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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임브리지 합격 후, 두 부자는 무너졌다

케임브리지 합격 후, 두 부자는 무너졌다

By:  김달콤Completed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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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 가장 화제가 된 SNS는 나에 관한 글이었다. [고 대표가 아들과 함께 첫사랑의 생일을 챙겼다는데, 드디어 여민지와 이혼하려는 건가?] 나는 조용히 ‘좋아요’를 눌렀다. 전화벨이 울렸을 때, 나는 결혼기념일을 위해 준비해 둔 풍선을 터뜨리고 있었다. [여보.] 남편이 다급한 목소리로 변명했다. [아들이 갑자기 놀이공원에 가고 싶다고 떼를 써서 내가...] 핸드폰 벨 소리 너머로 아들이 웃으며 말했다. [아빠, 이모가 오늘 밤 나랑 같이 잘 수 있대!] 나는 엉망이 된 집 안을 바라보았다. 풍선은 힘없이 축 처져 있었고, 케이크 위의 크림은 이미 굳어 있었다. “나한테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돼.” 내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놀라울 만큼 차분했다. “무슨 일인지 다 알아.” 고지훈 당신과 아들은 여기까지야, 이제 나한테 당신들 필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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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고지훈이 아들과 함께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소파에 웅크린 채 TV를 보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현관까지 달려가 남편과 아들에게 슬리퍼를 꺼내주고, 아들의 말랑한 볼에 입을 맞췄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엄마, 오늘은 왜 와서 뽀뽀 안 해줘?”

“민지야, 내 슬리퍼는 왜 안 가져다줘?”

나는 TV 볼륨을 높이며 말했다.

“나 지금 시간 없어.”

고지훈은 느긋하게 신발을 벗고 실내화로 갈아 신은 다음 아들을 먼저 집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설마 아직도 그깟 일로 삐쳐 있는 거야?”

“오늘 어린이날이잖아. 아들이 갑자기 놀이공원에 가고 싶다는데, 내가 어떻게 애 기분을 망치겠어?”

“그런데 나 혼자서는 애를 감당하기 힘들어서 해연이한테 같이 가달라고 한 거야. 내가 대체 몇 번이나 설명해야 해?”

옆에 있던 아들이 잔뜩 화난 얼굴로 말했다.

“또 이렇게 괜히 화내고 있어! 해연 이모는 나한테 절대 이렇게 인상 쓰지 않아!”

고지훈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더니 나를 바라봤다.

“들었지? 아들도 네가 이러는 걸 불편해하잖아.”

“대체 왜 이해하지 못해? 내가 너를 달래는 것도 다 네 체면 세워주려고 그러는 거야. 투정 부리고 화내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나 화 안 났어. 다 이해해.”

‘이해하지.’

나는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었다.

작년 내가 교통사고로 피를 너무 많이 흘렸던 그날처럼.

그때 고지훈은 전화 너머로 귀찮다는 듯 말했다.

[나 지금 급한 일이 있어. 조금 있다가 갈 테니까, 일단 네가 직접 구급차 불러.]

그런데 그 옆에서는 아들이 신나서 소리치고 있었다.

[아빠, 빨리 와! 해연 이모의 고양이 찾았대! 이모 울고 있으니까 빨리 가서 위로해줘!]

나는 피범벅이 된 도로에 누운 채 직접 119에 전화를 걸었다.

수술 동의서의 ‘보호자 서명’란에는 떨리는 손으로 ‘보호자 없음’이라고 썼다.

고지훈은 내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가 지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

나는 담담하게 고지훈의 시선을 마주했다.

“내가 뭘?”

순간, 공기가 얼어붙은 듯 조용해졌다.

고지훈은 갑자기 서류가방에서 벨벳 상자 하나를 꺼내 찻상 위에 툭 던졌다.

“자, 결혼기념일 선물이야.”

나는 상자 안에 놓인 목걸이를 바라봤다.

