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정훈도 안시연을 속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일은 소현주와 관련이 있었기에 진실을 말하지 않는 한 소현주를 만난 사실을 드러내는 순간 재앙이 닥칠 게 뻔했다.최단 시간 내에 소현주에게 충분한 보상을 하고 소현주와 확실히 선을 긋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연정훈은 일을 흐리멍덩하게 만드는 것을 가장 싫어했지만, 이 일만큼은 결코 단호하게 처리할 수 없었다. 소현주에게 요구를 강요할 수 없었고 소현주의 고통에서 연정훈의 마음을 죄책감 없이 떼어내지 못했다.연정훈은 안시연을 안고 누웠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안시연은 손을 뻗어 연정훈의 찌푸린 미간을 부드럽게 펴주며 말했다.“잘 자요.”“잘 자.”...최미란은 병원에 이틀 더 입원했는데, 상태가 조금 나아지자 다시 퇴원을 원했다.안시연은 말려 보았지만 소용없어 결국 의사에게 건강 상태를 물어보았다.마침, 당직이었던 사람이 소현주였다.소현주는 얼굴이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환자의 상태를 이야기할 때는 매우 집중한 모습이었다.“할머님의 상태는 이제 꽤 괜찮습니다. 퇴원하셔도 됩니다. 다만 약은 제때 드셔야 하고 퇴원 후에도 주의 깊게 상태를 살펴보셔야 합니다. 다시는 지난번처럼 되지 않도록 하세요.”소현주는 안시연에게 명함을 건네며 말했다.“여기에 제 연락처가 있으니 퇴원 후에 일상적으로 궁금한 점이 있으면 연락하세요.”안시연은 미묘한 감정을 억누르고 명함을 받았다.안시연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자 소현주는 웃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의사로서 사적인 감정이 제 일에 영향을 주지 않아요.”안시연은 어이없었다.“...”소현주의 말은 오히려 자신이 편협하다는 것을 지적하는 듯했다.“소현주 선생님의 전문성을 믿어요.”“그렇다면 다행이네요.”대화는 짧게 끝났고 안시연은 소현주의 사무실을 둘러보며 그녀의 생활 습관을 살펴보고 공기 중의 냄새까지 세심하게 맡았다.소독약 냄새만 가득했다.안시연은 속으로 자신을 비웃었다‘미쳤어. 어느 의사가 근무 중에 향초를 피우겠어
원장은 노련하게 더는 안시연을 압박하지 않고 대화를 적당히 마무리했다.안시연은 병원에서 외할머니의 퇴원 절차를 모두 마치고 오후에 외할머니를 모시고 나왔다.소현정에게서 몇 차례 전화가 왔지만, 매번 내일 돌아오겠다고 하면서도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안시연은 마음속에 쌓인 불만이 커지고 소현정에 대한 혐오감도 더욱 깊어졌다.외할머니는 안시연을 타일렀다.“너희 엄마도 힘들어.”“남의 가정에 끼어든 건데 부인께서 더 힘들었겠죠.”안시연은 무심코 말대꾸했다.외할머니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자신의 감정이 격해진 걸 깨달은 안시연은 약간 후회하며 목소리를 낮췄다.외할머니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너희 엄마가 잘못한 건 맞아...”외할머니는 본래 성실한 사람이었기에 딸이 저지른 일이 영광스러운 일은 아니라고 여겼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딸은 딸이었다. 도저히 끊어낼 수 없는 존재였다.안시연은 그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집은 제가 깨끗이 청소해 놓았어요. 들어가셔서 보시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제가 다시 사러 갈게요.”외할머니를 퇴원시키기 위해 온 차는 연정훈이 준비한 고급 차량이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이렇게 화려한 차를 타는 것이 불편했다.“무슨 돈을 그렇게 함부로 쓰니. 아깝잖아.”낡은 아파트에 도착한 후 안시연은 외할머니를 부축하며 올라갔다.문을 열고 들어서자 평범한 집 안의 거실이 보였고 두 사람은 왠지 눈시울이 붉어졌다.과거 외할머니가 병을 앓았을 때 안시연은 더 이상 외할머니를 퇴원시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이젠 괜찮아. 다 지나갔어.’외할머니는 눈물을 닦으며 안시연의 손을 잡고 말했다.“착한 우리 시연아. 그동안 정말 수고 많았구나.”“외할머니만 건강하시다면, 어떤 고생도 할 수 있어요.”안시연은 외할머니를 의자에 앉히고 무릎을 꿇고 다리를 주물러 드렸다.사람이 없을 때 외할머니는 슬쩍 안시연에게 물었다.“오늘 밤 여기서 자고 갈 거니?”안시연은 외할머니가 자신과 연정훈의 관계가
