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100억 원 줄게. 일주일 안에 출국해서 다시는 내 아들 앞에 나타나지 마.” 김소아의 맞은편에 앉은 한미정은 노골적으로 경멸 어린 시선을 보냈다. 예전 같았으면 김소아는 눈시울을 붉히며 분명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저 준우 씨랑 돈 때문에 만나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지금은 그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한미정은 예상 밖의 대답에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비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주제 파악은 할 줄 아는구나.” 마지막 ‘주제 파악’이라는 말에 유난히 힘이 들어갔다. 김소아와 서준우는 애초부터 사는 세계가 다르다는 뜻이었다. 김소아는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수표를 받아 든 뒤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View MoreH시에서도 손꼽히던 서씨 가문은 순식간에 무너졌다.XS그룹의 대표 서준우는 납치와 불법 감금 등 여러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수사 과정에서 5년 전 있었던 성범죄 미수 사건까지 다시 드러났다.결국 서준우는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범행을 사주한 또 다른 관련자 역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범행이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본인 역시 크게 다쳐서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라는 점이 고려돼 형의 집행은 유예됐다.이후에는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됐다.서준우는 자신의 혐의를 모두 인정했다.대신 한 가지 부탁을 했다.김소아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만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김소아는 한참 고민한 끝에 면회를 가기로 했다.다만 혼자 가지는 않았다.면회실.두꺼운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앉았다.김소아는 수화기를 들었다.유리 너머로 들려오는 서준우의 목소리에 잠시 묘한 기분이 들었다.어쩌다 여기까지 온 걸까?“소아야.”체포된 뒤 재판이 끝날 때까지 몇 달이 흘렀다.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하지만 유리 너머로 서로를 바라보는 순간 마치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김소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다음 말을 기다렸다.“그때...”서준우가 한참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내가 당신을 서씨 가문으로 데려오지 않았다면, 우리도 이런 지경까지 되지 않을 수도 있었을까?”김소아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만약 그때 서준우가 자신을 서씨 가문으로 데려가지 않았다면, 그 뒤의 수많은 일도 없었을 것이다.서준우가 조금만 더 확실하게 행동했더라도 모든 게 달라졌을지도 몰랐다.끝까지 김소아를 선택했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임지연과의 결혼을 선택했거나.김소아가 애초에 서준우를 구하지 않았더라면 또 달랐을 것이다.하지만 세상에는 그런 ‘만약’이 없었다.서준우는 XS그룹의 유일한 후계자였다.기억을 되찾은 이상 평생 김소아와 낡은 단칸방에서 살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서씨 가문으로 돌아간 뒤, 부모의 뜻을 완전히 무시할
“서준우.”김소아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정말 몰라?”서준우의 몸이 그대로 굳어졌다.그때 지하실 쪽에서 임지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서준우!”울부짖는 소리가 선명하게 이어졌다.“김소아 대신 복수해 주겠다고? 제일 잘못한 사람은 당신이잖아!”서준우의 얼굴에서 핏기가 서서히 사라졌다.못 들은 척하고 싶었다.그대로 자리를 피하려던 순간 김소아의 손이 그의 뺨에 닿았다.서준우의 움직임이 멈췄다.작은 창으로 희미한 빛이 들어왔지만 지하실 입구는 여전히 어두웠다.김소아는 곧 손을 거뒀다.자리에서 일어나 서준우를 지나쳐서 밖으로 향했다.그러면서도 말은 멈추지 않았다.“임지연 말이 맞아.”서준우는 듣고 싶지 않아도 들을 수밖에 없었다.“정말 내 복수를 해 주고 싶다면, 먼저 당신 자신부터 돌아봐.”김소아의 목소리는 차분했다.“나는 부모도 없고 배경도 없는 가난한 여자였어. 그 사람들은 아무 이유 없이 날 미워한 게 아니야.”잠시 걸음을 멈췄다.“당신들 같은 사람들 눈에는 애초에 나 같은 사람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으니까.”김소아가 다시 서준우를 바라봤다.“그런 곳으로 나를 데려간 사람은 바로 당신이야.”“나를 여자친구로 곁에 두면서, 다른 여자와 애매한 관계를 이어 간 것도 당신이고.”목소리가 한층 또렷해졌다.“사람들이 날 무시하고 괴롭히는 동안 모른 척한 것도 당신이야.”김소아는 마지막으로 말했다.“서준우, 이 모든 일의 시작은 당신이었어.”서준우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자신은 김소아를 사랑했다고.하지만 입을 여는 순간 지난 일들이 하나씩 떠올랐다.5년 전의 자신.김소아가 자신을 미행했다며 짜증 내던 모습.임지연을 일부러 다치게 했다며 김소아를 몰아붙이던 모습.사고가 났을 때 망설임도 없이 다른 사람부터 감싸던 모습.무대 위에서는 임지연과 함께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그 아래에서 김소아의 손목이 부러질 만큼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데도, 제대로 신경도 쓰