펜던트에는 ‘HY’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임해연의 이니셜이었다.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결혼기념일 선물조차 남의 것을 주워다가 준 것이었다.

그런 남편은 임해연의 생일에는 아들과 함께 빵집에 가서 오후 내내 직접 케이크까지 만들었던 사람이었다.

“고마워.”

내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았다.

그러자 고지훈이 벌떡 일어났다.

“이거 나랑 아들이 얼마나 정성 들여서 고른 건데. 넌 웃지도 않네? 마음에 안 들어?”

“좋아. 고마워.”

나는 목걸이에 새겨진 거슬리는 ‘HY’를 손가락으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고지훈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

예전의 나였다면 고지훈이 무슨 선물을 주든, 심지어 회사 연말 행사에서 받아온 사은품을 주어도 보물처럼 소중히 간직했을 테니까.

그러고는 언제나 달콤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여보, 사랑해.”

그렇게 몇 년을 한 번도 빠짐없이 내 생일을 이렇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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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고지훈이 아들과 함께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소파에 웅크린 채 TV를 보고 있었다.예전 같았으면 현관까지 달려가 남편과 아들에게 슬리퍼를 꺼내주고, 아들의 말랑한 볼에 입을 맞췄을 것이다.하지만 오늘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엄마, 오늘은 왜 와서 뽀뽀 안 해줘?”“민지야, 내 슬리퍼는 왜 안 가져다줘?”나는 TV 볼륨을 높이며 말했다.“나 지금 시간 없어.”고지훈은 느긋하게 신발을 벗고 실내화로 갈아 신은 다음 아들을 먼저 집 안으로 들여보냈다.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설마 아직도 그깟 일로 삐쳐 있는 거야?”“오늘 어린이날이잖아. 아들이 갑자기 놀이공원에 가고 싶다는데, 내가 어떻게 애 기분을 망치겠어?”“그런데 나 혼자서는 애를 감당하기 힘들어서 해연이한테 같이 가달라고 한 거야. 내가 대체 몇 번이나 설명해야 해?”옆에 있던 아들이 잔뜩 화난 얼굴로 말했다.“또 이렇게 괜히 화내고 있어! 해연 이모는 나한테 절대 이렇게 인상 쓰지 않아!”고지훈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더니 나를 바라봤다.“들었지? 아들도 네가 이러는 걸 불편해하잖아.”“대체 왜 이해하지 못해? 내가 너를 달래는 것도 다 네 체면 세워주려고 그러는 거야. 투정 부리고 화내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나는 담담하게 말했다.“나 화 안 났어. 다 이해해.”‘이해하지.’나는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었다.작년 내가 교통사고로 피를 너무 많이 흘렸던 그날처럼.그때 고지훈은 전화 너머로 귀찮다는 듯 말했다.[나 지금 급한 일이 있어. 조금 있다가 갈 테니까, 일단 네가 직접 구급차 불러.]그런데 그 옆에서는 아들이 신나서 소리치고 있었다.[아빠, 빨리 와! 해연 이모의 고양이 찾았대! 이모 울고 있으니까 빨리 가서 위로해줘!]나는 피범벅이 된 도로에 누운 채 직접 119에 전화를 걸었다.수술 동의서의 ‘보호자 서명’란에는 떨리는 손으로 ‘보호자 없음’이라고 썼다.고지훈은 내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가 지친 듯 한숨을 내쉬었다.“꼭 이렇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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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결혼기념일만 다가오면 나는 석 달 전부터 축하를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사진을 모아 앨범을 주문 제작하고, 영상을 찍고, 출장 중인 고지훈이 있는 도시까지 직접 날아가 깜짝이벤트를 준비했다.그런데 지금은 그 선물 상자를 아무렇게나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나는 그대로 침실로 들어가 가방을 챙긴 뒤 현관으로 가서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그러자 고지훈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내 팔을 확 잡아당겼다.