12월31일, 연정훈은 일부러 시간을 비워두었다.연정훈은 안시연의 외할머니가 어떤 의도를 가졌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 안시연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확인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일찍 가는 것이 외할머니의 마음을 편하게 해드릴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이 일정들을 다 내일로 미루는 건가요?”비서가 취소된 일정을 확인하며 물었다.연정훈은 소매를 정리하며 가볍게 대답했다. 동시에 지시했다.“기사에게 밑에서 대기하라고 해.” “알겠습니다.”비서가 막 나가자, 연정훈의 핸드폰이 울렸다.연정훈은 안시연인 줄 알고 화면을 확인했지만,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기억력이 좋은 덕분에 지난번 소현주가 걸었던 번호임을 금세 알아챘다. “...여보세요?”“연정훈, 나야.”“응.”연정훈은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게 대답했다.“무슨 일이야?”“오늘 새해 전날이잖아. 아줌마가 집에서 몇 가지 요리를 준비했는데...저녁 같이 먹어줄 수 있어?”소현주가 조용히 말했다.연정훈은 잠시 침묵했다.“이미 저녁시간인데 그쪽으로 가는 건 적절하지 않아.”“아직 어둡지 않았어.” “...”소현주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이어졌다.“걱정하지 마. 집에 아줌마도 있어서 우리 둘만 있는 건 아니야. 다른 뜻은 없고 그냥 부탁할 일이 좀 있어서 그래. 얼굴 보고 얘기하자.”“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지금 말해.”연정훈은 쉽게 응하지 않았다.수많은 사람과 매일 머리를 굴려 가며 상대하는 그였기에 소현주가 의도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이유를 모를 리 없었다. 소현주는 그저 연정훈이 거절할 수 없게 만들고 싶을 뿐이었다.소현주는 잠시 침묵했고 깊게 숨을 내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와서 나랑 저녁을 같이 먹어줘. 밥 먹으면서 이야기하면 좋겠어. 딱 30분이면 충분해. 해가 지면 네가 만나고 싶은 사람에게 가도 돼.”“집에서 기다릴게.”소현주는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연정훈은 대화 종료 화면을 보며 이마를 깊게 찌푸렸다.바로 그때, 안시연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바
안시연은 양혁수를 더 이상 설득할 수 없음을 느끼고 그냥 동의했다. “알겠어요.”“시간은 내가 정해도 돼?”양혁수가 물었다.안시연은 조심스럽게 말했다.“혁수 씨, 몸이 확실히 다 나아야 해요. 무리하게 노는 건 안 돼요.” “그리고...”그리고 잠시 망설이던 안시연은 덧붙였다. “정훈 씨한테 물어봐야 해요. 정훈 씨가 괜찮다고 해야 나갈 수 있어요.”이 말을 듣자, 양혁수는 비웃듯 웃음을 터뜨렸다.“하!”안시연은 침묵했다.“...”“너 독립한 사람 맞아? 자유는 있어? 연애 좀 한다고 연정훈한테 너를 팔아넘긴 거야?” “혁수 씨는 남자고 저는 여자잖아요. 그리고 정훈 씨는 내 남자친구죠. 혁수 씨랑 단둘이 나가려면 당연히 정훈 씨한테 말해야죠.”양혁수는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안 놀아!”양혁수는 불만스럽게 말했다.안시연은 차분히 말했다.“그래도 좋아요. 집에서 잘 쉬고 있어요. 다 나으면 제가 혁수 씨 집으로 보러 갈게요.”양혁수는 화가 난 듯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꿈꾸지 마.” “물어봐. 정훈 씨가 뭐라고 대답하는지 보자. 만약 정훈 씨가 진짜 남자라면 우리 셋이 같이 나가자.”연정훈은 그렇게 유치하지 않다고 안시연은 생각했다.가끔 양혁수를 보면 마치 성숙하지 않은 아이처럼 행동한다고 느꼈다. 속셈도 많고 온갖 나쁜 생각이 가득하며 가끔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본심을 드러낸다.그렇게 생각에 잠겨있던 찰나, 양혁수가 다시 말했다.“시간 좀 봐서 좋은 날 골라서 우리 둘이 몰래 만나자.”봐, 또 시작이다.에휴....한편, 연정훈이 인덕원에 도착했을 때 소현주는 이미 사람들에게 요리를 차리도록 지시해 놓았다.소현주가 거짓말하지는 않았다. 집에 아줌마들이 있었고 그것도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이었다.하지만 아줌마들이 아무리 많아도 소현주가 사는 집에는 여전히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소현주는 연정훈을 문 안으로 들였지만, 지난번처럼 슬리퍼를 건네주지 않았다. 심지어 수저와 젓가락도
