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씩 가지잖아요. 영훈 씨 본인 것만 보관하면 안 돼요?”“부승원에게 줄 거야. 혼인신고서 사본이 필요해. 나중에 공증할 때 필요할 거야.”“어떤 공증을 말하는 거예요?”“잘 몰라. 부승원한테 물어봐.”양시연은 답답했고 빠른 걸음으로 연정훈을 따라갔다. 연정훈의 걸음이 너무 빨라서 증명서를 되찾을 기회도 없었다.정말 머리가 아프다....양씨 가문에서.양지원은 오늘 회사에 가지 않고 양시연의 전화를 기다렸다.소파에 느긋하게 기대앉아 그녀는 물었다.“같이 저녁 먹을래?”“좋아요.”“그러면 나중에 네 할아버지께 말씀드릴게.”“걱정하지 마세요. 저희 꼭 제시간에 갈게요.”...전화를 끊은 양지원은 자신만만하게 연씨 가문에서 분명 문제가 생길 것이라 확신했다.그녀는 턱을 만지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곧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남산 저택에서.날이 저물기 전 양시연과 연정훈은 남산 저택에 도착했다.결혼식은 올리지 않고 혼인 증명서만 받았으며 그들의 결혼은 사랑 때문이 아니었다. 연씨 가문에 대한 인상도 썩 좋지 않았고 이렇게 빨리 식사 자리에 나가고 싶지도 않았다.그러나 생각해 보니 이건 예의를 지키는 일 같았다. 어차피 언젠가 직면해야 할 일이라면 차라리 빨리 마주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그녀는 양지원과 약속을 잡았고 연정훈도 가문 사람들을 초대했다.두 사람은 큰 방에 앉아 조용히 기다렸다.5시 30분 양쪽 모두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6시가 되어서도 여전히 소식은 없었다.7시 30분이 가까워지자 방은 고요했고 여전히 기다림만이 이어졌다.양시연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하루 종일 고생했는데 정말 배가 고팠다.하지만 그녀는 양지원의 상황을 이해했다. 양지원은 이미 도착해 있었지만,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연씨 가문의 사람들이 도착하면 내려오겠다고 했지만, 현재 연씨 가문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양지원이 방으로 들어오게 되면 더 오랫동안 기다려야 할 테고 그렇게 되면 오히려 양지원의 체면을 구기게
연씨 저택.표세연은 너무 초조해 가만히 있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며 제 남편인 연재혁을 재촉했다.“오늘 손자 상견례 날에 어머님이 갑자기 아프다고 하시는 건 일부러 그러시는 게 아니겠어요?”연재혁도 골치가 아팠다.민수희는 정말 몸이 아주 불편한 건지 소식이 아예 끊겼고 게다가 연호민마저도 별다른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연정훈은 이미 단호하게 태도를 보였고 계속 강행한다면 민수희와 연호민의 마음을 다치게 할 수도 있었다.“그만 재촉해요. 양씨 집안 사람들도 아직 채모이지 않았잖아요.”표세연은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그래도 양씨 집안은 신부 측이고, 우리는 신랑 측인데 우리 때문에 늦어진다면 정훈이 체면이 뭐가 되겠어요?”연재혁이 안경을 고쳐 쓰며 물었다.“그럼, 뭐 어떻게 할까요?”“그러지 말고 우리 둘이 가요!”“...”“재혁 씨는 다른 방법 있어요? 난 정말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해요.”“일단 진정해 봐요.”표세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고 도우미에게서 가방을 건네받았다.“안 갈 거면 나 혼자라도 갈 거예요! 내 아들 체면은 내가 챙겨줄 거라고요! 당신은 그냥 집이나 얌전히 지키다가 이틀 뒤 학동 시티로 돌아가는 대로 이혼해요!”연재혁의 표정이 굳어졌다.표세연은 농담이 아니었는지 가방을 챙기고 바로 밖으로 걸었다.그러자 연재혁도 별수가 없어졌다. 정말 표세연을 혼자 보내고 이혼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연재혁은 도우미를 시켜 간단하게 말을 전하게 하고 그 뒤를 따랐다.“기다려 봐요. 같이 가요!”아래층의 표세연과 연재혁이 막 집을 나설 때쯤, 머리가 희끗한 연호민이 민수희의 알약을 챙겨주며 덤덤하게 말했다.“시간도 많이 늦었고 우리도 이만 가요. 우리가 가지 않으면 예의에 어긋나지 않겠어요?”그 말을 들은 민수희는 병상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두 눈을 마주하자 왠지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는데도 제 남편은 가문의 이익을 1순위로 두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아 서러웠다.“난 그럴 힘