“이 시간에 어디 가? 아들이 네가 재워주길 기다리고 있는데.”나는 고지훈을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흘렸다.“정말 웃기네.”“예전에 내가 당신한테 새벽 3시에 어디 가냐고 물어보기만 해도 선 넘지 말라고 했잖아.”“그런데 이제는 내가 아무것도 묻지 않으니까 오히려 화를 내네. 이번엔 당신이 내 행적을 캐묻고 있잖아.”말을 마친 나는 그대로 집을 나섰다.현관문이 등 뒤에서 닫히는 순간, 억눌린 고지훈의 고함이 들려왔다.“맨날 삐쳐서 난리나 치고! 오늘 밤 안 들어올 거면 앞으로 아예 들어오지 마!”고지훈의 목소리에는 내가 두려워 결국 돌아올 거라는 확신이 배어 있었다.나는 비웃으며 걸음을 옮겼다.고지훈에게 나는 아마 영원히 그를 떠날 수 없는 광대일 것이다.비굴하고, 의존적이며, 선택권조차 없는 사람.하지만 광대도 언젠가는 그 가면 속에서 지치기 마련이다.이 결혼 생활은 이미 숨 막힐 만큼 비좁았다.그러니 이제 내가 먼저 이 무대에서 내려가기로 했다.노래방에서 사촌 동생이 잔을 들어 올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이게 웬일이야? 우리 집 24시간 대기조인 착한 아내가 집에서 '주상'과 '세자' 시중 안 들고?”“무슨 일 있어?”“어린애가 별걸 다 캐묻는다.”나는 웃으며 사촌 동생의 어깨를 툭 밀었다.“앞으로 재미있는 일 있으면 나도 꼭 불러.”사촌 동생이 코웃음을 쳤다.“언니가 집에서 빠져나올 수나 있어? 남편과 아들을 두고 나올 수 있겠어?”사촌 동생이 그렇게 말하는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고지훈과 결혼한 지난 5년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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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나는 밤새도록 아들을 돌봤지만, 아들은 내가 얼마나 고생하며 자기를 돌봤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고작 몇 번 만나본 것이 전부이면서도, 아들은 입만 열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임해연에 관해 이야기했다.고지훈은 전등을 켜더니, 아들이 한 말이 마음에 든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우리 아들이 뭐라고 하는지 잘 들어. 너 지금 엄마 노릇 제대로 하고 있는 것 같아?”“해연이 때문에 이렇게 끝도 없이 난리를 피우는 게 그렇게까지 큰일이야? 내가 해연이랑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어?”“집에서 누가 더 목소리를 내는지는 결국 누가 돈을 더 버느냐에 달린 거야.”“너 설계사무소에서 일하면서도 월급은 얼마 되지도 않잖아. 내가 너를 먹여 살리고 있는 이상, 똑똑히 알아둬.”“우리 부자를 떠날 수 없는 사람이 누군지는 너도 잘 알겠지.”나는 더 이상 두 사람의 반복되는 원망과 비난을 듣고 싶지 않았다.침실로 돌아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래. 당신 말이 다 맞아.”그러자 고지훈이 깊게 숨을 들이쉬고, 목소리가 심하게 쉬었다.“넌 왜 싸울 때마다 죽을 사람처럼 굴어? 대체 내 감정은 조금이라도 신경 쓰는 거야?”술에 취해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흐릿했다.나는 순간 발을 헛디뎠고, 종아리가 찻상 모서리에 세게 부딪혔다.몸이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고지훈은 거의 몸을 던지듯 달려왔다.그리고 내 뒤통수와 바닥 사이에 손바닥을 받쳤다.“차라리 죽어버리지 그랬어?”나는 고지훈의 가슴을 밀어내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그리고 아무런 감정도 없는 눈으로 고지훈을 바라봤다.“내 몸에 손대지 마.”고지훈은 몹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내가 이렇게까지 냉담하게 나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결국 고지훈은 손을 놓았다.나는 그대로 침실로 돌아가 깊이 잠들었다.다시 눈을 떴을 때는 새벽 5시였다.전날 술을 잔뜩 마셨는데도 생체 시계는 어김없이 나를 제시간에 깨웠다.고지훈은 갓 뽑은 수제 면을 좋아했고, 아들은 갓 빚은 고기만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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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결혼했으면 안정적으로 사는 게 좋잖아.”