아주머니는 당황한 얼굴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연신 사과했다.소현주도 순간 얼어붙은 듯 멍해졌다.“연정훈! 빨리 닦아야 해!”소현주는 급히 휴지를 한 움큼 뽑아 연정훈에게 건넸다. 표정에 당혹스러움이 서렸다.연정훈은 무거운 표정으로 휴지를 받아 들고 말없이 일어나 주방 쪽 세면대로 향했다.그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신속하게 얼룩을 처리하였다.소현주는 연정훈을 따라가며 깊은 미안함이 가득한 얼굴로 그를 지켜보았다.연정훈은 소현주의 사과를 끊고 담담하게 말했다.“회장님 쪽은 문제없을 거야. 자료 준비됐으니까, 병원으로 보내 줄게. 이 재단의 주관자는 네가 될 수 있으니 한번 생각해 봐.”소현주는 말없이 연정훈의 흠뻑 젖은 모습을 지켜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곧 안시연을 만나러 가야 하는 거 아닌가?”연정훈은 고개를 들어 소현주를 잠시 응시했다.“이렇게 엉망이 됐는데 안시연이 물어보면 뭐라고 설명할 거야?”소현주는 잠시 주저하다가 조심스레 제안했다.“위층에서 옷을 갈아입는 게 어때? 마침 여기 영훈 씨 옷이 있을 거야.”소현주의 말이 끝나자 연정훈의 눈빛이 어둡게 변했다....안시연은 연정훈이 오지 않자 두 차례나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러나 응답은 없었다.안시연은 그가 바쁜가 하고 생각하며 시간이 꽤 흐른 후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다.이번에는 연결되었지만, 수화기 너머로 희미한 물소리만이 들려왔다.안시연은 불안한 마음으로 서둘러 물었다.“정훈 씨, 지금 어디예요?”“집이야.”“집에 들어갔어요?”안시연은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연정훈은 짧게 대답했다.“옷 갈아입으려고 집에 왔어. 곧 너한테 갈게.”그의 목소리에서 어딘지 모르게 샤워 중인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왜 회사에서 갈아입지 않고 굳이 집에 갔을까? 회사에 갈아입을 옷이 없었던 건가?’불안한 마음이 스며들었지만, 그녀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살짝 재촉하며 전화를 끊었다.“도착했어?”외할머니가 조용히 물었다.안시연은 얼굴에 미소를 띠며 대답
연정훈은 제시간에 도착했다. 안시연뿐만 아니라 외할머니도 무척 기뻐했다.외할머니는 연정훈을 반갑게 맞이하며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그러고는 곧 음식을 데우러 부엌으로 향했다.“할머니, 앉아 계세요. 제가 할게요,”안시연이 재빠르게 말했다.“알았어, 알았어,”외할머니는 웃으며 연정훈을 바라봤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 듯했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는 표정이었다.연정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건강은 괜찮으세요? 다 회복되셨나요?”“괜찮아요.” “여기서 필요한 것이 있으면 시연이에게 말씀하세요. 저희가 준비할게요.”연정훈이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요.”외할머니는 안시연이 내온 음식을 받으며 활짝 웃었다.“여기 있는 것만으로 충분해요. 나 같은 늙은이가 뭐 그리 대단한 게 필요하겠어요?”연정훈은 따뜻하게 말했다.“그렇게 말씀하시면 시연이가 밤에 잠을 못 자요. 외할머니를 늘 걱정하고 있거든요.”외할머니는 미소 지었다.안시연은 살짝 부끄러워하며 연정훈 옆에 앉았다.그들은 자연스럽게 상을 차렸다. 마치 오래된 호흡처럼 말이 없어도 서로 손발이 척척 맞았다.외할머니는 그 모습을 보며 마음이 놓인 듯했다. 잔을 들어 연정훈에게 먼저 건배를 건넸다.“연정훈 씨, 사업 번창하고 내년에는 더 큰 성공을 이루길 바라요.”“외할머니도 건강하시고 행복한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연정훈이 답례했다. “그래요.”안시연은 연정훈에게 음식을 권하며 말했다.“이거 한번 먹어봐요. 이 갈비찜은 외할머니의 메인 요리예요. 정훈 씨가 오지 않았으면 저도 못 먹었을 거예요.”연정훈은 젓가락을 들며 안시연을 바라보더니 미소를 띠며 말했다.“그러면 네가 내 덕을 본 거네?”“그렇죠.”둘의 다정한 모습을 보고 있던 외할머니는 기분이 더 좋아져서 이야기를 멈추지 않으셨다.연정훈은 안시연과 함께 있을 때 자연스럽게 긴장을 풀었다. 게다가 아까 소현주 쪽 일을 마무리하면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고 외할머니와의 대화도 편안했다.연정훈은 외할머니의