연정훈이 표세연을 발견하고 의아하다는 듯 살짝 표정을 구겼다.“여긴 어쩐 일이세요?”“...”‘내가 잘못 온 건가?’이미 반쯤 비워진 한 차림을 보며 표세연은 가슴이 철렁했다.연재혁이 표세연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고 입을 열기도 전에 비워진 그릇부터 눈에 들어왔다.“...”양시연은 머쓱해져 빠르게 연정훈이 입가까지 가져온 고기를 마다하고 몰래 눈짓했다.사실 두 사람은 그리 많이 먹은 편이 아니었다. 겨우 배를 채운 정도였으나 남산 저택의 출장 뷔페는 미슐랭처럼 그릇에 담긴 양이 아주 적은 요리였다. 그러다 보니 얼마 먹지 않아도 빈 그릇이 산더미처럼 쌓이게 되었다.연정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표세연과 연재혁을 자리로 안내했다.표세연은 넋이 나간 듯 멍한 얼굴이었다.연재혁이 표세연의 어깨를 톡 건드리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양시연은 빠르게 입가를 닦고 인사를 올렸다.“이모, 삼촌, 안녕하세요.”양시연은 평소대로 호칭했지만, 듣는 사람은 그 호칭이 귀에 거슬렸다.표세연은 티가 나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제 남편을 향해 눈짓했다.‘호칭이 잘못된 거 아니에요?’‘그러니까 내가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했잖아요!’표세연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하지만 두 사람 앞에서는 체면을 차려 덤덤하게 자리에 착석했다. 다시 요리를 주문하고 오늘 이 자리를 찾은 목적이 떠올랐다.“혼인 신고서는 무사히 등록을 마친 거니?”표세연의 질문에 연정훈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신고서 작성은 모두 마쳤어요.”“다행이구나!”표세연도 기쁨을 숨기지 못했고 시선은 자연스럽게 양시연을 향했다.양시연은 부끄러운 듯 옅은 미소를 지은 채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표세연은 그제야 아차 싶었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오늘은 내가 너무 급하게 오는 바람에 따로 챙긴 게 없구나. 이제 날 잡고 너희 엄마랑 같이 주얼리 보러 가자꾸나. 내가 두 세트 해주마.”“그러실 필요 없으세요.”자신과 거리를 두는 양시연의 태도에 표세연은 조금
연호민은 대수롭지 않게 뱉은 말이었지만 양시연은 가슴이 철렁했다.이어 양홍두가 미소를 머금은 채로 말했다.“그런 말씀 마세요. 석진이 그 녀석은 속마음을 꽁꽁 숨기는 성격이라 얼마나 답답한데요.”연호민은 미소만 지을 뿐 말을 잇지 않았다.비즈니스계의 두 거물이 한자리에 모이고 두 사람은 먼저 예의를 갖춰 악수하더니 이어 가장 자리를 양보하는 ‘쟁탈’이 이어졌다.삽시에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결국 양홍두가 가장자리를 연호민에게 양보했다.“오늘같이 좋은 날 우리끼리 굳이 예의를 차릴 필요가 뭐 있나요?”“한 식구가 될 예정인데 누가 앉든 뭐가 중요하겠어요.”양홍두가 말을 이었다.오늘 이 자리의 주인공은 양시연과 연정훈이었지만 어느새 뒷전이 되었다.양시연은 몰래 가문 두 어르신을 살피고 있었다.그런데 참 웃기게도 방금까지 물잔을 들고 동동거리던 연정훈이 제 할아버지한테는 물 한 잔 따르지 않았다.연정훈은 두 어르신이 얘기를 주고받든 뭐든 양시연의 앞접시에 음식을 올려주느라 여념이 없었다.양시연은 밥을 먹는 내내 분위기를 조심스레 살폈다.연호민이 등장하고 식사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양홍두는 부드러운 군주라 칭할 수 있었는데 젊었을 적 많은 풍파를 겪고 현재는 진중하고 다정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연호민은 달랐다. 아직도 세운시에서 중요한 위치에 놓인 실권자로 비록 자리에서 내려왔지만 그 세력은 아직 가시지 않고 있었다. 연호민은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가시가 돋쳐 있었고 대체로 안하무인이었다.어느새 식사 자리는 연호민을 중심으로 흘러갔다.짧게 인사를 주고받은 뒤 연호민은 미소를 장착한 채로 양시연을 바라봤다.양시연은 양씨 가문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연호민과 같은 거물을 직접 마주하는 건 처음이라 긴장되고 쉽게 입을 열 수가 없었다.“며칠 전 정훈이 할머니가 널 찾아갔다고 들었어,”갑자기 연호민이 그 일을 꺼냈다.다른 사람들도 바짝 긴장한 채로 연호민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연정훈도 경계 가득한 얼굴로 살피고 있었다
