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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Autor: 안이슬
“뭘 하려는 거야? 할 말이 있으면 나한테 해! 우리 아빠는 건드리지 마!”

진지희는 두려움에 눈을 크게 떴다.

더는 자존심 따위를 챙길 여유도 없었기에 그대로 무릎을 꿇고 유명훈에게 애원했다.

하지만 유명훈은 진지희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대신 문밖에 있는 집사를 향해 나지막하게 소리쳤다.

“끌어내세요. 더 이상 나영이 눈에 거슬리게 하지 말고요!”

집사는 곧장 다가와 거칠게 진지희를 안방 밖으로 끌어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그대로 세게 닫혔다.

진지희는 문밖에 무릎을 꿇은 채 울면서 애원했다.

“제발 부탁이야. 우리 아빠는 건드리지 마!”

“이미 식물인간이잖아. 정말 더는 견디지 못해!”

하지만 방 안에서는 격정적인 소리가 흘러나왔다.

거센 파도처럼 밀려온 그 소리가 진지희의 마지막 동아줄마저 완전히 끊어버렸다.

한 번 밀려온 파도 위로 또다시 더 큰 파도가 덮쳐 온 것 같았다.

굴욕보다 먼저 찾아온 감정은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과 같은 절망감이었다.

진지희는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고열에 시달리는 몸도, 온몸을 짓누르는 극심한 통증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대로 문밖의 사나운 비바람 속으로 뛰어들었다.

날씨가 워낙 나빴기에 진지희는 택시조차 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진지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폭우 속을 10킬로미터는 족히 되는 거리를 미친 듯이 달렸다.

몇 번이고 진흙탕에 세차게 넘어졌지만,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나서 계속 달렸다.

마침내 온몸이 흙투성이가 된 채 요양병원으로 뛰어 들어갔을 때, 진지희는 지하실 입구에 홀로 누워 있는 아버지를 발견했다.

식물인간이 된 아버지는 미약하게 숨을 쉬고 있었고, 몸의 절반은 이미 빗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몸에는 억제대가 묶여 있었고, 사지는 꽉 조인 탓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늙고 창백한 얼굴에는 본능적으로 흘린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본 진지희는 가슴을 칼로 도려내는 것처럼 아팠다.

미친 사람처럼 달려 든 진지희는, 온 힘을 다해서 의료용 침대를 비를 피할 수 있는 안쪽으로 밀어 보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체중에 철제 프레임의 무게까지 더해진 의료용 침대는, 고열로 거의 탈진한 진지희의 힘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생명 유지 장치도 없이 언제 돌아가실지 몰랐다.

결국 진지희는 유명훈에게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다.

목소리는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제발 부탁이야. 나한테 뭘 시키든 다 할게. 그러니까 우리 아빠만은 놔줘!”

그러나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것은 허나영의 비웃음 섞인 목소리였다.

[진지희, 네가 예전에 나를 때리고 욕하고, 또 나를 그곳으로 보내 버린 것까지 하나하나 다 갚아 줄 거야. 고작 이 정도도 못 견디겠어? 이제 겨우 시작인데?]

진지희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허나영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더니, 날카롭고 귀를 찢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사모님, 저는 그저 오빠를 곤란하게 만들기 싫어서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민 것뿐인데, 왜 이렇게 독한 말로 저를 모욕하세요?]

[저, 저는 그저 진심으로 오빠를 사랑할 뿐이에요.]

허나영은 눈물까지 흘리며 가련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처음부터 오빠의 그 어떤 것도 탐낸 적 없어요. 사모님 자리나 유씨 집안의 재산을 두고 사모님과 다툴 생각도 전혀 없고요.]

진지희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낌새를 알아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아니나 다를까 곧 유명훈의 음침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진지희, 넌 정말 답이 없구나?]

진지희는 서둘러 해명했다.

“아니야. 나는 그냥 우리 아빠를 놔달라고 부탁하려던 것뿐이야.”

[됐어!]

수화기 너머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분노를 애써 억누르고 있는 게 그대로 느껴졌다.

[네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모를 것 같아?]

[나영이 정도면 충분히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야. 그런데도 너는 우리 집안 재산 때문에 기어이 걔를 죽음으로 몰아넣어야 속이 시원하겠어?]

[넌 정말 나를 끝까지 실망시키는구나!]

