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서윤의 얼굴이 굳었다."…그 말, 당신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무슨 뜻이야?""당신은 오늘도 다른 여자를 만났잖아요."도윤의 눈빛이 흔들렸다."만났어.""그럼 저도 제 마음대로 할게요."서윤은 그를 지나쳐 계단으로 향했다. 도윤은 이번에도 붙잡지 못했다.아니, 붙잡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해야 했다.서윤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도윤은 문득 깨달았다. 오늘 밤이 지나면 정말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걸.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을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늦게 들어와도 묻지 않을 것이고,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상처받지 않으려 애쓰지도 않을 것이다. 언젠가는 이 집에서 나갈 것이다.그리고 그때가 되면. 자신은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보내 줘야 했다. 계약서에 그렇게 적혀 있었으니까.도윤은 눈을 감았다."…하."그는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몸은 마음과 달리 움직였다.서윤이 다시 계단을 올라가려는 순간, 그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한서윤.""비켜요.""싫어."서윤의 눈이 커졌다."…당신 미쳤어요?"바로 그 순간이었다. 도윤이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예상하지 못한 힘에 서윤의 몸이 휘청였다. 어느새 두 사람의 거리가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제 입술을 당장이라도 집어삼킬 듯한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자를 향해, 서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강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허리를 감싼 손에 힘을 주었다. 물러날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다는 듯이."강도윤.""이름 부르지 마.""뭐?""지금 그 목소리로 내 이름 부르지 말라고."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서윤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 이 남자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당신, 오늘 여자 만난다고 하지 않았어요?""만났어.""나도 남자 만났고요.""알아.""그럼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그제야 도윤이 웃었다. 아
도윤은 그 자리에 서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평소 같았으면 한마디쯤 더 했을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무시했다느니, 말버릇이 나쁘다느니, 쓸데없는 감정에 휘둘린다느니. 그런데 오늘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서윤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한 계단. 그리고 또 한 계단.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기 직전이었다."한서윤."도윤이 다시 불렀다. 서윤이 멈췄다."왜요?"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오늘 만난 남자가 누구인지 다시 묻고 싶었나. 정말 그 남자를 좋아하느냐고 확인하고 싶었나.아니면…"…아무것도 아니야."서윤은 잠깐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그럼 잘 자요."철컥. 방문이 닫혔다.도윤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뒤늦게 깨달았다. 자신이 방금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가지 말라고. 적어도 오늘 밤만큼은 자신을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지 말라고. 하지만 그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는 낮게 욕설을 내뱉으며 제 방으로 향했다. 샤워를 마친 서윤은 침대에 누워 휴대전화를 확인했다.태하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집에 잘 들어갔어?]서윤은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 답장을 보냈다.[응. 너도 잘 들어갔어?]곧바로 답장이 왔다.[응. 오늘 네 표정이 조금 안 좋아 보여서 신경 쓰였어.]서윤은 입술을 깨물었다.[괜찮아. 걱정하지 마.][알겠어. 그래도 괜찮지 않으면 괜찮은 척하지 않아도 돼.]그녀는 한동안 답장을 쓰지 못했다. 괜찮지 않으면 괜찮은 척하지 않아도 된다. 별것 아닌 문장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플까.서윤은 휴대전화를 가슴 위에 올려놓고 천장을 바라봤다.강도윤은 한 번도 그런 말을 해 준 적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런 말을 해 줄 사람이라고 기대한 적이 없었다. 그저 가끔 자신을 붙잡는 듯한 행동을 할 때면, 어쩌면 그에게도 자신이 조금은 특별한 존재일지 모른다고 생각했을 뿐이다.하지만 그럴 때마다 돌아오는 건 똑같은 말이었다.'