양지원의 말에 연호민이 입꼬리를 올렸다.“아쉬울 게 뭐 있나요? 아무리 정인 그룹이라 해도 양씨 가문 아가씨를 맞기에는 아직 부족한걸요.”그 말에 양지원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더구나 연호민은 양시연의 신분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고 대수롭지 않아 하는 것 같았다.연호민이 다시 입을 열었다.“하지만 외부에 소식이 알려진다면 주주들이 술렁일 테니 회사 인수는 조금 천천히 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한 번에 강행한다면 너무 눈에 튈 거예요.”그 말도 틀린 건 아니었지만 왠지 인수를 망설이는 기분이 들었다.양시연은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랐다.연정훈이 입을 열려는데 양지원이 한발 앞섰다.“시간은 어느 정도로 생각하시는 걸까요?”“3, 4개월 정도면 충분할 것 같네요.”연호민이 잠시 고민하다가 말을 이었다.“세 번에 나누어 인수하는 겁니다. 그러는 편이 낫겠네요.”양시연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고작 몇 개월이라니. 왠지 더 진실성 있게 느껴졌다.연호민이 연정훈에게 말했다.“넌 신인이 아니지만 모든 게 처음인 시연이가 그 자리를 안전하게 이어받으려면 조급해서는 안 된단다. 안 그러면 가시밭길로 내모는 꼴이 될 수 있어. 그러면 시연이에게도 좋을 바가 없어.”연정훈도 미리 생각을 해둔 게 있었고 덤덤하게 대답했다.“제가 더 많이 알아볼게요.”“그래.”그러자 분위가 한결 풀렸다. 이번 대화가 거의 끝나려 하자 연재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양홍두에게 술을 권했다.그렇게 다시 화기애애해진 분위기로 돌아가고 고개를 들면 활짝 웃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마치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오랜 가족처럼 느껴졌다.표세연과 양지원이 미소를 지은 채로 얘기를 주고받는 모습이 이상할 정도로 화기애애했다.그런데 그때!행복한 순간에 정지 버튼이 눌러졌다.연호민이 양시연을 향해 이런 질문을 했다.“의료 보험 프로그램 일을 한다고 들었어.”“네. 맞습니다.”연호민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질문을 이었다.“자선 사업은 해본 적이 있는가?”그 질문에 연정
이씨 가문은 최상급 재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경인시에서는 몇 손가락 안으로 꼽히는 가문이었다. 남산 저택을 운영하는 이희영은 연호민 같은 레벨의 사람도 자주 만날 수 있었고 연호민이 왔다고 해서 직접 인사를 건네는 경우는 없었다.그래서 방금 연호민의 등장에도 모르는 척 넘어갔다.오늘 자리에 함께 한 모든 사람도 이희영을 알고 있었기에 갑자기 등장한 이희영을 보고 의아해했다.이희영은 우선 예의를 갖춰 인사를 건네고 표세연에게 말했다.“세연 언니, 온다고 미리 말하지 그랬어요. 그러면 제가 미리 준비해서 연 회장님을 잘 모셨을 텐데요.”“가족 모임이라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뭐가 번거롭다고 그래요.”이희영은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자연스럽게 정보를 흘렸다.“연 회장님도 오시고 의원님도 오시면 제가 보안에 더 힘을 주도록 미리 언질을 해야 해요.”의원님?양시연은 양석진이 왔음을 바로 눈치챘다.고개를 드니 양지원도 아주 기뻐하는 눈치였다.그러자 양시연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오늘같이 특별한 자리에 양석진이 함께하기를 바랐었다.양석진은 따로 볼일이 있어 아침 일찍부터 집을 나섰었다.그런데 저녁 시간을 맞춰 이렇게 돌아올 줄은 미처 몰랐다.양석진이 안으로 들어서기 전, 이희영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빠르게 상황을 정돈했다. 이어 새로운 요리가 준비되었다.연호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가만히 자리를 지키는 모습이 양석진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진정한 실권을 가지고 있는 양석진이라면 말이 달랐다.아무리 세상에 두려운 것 없어 보이는 연호민이라도 양석진의 앞에서는 주춤했다.그도 그럴 것이, 양석진은 연재혁보다도 몇 살이 어리지만 손에 쥔 권력을 놓고 보면 연재혁의 한참 위에 있었다.연재혁이 아직 젊어 미래 20년 동안 더 열심히 일을 한다고 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위치였다.그래서 연호민은 연씨 가문의 희망을 연정훈에게 돌렸다.연씨 가문과 양씨 가문이 쌓아 올린 권력과 재력을 더한다면 연재혁과 같은 사람을 키우는 건
