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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or: 안이슬
법률사무소 건물을 나서자 밖에는 바람이 사납게 불고 있었다.

이윽고 콩알만큼 굵은 빗방울이 후두둑 쏟아졌다.

진지희는 길가에 서 있다가 저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때 유명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악의적인 목소리에는 비웃음이 가득했다.

[물건은 실컷 챙겼어?]

진지희는 잠시 말이 없다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

수화기 너머에서 차가운 코웃음이 터져 나왔다.

[진지희, 너 정말 천성은 안 변하는구나. 내 돈 챙겼으면 당장 집에 가서 안방 깨끗이 치워. 오늘 밤 나영이랑 같이 잘 거야.]

이혼을 결심했는데도 진지희의 심장은 콱 조여들었고 코끝은 시큰해졌다.

한참이 지나서야 쓴맛을 억지로 삼키면서 조용히 대답했다.

“알았어.”

그런데 그런 순종적인 태도는 유명훈을 만족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분노를 자극했다.

음침하고 냉랭한 목소리가 독침처럼 수화기 너머에서 날아왔다.

[그래, 너 진짜 대단하다. 진지희, 넌 정말 돈만 있으면 양심마저도 다 파는구나?]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뚝 끊겼다.

비가 억수로 쏟아졌고 진지희는 빗속에 서서 넋을 놓고 있었다.

오래도록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진지희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제서야 진지희는 곧 정신이 들었는지 아주머니를 쳐다봤다.

“아가씨, 왜 그래요? 괜찮아요?”

그제야 진지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손바닥에서 살을 파고드는 통증이 밀려왔다.

휴대폰을 움켜쥔 손바닥이 금속 모서리에 눌려서 피가 배어 있었다. 그 주변은 온통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진지희는 자신이 아직도 이렇게 아플 수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온몸이 흠뻑 젖어 있어서, 얼른 뜨거운 물로 샤워부터 하고 안방을 치울 생각이었다.

스마트 도어록에 지문을 대자, 무단 침입이라는 안내가 떴다. 진지희는 그 자리에서 우뚝 멈췄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자신의 출입 권한이 취소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진지희는 쓴웃음을 지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손을 들어 가볍게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초인종을 열댓 번 눌러 봤지만 여전히 아무 기척도 없었다.

그렇게 사나운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씨 속에서, 진지희는 반팔 티셔츠 하나만 입은 채 문가 구석에 웅크리고 꼬박 두 시간을 버텼다.

추위에 몸은 덜덜 떨린 데다가 이마는 열이 펄펄 나서 머리가 자꾸 어지러웠다.

마침내 삐걱 소리와 함께 저택 대문이 안에서 열렸다.

집사가 차가운 얼굴로 걸어 나오더니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그 표정에는 동정의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사모님, 이제 들어오셔도 돼요.”

“대표님께서 유씨 집안의 돈을 받았으면 유씨 집안 규칙을 지켜야 한다고 하셨어요. 이 2시간은 가벼운 벌이니 앞으로는 분수를 지키시기 바라신다고요.”

진지희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미 정신이 혼미해 정상적으로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그럼에도 유명훈이 일부러 자신을 문밖에 세워 추위에 떨게 했다는 점, 그 한 가지만큼은 정확하게 알아들었다.

자조하듯 웃은 진지희는 비틀거리며 일어나서 말없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는 내내 정신이 아득했다.

그 뒤에는 그저 조금 남은 정신력으로 애써 버티면서 안방을 정리했다.

그리고 게스트룸으로 돌아오자마자 바닥에 그대로 고꾸라져서 의식을 잃었다.

혼미한 의식 속에서 진지희는 자신의 몸 안에서 때로는 불길이 맹렬하게 타오르다가, 때로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남극의 빙하 속으로 내던져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숨이 막힐 듯한 강렬한 질식감에 절망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깨어날 수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누가 엄청난 힘으로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곧 몸이 바닥에서 그대로 끌려 올라가더니, 곧이어 뺨을 사정없이 연달아 맞았다.

그 순간 허나영의 비명이 저택 전체를 뒤흔들었다.

허나영은 옷이 반쯤 벗겨진 채 가슴을 가리고 있었다. 여자의 뒤로는 방문 밖에서부터 이어진 옷가지가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곧 유명훈이 눈을 찢어질 듯 부릅떴다.

“안방 바닥에 누워서 뭐 하는 짓이야? 일부러 나영이를 곤란하게 만들려고 이러는 거야?”

그제야 완전히 정신을 차린 진지희는 마침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차렸다.

