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대표실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서윤은 한동안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도윤은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괜찮습니까?”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한 걸음 다가가려다가 멈췄다.“서윤 씨.”“…왜 그러셨어요?”서윤이 낮게 물었다. 도윤의 표정이 굳었다.“뭘 말씀하시는 겁니까?”“세린 씨 앞에서.”서윤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왜 그렇게까지 말씀하셨어요?”도윤은 그녀를 바라보았다.“사실이니까요.”“…….”“당신을 사랑한다는 것도, 세린이와 다시 시작한 적 없다는 것도.”서윤의 입술이 떨렸다.“그래도…….”“서윤 씨.”도윤이 조용히 그녀의 말을 끊었다.“저는 이제 당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지 않습니다.”“…….”“누가 묻든 똑같이 대답할 겁니다.”서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도윤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그리고 앞으로는 당신이 다른 사람의 말 때문에 제 마음을 의심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그게 제 마음대로 되나요?”서윤의 목소리가 흔들렸다.“저는 이미 한 번 당신을 믿었다가…….”말끝이 흐려졌다. 도윤의 표정이 아프게 굳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압니다.”서윤은 눈을 내리깔았다.“그래서 무서워요.”그 말이 흘러나온 순간, 서윤 자신도 놀랐다. 도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윤은 떨리는 숨을 삼켰다.“당신이 다시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도, 잘해 주는 것도…….”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전부 믿고 싶어질까 봐 무서워요.”도윤의 눈빛이 흔들렸다. 서윤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그러다가 또 제가 혼자 좋아하게 되면 어떡해요.”그 말에 도윤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는 한동안 서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런 일 없게 하겠습니다.”서윤은 고개를 저었다.“그런 걸 어떻게 장담해요.”“장담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건 압니다.”도윤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하지만 적어도 제가 먼저 도망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당신이 제 마음을 확인하려 할 때
서윤의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혹시 도윤이가 갑자기 잘해 준다고 해서, 그걸 전부 사랑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세린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조용히 덧붙였다.“특히 아이 같은 문제가 얽혀 있다면 더더욱요.”서윤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세린은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역시.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자신의 짐작이 맞을 가능성이 커 보였다.“서윤 씨.”세린은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혹시 정말 임신한 거예요?”서윤은 숨을 삼켰다. 그러나 곧 표정을 굳혔다.“그건 정세린 씨가 관여할 일이 아니에요.”“그렇죠. 제 일이 아니죠.”세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도윤 씨 일이라면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요?”서윤의 눈빛이 차가워졌다.“도윤 씨 일인지 아닌지는 제가 판단할 문제예요.”“그렇게 생각하세요?”세린이 작게 웃었다.“그런데 도윤 씨도 그렇게 생각할까요?”서윤은 입술을 다물었다. 세린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서윤 씨. 저는 그냥 걱정돼서 하는 말이에요.”“…….”“도윤 씨가 아이 때문에 서윤 씨한테 돌아가려고 하는 거라면, 그건 두 분 모두에게 불행한 일일 수도 있잖아요.”그 순간. 똑똑. 대표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서윤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네.”문이 열렸다. 그리고.“그건 정세린 씨가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서윤의 눈이 커졌다. 강도윤이었다.도윤은 문 앞에 서 있었다. 검은색 정장 차림에 평소와 다르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눈빛만큼은 달랐다. 그의 시선은 곧장 세린에게 향했다.“도윤아?”세린이 놀란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당신이 여긴 어떻게…….”“서윤 씨와 약속이 있었습니다.”도윤은 짧게 대답했다. 그는 원래 오늘 서윤과 협업 관련 서류를 확인하기로 되어 있었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고, 비서에게 세린이 와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 순간부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도윤은 세린을 바라보았다.“무슨 이야기를