하지만 고지훈의 이 한마디에 나는 해외 유학의 기회를 포기하고, 꿈도 내려놓았다.아이를 낳고 나서는 완전히 가정에 발이 묶였다.집안일과 관련된 일이라면 무엇이든 우선적으로 내 업무 시간과 휴식 시간을 희생해 가며 처리해야 했다.하지만 내가 쏟아부은 노력은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다.오히려 고지훈과 아들은 날이 갈수록 나의 정성과 수고를 무시하고 업신여겼다.그리고 끝내 다른 여자를 끌어들여 내 존엄까지 짓밟았다.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원장실로 향했다.그리고 사직 의사를 밝혔다.원장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나를 바라봤지만, 한편으로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원래 넌 더 높이 날아가야 할 사람이었어. 어디로 갈 생각이야?”“언제 떠날 생각이야?”나는 가방 안에 넣어둔 합격 통지서를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건축학과의 합격 통지서였다.“영국이요. 모레 떠납니다.”짐을 정리하고 있는데 동료 소준희가 다가왔다.“영국으로 간다면서요? 그럼 고 대표님이랑 천희는 어떻게 해요?”나는 책상 위에 놓인 가족사진 액자를 뒤집어 놓았다.사진 속 다정하게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세 사람의 모습이 그대로 어둠 속에 묻혔다.“우리 이혼할 거야.”“그 사람들한테는 곧 새로운 아내와 엄마가 생기겠지.”소준희는 뭔가 말하려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설계원을 나왔을 때는 이미 밤이 깊어 있었다.집에 돌아와 현관 센서 등이 켜지는 순간, 나는 거실에 놓인 여행용 캐리어를 발견했다.고지훈은 그 안에 아들의 외투를 챙겨 넣고 있었고, 아들은 새로 산 공룡 책가방을 품에 안은 채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옆에 서 있었다.현관에는 명품 로고가 박힌 선물 상자가 버젓이 놓여 있었다.임해연이 SNS에 갖고 싶다고 올렸던 최신형 가방이었다.내가 돌아온 걸 알아차렸으면서도 고지훈은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갑자기 출장이 잡혔어. 천희도 데리고 갈 거야.”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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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여민지는 하루 종일 의심이나 하니까 보기만 해도 짜증 나.”고지훈의 사교계에서 나는 그저 웃음거리였다.남편에게 죽자고 목매는 본처, 고지훈이 진정한 사랑을 좇는 길을 가로막는 걸림돌.그러다 내 손가락이 갑자기 멈췄다.고지훈이 댓글을 남긴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해연이만 행복하면 그걸로 됐지.]뒤에 붙은 세 개의 태양 이모티콘이 내 눈을 찔렀다.강인호가 곧바로 그 뒤를 이었다.[어떤 사람은 또 난리 치겠네. 아무리 정실부인 행세를 해도, 해연이 좋아한다고 한마디만 하면 끝이잖아!]이름을 직접 언급하지 않았지만, 누구를 말하는지 모를 사람은 없었다.나는 망설임 없이 SNS 화면을 닫았다.따뜻한 우유 한 잔을 마신 뒤 깊이 잠들었다.다시 눈을 떴을 때, 고지훈이 잔뜩 화난 얼굴로 캐리어를 끌고 침대 곁에 서 있었다.아들까지 데리고 있었다.“남편이랑 아들이 밖에 있는데 전화 한 통도 안 하고 연락 한 번도 안 하면서 그렇게 푹 잘 수 있어?”“이제 나랑 아들은 네가 신경 쓸 가치도 없는 사람이 된 거야?”나는 말없이 고지훈을 바라봤다.예전에는 고지훈이 비행기에서 내렸는지, 호텔에는 도착했는지, 밥은 뭘 먹었는지 하나하나 신경쓰며 내내 걱정했다.그러면 고지훈은 내가 귀찮다며, 쓸데없이 참견한다고 했다.그런데 이제 내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자, 이번에는 나더러 자신을 무시한다고 했다.“당신이 출장 간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방해하지 않은 거야.”“게다가 당신과 아들 곁에는 임해연도 있었잖아.”고지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내가 임해연의 이름을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올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잠시 후 고지훈은 붉어진 얼굴로 애써 진정했다.“나랑 해연이는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야.”“그냥 내가 예전에 진 빚이 있어서 갚는 것뿐이야. 대체 몇 번을 더 설명해야 믿겠어?”