양석진은 자리에 앉자마자 입을 열었다.“늦게 와서 죄송해요. 방금까지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나요?”양지원은 냉큼 수저를 내려두고 고자질하려 했다.그러나 맞은편의 연정훈이 한 발 더 빨랐다.“제가 정인 그룹에 손을 떼기 전 14조 자금을 기부 단체에 처리해야 하는데 할아버지께서 시연이가 하길 바라십니다.”“...”표세연이 살짝 연정훈을 노려보았다.‘지금 네 할아버지의 고자질을 하는 거야?’양지원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웃기는 녀석이네.’연재혁은 머리가 지끈거렸고 양홍두는 몰래 미소를 지었다.그리고 연호민은 침묵을 유지했다.한참 주변을 힐끗거리던 양시연은 결국 연정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할아버지의 체면을 보기 좋게 구기는 모습에 이상할 정도로 속이 시원했다.양석진은 아주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연정훈은 대답에 망설임이 없었다.“자선 사업이 그러하듯 신경 써야 할 일이 많고 압력이 많다보니 시연이가 하기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해요.”연호민은 숨을 들이마시었다.양석진이 입꼬리를 올린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개인 자선 사업으로 보았을 때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니지.”자리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양시연이 자선 사업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해도 양석진은 아니었다.양석진은 양지원의 앞접시에 고기를 올려두며 말했다.“하지만 압력이 있어야 성장을 하는 법이지. 네가 시연이를 많이 아끼는 건 나도, 지원이 이모도 잘 알고 있단다. 하지만 시연이는 평범한 여자아이가 아니야. 시연이도 이제 이런 사업에서 역량을 키우고 경험을 쌓아야 할 나이이지. 그동안은 기회가 없었지만 이런 기회가 생긴 이상 한번 해보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다른 사람들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러자 연호민의 표정이 살짝 풀렸다. 미소를 머금은 연호민이 양시연에게 말했다.“네 삼촌 말이 맞아. 좀 힘든 일이긴 해도 경험을 쌓는다고 생각하면 못 할 것도 없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중요한 법이니까.”양시연은 양석진의 눈치를 살폈다
식사하는 내내 가장 마음이 불편해진 건 표세연이었다.어린 시절부터 양지원과 오랜 친구 사이였던 표세연은 양지원과 양석진의 사이를 의심해 본 적이 없던 게 아니었다.하지만 양지원이 결혼을 하고 양석진이 독신으로 지내는 걸 보며 차츰 생각을 접었었다.그러나 방금 양석진의 행동에 머리가 펑 하고 터지는 것만 같았다.표세연이 몰래 남편 연재혁에게 눈짓했다.‘방금 봤어요?’연재혁은 표세연의 앞접시에 요리를 올리며 말했다.“이게 맛이 좋네요. 먹어봐요.”‘조용히 해!’어쩔 수 없이 표세연은 아들 연정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아들, 봤어?’연정훈은 무표정으로 표세연의 앞접시에 음식을 올렸다.“엄마, 이것도 맛이 참 좋아요.”‘묻지 마세요.’“...”심호흡하던 표세연은 양시연과 시선이 마주쳤다.양시연은 눈을 깜빡이다가 빠르게 고개를 숙여 고기를 입에 넣었다.‘저한테도 묻지 마세요.’그러자 표세연은 심장이 벌렁거렸다.드디어 길고 긴 저녁 식사가 끝나고 두 가문은 긴 인사를 뒤로하고 각자 헤어지기로 했다. 표세연은 바로 연정훈에게서 ‘내부 소식’을 듣고 싶었지만 연정훈은 장모님 챙기기에 바빴다.이희영은 빠르게 다른 손님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켰다. 그래서 양시연 일행이 있는 부근에는 인적이 뚝 끊기고 오가는 차량 하나 없었다.양홍두와 양씨 가문 가족을 배웅하고 양시연도 따라 차에 오르려 하자 연정훈이 양시연의 손목을 잡았다.“왜요?”양시연이 고개를 돌렸다.‘뭐야?’연정훈이 입을 열기도 전에 반대 편의 차량 문이 벌컥 열렸다.양지원과 양석진이 차 안에 앉아 조용히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연정훈은 한참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오늘 일찍 쉬어.”양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걱정하지 마요. 정훈 씨도 일찍 쉬어요.”그리고 양시연은 망설임 없이 잡힌 손을 빼내고 빠르게 차에 올랐다.그 자리에 덩그러니 남겨진 연정훈은 어쩔 수 없이 양석진과 양지원에게도 고개 숙여 인사를 올렸다. 커다란 몸집의 연정훈이 오늘따라 작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