게스트룸까지 가지도 못한 채 안방에서 쓰러졌던 것이었다.

그리고 유명훈과 허나영은 복도에서부터 참지 못하고 서로를 끌어안은 채 이곳까지 들어온 것이었다.

허나영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눈가에는 눈물이 가득 맺혀 있었다.

“오빠, 저 여자 일부러 그런 거야. 이런 얘기가 퍼지면 나 앞으로 어떻게 사람들을 만나!”

말을 마친 허나영은 엉엉 울며 몸을 돌려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러다 발을 헛디뎌 곧 넘어질 것처럼 휘청거리자, 유명훈의 눈에 순간 어두운 빛이 스쳤다.

유명훈은 곧장 앞으로 달려가서 허나영을 안정적으로 받아 안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진지희에게 버럭 소리쳤다.

“아직도 안 나가고 뭐 해? 당장 꺼져!”

하지만 허나영은 죽어라 몸부림치면서 울고 소란을 피웠다.

손에 잡히는 물건을 닥치는 대로 집어 던졌다.

그중 하나였던 크리스털 화병이 진지희의 이마에 거세게 부딪혔다.

쨍그랑!

크리스털 유리가 머리 위에서 산산이 깨지면서, 이마에서 흘러내린 뜨거운 피가 뺨을 타고 주르륵 흘렀다.

가뜩이나 어지럽던 진지희는 그 충격에 그대로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살을 저미는 듯한 통증이 밀려오자, 진지희는 멍하니 손을 들어서 이마의 상처를 감쌌다.

손끝에 뜨거운 감촉이 느껴지자 그제야 열이 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전에는 자신이 고열에 시달릴 때마다 유명훈은 몹시 걱정했다.

조금이라고 빨리 열을 내려 주겠다며 냉동창고에 들어가서 자기 몸을 차갑게 식힌 뒤, 돌아와서 진지희를 꼭 끌어안아 주기도 했다.

“지희야, 네가 아픈 걸 보는 게 내가 죽는 것보다 더 괴로워. 할 수만 있으면 내가 대신 아프고 싶어.”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설레던 그 순간들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남은 것은 서로를 향한 날이 갈수록 날카로워지는 고통뿐이었다.

죽어야 비로소 끝날 만큼 지독한 고통이었다.

힘없이 서 있는 진지희를 바라보던 유명훈은 순간 얼굴을 굳히더니, 두 손을 무의식적으로 움켜쥐었다.

유명훈이 막 다가가려는 순간, 허나영이 서러운 목소리로 흐느꼈다.

“오빠, 그냥 나 놔줘. 나 갈래!”

“예전에는 아무리 그래도 바닥에 무릎 꿇고 고개도 못 들게 했잖아. 이렇게 대놓고 쳐다보는 건 나를 모욕하려는 거 아니야?”

“여기는 자기 안방이고, 나는 들어올 자격도 없는 사람이라고 알려 주려는 거잖아!”

그 말에 유명훈은 허나영을 허리째 안아 들어 올리면서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화내지 마. 내가 대신 갚아 줄게.”

“가자, 침대에 먼저 앉아 있어. 나머지는 나한테 맡겨.”

말을 마친 유명훈은 진지희를 밀쳐 내고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진지희는 비틀거리며 몇 걸음이나 물러났다.

그러다 허리가 낮은 수납장의 모서리에 강하게 부딪혔다.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온몸을 휩쓸면서, 진지희는 볼썽사납게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치 자신이야말로 비열하고 더러운 내연녀인 것처럼 말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진지희는 자조하듯 비참하게 웃더니, 고통을 참으며 힘겹게 일어섰다.

그러고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몸이 안 좋아서...”

“몸이 안 좋아?”

유명훈이 시퍼렇게 굳은 얼굴로 말을 끊었다.

“이제는 핑계를 대는 것도 이렇게 어설퍼졌어? 돈을 손에 넣고 나니까 이젠 연기하는 것도 귀찮아진 거야?”

“너 정말 한결같이 사람을 역겹게 만드는구나!”

진지희는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더는 해명할 말조차 없었으니까.

그 모습을 본 유명훈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왜 할 말도 없어? 좋아. 그렇다면 딸이 잘못했으면 아버지가 책임을 져야지!”