김소아는 가정부의 부축을 받으면서 지하실 밖으로 나갔다.순식간에 지하실에는 서준우와 임지연, 그리고 조금 전에 끌려온 남자만 남았다.임지연은 겁에 질린 눈으로 한때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를 바라봤다.마치 괴물이라도 보는 듯했다.“준우 씨, 미쳤어?”목소리가 갈라졌다.“당신 완전히 미쳤어! 이러고도 벌을 받는 게 안 무서워?”오랫동안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한 듯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서준우는 임지연을 한 번 바라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다가갔다.턱을 거칠게 붙잡고 겁에 질린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짧게 웃었다.“벌?”서준우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내가 뭘 무서워해야 하는데?”“당신들이 그런 짓을 할 때는 벌받을 생각도 안 했잖아. 이제 와서 나한테 그런 말을 해?”임지연의 눈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그런 짓?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혹시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닐까?그 생각이 들자 마지막 기회라도 붙잡듯 억지로 눈물을 짜냈다.“준우 씨,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니야?”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누가 무슨 짓을 했다는 거야? 난 정말 아무것도 몰라.”하지만 다음 순간 서준우는 임지연을 거칠게 밀어냈다.이어 손수건을 꺼내 손을 닦았다.마치 더러운 것을 만진 사람처럼.임지연은 수치심과 분노가 치밀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감히 따질 수는 없었다.서준우가 진실을 알게 됐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여러 번 상상해 봤다.하지만 막상 이렇게까지 차갑게 돌변한 모습을 보자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서준우의 눈에는 분명한 혐오가 담겨 있었다.그리고 이어진 말은 더욱 믿기 힘들었다.“5년 전에 네가 꾸민 일 때문에 소아가 큰일을 당할 뻔했지.”서준우가 임지연을 차갑게 바라봤다.“이번에는 네가 썼던 방법을 그대로 돌려줄 거야.”임지연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조금 전 나간 김소아.얼마 전 손을 다친 사람들.지하실에 갇힌 자신.그리고 옆에 있는 낯익은 듯 낯선 남자.모든 게 하나로 이어졌다.임지연의
장씨, 이씨, 진씨, 왕씨 집안의 아가씨들이 같은 날 오른손을 크게 다쳤다는 소문은 금세 퍼졌다.그리고 바로 그날.평소처럼 회사에 가기 위해 차에 올라탄 김소아는 갑자기 정신을 잃었다.다시 눈을 떴을 때는 낯익은 방 안이었다.김소아는 한동안 주위를 살폈다.그러다 문득 기억해 냈다.5년 전 서준우를 따라 서씨 가문으로 들어왔을 때 사용했던 방이었다.그렇다면 자신을 이곳까지 데려온 사람이 누군지도 뻔했다.김소아는 곧바로 일어나서 문으로 향했다.손잡이를 돌려 봤지만 문은 밖에서 잠겨 있었다.“김소아 씨, 일어나셨어요?”문밖에서 가정부의 목소리가 들렸다.“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바로 대표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김소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급하게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렸다.김소아는 방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밖으로 나갈 수 있는 곳은 전부 막혀 있었다.확인할 건 다 확인했다.김소아는 더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서준우가 대체 뭘 하려는 건지 한번 보기로 했다.오래 기다리지는 않았다.잠시 뒤 방문이 열리고 정장을 입은 서준우가 들어왔다.김소아가 가만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보자,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익숙한 사람과 익숙한 방.지금 상황만 아니었다면, 순간 5년 전으로 돌아온 듯한 착각이 들었을지도 몰랐다.“소아야...”서준우가 무심코 이름을 불렀다.김소아가 돌아봤다.눈빛에는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서준우는 그 반응을 보지 못한 듯 웃으면서 방 안을 둘러봤다.“이 방, 다시 예전처럼 꾸며 놨어.”김소아를 바라보며 물었다.“기억나? 우리가 여기 살던 때랑 거의 똑같지?”정말 비슷했다.예전에 두 사람이 다투다 떨어뜨려서 모서리가 깨진 액자까지 똑같이 만들어서 같은 자리에 놓아두었다.굳이 묻지 않아도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아무리 똑같이 되돌려 놓는다 해도 두 사람의 감정까지 예전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김소아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날 여기까지 데려온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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