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늦은 시각, 대기업 본사 18층 전무실.낮에 있었던 야간 세미나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문리안 변호사는 최종 수정된 M&A 계약 부속 서류를 검토하기 위해홀로 서지우의 집무실로 불려 들어왔다.넓고 쾌적한 전무실 안에는 은은한 간접 조명과 함께 묵직한 서류 냄새만이 가득했다.하지만 그 진지한 공간의 공기를 완전히 깨트리는 이는 따로 있었다.바로 서지우 전무였다.서지우는 책상 뒤편의 중후한 가죽 의자에 앉아 업무를 보는 대신,일부러 전무실 한쪽에 마련된 널찍한 소파에 다리를 툭 꼬고 비스듬히 몸을 파묻고 있었다.서른 네살의 완숙한 대기업 전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그의 눈빛은 짓궂은 장난기를 가득 품은 채 리안의 일거수일투족을 끈질기게 쫓고 있었다.문리안 변호사는 소파 앞 낮은 협탁 위에 두툼한 서류 뭉치를턱 소리가 나게 내려놓으며, 참아왔던 숨을 가쁘게 내뱉었다."전무님. 이 부속 합의서 제 3조 2항의 배임 면책 조항 말입니다. 명백히 자문사 측의 권한을 넘어선 과도한 요구 아닙니까? 왜 자꾸 이렇게 불필요한 문구를 마구잡이로 넣으시는 거죠?"문리안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따져 물었지만,서지우는 느긋하게 팔짱을 낀 채 피식 웃을 뿐이었다."글쎄요. 내 눈에는 그 조항이 꼭 필요해 보이는데. 왜요, 문 변호사님 눈에는 아주 눈엣가시처럼 거슬리나 봅니다?""지금 공적인 계약 문구를 조율하는 자리입니다. 감정적으로 사사건건 시비를 거실 거면 자문 계약을 파기하든지 하시죠."새침하게 쏘아붙이며 서류를 탁탁 정리하는 리안의 모습에,서지우는 입꼬리를 슥 말아 올리며 능청스럽게 한 술 더 떴다."파기라니요, 너무 살벌하시네. 나이 서른넷 먹고 스물여섯짜리 파트너 변호사한테 이렇게 매번 뼈 때리는 설교를 들으려니, 이 나이 많은 전무는 뼈마디가 아주 마디마디 쑤셔 죽겠어요. 독사라는 별명은 어디 안 가네요, 그래도 형수님 친구분이니 살살 하실 줄 알았는데.. 아주 사람 잡는 재주가 탁월하십니다."그 순간, 서류를 넘기던
태산 로펌 대회의실.M&A 인수 대상 기업의 재무제표 속 숨겨진 채무 리스크와잠재적 법적 부실을 낱낱이 파헤치기 위한 야간 집중 세미나가 열렸다.대형 스크린 앞에는 파트너 변호사 문리안이 서 있었다.칼단발을 단정하게 정돈하고 단정한 다크 블루 셋업 수트 차림으로 선 리안의 모습은그 자체로 완벽한 프로페셔널 커리어 우먼의 표본이었다.그녀의 손에는 프리젠테이션 슬라이드를 넘기는슬림한 검은색 레이저 리모컨(프레젠터)이 들려 있었다."자, 여기 화면을 잘 보시죠. 이쪽 제 5호 감사보고서의 재무 수치를 보면 자산 가치가 일견 탄탄해 보이지만, 이면에는 해외 자회사의 우발 채무가 고스란히 숨겨져 있습니다. 레이저 포인터가 가리키는 이 세 번째 항목의 이자율 변동 폭을 주목하십시오."치익-- 붉은색 레이저 포인터 불빛이대형 스크린의 복잡한 수치와 법적 조항들을 정확하게 짚어냈다.문리안 변호사는 막힘없이 논리적인 목소리로복잡한 M&A 구조의 허점들을 조목조목 비교 분석해 설명해 나갔다.그녀의 지적은 날카로웠고, 설명은 명쾌했으며,거침없는 태도에는 일에 대한 자부심과 프로의식이 가득 묻어났다.백전노장인 로펌 시니어 변호사들과 그룹 기획팀 팀원들조차그녀의 완벽한 족집게 강의에 홀린 듯 숨을 죽이고 집중하거나 필기하기 바빴다.하지만 그 많은 사람 중에서, 오직 단 한 사람만은스크린이 아니라 오직 문리안이라는 여자에게 시선이 완전히 고정되어 있었다.대회의실 상석에 팔짱을 낀 채 비스듬히 기대어 앉은 서지우 전무.그는 턱을 괸 채, 레이저 리모컨을 능숙하게 누르며당차게 회의실을 압도하는 리안의 옆모습을 넋 놓고 감상하고 있었다.'저 어린 아가씨…… 진짜 미치도록 멋있네. 이렇게 멋진 여자이니 내가 바라볼 수 밖에...'평소에 툭하면 툴툴대고 철벽을 치던 모습은 어디 가고,업무에 몰입해 눈빛을 반짝이며 사람들을 휘어잡는 저 지적인 아우라.칠판이나 스크린 앞을 당당하게 거닐며 논리를 펼치는 리안의 모습은34세 완숙한 늑대의 심장을