거실 밥상 위, 뚝배기에서 여전히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외할머니는 옛날이야기에 푹 빠져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지만, 안시연과 연정훈 사이의 공기는 점점 차가워졌다.“이 반지는 내가 소중히 간직해 왔단다. 언젠가 시연이가 결혼할 때 주려고 말이야.”“외할머니...”안시연은 외할머니를 말리려 눈짓을 보냈지만, 외할머니는 이미 반지를 연정훈과 안시연 앞으로 밀어두셨다.“이제 시연이가 연정훈 씨를 만났으니 나는 더 이상 걱정이 없어. 이 반지를 너희에게 줄 테니, 이걸 끼고 평생 함께 행복하길 바란다.”안시연의 얼굴이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화끈거렸다.연정훈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혹시 외할머니를 빌미로 결혼을 재촉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안시연과 연정훈은 서로 결혼 이야기를 섣불리 꺼내지 않기로 묵시적으로 합의한 상태였다. 외할머니의 갑작스러운 행동이 연정훈에게 잘못된 신호를 줄까 두려웠다.안시연은 입술을 꽉 깨물며 반지를 가져가려고 했다.그러나 연정훈이 먼저 손을 내밀어 반지와 상자를 집어 들었다.그는 여전히 평온한 표정으로 외할머니에게 감사를 표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시연이를 잘 보살필 겁니다.”그 말을 들은 외할머니는 기쁨에 얼굴이 밝아지며 연정훈에게 연거푸 술을 권했다.하지만 안시연은 말없이 있었다.그 순간부터 안시연의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연정훈에게 해명해야 할 생각만이 머릿속을 채웠다.저녁 식사가 끝나고 외할머니는 피곤해 보이며 방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안시연은 연정훈을 배웅하며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운전기사가 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둘은 계단을 내려가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거의 다 내려왔을 때 갑자기 누군가 급하게 밖에서 들어오다 그들과 부딪힐 뻔했다.안시연이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반우희였다.반우희는 야근을 마치고 돌아온 듯 보였다. 여전히 근무복을 입고 있었으나 얼굴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고 입가에는 멍 자국까지 남아 있었다.안시연은 반우희가 걱정되어 말을
차는 나무 그늘 아래에 조용히 주차되어 있었다. 바깥은 고요했지만, 차 안은 더 깊은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안시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손가락에서 반지를 천천히 빼냈다.태연한 척하려 했지만, 굳게 다문 입술은 안시연의 실망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연정훈은 안시연을 부드럽게 끌어안으며 위로했다.“괜찮아요...”안시연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지만,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저...”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멈칫했고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얼굴을 겨우 지탱하고 있었다.연정훈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잠시 생각하더니 한발 물러서서 말했다.“네가 집에 가면 체인 하나 찾아줘. 그럼 내가 목걸이로 하고 다닐게.”“괜찮아요...”안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정훈 씨가 불편하면 안 해도 돼요.”연정훈은 안시연의 볼을 장난스럽게 꼬집으며 말했다.“안 한다고 하니까 울기 직전이잖아.”“...”안시연은 고개를 숙이며 작게 부인했다.“아니에요.”연정훈은 그녀를 다시 품에 안고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했다.“외할머니가 우리에게 이 선물을 준 건 잘 지내라고 한 거잖아. 근데 네가 이렇게 울먹이면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안시연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연정훈의 말에 마음속에서 억울함과 후회가 밀려왔다.연정훈은 이미 충분히 양보한 것이다. 원래 결혼반지는 그들 사이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규칙을 깬 건 안시연이고 연정훈이 선을 넘은 건 아니었다.안시연은 조용히 연정훈의 어깨에 기대어 그의 목을 가만히 감쌌다.연정훈은 부드럽게 안시연의 머리를 정리해 주며 물었다.“이틀 동안 못 봤는데, 저녁에도 전화 안 하고 뭐 하고 있었어?”“전화했는데, 정훈 씨가 바쁘다며 대충 흘려보내더니, 말하다가 갑자기 끊어졌어요.”안시연이 살짝 투덜거리듯 말했다.“그랬나?”“정훈 씨가 인정하지 않으면, 저도 어쩔 수 없죠.”연정훈은 웃음을 터뜨렸다.차 안의 무거웠던 분위기가 조금 풀렸다.안시연도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연정훈의 품에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