식사를 마치고 나오자 밤공기가 제법 차가웠다. 서윤은 어깨를 움츠렸다. 도윤은 곧바로 자신의 재킷을 벗으려 했다.“괜찮아요.”서윤이 먼저 말했다.“춥지 않아요.”도윤은 그녀를 바라보았다.“방금 어깨를 움츠리셨는데요.”“그냥 바람이 불어서요.”“그럼 더 춥지 않습니까.”서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도윤은 웃음을 참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입으십시오.”그가 재킷을 내밀었다. 서윤은 잠시 망설이다 받아 들었다.“잠깐만요.”“네.”재킷을 어깨에 걸치자 익숙한 향이 났다. 결혼 생활 동안 수없이 맡았던 향이었다. 그 향이 이상하게 그리웠다는 사실을 깨닫자 서윤은 가슴이 먹먹해졌다.두 사람은 천천히 주차장으로 걸었다. 도윤은 서윤의 걸음에 맞춰 속도를 늦췄다. 잠시 후 서윤이 물었다.“강도윤 씨.”“네.”“정말 저랑 다시 시작하고 싶으세요?”도윤은 걸음을 멈췄다. 서윤도 따라 멈췄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네.”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정말로요.”서윤은 입술을 깨물었다.“그럼….”그녀는 한참 동안 말을 고르다가 고개를 들었다.“이번에는 제가 당신을 좋아하게 만들 자신 있으세요?”도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서윤은 애써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저는 이제 예전처럼 당신을 좋아하고 싶지 않아요.”“…….”“혼자 기대하고, 혼자 상처받고, 혼자 포기하는 일은 다시 하고 싶지 않아요.”도윤은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들었다. 서윤은 숨을 골랐다.“그러니까 자신 없으면…….”“있습니다.”도윤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서윤의 눈이 커졌다. 그는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자신 있습니다.”서윤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도윤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이번에는 당신이 혼자 좋아하게 두지 않을 자신 있습니다.”서윤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당신이 저를 좋아하는 만큼, 아니…….”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낮게 덧붙였다.“그보다 더 좋아할 자신 있습니다.”서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도윤은 그녀의 눈을 바라
“식사 한번 하시겠습니까?”서윤은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 잠시 말을 잃었다.“…네?”“이번 주 금요일 저녁입니다. 시간 괜찮으십니까?”너무도 태연한 목소리였다. 마치 중요한 거래처와 저녁 약속을 잡는 사람처럼. 서윤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강도윤 씨.”“네.”“지금 저한테 데이트 신청하시는 거예요?”잠깐의 침묵. 그리고.“네.”서윤의 손이 멈췄다.“데이트 신청하는 겁니다.”도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전남편으로서가 아니라, 당신을 좋아하는 남자로서 식사 한번 하고 싶습니다.”서윤은 입술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남자가 정말 강도윤이 맞나 싶었다. 결혼 생활 내내 자신에게 식사하자는 말 한마디조차 쉽게 건네지 않던 사람이었다. 같은 집에 살면서도 저녁을 함께 먹는 날보다 각자의 일정에 맞춰 따로 식사하는 날이 더 많았다.그런 남자가. 이혼한 지금 자신에게 데이트를 신청하고 있었다.“…제가 왜요?”“저와 식사할 이유가 없으십니까?”“없는데요.”즉각적인 대답이었다. 도윤은 수화기 너머에서 작게 웃었다. 서윤의 눈썹이 올라갔다.“지금 웃으셨어요?”“네.”“뭐가 웃긴데요?”“거절하실 줄 알았습니다.”“그럼 왜 물어보셨어요?”“거절하실 줄 알았다고 해서, 신청하지 말아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서윤은 말문이 막혔다. 정말이지. 요즘의 강도윤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저 바빠요.”“금요일 저녁에도요?”“네.”“알겠습니다. 그럼 토요일은 어떻습니까?”“강도윤 씨!”“네. 듣고 있습니다.”서윤은 이마를 짚었다.“제가 바쁘다는 건 당신이랑 만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에요.”“그렇군요.”이번에는 도윤이 잠시 말을 멈췄다.“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서윤은 뜻밖이라는 듯 눈을 깜빡였다.“원하지 않으신다면 더 권하지 않겠습니다.”어쩐지 허무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끈질기게 날짜를 묻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거절의 뜻을 분명하게 밝히자 순순히 물러섰다. 서윤은 자신도 모르게 입