나는 가볍게 손을 들어 고지훈의 말을 막았다.그리고 입가에 적당히 미소를 띠었다.“설명 안 해도 돼. 나도 다 이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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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고지훈은 넋이 나간 얼굴로 집에 돌아왔다.열쇠를 세 번이나 돌리고서야 현관문이 열렸다.5년 동안 매일 해오던 일이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손에 익지 않았다.“아빠!”천희가 맨발로 방에서 뛰어나왔다.“엄마는? 나 배고파!”고지훈은 기계적으로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리고 텅 빈 거실을 천천히 둘러봤다.여민지가 가장 아끼던 머그잔 한 쌍 중 하나가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신발장에 있던 여민지가 늘 신던 베이지색 슬리퍼도 보이지 않았다.“네 엄마는...”고지훈의 목이 바짝 조여왔다.그러다 갑자기 코웃음을 쳤다.“삐쳐서 나간 거야. 조금 있으면 돌아오겠지!”그리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렸다.“그런 애가 어떻게 우리 부자를 떠나겠어?”천희가 고개를 갸웃했다.“아빠, 그런데 왜 엄마 물건이 다 없어졌어?”“어린 애가 뭘 안다고!”고지훈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아들은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그냥 삐친 척하는 거야! 원장님이 분명 뭔가 잘못 아신 거라고.”“민지가 무슨 실력으로 케임브리지에 가겠어?”말을 이어가던 고지훈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고지훈은 술장으로 다가가 위스키를 꺼내 잔에 가득 따랐다.“네 엄마, 영어 시험도 재수해서 겨우 붙은 사람이야. 그런데 영국에 유학하러 간다고?”잔 안에서 호박빛 술이 천천히 흔들렸다.“몇 년 동안 집 밖에도 제대로 나가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그렇게 먼 곳까지 갈 수 있을 리가 없잖아.”“걔가 감히 갈 수나 있겠어? 나를 떠나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야. 아무것도 못 해.”천희가 겁먹은 얼굴로 고지훈의 옷자락을 살짝 잡았다.“아빠, 그럼 엄마는 언제 와서 밥 해줘?”“뭘 그렇게 재촉해!”고지훈은 짜증스럽게 넥타이를 풀어헤쳤다.“늦어도 사흘이면 울면서 돌아와서 아빠한테 용서해달라고 빌 거야.”고지훈은 고개를 젖힌 채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목구멍을 태우는 알코올조차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이름 모를 분노를 잠재우지는 못했다.그때 휴대폰 화면이 켜졌다.임해연에게서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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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고지훈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중얼거리다가, 문득 수상 증서 아래에 깔려 있던 항공권 예약 내역을 발견했다.[여민지/ 런던 히드로 공항/ 편도]발권일은 석 달 전이었다.고지훈의 숨이 갑자기 턱 막혔다.석 달 전, 바로 고지훈이 처음으로 임해연을 집에 데려와 함께 식사했던 날이었다.그날 여민지는 평소와 달리 저녁을 차리지 않고 야근한다고 했다.당시 고지훈은 오히려 여민지를 비웃었다.“그깟 직장에서 야근한다고 뭐가 달라져?”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날 밤 여민지에게서는 은은한 커피 향이 났던 것 같았다.여민지는 원래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커피를 마시면 손이 떨려 설계 도면을 그리는 데 방해가 된다고 했었다.“아빠...”천희는 여전히 훌쩍이며 물었다.“엄마가 우리를 버린 거야?”“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고지훈은 갑자기 아들을 끌어당겼다가, 아이의 몸에 손이 닿는 순간 힘을 빼고 아들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고지훈은 쪼그려 앉아 갑자기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아들에게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천희야,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너잖아. 