강도윤은 곧장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정확히는 그래야 했다.한서윤과의 이혼 협상은 최악으로 끝났다. 그녀는 정말로 이혼을 원했고, 그 이유도 명확했다.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와 함께하고 싶어서.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아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그 남자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신경이 곤두섰고, 서윤이 그 남자에게 웃어 주는 모습을 생각하면 속이 뒤틀렸다.강도윤은 운전대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미쳤군.'누구보다 합리적인 판단을 중요하게 여기는 자신이 고작 이런 일로 감정을 낭비하고 있다니.애초에 한서윤과의 결혼은 계약이었다. 서로의 사업이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부부로 지내고, 그 이후에는 미련 없이 헤어진다.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는다. 연애 상대에 관여하지 않는다. 그녀가 누구를 만나든, 누구에게 웃어 주든, 누구를 좋아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게 두 사람의 약속이었다.그런데 이제 와서 불쾌하다니. 강도윤은 헛웃음을 흘렸다.'정신 차려, 강도윤.'그녀가 이혼하겠다고 하자 화가 났다.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사실이 불쾌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그저 자신의 예상과 다르게 행동하는 한서윤이 거슬릴 뿐이었다. 자신이 알던 그녀라면 조금 더 계산적으로, 조금 더 냉정하게 행동했어야 했다.이혼을 앞당기겠다는 것도, 다른 남자를 선택하겠다는 것도. 전부 성급한 판단이었다. 적어도 강도윤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신호가 바뀌었다. 그는 차를 출발시키려다가 문득 브레이크를 밟았다. 도로 건너편에 작은 바가 보였다.잠깐만. 정말 잠깐만 머리를 식히고 가면 될 일이었다.어차피 집에 돌아가 봐야 서윤과 마주칠 테고, 지금처럼 신경이 곤두선 상태로는 무슨 말을 할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도윤은 방향지시등을 켰다. 그리고 예정에 없던 곳에 차를 세웠다.위스키는 생각보다 쓰지 않았다. 강도윤은 잔을 기울이며 시계를 확인했다.오후 여덟 시 사십 분.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생각한 지 한 시간이 훌쩍 지
서윤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장난으로 시작한 적 없어요. 처음부터 서로에게 필요한 게 있어서 선택한 결혼이었잖아요.”“그렇다면 계약을 지켜야죠.”“계약을 깨겠다는 게 아니에요. 조건을 다시 협의하자는 거죠.”“이유가 윤태하 씨라면 이야기는 다릅니다.”“왜요?”“…….”“태하가 제 남자친구가 되든, 제가 다른 사람을 만나든, 그게 왜 문제가 되는데요?”도윤의 눈빛이 서늘해졌다.“적어도 계약을 맺은 당사자라면 자신의 선택이 상대방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서윤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물었다.“그럼 강도윤 씨는 제게 어떤 영향을 받으시는데요?”도윤의 입이 다물렸다.“제가 태하와 연애하면 강도윤 씨의 사업에 문제가 생기나요? 주주들이 반대하나요? 계약상 불이익이 발생하나요?”“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건 본인도 알 텐데요.”“그럼 무슨 문제인데요?”서윤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대체 뭐가 문제냐고요.”도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도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으니까.그저 싫었다. 한서윤이 다른 남자를 선택한다는 사실이. 자신과의 결혼을 끝내고 그 남자에게 가겠다는 사실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겠다는 사실이.그 모든 것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거슬렸다.하지만 그 이유를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아니, 꺼낼 이유가 없었다. 그는 한서윤을 좋아하지 않으니까.“…한서윤 씨는 정말 이성적인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도윤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그런데 지금은 제 판단이 틀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서윤의 눈빛이 흔들렸다. 도윤은 그 모습을 보고도 멈추지 않았다.“계산적이고, 현실적이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감정을 통제할 줄 아는 사람.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그는 서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그런데 결국 감정에 휘둘려 스스로에게 유리한 계약까지 바꾸려는군요.”