진지희의는 가슴을 두꺼운 솜으로 꽉 틀어막은 것처럼 답답해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었고, 무슨 말을 더 꺼내는 것조차 변명처럼 들릴 터였다.

유명훈은 이미 진지희에게 대한 편견이 너무 깊숙하게 자리 잡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진지희가 무슨 말을 하든 믿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다시 입을 연 유명훈의 목소리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기색만 남아 있었다.

한 글자 한 글자가 날카로운 칼날처럼 진지희의 심장을 베었다.

[네 아빠를 살려 달라고? 좋아. 그럼 요양병원에서 머리 좀 제대로 뜯어고치고 정신 차려.]

진지희의 신경이 순간적으로 곤두서면서 유명훈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아차렸다.

이 요양병원에는 최첨단 전기경련치료 장비가 있었다.

그러니 진지희의 정신을 억지로 차리게 만들기에는 충분한 장비였다.

“안 돼. 당신도 알잖아. 나 죽을 거야...”

진지희는 오랫동안 중증 우울증을 앓아 왔다.

전기경련치료는 일반인에게는 그저 고통스러운 치료에 그칠 수도 있지만, 진지희에게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그해, 아버지가 경쟁자의 계략에 걸려들었을 때였다.

함께 붙잡혔던 부녀는 고문용 전기의자에 묶인 채 사흘 밤낮을 고문당했다.

구조됐을 당시 진지희는 자신의 온몸을 미친 듯이 할퀸 상태였다.

열 손가락의 손톱은 모조리 부러져 부러져 있었고, 온몸은 피범벅이 되어서 사람의 모습조차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 일 이후 진지희는 우울증을 앓게 됐다.

그때의 일을 떠올릴 때마다 증상이 재발했고, 심각한 신체화증상까지 나타났다.

유명훈이 진지희를 가장 사랑했던 그 시절에는 ‘전기’라는 단어조차 감히 입에 올리지 못했다.

그 말만으로도 진지희가 자극을 받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진지희의 갈라진 목소리에는 이 사랑에 대한 마지막 애원이 담겨 있었다.

이제 자신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한 번쯤은 마음이 약해져 주기를 바라는 마지막 부탁이었다.

“제발...”

유명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진지희는 두 사람의 지난날을 생각해 주는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뭐?”

“바로 그렇기 때문에 네가 제대로 교훈을 얻어야 하는 거야!”

진지희의 마음은 순식간에 끝없는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그래서 뭐라니?’

그 한마디는 너무나 명확했다.

이제 유명훈은 허나영을 위해서라면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자신을 지옥으로 밀어 넣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은 진지희는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손에서 놓친 휴대폰이 진흙탕에 떨어졌다. 곧이어 합선이 일어났는지 지직거리며 몇 번 번쩍이더니 화면이 완전히 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요양병원 의사들이 밖으로 나왔다.

그 사람들은 진지희를 끌고 가서 전기치료 침대에 묶었고, 여자가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저승사자처럼 냉정했다.

“대표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사모님이라고 봐드리지 말라고요.”

“사모님이 더 심한 고통을 받을수록 아버님이 장치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더 길어져요.”

진지희는 마침내 몸부림치는 것을 포기하고 비참하게 헛웃음을 지었다.

알고 보니 99번째 내연녀인 허나영은 이미 유명훈의 마음속에서 영원한 마지막 여자가 되어 있었던 같았다.

자신이 당하는 고통 역시 더는 혼전 계약서를 발견한 뒤 사랑받지 못한 분노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전기치료 장비가 작동하기 시작하면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날카롭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진지희는 절망 속에서 눈을 감았다.

강렬한 전류가 온몸을 관통하는 순간, 진지희의 입에서는 고막이 찢어질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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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약 종료를 통보합니다   제16화