변여름은 2층 베란다에서 뛰쳐나오며 양혁수와 양지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마침, 요즘 한가한데 여름이 데리고 경인시로 놀러 갈게요. 시연이도 볼 겸.”‘한가하긴! 고양이 배변도 아직 치우지 않았는데!’고개를 돌린 양혁수는 변여름이 입을 삐죽이고 있는 게 보였다.그래서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변여름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서재 다 치워뒀으니 거기에서 논문 보면 돼.”“네.”변여름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고 쿵쿵거리며 서재로 들어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었고 통화를 종료한 양지원은 다시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화면에는 양지원뿐만 아니라 양시연도 함께였다.막 아이를 낳았지만 양시연은 컨디션이 꽤 좋아 보였고 죽을 먹는 중이었다.양지원이 핸드폰을 넘기자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지금 퇴근하는 거야?”“막 집에 도착했어.”핸드폰 너머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양승윤과 다른 아이들도 함께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양혁수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축하해. 잘생긴 아들에, 귀여운 딸까지 생긴걸.”과거에는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들었지만 정작 하고 보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너도 축하해.”“엄마한테서 전해 들었어. 너랑 여름이 말이야.”양혁수는 창밖의 핑크빛 노을을 보며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우리 공주님 보여줄까?”“좋아.”화면을 돌리자 침대 끝에 앉은 연정훈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주변에는 양승윤을 제외하고 꼬마가 둘이나 더 있었다.“아빠, 나도 안아보고 싶어요!”“삼촌! 예지도 안아볼래요!”‘참 시끌벅적하네.’양시연이 연정훈을 낮게 부르자 연정훈이 딸을 품에 안고 걸어왔다.그리고 화면을 통해 양혁수는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무언의 시그널을 주고받았는지 또 표정을 찡그렸다.연정훈은 예전처럼 차가웠지만 제 딸을 볼 때에는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시간 되면 경인시로 놀러와. 시
“그 사람도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낳아준 어머니는 뒤로 하고 장모님한테 왔잖아요.”양혁수가 투덜거리며 말했다.양시연을 향한 감정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양혁수는 늘 연정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변여름은 조용히 그 옆에서 눈치를 살폈다.그러다가 며칠 전 변여름과 진지하게 나눴던 첫사랑 얘기가 떠오른 양혁수는 오늘 이 기회를 빌려 변여름에게 장난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변여름은 크게 화도 내지 못하고 입만 삐죽일 것이다.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 거의 집에 다 와간다고 알렸다.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뒤뜰에서 잡초를 손질하는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갔고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오빠, 우리 산책하러 가요.”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지금?”“네!”“곧 다 모일 텐데 밥 먹고 산책하러 가자.”그러자 변여름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앞에 보이는 잡초를 마구잡이로 휙 잡아 뽑았다.양혁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음을 꾹 참았다.그때 누군가 양혁수를 불렀고 두 사람은 다시 거실로 돌아가야 했는데 변여름이 갑자기 양혁수를 벽으로 툭 밀쳤다.그러자 양혁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벽에 기댄 채로 변여름의 턱을 잡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첫사랑을 잊는 방법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거라며? 현실보다 상상 속 첫사랑이 더 완벽하고 이쁠 테니까.”“...”‘짜증 나.’양혁수가 변여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이건 네가 말했던 거잖아.”