했는데 내 말을 무시해?

그는 이를 갈며 차가운 웃음을 내뱉었다.

“좋아, 출장 한번 다녀왔다고 이제 내 말은 듣지도 않겠다는 거지!”

그때 출입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유준서는 몸을 홱 돌려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갔다. 신발을 갈아신고 있는 정다름이 보였다.

그녀는 보기 드물게 유니폼이 아닌 짙은 녹색의 탱크톱 롱 드레스에 같은 색상의 프릴 거즈 롱코트를 걸쳐 움직일 때마다 코트가 우아하게 흩날렸다.

짙은 녹색의 옷은 그녀의 하얀 피부를 더 돋보이게 했다.

“뭘 이딴 걸 입고 있어? 설마 이딴 걸 입고 나갔던 거야?”

정다름은 방금 산 음식을 손에 든 채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었다. 고개를 숙여 자기 의상을 체크했지만, 옷이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유준서는 화가 잔뜩 나 보였다.

‘이렇게 입는 게 싫으시다면 다음부터는 절대 입지 않을게요.’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말이다. 그러나 유준서가 듣고 오해를 할 수도 있는 말이었기에 절대 해서는 안 됐다.

그녀는 항상 주제넘은 말로 유준서의 마음에 거북함이 들지 않게 노력했다.

“대표님, 제 의상이 이상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지금은 출근 시간이 아니니 사복을 입는 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으니까요.”

차가운 그녀의 반박에 유준서는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맞아, 이 여자가 어떤 옷을 입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황제의 새 옷을 입고 나가 망신을 당한다고 해도 그것이 그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탁한 숨을 내뱉던 유준서는 차갑고 까칠한 낯빛을 되찾았다.

“업무 시간이 아니니 정 비서가 사복을 입는 건 당연히 문제가 되지 않아. 하지만 이런 추한 옷은 내 앞에서 입지 않는 것이 좋겠어. 내 눈에 안 좋으니까.”

그러자 정다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다음부터는 조심하겠습니다.”

그녀는 그의 앞을 지나 주방으로 걸어갔다. 향기로운 바람이 멀어지자, 유준서도 바로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그는 주방 문 앞에 서서 차갑게 물었다.

“어디 갔다 왔어? 내 곁을 지키라고 했을 텐데 제멋대로 내 명령을 어겨? 대표인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그러자 정다름은 손에 쥐고 있던 음식을 흔들어 보였다.

“아침에 먹을 것 좀 사 왔습니다.”

시선을 끄는 그녀의 치마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던 유준서가 참지 못하고 추궁했다.

“그리고 또 어디 갔어? 얼마나 나갔다 온 거야?”

“단지에 있는 목욕탕에서 씻은 다음에 바로 아침을 사고 돌아오는 길이니 2시간 정도 걸렸겠네요.”

정다름의 솔직한 대답에 유준서는 미간을 찌푸리며 거친 말투로 물었다.

“우리 집에 화장실이 3개나 있는데 아침부터 목욕탕을 가?”

그의 질문에 정다름은 움찔했다. 이제야 지난 일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일까 봐 무서웠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대답했다.

“대표님의 물건에 여자의 손길이 닿는 것을 싫어하시잖아요. 항상 마음에 새기고 있습니다.”

그러자 유준서는 어두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차갑게 웃었다.

“정 비서가 원칙주의자였다는 걸 내가 깜빡했네. 그럼 정 비서 어제 어디에서 잤어? 설마 바닥에서 잔 건 아니지?”

정다름은 입술을 오므렸다.

“식탁 위에 엎드려서 잤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따가 깨끗이 닦겠습니다.”

내가 언제 깨끗이 닦으라고 했어?

손님방이 있는 데도 손님방에서 안 자는 건 무슨 생각인 거지?

본인 주제를 아는 것 같아 보여도 실은 이 대표가 야박한 사람이라고 날 욕하는 거잖아?

되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필요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스파이가 잠을 편안히 자든 말든 그건 그와 상관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유준서는 차갑게 코웃음을 치더니 몸을 돌려 방으로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정다름은 종잡을 수 없는 그의 성격에 개의치 않았다.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미 익숙해진 이유도 있었고 그녀의 고집스러운 사랑으로 감싸줄 수도 있었다.

콩깍지란 건 무서운 것이다. 아무리 추악한 물건이라도 아름답게 만들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녀 마음속의 유준서는 미와 구원의 상징이었다.

아침 식사가 준비되자 유준서도 단정한 옷차림으로 방을 나왔다.

그는 소매를 정리하다 무심코 바라본 그녀의 모습에 멈칫했다. 그녀가 몸을 살짝 굽히자 드러나는 은밀한 아름다움에 그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는 감정을 억누르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식탁에 앉았다. 그러나 또 본인 음식만 준비된 것을 본 그는 젓가락을 세게 움켜잡았다. 이번에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정 비서, 드디어 살덩어리가 얼마나 눈에 거슬리는지 깨달았나 봐?”

“대표님, 불편한 게 있으세요?”

아무리 영리한 정다름이어도 그의 말뜻을 알아듣지는 못했다.

그러자 유준서는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다이어트해?”

그의 말에 정다름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 몸매는 유준서의 곁에 있기 위해 최선을 다해 먹어서 만든 보험 같은 거였다.

유준서는 여자를 싫어해서 여비서도 곁에 두지 않는다. 그렇기에 예쁜 여비서는 더더욱 본인의 곁에 두려 하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유준서의 곁에 있기 위해서는 무슨 수라도 써야 했다.

그녀가 충분히 예쁘지 않고 뛰어난 몸매를 가지고 있지 않아야만 그에게 가까이 가고 싶은 소원을 이룰 작은 희망이라도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남자를 위해 아름다운 몸매를 포기할 수 있냐고, 남자는 다 아름다운 여자를 좋아한다며 친구가 그녀에게 남자 하나 때문에 미쳤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정다름의 생각은 달랐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그녀를 위해 소원을 이루는 일이었다.

그녀가 무엇을 원하든 오직 원하는 결과만 얻을 수 있다면 집착하든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유준서의 곁에 있는 건 그녀가 원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원한다면 반드시 가져야 했다.

그를 괴롭히고 함정에 빠뜨리는 사람들이 미녀들이었다면 살을 좀 찌워서 그에게 안정감을 주면 소원을 이룰 기회가 조금 더 생길지도 모른다.

원하는 것이 있어도 몰래 기도만 하는 건 그녀의 스타일이 아니다. 그녀는 직접 나서서 스스로 쟁취하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유준서의 곁에 있는 한 절대 다이어트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이 몸매로 그에게 스스로가 뚱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고 절대로 대표님의 아름다운 미모를 탐내지 않을 것이란 걸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그녀도 원하는 대로 그의 비서가 되었다.

그리움이 그녀의 발걸음을 이끌고, 사랑이 그녀의 마음을 억눌렀다.

그녀는 분명히 구분할 수 있고 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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