변여름은 2층 베란다에서 뛰쳐나오며 양혁수와 양지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마침, 요즘 한가한데 여름이 데리고 경인시로 놀러 갈게요. 시연이도 볼 겸.”‘한가하긴! 고양이 배변도 아직 치우지 않았는데!’고개를 돌린 양혁수는 변여름이 입을 삐죽이고 있는 게 보였다.그래서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변여름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서재 다 치워뒀으니 거기에서 논문 보면 돼.”“네.”변여름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고 쿵쿵거리며 서재로 들어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었고 통화를 종료한 양지원은 다시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화면에는 양지원뿐만 아니라 양시연도 함께였다.막 아이를 낳았지만 양시연은 컨디션이 꽤 좋아 보였고 죽을 먹는 중이었다.양지원이 핸드폰을 넘기자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지금 퇴근하는 거야?”“막 집에 도착했어.”핸드폰 너머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양승윤과 다른 아이들도 함께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양혁수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축하해. 잘생긴 아들에, 귀여운 딸까지 생긴걸.”과거에는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들었지만 정작 하고 보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너도 축하해.”“엄마한테서 전해 들었어. 너랑 여름이 말이야.”양혁수는 창밖의 핑크빛 노을을 보며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우리 공주님 보여줄까?”“좋아.”화면을 돌리자 침대 끝에 앉은 연정훈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주변에는 양승윤을 제외하고 꼬마가 둘이나 더 있었다.“아빠, 나도 안아보고 싶어요!”“삼촌! 예지도 안아볼래요!”‘참 시끌벅적하네.’양시연이 연정훈을 낮게 부르자 연정훈이 딸을 품에 안고 걸어왔다.그리고 화면을 통해 양혁수는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무언의 시그널을 주고받았는지 또 표정을 찡그렸다.연정훈은 예전처럼 차가웠지만 제 딸을 볼 때에는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시간 되면 경인시로 놀러와. 시
“그 사람도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낳아준 어머니는 뒤로 하고 장모님한테 왔잖아요.”양혁수가 투덜거리며 말했다.양시연을 향한 감정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양혁수는 늘 연정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변여름은 조용히 그 옆에서 눈치를 살폈다.그러다가 며칠 전 변여름과 진지하게 나눴던 첫사랑 얘기가 떠오른 양혁수는 오늘 이 기회를 빌려 변여름에게 장난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변여름은 크게 화도 내지 못하고 입만 삐죽일 것이다.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 거의 집에 다 와간다고 알렸다.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뒤뜰에서 잡초를 손질하는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갔고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오빠, 우리 산책하러 가요.”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지금?”“네!”“곧 다 모일 텐데 밥 먹고 산책하러 가자.”그러자 변여름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앞에 보이는 잡초를 마구잡이로 휙 잡아 뽑았다.양혁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음을 꾹 참았다.그때 누군가 양혁수를 불렀고 두 사람은 다시 거실로 돌아가야 했는데 변여름이 갑자기 양혁수를 벽으로 툭 밀쳤다.그러자 양혁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벽에 기댄 채로 변여름의 턱을 잡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첫사랑을 잊는 방법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거라며? 