태산 로펌의 파트너 변호사 집무실 안쪽, 두 사람만의 오붓한 별도 미팅룸.양측의 M&A 본계약 체결을 코앞에 두고세부 조항의 최종 문구를 조율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대기업 임원진들이나 로펌의 다른 변호사들이 다 빠져나간 채,실무 총괄인 서지우 전무와 파트너 변호사 문리안,딱 두 사람만 마주 앉아 있었다.회의실의 공기는 겉보기엔 사뭇 진지한 비즈니스의 장이었으나,실상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리안은 숏컷 단발머리를 깔끔하게 귀 뒤로 넘기고,날카로운 눈빛으로 모니터 화면과 서류를 번갈아 탐색하며조목조목 짚어 나갔다."이쪽 제 14조 손해배상 예정 조항 말입니다. 자회사 매각 시 발생할 수 있는 잠재적 리스크에 대비해 위약벌 조항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완했습니다. 검토해 보시죠."완벽하고 흠잡을 데 없는 프로페셔널한 브리핑이었다.자문 변호사로서의 유능함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하지만 서지우는 그 복잡한 법률 조항이나 리스크 분석에는눈꼽만큼도 관심이 없는듯 했다.문리안 변호사의 실력을 믿은 탓도 있었지만,둘 만 자리한 이 시간,이 공간을 자신과 리안의 온전한 시간이라고 여기는 것만 같았다.서 전무는 턱을 괸 채 삐딱하게 의자에 기대어문리안 변호사의 얼굴만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다.34세의 완숙한 어른 남자라는 수식어가 무색하게,지금 그의 행동은 마치 자기가 좋아하는 유치원생 짝꿍의고무줄을 끊고 싶어 안달이 난 장난꾸러기 소년과 다름없었다.서지우는 서류를 슬쩍 내려다보더니,느닷없이 콧방귀를 뀌며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원참…… 문 변호사님, 이 조항 말인데 말입니다. 내용이 너무 우리 그룹 쪽을 쥐어짜는 거 아닌가요? 조항이 아주 살벌해서 읽는 사람 심장이 다 쫄립니다. 이거 너무 문 변호사님 위주로 편파적으로 쓴 거 아닙니까?"문리안은 기가 막히다는 듯 펜을 탁 내려놓고 서지우를 노려보았다."편파요? 이건 상법상 표준 자문 계약에 근거한 정당한 리스크 헤지 조항입니다. 전무님, 법률적
어두운 새벽, 빗속의 배웅을 마치고 전무실로 돌아온 서지우는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그는 집무실 한켠에 마련된 개인 옷장의 문을 조용히 열어젖혔다.그 안에는 3년 전 비 오는 날,산후조리원 앞에서 온몸이 젖은 채 벌벌 떨던 문리안에게무심하게 툭 걸쳐주었던 바로 그 검은색 자켓이 고이 걸려 있었다.드라이클리닝을 마쳐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지만,묘하게도 그 자켓을 바라볼 때마다 그날 밤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코끝을 스치던 리안의 서늘하면서도 달콤한 바닐라 향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것만 같았다."참…… 사람 미치게 하는 재주도 있지."지우는 자켓의 소매 끝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낮게 헛웃음을 흘렸다.다음 날 아침,서지우의 머릿속은 온통 문리안이라는 여자로 가득 차 있었다.전날 회식 자리에서 믹스커피를 찾던 그녀의 모습과전에 고급원두로 내린 아메리카노나 에스프레소 보단믹스커피가 취향이라던 불현듯 떠오른 서지우는비서가 출근하자마자 비서에게 곧바로 특별 지시를 내렸다."김 비서. 우리 사내 탕비실이랑 전무실 비품함 말이야.""네, 전무님. 어떤 걸 준비해 드릴까요?""거기 인스턴트 커피들 3분의 1로 줄이고, 대신 시중에 파는 오리지널 믹스커피부터 부드러운 맛, 깔끔한 맛, 프리미엄 원두 믹스까지 종류별, 품목별로 아주 박스 채로 쟁여놔. 알겠어?""네? 믹스커피요? 전무님은 에스프레소만 찾으시지 않으셨습니까?""커피를 나만 마시는 건 아니잖아.. 내가 마실 거 아니니까 묻지 말고 당장 갖다 놔. 아, 그리고 비품해 둘 커피들 맛이 어떻게 다른지, 직접 마셔보고 내 책상 위에 간단히 보고서로 올려두고."김 비서는 영문도 모른 채 진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한편, 로펌 의 파트너 변호사 집무실.문리안은 아침부터 모니터 화면을 보며 심각하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밤새 잠을 설친 탓도 있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어젯밤 택시를 타려던 순간, 자신을 붙잡았던 서지우의...뜨겁고 커다란 손바닥의 감촉