“...”“그런데 지금 표정이 왜 그렇지? 설마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은 거야?”변여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세상에 영원한 정답은 없는 거니까요.”“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계속 피해 다니며 만나지 않을 수도 없고.”“나 질투 난다는 말이에요.”“내가 평생 시연이 좋아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그건 예전이잖아요!”“그럼 지금은?”‘지금은...’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양혁수의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양혁수는 변여름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아침이 되어도 아무도 두 사람을 깨우지 않았고 실컷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잠에서 깬 뒤에도 한참 침대에서 뭉그적거렸고 양혁수가 먼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양혁수가 음식을 챙겨 돌아왔을 때, 변여름은 세수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양혁수가 침대 끝자락에 앉으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뭐라도 좀 먹고 다시 자.”변여름은 지금 자신의 옷차림이 어떤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바로 이불에서 빠져나와 양혁수의 품에 안겼다.양혁수는 서둘러 변여름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고 눈을 감고 있는 변여름에게 한 입씩 떠먹여 줬다.변여름은 몇 입 먹더니 금방 싫증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이 남긴 걸 입에 넣었다.그런데 양혁수가 아침을 먹는 사이 변여름이 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그렇게 졸린가?’양혁수는 변여름을 다시 이불 안에 넣어주고 옷을 갈아입은 뒤 헬스장을 다녀왔다.돌아와서 샤워를 마쳤을 때도 변여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양혁수는 침대 앞으로 다가가 곤히 잠든 변여름을 바라봤고 젖은 머릿결이 마를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다가 본능을 못 이긴 양혁수는 수건을 내려두고 침대 옆자리로 올라갔다.변여름은 금세 이상한 점을 눈치챘고 귓가에 들려오는 양혁수의 뜨거운 숨소리에 몸을 돌려 품에 안기며 말했다.“오빠...”양혁수는 숨을 고르다가 변여름에게 속삭였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없어요...”변여름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고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어깨를 깨물었다. 양혁수가 작게 신음 소리를 뱉자 변여름도 점점 이성을 잃게 되었고 눈가가 빨개진 채로 물었다.“우리 새해 인사드리러 가야 하지 않아요?”“필요 없어. 친척들도, 친구들도 많지 않아서 상관없어.”변여름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말했다.“우리 세운시로 가야 하잖아요.”양혁수는 새해 인사 따위는 이제 안중에 없었다.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
거사를 치르기 전에 변여름도 나름 많은 조사를 걸쳐 충분히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실전과 이론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변여름은 자신이 주동권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모두 가볍게 양혁수에게 들통이 나 물거품이 되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시켰고 변여름이 점차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할 때까지 꼭 붙잡아줬다.변여름의 머릿속에는 양혁수가 거친 숨을 내쉬며 귓가에 뱉은 말뿐이었다.“긴장하지 말고 힘 풀어.”긴장을 풀자 바로 쾌감이 이어졌다.처음 사과를 베어 문 에덴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변여름은 눈앞이 흐릿해지고 이 세상과는 단절된 쾌감만 느껴졌다.