“거기 누구 없어요? 요양병원에 연락하세요. 우리 장인어른 잘 좀 모시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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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약 종료를 통보합니다   제16화

    허나영이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너는 지금 모든 걸 다 가졌는데, 나는 왜 아무것도 가져서는 안돼?”“분명히 유명훈이 자기 입으로 말했어. 영원히 나한테 잘 대해 주겠다고. 그런데 왜 결국 나를 이런 꼴로 만든 거야?”“이게 다 너 때문이야! 내가 지금 이런 거지꼴로 살게 됐으니 너도 잘 살 생각은 말아!”말을 마친 허나영은 품에 폭탄을 안은 채 진지희를 향해 달려들었다.진지희는 황급히 몸을 돌리면서 달아났다. 막 허나영에게 붙잡힐 것 같던 순간, 유명훈과 배상헌이 갑자기 나타났다.두 사람이 함께 달려들어서 완전히 미쳐버린 허나영을 제압하고 진창에 사정없이 눌렀다.더러운 흙탕물이 허나영의 얼굴을 뒤덮었는데도, 여자는 여전히 쉬지 않고 저주를 퍼부었다.허나영이 완전히 제압된 것을 확인하자, 배상헌은 곧바로 몸을 돌려서 달래듯 진지희를 품에 꽉 끌어안았다.유명훈은 눈을 들더니 서로 기대고 있는 두 사람을 씁쓸하게 바라보았다.유명훈은 진지희가 배상헌에게 느끼는 의지와 감정을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질투로 미칠 것만 같았지만, 지금의 자신은 아직 과거를 완전히 정리하지도 못했다는 사실을. 그랬기에 다시 진지희에게 다가가 마음을 얻을 자격조차 없다는 사실까지도.유명훈은 애써 몸을 일으키고 멀리서 진지희를 바라보았다.“나는 너를 한 번 놓쳤어. 두 번은 절대 없을 거야. 지희야, 마지막으로 하루만 더 기다려 줘. 모든 걸 완전히 정리하고 다시 돌아올게.”“나는 정말 너를 놓을 수가 없어.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딱 한 번만.”진지희는 시종 침묵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눈빛에도 조금의 흔들림조차 없었다.유명훈의 가슴은 칼로 저미는 듯 아팠지만, 그래도 사람을 시켜서 허나영을 데려가게 한 뒤 힘겹게 몸을 돌려 떠났다.그런데 바로 그 순간, 사고가 일어났다.허나영이 갑자기 미친 듯이 몸부림치더니, 자신을 제압하고 있던 사람의 손목을 강하게 물었다. 그 사람이 고통에 손을 놓는 순간, 허나영은 품에서 단검 한 자

  • 계약 종료를 통보합니다   제15화

    하지만 진지희는 유명훈의 광기를 너무 얕잡아 본 것이었다.유명훈은 생방송을 켜고 자신을 사냥개 사육장 우리에 가둔 뒤, 며칠 동안 굶긴 맹견들이 자신의 몸을 물어뜯게 했다.[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잘못을 저질렀고, 다른 사람이 내 아이 다섯을 죽게 내버려뒀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제 아이들에게 속죄하겠습니다.]방송 시청자 수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유명훈은 카메라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마치 렌즈 너머의 진지희를 바라보는 것처럼 다정하게 미소를 지으면서.[사랑하는 사람의 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만회하고 싶습니다. 내가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다는 걸 알아주기만을 바랄 뿐입니다.]말을 마친 유명훈은 쇠막대기를 들고 미친 듯이 철창을 두드렸다.일부러 맹견들의 분노를 자극한 것이었다.방송 댓글 창이 순식간에 도배가 되더니 모두가 유명훈이 미쳤다고 말했다진지희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대폰을 움켜쥔 손은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유명훈은 진지희를 몰아붙이고 있었다.언제나 착했던 진지희에게 생명과 원한 사이에서 선택하라고 강요하고 있었다.배상헌은 유명훈이 진지희를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곧바로 일을 내버려둔 채 곧바로 돌아왔다.이윽고 진지희의 곁으로 다가간 배상헌이 조용히 휴대폰을 빼앗아서 종료 버튼을 눌렀다.“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해. 지희야,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나는 응원할 거야.”이와 동시에 맹견 한 마리가 유명훈을 향해 사납게 달려들면서, 남자의 종아리를 세차게 물어뜯었다.그리고 유명훈은 손에 든 쇠막대기를 휘두르며 필사적으로 맞섰다.마음속에는 오직 하나의 믿음만이 유명훈의 강렬한 생존 본능을 굳건히 떠받치고 있었다.‘나가야 해. 반드시 이곳을 빠져나가 지희 곁으로 돌아가야 해.’‘그러면 지희는 반드시 나를 용서할 거고, 우리는 반드시 다시 행복해질 거야.’피가 사방으로 튀었고, 살점이 한 덩이씩 뜯겨 나가면서 아무렇게나 내던져졌다.철창에도 짚더미에도