엄마가 너 입히려고 곰돌이 스웨터도 사흘 밤을 꼬박 새워가며 뜨개질했잖아.”말을 이어가던 고지훈의 목소리가 갑자기 잠겼다.그 스웨터는 지난주 임해연이 ‘실수로’ 커피를 쏟았던 옷이었다.그때 여민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조용히 바닥에 떨어진 스웨터를 주워 쓰레기통에 넣었을 뿐이었다.창밖으로 해 질 녘 어둠이 짙어지고 있었다.고지훈은 휴대폰을 꺼내 익숙한 번호를 17번째로 눌렀다.기계음은 여전히 정중한 안내 멘트를 반복했다.[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뭘 잘난 척해!”고지훈은 화가 난 듯 휴대폰을 소파에 내던졌다.그런데 순간 화면이 다시 켜졌다.여민지의 SNS에 위치가 업데이트되었다.[런던·케임브리지대학교 킹스칼리지]사진 속에는 석양에 물든 캠 강이 펼쳐져 있었다.그리고 그 앞에는 펜을 쥔 가느다란 손목이 보였다.그런데 그 손목에 있어야 할 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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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여민지, 나를 떠나면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지금이라도 당장 돌아와. 그러면 용서해 줄게!]그러던 어느 순간부터 고지훈의 말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대체 언제까지 이럴 거야? 아들이 매일 울면서 너를 찾고 있어.][임해연의 일은 내가 설명할 수 있어. 돌아와. 우리 둘이 차분하게 이야기하자...]그러더니 나중에는 메시지에 애원하는 기색까지 묻어나기 시작했다.[내가 잘못했어... 정말 내가 잘못했어.][돌아와 주면 안 될까? 나랑 천희는 네가 없으면 안 돼.]나는 그 메시지들을 바라보며 그저 헛웃음만 나왔다.예전에 내가 병원에 누워 혼자 수술 동의서에 서명할 때, 고지훈은 단 한 마디의 걱정도 하지 않았다.수없이 많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자신과 아들의 입맛에 맞는 아침을 차려주었을 때도, 고지훈은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이라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그런데 이제야 고지훈이 깨달은 것이다.내가 고지훈을 떠날 수 없었던 게 아니라, 사실은 그가 나 없이는 살 수 없었다는 걸.나는 그 어떤 메시지에도 답하지 않았다.그러던 어느 날 밤늦게 휴대폰이 다시 진동했다.[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데?!]나는 한참 동안 화면을 바라보다가 마침내 손가락을 움직였다.그리고 딱 한 문장만 보냈다.[당신 서재 서랍에 내가 서명해 둔 이혼 합의서가 있어. 당신도 서명해.]그 말을 끝으로 나는 고지훈의 모든 연락처를 차단했다.고지훈은 완전히 미쳐버렸다.내게 연락할 수 없게 되자 고지훈은 내 동급생과 지도교수에게까지 집요하게 연락하기 시작했다.심지어 학교 행정실에까지 전화를 걸어 악을 쓰며 따져 물었다.[여민지가 어디 있는지 말해!]Martin은 미간을 찌푸린 채 자신의 휴대폰을 내게 내밀었다.화면에는 모르는 번호로 온 영어로 쓴 문자 한 통이 떠 있었다.[Professor, please tell Minji that her husband and son are waiting for her. Family is the most impor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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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대체 무슨 뜻이야? 그 여자 때문에 나랑 끝내겠다는 거야?][2021.09.16 08:12][전화 좀 받아!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많은 걸 포기했는지 알아?][2021.09.17 14:35][고지훈! 여민지가 너를 다시 용서할 것 같아? 지금쯤이면 널 죽도록 미워하고 있을걸!][2021.10.01 09:05][오늘 네 생일이잖아. 작년에 우리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나? 나 그때 그 자리에서 기다릴게.][2022.01.01 00:03][새해 복 많이 받아... 너무 보고 싶어.][2022.03.08 15:22][마지막으로 한 번만 물어볼게. 나 안 만날 거야?][2022.05.20 13:14][너 후회할 거야! 대체 여민지의 어디가 그렇게 좋아?! 걔는 주방만 맴도는 전업주부일 뿐이잖아!][2022.07.30 22:08][제발... 한마디만 답해주면 안 될까?]