    허나영이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너는 지금 모든 걸 다 가졌는데, 나는 왜 아무것도 가져서는 안돼?”“분명히 유명훈이 자기 입으로 말했어. 영원히 나한테 잘 대해 주겠다고. 그런데 왜 결국 나를 이런 꼴로 만든 거야?”“이게 다 너 때문이야! 내가 지금 이런 거지꼴로 살게 됐으니 너도 잘 살 생각은 말아!”말을 마친 허나영은 품에 폭탄을 안은 채 진지희를 향해 달려들었다.진지희는 황급히 몸을 돌리면서 달아났다. 막 허나영에게 붙잡힐 것 같던 순간, 유명훈과 배상헌이 갑자기 나타났다.두 사람이 함께 달려들어서 완전히 미쳐버린 허나영을 제압하고 진창에 사정없이 눌렀다.더러운 흙탕물이 허나영의 얼굴을 뒤덮었는데도, 여자는 여전히 쉬지 않고 저주를 퍼부었다.허나영이 완전히 제압된 것을 확인하자, 배상헌은 곧바로 몸을 돌려서 달래듯 진지희를 품에 꽉 끌어안았다.유명훈은 눈을 들더니 서로 기대고 있는 두 사람을 씁쓸하게 바라보았다.유명훈은 진지희가 배상헌에게 느끼는 의지와 감정을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질투로 미칠 것만 같았지만, 지금의 자신은 아직 과거를 완전히 정리하지도 못했다는 사실을. 그랬기에 다시 진지희에게 다가가 마음을 얻을 자격조차 없다는 사실까지도.유명훈은 애써 몸을 일으키고 멀리서 진지희를 바라보았다.“나는 너를 한 번 놓쳤어. 두 번은 절대 없을 거야. 지희야, 마지막으로 하루만 더 기다려 줘. 모든 걸 완전히 정리하고 다시 돌아올게.”“나는 정말 너를 놓을 수가 없어.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딱 한 번만.”진지희는 시종 침묵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눈빛에도 조금의 흔들림조차 없었다.유명훈의 가슴은 칼로 저미는 듯 아팠지만, 그래도 사람을 시켜서 허나영을 데려가게 한 뒤 힘겹게 몸을 돌려 떠났다.그런데 바로 그 순간, 사고가 일어났다.허나영이 갑자기 미친 듯이 몸부림치더니, 자신을 제압하고 있던 사람의 손목을 강하게 물었다. 그 사람이 고통에 손을 놓는 순간, 허나영은 품에서 단검 한 자

  • 계약 종료를 통보합니다   제15화

    하지만 진지희는 유명훈의 광기를 너무 얕잡아 본 것이었다.유명훈은 생방송을 켜고 자신을 사냥개 사육장 우리에 가둔 뒤, 며칠 동안 굶긴 맹견들이 자신의 몸을 물어뜯게 했다.[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잘못을 저질렀고, 다른 사람이 내 아이 다섯을 죽게 내버려뒀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제 아이들에게 속죄하겠습니다.]방송 시청자 수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유명훈은 카메라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마치 렌즈 너머의 진지희를 바라보는 것처럼 다정하게 미소를 지으면서.[사랑하는 사람의 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만회하고 싶습니다. 내가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다는 걸 알아주기만을 바랄 뿐입니다.]말을 마친 유명훈은 쇠막대기를 들고 미친 듯이 철창을 두드렸다.일부러 맹견들의 분노를 자극한 것이었다.방송 댓글 창이 순식간에 도배가 되더니 모두가 유명훈이 미쳤다고 말했다진지희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대폰을 움켜쥔 손은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유명훈은 진지희를 몰아붙이고 있었다.언제나 착했던 진지희에게 생명과 원한 사이에서 선택하라고 강요하고 있었다.배상헌은 유명훈이 진지희를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곧바로 일을 내버려둔 채 곧바로 돌아왔다.이윽고 진지희의 곁으로 다가간 배상헌이 조용히 휴대폰을 빼앗아서 종료 버튼을 눌렀다.“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해. 지희야,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나는 응원할 거야.”이와 동시에 맹견 한 마리가 유명훈을 향해 사납게 달려들면서, 남자의 종아리를 세차게 물어뜯었다.그리고 유명훈은 손에 든 쇠막대기를 휘두르며 필사적으로 맞섰다.마음속에는 오직 하나의 믿음만이 유명훈의 강렬한 생존 본능을 굳건히 떠받치고 있었다.‘나가야 해. 반드시 이곳을 빠져나가 지희 곁으로 돌아가야 해.’‘그러면 지희는 반드시 나를 용서할 거고, 우리는 반드시 다시 행복해질 거야.’피가 사방으로 튀었고, 살점이 한 덩이씩 뜯겨 나가면서 아무렇게나 내던져졌다.철창에도 짚더미에도