시끌벅적했던 합동 팀 결성 회식이 끝난 시각은밤이 깊어 이미 자정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식당 문을 나서자, 가을밤의 서늘한 공기와 함께 부슬부슬 가랑비가아스팔트 바닥을 적시며 내리기 시작했다.우산이 없던 직원들은 저마다 코트를 머리에 이거나 발걸음을 서둘러지하철역과 택시 승강장으로 흩어졌다.건물 처마 아래에 멈춰 선 서지우는이마에 맺힌 알코올의 열기를 식히듯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34세의 완숙한 전무라는 타이틀과 달리,오늘따라 마셔댄 술과 문리안과의 아슬아슬한 기싸움 탓에 머릿속이 핑핑 돌았다.특히 테이블 아래에서 다리가 닿았던 그 묘한 감각과,3년 전 자켓 메모지의 비밀을 기습적으로 물었을 때흔들리던 리안의 눈빛이 자꾸만 뇌리를 스쳤다.그때, 출입구 쪽에서 깔끔하게 트렌치코트를 여미며 걸어 나오는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바로 문리안이었다.서지우는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며 문리안에게로 다가갔다.술기운 탓에 걸음걸이가 살짝 비틀거렸지만,겉으로는 최대한 어른 남자의(8살 연상남의) 여유를 가장하며 리안의 앞을 가로막듯 섰다."문 변호사님, 이 시간에 여자 혼자 이 비 오는 거리를 걷겠다고요? 택시는 부르셨나요?"리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서지우를 올려다보았다.늦은 시간까지 술을 꽤 마신 탓에 서지우의 눈빛은 평소보다 나른하게 풀려 있었고,젖은 아스팔트 냄새와 섞인 은은한 알코올 향이 훅 끼쳐왔다."전무님, 저 어린애 아니고, 전무님 회사와 계약한 변호사입니다. 그리고 지금 충분히 혼자 갈 수 있으니까 제발 그쪽 앞가름이나 잘하시죠. 얼굴이 토마토처럼 빨개지셨는데요. 걸음걸이도 휘청하시는것 같고요.."리안이 차갑게 쏘아붙이며 스마트폰 화면을 두드리려 하자,서지우는 콧방귀를 뀌며 허세를 부렸다."누가 아니랍니까? 난 멀쩡합니다. 다만 우리 그룹의 귀하신 자문 변호사님이 이 밤에 길바닥에서 고생하면 내 체면이 뭐가 되겠습니까. 가만히 있어요. 내가 잡아줄 테니까."서지우는 삐뚤빼뚤한 발걸음으로
태산 로펌과의 합동 팀 결성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인 만큼,회식 장소는 시끌벅적하면서도 묘한 긴장감이 감도는 대형 고깃집이었다.입사 동기들과 기획팀 직원들은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연신 서지우 전무에게 술잔을 권했다.34세의 젊고 능력 있는 전무라는 타이틀과 사내 냉혈한이라는 명성에 걸맞게,지우는 짐짓 여유로운 어른 남자의 미소를 지으며권해지는 술잔을 마다하지 않고 넙죽뙵죽 받아 마시기 시작했다."하하, 전무님 역시 주량이 대단하십니다!""오늘 아주 끝까지 달려보는 겁니다!"직원들의 환호에 흥이 오른 지우는 속으로 살짝 알코올이 올라오는 것을 느끼면서도,은근히 제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쿨하게 소맥을 섞어 마시며 허세를 부렸다.하지만 그 모습을 건너편 테이블에서 팔짱을 낀 채 차갑게 응시하고 있는 시선이 있었다.바로 문리안이었다.리안은 맑은 생수가 담긴 잔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지우가 마시는 술잔 개수를 머릿속으로 조용히 세고 있었다.냉철한 자문 변호사로서 거래처 책임자의 컨디션을 체크해야 한다는프로페셔널한 염려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저 아저씨가 진짜 정신을 차리려나…….'