현실보다 상상 속 첫사랑이 더 완벽하고 이쁠 테니까.”“...”‘짜증 나.’양혁수가 변여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이건 네가 말했던 거잖아.”“...”“그런데 지금 표정이 왜 그렇지? 설마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은 거야?”변여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세상에 영원한 정답은 없는 거니까요.”“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계속 피해 다니며 만나지 않을 수도 없고.”“나 질투 난다는 말이에요.”“내가 평생 시연이 좋아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그건 예전이잖아요!”“그럼 지금은?”‘지금은...’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양혁수의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양혁수는 변여름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아침이 되어도 아무도 두 사람을 깨우지 않았고 실컷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잠에서 깬 뒤에도 한참 침대에서 뭉그적거렸고 양혁수가 먼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양혁수가 음식을 챙겨 돌아왔을 때, 변여름은 세수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양혁수가 침대 끝자락에 앉으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뭐라도 좀 먹고 다시 자.”변여름은 지금 자신의 옷차림이 어떤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바로 이불에서 빠져나와 양혁수의 품에 안겼다.양혁수는 서둘러 변여름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고 눈을 감고 있는 변여름에게 한 입씩 떠먹여 줬다.변여름은 몇 입 먹더니 금방 싫증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이 남긴 걸 입에 넣었다.그런데 양혁수가 아침을 먹는 사이 변여름이 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그렇게 졸린가?’양혁수는 변여름을 다시 이불 안에 넣어주고 옷을 갈아입은 뒤 헬스장을 다녀왔다.돌아와서 샤워를 마쳤을 때도 변여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양혁수는 침대 앞으로 다가가 곤히 잠든 변여름을 바라봤고 젖은 머릿결이 마를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다가 본능을 못 이긴 양혁수는 수건을 내려두고 침대 옆자리로 올라갔다.변여름은 금세 이상한 점을 눈치챘고 귓가에 들려오는 양혁수의 뜨거운 숨소리에 몸을 돌려 품에 안기며 말했다.“오빠...”양혁수는 숨을 고르다가 변여름에게 속삭였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없어요...”변여름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고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어깨를 깨물었다. 양혁수가 작게 신음 소리를 뱉자 변여름도 점점 이성을 잃게 되었고 눈가가 빨개진 채로 물었다.“우리 새해 인사드리러 가야 하지 않아요?”“필요 없어. 친척들도, 친구들도 많지 않아서 상관없어.”변여름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말했다.“우리 세운시로 가야 하잖아요.”양혁수는 새해 인사 따위는 이제 안중에 없었다.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
거사를 치르기 전에 변여름도 나름 많은 조사를 걸쳐 충분히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실전과 이론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변여름은 자신이 주동권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모두 가볍게 양혁수에게 들통이 나 물거품이 되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시켰고 변여름이 점차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할 때까지 꼭 붙잡아줬다.변여름의 머릿속에는 양혁수가 거친 숨을 내쉬며 귓가에 뱉은 말뿐이었다.“긴장하지 말고 힘 풀어.”긴장을 풀자 바로 쾌감이 이어졌다.처음 사과를 베어 문 에덴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변여름은 눈앞이 흐릿해지고 이 세상과는 단절된 쾌감만 느껴졌다.