변여름은 나른하게 침대에 누웠고 잠시 의식을 되찾고 양혁수와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또 달래듯 입술에 키스했다.금방 지나갈 소나기같았지만 또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양혁수도 쾌감에 절여 절로 미소가 나갔지만 자꾸 변여름을 놀렸다.그러자 변여름이 바로 양혁수의 입술을 깨물었다.양혁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자세를 바꿔 또 새로운 쾌감을 찾았다.변여름은 촉촉해진 눈가로 양혁수를 바라봤고 마치 처음 치즈를 선물 받은 고양이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것 같았다.“네가 자세 바꾸고 싶다며?”양혁수는 손을 뻗어 변여름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나른한 시선으로 유혹했다.“자,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변여름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까도 변여름에게 기회를 줄 것처럼 굴다가 또 선수를 빼앗아 본인이 흐름을 주도했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농락에 변여름은 이제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하지만 양혁수가 얌전히 누워주니 변여름은 또 덮칠 마음이 스멀스멀 생겼다.‘내가 잡아먹어야지!’서로를 탐닉하고 뜨거운 숨을 몰아 내쉬기를 반복했고 어느샌가 이불도 바닥 위로 떨어져 있었다.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고 입술을 막아도 걷잡을 수 없었다.결국 변여름은 이불에 얼굴을 묻어버렸고 지금 본인
변여름은 낮에 물건을 뒤적이다가 양혁수가 서랍에 새로 준비해 둔 걸 발견했었다.양혁수가 참 보수적이라 생각했지만 변여름은 그런 점도 귀엽게 느껴져 눈치껏 본인이 준비한 물건은 서랍에 넣어두지 않았다. 뭐든지 차근차근 순서를 밟는 게 좋을 것 같았다.그러나 갑자기 자신을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향하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의아해졌다.‘오늘 밤엔 순정남이 아닌 건가? 아, 벌써 기대돼.’그러나 위층으로 올라가서 키스도 한참 했지만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변여름이 양혁수의 품 안에서 기어 나오며 말했다.“오빠, 먼저 샤워나 할래요?”“...”‘이 흐름이 아닌데.’양혁수는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변여름을 잡고 다시 아래에 깔았다.또 쉴 틈 없는 키스가 이어지고 변여름은 온몸이 나른해졌으며 입가가 얼얼해질 무렵, 양혁수가 마지막으로 입가에 뽀뽀하고 욕실로 향했다.변여름은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 내가 기다리지 뭐.’얌전히 침대에 누운 변여름은 다리를 달달 떨며 시간을 보냈다.그때, 양혁수가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고 걸어왔다.바로 변여름에게 다가간 양혁수는 순식간에 변여름을 이불 안에서 꺼내 안아 들었다.‘뭐야 샤워하러 간 거 아니었어? 또 준비한 게 있나 보네?’의아해하는 변여름의 생각을 읽고 양혁수는 입술에 도장을 꾹 찍고 욕실로 향했다.“같이 씻자.”변여름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욕실 안에는 뜨거운 김이 가득해 시야가 흐릿했다.양혁수는 어제 무슨 이유인지 안방에 새로 가구를 배송받았었다. 목재로 된 흔들의자였는데 하나는 안방에 두었고 특수 코팅을 거친 의자는 욕실에 두었다. 변여름은 안방에 둔 흔들의자에 누워 햇살을 느껴봤는데 그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욕실에 둔 의자에 누우면 마치 발가벗겨진 생쥐 꼴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욕실로 향하는 내내 별 별 난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양혁수를 상대로 그런 음흉한 상상을 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그러나, 변여름은 곧 자신의 상상이 틀리지 않았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양이 하나 때문에 그렇게 혼을 내던 오빠 친구가 오늘엔 제 옆에 앉아 평범한 여느 연인들처럼 자신을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것을.변여름은 다른 사람에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양혁수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술이 술술 넘어갔다.