  • 계약 종료를 통보합니다   제14화

    진지희는 배상헌의 보살핌 속에서 차츰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배상헌은 심리 치료 전문가까지 불러서 우울증 치료를 받게 했다.배상헌이 있는 곳은 섬나라였다. 국토 면적은 크지 않았지만 과학기술이 발달한 나라였다. 진지희는 몸을 회복한 뒤 BU그룹에 입사하라는 제안을 거절하고, 대신에 한 게임 회사에 지원해서 입사했다.지난 몇 년 동안 진지희는 줄곧 유명훈을 중심으로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라는 존재를 거의 잊고 있었다.대학때 게임 디자인과 프로그래밍으로 상을 휩쓸었던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도.진지희는 타고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그래도 다시 일에 뛰어드니 다소 버거운 감도 없지 않았다.하지만 끊임없이 노력하는 그 과정에서, 진지희는 난생처음 느껴 보는 안정감을 느꼈다.시간은 하루하루 흘러갔고 진지희와 배상헌의 사이는 점점 가까워졌다.두 사람은 매일 함께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며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가끔은 함께 술을 마시기도 했다.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은 마치 평범한 연인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사실 진지희도 배상헌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제 막 실패한 결혼을 끝낸 진지희는 그렇게 빨리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다행히 배상헌도 서두르지 않았다.두 사람은 모두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거라고 믿었다.그러던 어느 날, 진지희가 퇴근했을 때는 이미 밤 11시가 다 되어 있었다.마침 배상헌은 최근 출장 중이었기에, 진지희는 혼자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다.그런데 문득 뒤에서 누군가 자신을 따라오는 것 같자, 진지희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재촉했다.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도 함께 빨라졌고, 점점 자신에게 가까워졌다.진지희는 겁에 질려서 종종걸음으로 달리기 시작했다.그 순간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지희야, 무서워하지 마. 나야!”그 소리에 진지희의 온몸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바로 그 자리에 멈춰 섰다.유명훈이었다.뒤에 있던 유명훈은

  • 계약 종료를 통보합니다   제13화

    진지희는 갑자기 눈을 떴다.강렬한 질식감의 여운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았다진지희는 가슴을 꽉 움켜쥔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깨어났어요?”문가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기품 있고 꽤 젠틀한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손에는 진지희의 얼굴을 닦아줄 수건과 물이 담긴 대야가 들려 있었다.“2주 동안이나 의식이 없었어요. 의사 말로는 몸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무의식 속에 죽으려는 마음이 남아 있어서 살려는 의지가 전혀 없었다고 하더라고요.”“그래서 좀처럼 깨어나지 않았던 거고요.”진지희는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았다.침대 곁으로 다가온 남자가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마치 이런 장면을 이미 수없이 겪어 본 사람처럼 자연스러운 태도였다.남자는 진지희와 시선을 마주치더니 부드럽게 웃었다.“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요. 바다에 빠진 당신을 구한 사람, 나예요. 며칠 동안 의식이 없을 때도 계속 곁을 지켰고, 이런저런 얘기도 많이 해줬어요.”진지희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 마치 사포로 문지른 것처럼 거칠고 쉰 목소리가 나왔다.“고마워요.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그제야 손에 들고 있던 물대야를 내려놓은 남자는 진지희 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이며 일부러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정말 매정하네요, 후배님. 설마 나를 정말 기억하지 못하는 거예요?”진지희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남자를 바라보았다.남자는 뚜렷한 이목구비에 깊은 눈매를 하고 있었다. 매끄럽게 이어지는 얼굴선은 마치 신이 조각으로 깎아 놓은 듯 완벽했고, 유명훈보다도 몇 배는 더 잘생겼다.‘이런 남자를 내가 알고 있었다면, 어떻게 기억이 조금도 안 날 수가 있겠어?’진지희는 솔직하게 고개를 저었다.“미안해요. 기억이 안 나서요.”남자는 마침내 웃음을 거두고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그러고는 휴대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찾아서 진지희에게 내밀었다.“그럼 이건 기억나요?”사진 속에는 산에 올라서 쓰레기를 줍