  • 계약 종료를 통보합니다   제14화

    진지희는 배상헌의 보살핌 속에서 차츰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배상헌은 심리 치료 전문가까지 불러서 우울증 치료를 받게 했다.배상헌이 있는 곳은 섬나라였다. 국토 면적은 크지 않았지만 과학기술이 발달한 나라였다. 진지희는 몸을 회복한 뒤 BU그룹에 입사하라는 제안을 거절하고, 대신에 한 게임 회사에 지원해서 입사했다.지난 몇 년 동안 진지희는 줄곧 유명훈을 중심으로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라는 존재를 거의 잊고 있었다.대학때 게임 디자인과 프로그래밍으로 상을 휩쓸었던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도.진지희는 타고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그래도 다시 일에 뛰어드니 다소 버거운 감도 없지 않았다.하지만 끊임없이 노력하는 그 과정에서, 진지희는 난생처음 느껴 보는 안정감을 느꼈다.시간은 하루하루 흘러갔고 진지희와 배상헌의 사이는 점점 가까워졌다.두 사람은 매일 함께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며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가끔은 함께 술을 마시기도 했다.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은 마치 평범한 연인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사실 진지희도 배상헌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제 막 실패한 결혼을 끝낸 진지희는 그렇게 빨리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다행히 배상헌도 서두르지 않았다.두 사람은 모두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거라고 믿었다.그러던 어느 날, 진지희가 퇴근했을 때는 이미 밤 11시가 다 되어 있었다.마침 배상헌은 최근 출장 중이었기에, 진지희는 혼자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다.그런데 문득 뒤에서 누군가 자신을 따라오는 것 같자, 진지희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재촉했다.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도 함께 빨라졌고, 점점 자신에게 가까워졌다.진지희는 겁에 질려서 종종걸음으로 달리기 시작했다.그 순간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지희야, 무서워하지 마. 나야!”그 소리에 진지희의 온몸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바로 그 자리에 멈춰 섰다.유명훈이었다.뒤에 있던 유명훈은

  • 계약 종료를 통보합니다   제13화

    진지희는 갑자기 눈을 떴다.강렬한 질식감의 여운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았다진지희는 가슴을 꽉 움켜쥔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깨어났어요?”문가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기품 있고 꽤 젠틀한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손에는 진지희의 얼굴을 닦아줄 수건과 물이 담긴 대야가 들려 있었다.“2주 동안이나 의식이 없었어요. 의사 말로는 몸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무의식 속에 죽으려는 마음이 남아 있어서 살려는 의지가 전혀 없었다고 하더라고요.”“그래서 좀처럼 깨어나지 않았던 거고요.”진지희는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았다.침대 곁으로 다가온 남자가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마치 이런 장면을 이미 수없이 겪어 본 사람처럼 자연스러운 태도였다.남자는 진지희와 시선을 마주치더니 부드럽게 웃었다.“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요. 바다에 빠진 당신을 구한 사람, 나예요. 며칠 동안 의식이 없을 때도 계속 곁을 지켰고, 이런저런 얘기도 많이 해줬어요.”진지희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 마치 사포로 문지른 것처럼 거칠고 쉰 목소리가 나왔다.“고마워요.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그제야 손에 들고 있던 물대야를 내려놓은 남자는 진지희 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이며 일부러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정말 매정하네요, 후배님. 설마 나를 정말 기억하지 못하는 거예요?”진지희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남자를 바라보았다.남자는 뚜렷한 이목구비에 깊은 눈매를 하고 있었다. 매끄럽게 이어지는 얼굴선은 마치 신이 조각으로 깎아 놓은 듯 완벽했고, 유명훈보다도 몇 배는 더 잘생겼다.‘이런 남자를 내가 알고 있었다면, 어떻게 기억이 조금도 안 날 수가 있겠어?’진지희는 솔직하게 고개를 저었다.“미안해요. 기억이 안 나서요.”남자는 마침내 웃음을 거두고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그러고는 휴대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찾아서 진지희에게 내밀었다.“그럼 이건 기억나요?”사진 속에는 산에 올라서 쓰레기를 줍