회식을 끝내고 근처를 걸으니 거리에서 새해 느낌이 물씬 났다. 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워서도 양혁수의 이름을 불러댔다.“양혁수... 혁수 오빠...”대체 뭘 어떻게 더 해야 이렇게 커진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변여름은 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양혁수가 좋았다.올해는 양혁수가 근 10년 동안 가장 기대되는 새해라고 할 수 있다.새해에 맞춰 양홍두도 세운시로 향해 양지원과 함께 새해를 보내기로 했다.그리고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곧 변여름과 함께 세운시를 찾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다고 말했다.새해 전날, 집사는 양혁수의 기분이 퍽 좋은 걸 발견하고 다 같이 만두도 빚고 송편도 빚을 것을 제안했다.변여름도 아침 일찍 양씨 가문을 찾아 일을 거들었다.양혁수는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새해 분위기가 물씬 나는 조명이나 인테리어를 세팅했다.“조명을 켜기엔 아직 일러요. 조명은 오후부터 켜야 한다고 했어요.”변여름은 어디에서 들은 정보를 한 손에 만두를 쥔 채로 양혁수에게 말했다.양혁수는 사다리 위에 서서 말했다.“누가 그래? 우린 우리만의 법을 따르는 거야.”양혁수는 변여름을 달래듯 말했다.“꼬맹이는 얼른 가서 만두 빚고 있어. 예쁘게 빚으면 내가 새해 용돈도 챙겨줄게.”집사는 괜히 큰소리하는 양혁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씨 가문 남자들, 누구 하나 큰소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그러나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였고 또 양혁수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사다리 아래까지 내려온 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왜?”변여름은 바로 이때다 싶어 양혁수의 두 볼에
양지원은 바로 세운시로 돌아갔다.양씨 가문에는 오직 변여름과 양혁수만 남겨졌고 그날 밤부터 변여름은 아주 자연스레 양혁수의 방을 드나들었다.며칠 뒤면 새해인지라 연구실도 곧 휴가가 시작될 것이다. 변여름은 하루 시간을 내어 선물을 들고 연구실을 찾았다.선배들은 변여름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돌아온 변여름을 보며 아주 기뻐했고 선물을 받으며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연애하고 왔어요.”솔직한 변여름의 대답에 사람들은 조금 당황했고 과거에 변여름에게 고백했었던 선배는 마음이 부서졌다.교수님은 변여름의 교제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저희 오빠 친구예요.”‘그래. 오래 붙어있을수록 정분이 나는 법이지.’사람들은 변여름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 상대가 궁금했고 교수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변여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점심시간이 되자 도시락을 들고 양혁수를 찾아갔다.“회식?”양혁수는 변여름이 연구실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게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좀 더 생각을 해보니 고작 며칠 사이에 얼굴도 보지 못한 제 비서와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변여름이 말했다.“남자 친구 생겼다고 말했거든요.”그러자 양혁수는 변여름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걸 바로 눈치챘다.그리고 불현듯 과거에 변여름이 연구실 선배한테 고백을 받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는걸요.”어깨를 으쓱거리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다?”“네!”“어떤 사람이었는데? 다들 똑똑할 거고, 뭐 잘생겼어?”“똑똑하기도 하고 잘생기기도 했죠.”옆에서 문서를 정리하던 비서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대표님, 예쁘고 요리도 잘하시는 여름 씨가 얼마나 인기가 많겠어요. 대표님이 조심하셔야겠네요.”변여름이 양혁수를 힐끔 훔쳐보자 양혁수가 바로 연기를 이어갔다.“그러게. 갑자기 짜증이 나서 입맛이 하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