  • 계약 종료를 통보합니다   제12화

    강현숙은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린 유명훈의 낯빛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연기하지 마. 이 계약서는 줄곧 본가 금고에 보관되어 있었어.”“그날 지희가 계약서를 가지러 갔을 때, 너는 지희와 생방송까지 하고 있었잖아. 어떻게 모를 리가 있어?”유명훈이 뒤통수를 한 방 맞은 사람처럼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말 한마디 한마디가 독을 바른 화살처럼 유명훈의 심장을 사정없이 꿰뚫는 것 같았다.유명훈은 머릿속에 흩어진 조각들을 맞춰 보면서 앞뒤를 이어 보려 애썼지만, 이 순간만큼은 멍청이가 된 것만 같았다. 머리가 윙윙 울릴 뿐, 도무지 실마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문득 인터넷에서 이혼하라는 반응이 쏟아졌던 그 인기 댓글에 진지희가 본계정으로 ‘좋아요’를 눌렀던 일이 떠올랐다.그때 유명훈은 진지희가 속 보이는 연기를 한다고 단정했다.이후에도 진지희가 금고에서 상당한 액수의 재물을 가져갔기에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다.심지어 오늘 파티장에서도, 진지희가 유씨 집안의 돈 때문에 그 계약서의 내용을 지키느라 더 이상 자신의 생활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그래서 질투하거나 소란을 피우지도 않는 것이라고 여겼다.그런데 알고 보니 진지희는 그 돈을 한 푼도 건드리지 않았고, 두 번째 계약서만 가져갔던 것이다.진지희는 진작부터 자신과 이혼하기로 결심했던 것이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유명훈은 뭔가를 살짝 깨달은 것 같았다. 진지희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고, 다시 시작할 기회를 주고 싶었다.지난 세월 동안 자신은 사실 그 여자들 누구와도 진짜로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다고 말하려고 했다.그저 화가 나서, 진지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어서 일부러 여자들을 하나둘씩 데리고 다니며 속을 긁었던 것뿐이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허나영까지도 그랬다.유명훈이 허나영을 그나마 특별하게 여겼던 것은, 그 눈매가 진지희와 많이 닮았기 때문이었다.‘대체 왜?’‘왜 지희는 자신에게 해명할 기회조차 조금도 남기지 않은 채, 이렇게 나의 삶에서 사라져

  • 계약 종료를 통보합니다   제11화

    순간, 유명훈은 벼락을 맞은 것만 같았다.그 자리에 그대로 굳은 채 오감이 모두 마비된 듯했다.‘죽었다고? 어떻게 죽을 수가 있지?’유명훈은 순간 화가 치밀어 올라서 원장의 옷깃을 거칠게 움켜쥐었다.“이렇게 큰일을 왜 아무도 나한테 알리지 않았죠?”원장은 유명훈의 기세에 겁을 먹고 목소리를 낮췄다.“그게 사모님께서 알릴 필요가 없다고 하셔서요. 장인어른은 다른 병원에서 돌아가셨고, 요양병원으로는 아예 돌아오지 않으셨어요.”“사모님께서 이미 아버님 장례를 치르셨다고...”순간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은 듯했다.유명훈은 눈을 크게 뜬 채 원장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원장이 한 말 하나하나는 분명 다 알아들었다.그런데 그 말들을 이어 붙이면, 대체 무슨 뜻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두 손이 서서히 주먹을 쥐면서 눈에는 핏발이 섰다.순식간에 커다란 손으로 심장을 꽉 움켜쥔 듯했다. 마치 심장이 뛸 틈을 주지 않는 것처럼 가슴이 꽉 막혔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답답함이 점점 커지면서, 유명훈의 표정도 서서히 광기에 가까워졌다.‘장인어른이 돌아가셨어.’진지희와 이어져 있던 마지막 끈이 이렇게 끊어진 것이었다.하늘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고, 몸을 가누지 못한 유명훈은 비틀거리며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마침 도착한 비서가 곧바로 달려와 유명훈을 부축했다.“대표님, 어르신께서 지금 당장 저택으로 모시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사모님 일로 대표님께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시면서요.”사모님 일이라는 말에 유명훈은 한 치도 지체하지 않았다.곧장 비서를 따라 유씨 본가로 향했다.불당에 앉아 있던 강현숙은 유명훈이 들어오자, 도우미에게 서류 한 뭉치를 가져오게 했다.“이것부터 한번 보거라. 전부 B시와 A시의 명문가의 미혼 여자들이야.”“너와 지희가 결혼생활을 포기하기로 했다면, 어서 다른 좋은 여자를 찾아서 유씨 집안의 대를 이어야지.”“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어서 저승에 가서도 네 할아버지를 볼 낯이 없잖아.”유명훈이 벌떡 고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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