  • 계약 종료를 통보합니다   제12화

    강현숙은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린 유명훈의 낯빛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연기하지 마. 이 계약서는 줄곧 본가 금고에 보관되어 있었어.”“그날 지희가 계약서를 가지러 갔을 때, 너는 지희와 생방송까지 하고 있었잖아. 어떻게 모를 리가 있어?”유명훈이 뒤통수를 한 방 맞은 사람처럼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말 한마디 한마디가 독을 바른 화살처럼 유명훈의 심장을 사정없이 꿰뚫는 것 같았다.유명훈은 머릿속에 흩어진 조각들을 맞춰 보면서 앞뒤를 이어 보려 애썼지만, 이 순간만큼은 멍청이가 된 것만 같았다. 머리가 윙윙 울릴 뿐, 도무지 실마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문득 인터넷에서 이혼하라는 반응이 쏟아졌던 그 인기 댓글에 진지희가 본계정으로 ‘좋아요’를 눌렀던 일이 떠올랐다.그때 유명훈은 진지희가 속 보이는 연기를 한다고 단정했다.이후에도 진지희가 금고에서 상당한 액수의 재물을 가져갔기에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다.심지어 오늘 파티장에서도, 진지희가 유씨 집안의 돈 때문에 그 계약서의 내용을 지키느라 더 이상 자신의 생활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그래서 질투하거나 소란을 피우지도 않는 것이라고 여겼다.그런데 알고 보니 진지희는 그 돈을 한 푼도 건드리지 않았고, 두 번째 계약서만 가져갔던 것이다.진지희는 진작부터 자신과 이혼하기로 결심했던 것이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유명훈은 뭔가를 살짝 깨달은 것 같았다. 진지희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고, 다시 시작할 기회를 주고 싶었다.지난 세월 동안 자신은 사실 그 여자들 누구와도 진짜로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다고 말하려고 했다.그저 화가 나서, 진지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어서 일부러 여자들을 하나둘씩 데리고 다니며 속을 긁었던 것뿐이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허나영까지도 그랬다.유명훈이 허나영을 그나마 특별하게 여겼던 것은, 그 눈매가 진지희와 많이 닮았기 때문이었다.‘대체 왜?’‘왜 지희는 자신에게 해명할 기회조차 조금도 남기지 않은 채, 이렇게 나의 삶에서 사라져

  • 계약 종료를 통보합니다   제11화

    순간, 유명훈은 벼락을 맞은 것만 같았다.그 자리에 그대로 굳은 채 오감이 모두 마비된 듯했다.‘죽었다고? 어떻게 죽을 수가 있지?’유명훈은 순간 화가 치밀어 올라서 원장의 옷깃을 거칠게 움켜쥐었다.“이렇게 큰일을 왜 아무도 나한테 알리지 않았죠?”원장은 유명훈의 기세에 겁을 먹고 목소리를 낮췄다.“그게 사모님께서 알릴 필요가 없다고 하셔서요. 장인어른은 다른 병원에서 돌아가셨고, 요양병원으로는 아예 돌아오지 않으셨어요.”“사모님께서 이미 아버님 장례를 치르셨다고...”순간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은 듯했다.유명훈은 눈을 크게 뜬 채 원장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원장이 한 말 하나하나는 분명 다 알아들었다.그런데 그 말들을 이어 붙이면, 대체 무슨 뜻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두 손이 서서히 주먹을 쥐면서 눈에는 핏발이 섰다.순식간에 커다란 손으로 심장을 꽉 움켜쥔 듯했다. 마치 심장이 뛸 틈을 주지 않는 것처럼 가슴이 꽉 막혔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답답함이 점점 커지면서, 유명훈의 표정도 서서히 광기에 가까워졌다.‘장인어른이 돌아가셨어.’진지희와 이어져 있던 마지막 끈이 이렇게 끊어진 것이었다.하늘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고, 몸을 가누지 못한 유명훈은 비틀거리며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마침 도착한 비서가 곧바로 달려와 유명훈을 부축했다.“대표님, 어르신께서 지금 당장 저택으로 모시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사모님 일로 대표님께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시면서요.”사모님 일이라는 말에 유명훈은 한 치도 지체하지 않았다.곧장 비서를 따라 유씨 본가로 향했다.불당에 앉아 있던 강현숙은 유명훈이 들어오자, 도우미에게 서류 한 뭉치를 가져오게 했다.“이것부터 한번 보거라. 전부 B시와 A시의 명문가의 미혼 여자들이야.”“너와 지희가 결혼생활을 포기하기로 했다면, 어서 다른 좋은 여자를 찾아서 유씨 집안의 대를 이어야지.”“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어서 저승에 가서도 네 할아버지를 볼 낯이 없잖아.”유명훈이 벌떡 고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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