다른 사람도 아닌 제 친구 수아의 시도련님이었다.어쩌다보니 엮인 특수한 관계이기도 한 저 인간이 이 자리에서 대판 취해 망가지기라도 하면,내일 회사에서 대형 사고가 터질 것은 뻔했다.게다가 저렇게 넙죽뙵죽 받아 마시다간 내일 아침 본사 회의에서 호되게 깰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우가 또다시 소주 한 잔을 가볍게 비우자마자,리안은 참지 못하고 나지막하면서도 뼈가 콕 박히는 목소리를 던졌다."전무님, 오늘 아주 기분 좋으신가 봐요. 그런데 내일 아침 8시에 대기업 임원진 합동 조찬 브리핑 회의 있으신 건 똑똑히 기억하시고 마시는 거죠?"돌직구 같은 리안의 팩폭에 지우의 손이 미끄러질 뻔했다.주변 직원들도 일동 조용해지며 눈치를 살폈다.'이 가시내는 쉬는 날이 없지, 아주 사람 잡는 데 도사라니까.'속으로는
술을 마신 지 채 십 분도 지나지 않아, 지완은 몸 안쪽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이상 열기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단순한 취기가 아니었다. 척추를 타고 올라온 뜨거운 불길이 뇌를 난도질하는 기분이었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뛰었고, 거친 숨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눈앞이 흐려지고 온몸의 세포가 비명을 지르며 무언가를 갈망하고 있었다. “……서지우. 술에, 무슨 짓을 한 거냐.” 지완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지우의 덜미를 잡으려 했지만,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형, 미안. 근데 형을 위해서야.
“엄마, 대박 사건이라니까? 형이 여자한테 눈이 돌아갔어. 그것도 아주 제대로.” 서울 성북동의 거대한 저택, 서지우는 수화기 너머의 어머니에게 흥분된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지방의 한 한적한 카페 구석, 지우의 손에는 채원의 신상명세서와 조사 보고서가 들려 있었다. 강수아, 스물둘. 지방 국립대 농업생명과학과 과수석. 부모 없이 홀로 키워준 이모의 교통사고 수술비를 대기 위해 잠시 밤거리로 흘러든 불쌍하고 올곧은 여자. 평생 얼음 조각 같던 형 서지욱이 매일 밤 노래방 구석에서 그 미련한 짓을 하
서지우는 제 친형인 서지완을 한 번도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형은 가문의 완벽한 피조물이자 오차 없는 기계였다. 부모님조차 형을 자식이 아닌 가문의 간판으로 대했고, 지우 역시 늘 대단한 형의 그늘에 가려져 방탕한 둘째 도련님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가문에는 철저히 숨겨진 비밀이 있었다. 형 지완은 아주 어릴 적 앓았던 큰 병의 후유증으로 인해, 선천적으로 이성에게 반응하지 못하는 데다가 그 병으로 인해 아이를 갖기 힘든 몸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집안 어른들이 기를 쓰고 명문가 딸인 윤서희와 형을
서지완의 인생은 단 한 번도 흐트러진 적이 없었다. 자식을 학문의 도구로 여기는 엄격한 집안에서, 그는 늘 자를 잰 듯 완벽한 장남이어야 했다. 감정은 사치였고 이성은 법이었다. 서른넷이 되도록 그 어떤 여자에게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건 대단한 절제력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흥미가 없었다. 심장이 뛰지 않으니 동요할 일도 없었다. 친구들의 등쌀에 밀려 이 유흥가 지하의 퀴퀴한 노래방에 앉아 있을 때까지만 해도, 지완은 제 인생이 통째로 뒤흔들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오, 새로 온 애냐? 얼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