마지막으로 ‘읽음’ 표시가 남은 메시지는 2년 전 고지훈이 보낸 이별 통보였다.그 뒤로 임해연이 보낸 모든 메시지에는 선명한 붉은색의 ‘읽지 않음’표시가 남아 있었다.시간은 728일 전에서 멈춰 있었다.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휴대폰을 닫아 고지훈에게 돌려줬다.“고지훈.”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이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고지훈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무언가에 찔린 사람처럼 얼굴이 일그러지고, 목소리가 떨렸다.“중요하지 않다고?”“지난 2년 동안 내가 얼마나 후회했는지 알아?”“나는 정말 오래전에 임해연과 완전히 끝냈어.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지난 2년 동안 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인정할게. 내가 잘못했어.”“예전에는 임해연 때문에 널 홀대했고, 심지어 네가 하는 일이 뭔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한때는 네 직업을 무시하기까지 했어.”고지훈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눈가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리고 강인호나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야.”“내가 그 사람들이 너를 함부로 대하도록 내버려뒀어. 모임만 하면 너를 난처하게 만들었는데도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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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그동안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 그 좋았던 기억들까지 정말 다 잊은 거야?”나는 조용히 손을 빼고, 캠 강 위에 떨어지는 마른 잎을 바라보았다.“기억해. 기억하기 때문에 당신이 나를 몇 번이고 상처 입힐 때마다 나도 몇 번이고 기회를 줬던 거야.”“하지만 당신은 이제야 깨달았잖아.”“고지훈, 너무 늦었어.”“이 낙엽처럼.”나는 손바닥을 펼쳐 바람에 날려온 누렇게 마른 잎사귀 하나를 받아냈다.“다시 나뭇가지에 붙여놓는다고 해도... 이미 떨어진 잎은 다시 살아나지 않아.”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리고 저 멀리 캠 강 위로 반짝이는 물결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알고 있어? 케임브리지에서 보낸 지난 2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자유로운 시간이었어.”“나는 더 이상 누구의 아내도, 누구의 엄마도 아니었어.”“그저 나 자신일 뿐이야.”“그리고 이제야 알게 됐어. 사랑은 한쪽이 비굴하게 희생하는 게 아니라, 서로를 동등하게 존중하는 거라는 걸.”고지훈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얼굴은 종잇장처럼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그러니까...”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고지훈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우린 여기까지야.”그 말을 끝으로 나는 사람들 사이로 몸을 돌려서 걸어갔다.그리고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았다.등 뒤에서 천희의 찢어질 듯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엄마!”가슴이 세차게 흔들렸지만,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어떤 상처는 아무리 애써도 되돌릴 수 없다.어떤 균열은 아무리 꿰매도 다시 붙지 않는다.그리고 나는 마침내 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나중에야 알게 되었다.고지훈은 천희를 데리고 영국으로 이사 왔다.두 사람은 내 삶을 방해하지 않았지만, 매년 기념일이 돌아올 때마다 조용히 선물 하나를 보내왔다.어떤 때는 손수 만든 쿠키 한 상자였다.포장지에는 밀가루가 묻어 있었다.어떤 때는 건축 잡지 한 권이었다.그 안에는 케임브리지의 여러 칼리지 앞에서 찍은 두 부자의 사진이 끼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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