“….”“실망입니다.”그 한마디가 사무실 안에 떨어졌다.서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나, 태하 너랑 진지하게 만나 보려고.”한서윤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자신이 얼마나 큰 결심을 했는지 실감했다.맞은편에 앉은 윤태하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정말?”“응.”“네 마음이 확실해?”서윤은 잠시 생각했다. 아직 확신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태하를 좋아하는지, 친구로서 소중하게 여기는지. 그 경계가 어디인지 자신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했다. 태하는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자신이 어떤 대답을 하든 그 선택을 존중해 주었다. 그리고 자신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혼란스럽게 만들거나, 다가왔다가 밀어내기를 반복하지 않았다.서윤은 그런 태하가 좋았다. 무엇보다 이제는 누군가의 애매한 행동에 기대를 걸며 마음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확실하다고 말할 수는 없어.”서윤이 솔직하게 대답했다.“그런데 너랑 제대로 만나 보고 싶어. 네가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에 기대서 도망치고 싶은 게 아니라, 나도 네 마음을 진지하게 알아 가고 싶어.”태하는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천천히 웃었다.“알았어.”“…정말?”“응. 대신 하나만 약속해.”“뭔데?”“나한테 미안해서 억지로 잘해 주지 않기.”태하가 그녀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내가 너 좋아하는 건 내 선택이야. 네가 나한테 같은 마음을 주기로 했다고 해서 갑자기 완벽한 여자친구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서윤은 웃음을 터뜨렸다.“야, 내가 언제 완벽한 여자친구가 되겠다고 했어?”“너 은근히 그런 거 신경 쓰잖아.”“…그건 맞는데.”“그러니까 천천히 해. 우리 원래 오래된 친구잖아.”태하가 웃었다.“친구에서 연인으로 넘어가는 데 적응할 시간은 필요하겠지.”서윤도 따라 웃었다.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그런데 곧 웃음이 잦아들었다.“태하야.”“응.”“나 먼저 정리해야 할 게 있어.”태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차린 듯했다.“강도윤 씨?”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이혼하기로 했잖아. 어차피 언젠가 끝낼
그날 저녁.“서윤아.”태하가 서윤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오늘 무슨 일 있었어?”“왜?”“표정이 이상한데.”“내 표정이 뭐가?”“누가 열받게 했거나, 아니면 네가 누구 열받게 했거나.”서윤이 웃음을 터뜨렸다.“너 진짜 나 잘 안다.”“그럼. 우리가 한두 해 본 사이인가.”태하는 익숙하게 그녀 앞에 음료를 놓았다.두 사람은 대학 시절부터 친구였다. 서로의 취향을 알고, 서로의 버릇을 알고,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상대방의 기분을 알아차릴 때가 많았다.태하는 서윤이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먼저 알아차리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서윤은 그럴 때마다 태하에게 기대곤 했다.“강도윤이 또 뭐라고 했어?”서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어떻게 알았어?”“너 강도윤 얘기 나올 때마다 표정부터 달라져.”“내가?”“응. 짜증 난 표정인데, 한편으로는 뭔가 기대했다가 실망한 사람 같아.”서윤은 웃으려다가 멈췄다.정확했다. 너무 정확해서 웃을 수 없었다. 태하는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아직도 그 사람 신경 쓰여?”“…모르겠어.”서윤은 솔직하게 대답했다.“처음에는 나도 그 사람이 조금 궁금했던 것 같아. 가끔은 다정한 것 같고, 가끔은 또 아닌 것 같고. 그래서 자꾸 이유를 생각하게 됐어.”“…….”“그런데 이제는 모르겠어. 그 사람이 나한테 잘해 주면 내가 착각하는 것 같고, 그렇다고 아예 무시하면 또 이상하게 신경 쓰이고.”서윤은 컵을 손끝으로 굴렸다.“그냥 지쳤어.”태하의 표정이 조용히 가라앉았다.“그럼 그만 신경 써.”“…….”“네가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무조건 이해해 줘야 하는 건 아니잖아.”서윤은 고개를 들었다. 태하가 부드럽게 웃었다.“네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도 좋지만, 그 사람 때문에 네가 계속 힘들어지는 건 싫어.”“태하야.”“응.”“너는 내가 왜 좋아?”태하는 잠시 말을 멈췄다.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그러나 대답은 어렵지 않았다.“그냥 너라서.”“그런 대답 말고.”“그런 대답밖에 못 하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