변여름은 나른하게 침대에 누웠고 잠시 의식을 되찾고 양혁수와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또 달래듯 입술에 키스했다.금방 지나갈 소나기같았지만 또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양혁수도 쾌감에 절여 절로 미소가 나갔지만 자꾸 변여름을 놀렸다.그러자 변여름이 바로 양혁수의 입술을 깨물었다.양혁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자세를 바꿔 또 새로운 쾌감을 찾았다.변여름은 촉촉해진 눈가로 양혁수를 바라봤고 마치 처음 치즈를 선물 받은 고양이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것 같았다.“네가 자세 바꾸고 싶다며?”양혁수는 손을 뻗어 변여름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나른한 시선으로 유혹했다.“자,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변여름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까도 변여름에게 기회를 줄 것처럼 굴다가 또 선수를 빼앗아 본인이 흐름을 주도했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농락에 변여름은 이제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하지만 양혁수가 얌전히 누워주니 변여름은 또 덮칠 마음이 스멀스멀 생겼다.‘내가 잡아먹어야지!’서로를 탐닉하고 뜨거운 숨을 몰아 내쉬기를 반복했고 어느샌가 이불도 바닥 위로 떨어져 있었다.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고 입술을 막아도 걷잡을 수 없었다.결국 변여름은 이불에 얼굴을 묻어버렸고 지금 본인
변여름은 낮에 물건을 뒤적이다가 양혁수가 서랍에 새로 준비해 둔 걸 발견했었다.양혁수가 참 보수적이라 생각했지만 변여름은 그런 점도 귀엽게 느껴져 눈치껏 본인이 준비한 물건은 서랍에 넣어두지 않았다. 뭐든지 차근차근 순서를 밟는 게 좋을 것 같았다.그러나 갑자기 자신을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향하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의아해졌다.‘오늘 밤엔 순정남이 아닌 건가? 아, 벌써 기대돼.’그러나 위층으로 올라가서 키스도 한참 했지만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변여름이 양혁수의 품 안에서 기어 나오며 말했다.“오빠, 먼저 샤워나 할래요?”“...”‘이 흐름이 아닌데.’양혁수는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변여름을 잡고 다시 아래에 깔았다.또 쉴 틈 없는 키스가 이어지고 변여름은 온몸이 나른해졌으며 입가가 얼얼해질 무렵, 양혁수가 마지막으로 입가에 뽀뽀하고 욕실로 향했다.변여름은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 내가 기다리지 뭐.’얌전히 침대에 누운 변여름은 다리를 달달 떨며 시간을 보냈다.그때, 양혁수가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고 걸어왔다.바로 변여름에게 다가간 양혁수는 순식간에 변여름을 이불 안에서 꺼내 안아 들었다.‘뭐야 샤워하러 간 거 아니었어? 또 준비한 게 있나 보네?’의아해하는 변여름의 생각을 읽고 양혁수는 입술에 도장을 꾹 찍고 욕실로 향했다.“같이 씻자.”변여름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욕실 안에는 뜨거운 김이 가득해 시야가 흐릿했다.양혁수는 어제 무슨 이유인지 안방에 새로 가구를 배송받았었다. 목재로 된 흔들의자였는데 하나는 안방에 두었고 특수 코팅을 거친 의자는 욕실에 두었다. 변여름은 안방에 둔 흔들의자에 누워 햇살을 느껴봤는데 그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욕실에 둔 의자에 누우면 마치 발가벗겨진 생쥐 꼴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욕실로 향하는 내내 별 별 난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양혁수를 상대로 그런 음흉한 상상을 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그러나, 변여름은 곧 자신의 상상이 틀리지 않았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양이 하나 때문에 그렇게 혼을 내던 오빠 친구가 오늘엔 제 옆에 앉아 평범한 여느 연인들처럼 자신을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것을.변여름은 다른 사람에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양혁수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술이 술술 넘어갔다.