다음 날 오전. 서윤이 출근하자 비서가 작은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대표님, 이거 전달해 달라고 하셨습니다.”“뭔데요?”“과일이요.”서윤의 손이 멈췄다.“…과일이요?”“네. 강명인베스트먼트 강도윤 대표님 쪽에서 보내셨습니다.”서윤은 상자를 바라보았다. 안에는 먹기 좋게 손질된 과일들이 담겨 있었다. 딸기와 포도, 잘게 썬 사과. 그 옆에는 작은 카드가 놓여 있었다.[어제 과일 드신다고 하셨는데, 혹시 못 드셨을까 봐 보냅니다.부담스러우시면 다음부터는 보내지 않겠습니다.- 강도윤 -]서윤은 카드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 정말 이상한 남자였다. 예전에는 자신이 무엇을 먹는지, 언제 퇴근하는지조차 관심 없어 보이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과일 하나까지 챙기고 있었다.서윤은 상자 안에서 포도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입안에 퍼지는 달콤한 맛에 속이 조금 편안해졌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과일 받았어요.]잠시 후 답장이 왔다.[입맛에는 맞습니까?]서윤은 포도를 하나 더 먹었다.[네. 맛있네요.]이번에는 답장이 조금 늦게 왔다.[다행입니다.]그리고 곧이어 한 줄이 더 도착했다.[오늘은 그 말만 들어도 기분이 좋네요.]서윤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진짜 왜 이래.”혼잣말과 달리 그녀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남아 있었다.그때 비서가 다시 노크했다.“대표님, 윤태하 대표님 오셨습니다.”서윤은 황급히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다.“들어오시라고 하세요.”잠시 후 태하가 들어왔다.“서윤아.”“태하야. 일찍 왔네?”“근처에 미팅 있어서 들렀어.”태하는 자연스럽게 서윤의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다 과일 상자를 발견했다.“웬 과일이야?”“아, 이거?”서윤은 잠시 망설였다.“도윤 씨가 보내셨어.”태하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강도윤 씨가?”“응.”서윤은 아무렇지 않은 척 포도를 하나 집어 들었다.“어제 과일 먹고 싶다고 했더니 보내셨네.”태
도윤의 말이 끝나자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태하는 한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낮게 웃었다. “참 쉽게 말씀하시네요.” 도윤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쉽게 하는 말 아닙니다.” “그럼 더 이해가 안 되는데요.” 태하가 한 걸음 다가섰다. “그렇게 소중한 사람이었으면 왜 놓쳤습니까?” 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태하는 그의 침묵을 기다리지 않았다. “서윤이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아십니까? 그쪽이 아무렇지 않게 던진 말 하나에 얼마나 오래 상처받았는지요.” “…….” “이혼하고 나서도 그랬습니다. 강도윤 씨가 다시 좋아한다고 했을 때, 서윤이가 얼마나 혼란스러워했는지 아세요?” 도윤의 손이 천천히 굳어졌다. “알고 있습니다.” “아니요. 강도윤 씨는 하나도 모릅니다.” 태하의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알았다면 그렇게 쉽게 다시 시작하자는 말 못 했을 겁니다.” 도윤은 잠시 시선을 내렸다. 태하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서윤이 자신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 시간을 모두 알 수는 없었다. 그가 보지 못한 곳에서 서윤이 얼마나 울었는지. 얼마나 많은 밤을 혼자 견뎠는지. 그 모든 시간을 자신은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 곁에 태하가 있었다. 그 사실이 견딜 수 없이 질투 났다. 하지만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윤태하 씨.” 도윤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사실이 제가 앞으로도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서윤이가 원하지 않는다면요?” “그 사람의 선택은 존중할 겁니다.” 도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하지만 제 마음까지 포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태하가 헛웃음을 흘렸다. “결국 다시 붙잡겠다는 거네요.” “네.” 짧고 분명한 대답이었다. 태하는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도윤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다시 좋아해 달라고 말할 겁니다. 기회를 달라고도 할 겁니다.” “…….” “다만 서윤 씨가 싫다고 하는 일을 억지로 하지는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