회식을 끝내고 근처를 걸으니 거리에서 새해 느낌이 물씬 났다. 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워서도 양혁수의 이름을 불러댔다.“양혁수... 혁수 오빠...”대체 뭘 어떻게 더 해야 이렇게 커진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변여름은 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양혁수가 좋았다.올해는 양혁수가 근 10년 동안 가장 기대되는 새해라고 할 수 있다.새해에 맞춰 양홍두도 세운시로 향해 양지원과 함께 새해를 보내기로 했다.그리고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곧 변여름과 함께 세운시를 찾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다고 말했다.새해 전날, 집사는 양혁수의 기분이 퍽 좋은 걸 발견하고 다 같이 만두도 빚고 송편도 빚을 것을 제안했다.변여름도 아침 일찍 양씨 가문을 찾아 일을 거들었다.양혁수는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새해 분위기가 물씬 나는 조명이나 인테리어를 세팅했다.“조명을 켜기엔 아직 일러요. 조명은 오후부터 켜야 한다고 했어요.”변여름은 어디에서 들은 정보를 한 손에 만두를 쥔 채로 양혁수에게 말했다.양혁수는 사다리 위에 서서 말했다.“누가 그래? 우린 우리만의 법을 따르는 거야.”양혁수는 변여름을 달래듯 말했다.“꼬맹이는 얼른 가서 만두 빚고 있어. 예쁘게 빚으면 내가 새해 용돈도 챙겨줄게.”집사는 괜히 큰소리하는 양혁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씨 가문 남자들, 누구 하나 큰소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그러나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였고 또 양혁수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사다리 아래까지 내려온 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왜?”변여름은 바로 이때다 싶어 양혁수의 두 볼에
양지원은 바로 세운시로 돌아갔다.양씨 가문에는 오직 변여름과 양혁수만 남겨졌고 그날 밤부터 변여름은 아주 자연스레 양혁수의 방을 드나들었다.며칠 뒤면 새해인지라 연구실도 곧 휴가가 시작될 것이다. 변여름은 하루 시간을 내어 선물을 들고 연구실을 찾았다.선배들은 변여름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돌아온 변여름을 보며 아주 기뻐했고 선물을 받으며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연애하고 왔어요.”솔직한 변여름의 대답에 사람들은 조금 당황했고 과거에 변여름에게 고백했었던 선배는 마음이 부서졌다.교수님은 변여름의 교제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저희 오빠 친구예요.”‘그래. 오래 붙어있을수록 정분이 나는 법이지.’사람들은 변여름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 상대가 궁금했고 교수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변여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점심시간이 되자 도시락을 들고 양혁수를 찾아갔다.“회식?”양혁수는 변여름이 연구실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게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좀 더 생각을 해보니 고작 며칠 사이에 얼굴도 보지 못한 제 비서와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변여름이 말했다.“남자 친구 생겼다고 말했거든요.”그러자 양혁수는 변여름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걸 바로 눈치챘다.그리고 불현듯 과거에 변여름이 연구실 선배한테 고백을 받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는걸요.”어깨를 으쓱거리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다?”“네!”“어떤 사람이었는데? 다들 똑똑할 거고, 뭐 잘생겼어?”“똑똑하기도 하고 잘생기기도 했죠.”옆에서 문서를 정리하던 비서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대표님, 예쁘고 요리도 잘하시는 여름 씨가 얼마나 인기가 많겠어요. 대표님이 조심하셔야겠네요.”변여름이 양혁수를 힐끔 훔쳐보자 양혁수가 바로 연기를 이어갔다.“그러게. 갑자기 짜증이 나서 입맛이 하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