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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공 나리의 첫사랑
국공 나리의 첫사랑
Author: 만보운단

제1화

Author: 만보운단
침상 옆에 놓인 등불을 후 하고 불었더니 불꽃이 튕기며 아리따운 김희영의 얼굴을 비추었다.

하지만 곧이어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기척 소리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긴장되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배진휘가 두루마리 그림을 들고 술 냄새를 풍기며 들어온 것이었다.

그는 화를 참느라 씩씩거리면서도 애써 다정하게 말했다.

“오늘 서용이 돌아간 지 다섯 해가 되는 기일인데 꼭 조모를 내세워 나와 합방해야겠소?”

“그런 적이 없어요.”

“어쨌든 부인이 원한다면 오늘 소원을 이뤄주지!”

배진휘는 나무 침대로 가서 가리개를 거두고는 그림을 조심스럽게 펴서 머리맡에 걸어 놓았다.

그림에는 흰옷을 입은 여인이 그려져 있었는데 곱상한 얼굴에 우아한 기품이 흘렀다.

그는 그림 속 여인의 얼굴에 홀린 것처럼 지긋이 보다가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서용아, 미안하구나. 난 녕국공 저택의 가주로서 반드시 짊어져야 할 책임이 있단다. 부디 날 탓하지 마. 하지만 염려할 것 없다. 내 몸이 곧 더러워지겠지만 내 마음속엔 항상 너만 있어.”

김희영은 익숙한 그림 속 여인의 얼굴을 보고, 배진휘의 애처로운 목소리를 들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보다 더 비참한 것이 어디 있으랴.

녕국공 저택에 시집온 지 어느덧 다섯 해가 되는데, 배진휘는 이미 돌아간 첫사랑을 배신할 수 없어 지극정성으로 상을 치렀다.

그리고 김희영을 무슨 더러운 물건 취급하며 손끝도 건드리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노부인의 잔소리에 못 이겨 그녀의 처소에서 쉬는 날이면 무조건 주서용의 초상화를 갖고 와서 머리맡에 걸어 놓았다. 가끔씩은 자다가도 김희영을 등지고 눕더니 그림을 보면서 욕구를 풀었다.

그런 사람이 선심을 쓰듯 합방해주겠다는, 그 말이 비수가 되어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았다.

배진휘는 고개를 숙여 그림 속 여인의 입가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돌아서서 김희영을 쳐다보며 그녀의 옷을 벗기고 침상 위에 눕혔다.

김희영은 떨리는 눈빛으로 그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진정하세요.”

“휴, 희영.”

그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다.

“부인의 소원대로 아이를 낳게 해주겠다는데 왜 거절하는 거요? 혼인할 때 말했듯이 난 평생 서용만 사랑할 거고, 합방해도 부인에게는 마음을 주지 않을 거요. 난 부인에게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소. 지금은 서용의 그림이라도 있으니 그나마 합방할 마음이 생기는 거요.”

배진휘가 다시 그림을 쳐다봤는데, 이내 그의 눈가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김희영의 입을 맞추었다.

또 상처받은 그녀의 마음은 수많은 바늘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

‘어떻게 이토록 다정한 목소리로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말을 할까?’

김희영은 사내의 힘에 못 이겨 입을 벌이고 그의 혀를 꽉 깨물었다.

배진휘가 씁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런 복수는 생각도 못했는지 입가에 피를 흘린 채 김희영의 턱을 움켜쥐었다.

“부인이 원하는 걸 주겠다는데 대체 왜 이러는 거요?”

김희영이 눈시울을 붉히며 흐느꼈다.

“이러지마요. 저리 비켜요!”

물론 수년 전부터 배진휘를 짝사랑했지만 이런 식으로 무시당하고 짓밟히는 건 싫었다.

‘대체 나를 뭘로 보는 거야?’

탕탕!

바로 그때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나리! 서용 아가씨가 돌아왔어요.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왔다고요!”

갑작스러운 소식에 배진휘가 움찔거리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기색을 드러냈다.

“또 누가 서용을 사칭한 것이냐? 당장 관아로 끌고 가서 배후가 누군지 낱낱이 조사하거라!”

그동안 수많은 사람이 그에게 미인을 보내며 아부했지만, 그 누구도 주서용의 자리를 대신하지 못했다.

마음이 급한 송이가 흥분하며 말했다.

“나리! 이번에 진짜입니다. 제 눈으로 직접 봤다니까요. 진짜 서용 아가씨 맞습니다! 5년 전 모습과 똑같고 제가 허리를 다친 것도 알고 있었다고요!”

배진휘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서서는 겉옷을 대충 걸치고 재빨리 뛰어나갔다.

본래 따뜻한 이불속에 있던 김희영은 그가 갑자기 일어나는 바람에 차가운 공기가 피부에 닿아서, 재빨리 일어나 아무 옷이나 잡아당겨 벗은 몸을 가렸다.

주서용은 배진휘의 죽마고우이자 사촌 누이동생이었다.

‘당신이 5년이나 잊지 못했던 첫사랑이 살아서 돌아왔다고? 말도 안 돼!’

그렇게 잠시 후, 검은 옷 차림을 한 여름이 소리 없이 들어와 조용히 보고했다.

“부인, 한 도련님의 행방을 알아냈습니다.”

그 말에 김희영은 건성으로 대답하고 옷을 입기 시작하자, 여름은 급하게 한 도련님을 만나러 가시는 줄 알았는데 의외의 답을 들었다.

“대청으로 가자.”

현재 녕국공 저택 안은 등불로 환하게 밝혀지고 모든 사람이 대청에 모였다.

김희영은 일단 들어가지 않고 대청 입구의 문틈을 통해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식솔들이 모인 가운데 백발 노부인이 뒷모습이 가냘픈 여인을 안고 낮은 소리로 흐느껴 울고 있었다.

“불쌍한 서용아, 네가 죽지 않고 살았구나. 그런데 왜 이제야 돌아왔느냐? 내가 얼마나 네가 보고싶었는지 아느냐? 하마터면 울다가 눈까지 버릴 뻔했어.”

지금 주서용은 낡은 흰옷을 입었어도 버드나무 잎처럼 드리운 눈썹에 오똑한 코, 분홍 꽃처럼 입술이 선명했다.

게다가 몸은 바람에 날려갈 것처럼 가냘퍼서 보는 것만으로도 안타까워 보듬어주고 싶은 충동을 일으킬 정도였다.

5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할 만큼 그녀는 여전히 열여섯 살, 앳된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외조모, 저도 돌아오고 싶었어요. 그런데… 5년 전에 오라버니를 구하려다 절벽에 떨어져 머리를 다치는 바람에 모든 기억을 잃어버렸어요. 그동안 대진 곳곳을 다니면서 명의한테 치료를 받았더니 최근에서야 기억이 차츰 돌아오기 시작했어요.”

“누이, 그동안 고생 많았어.”

녕국공 저택의 둘째 도련님 배진운은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었고, 셋째 아가씨 배진연은 아예 품에 안겨 통곡하자 주서용은 다정한 목소리로 안아주며 달래 주었다.

배진운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지난날을 회상했다.

“5년 전에 형이 암살당할 때, 누이가 중독된 형을 보호하기 위해 형의 옷으로 갈아입고 적들을 유인했는데 결국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어요. 조모, 누이는 형을 살리기 위해 죽은 거예요.”

다들 주서용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의리가 있는 여인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심지어 경성의 명문가 규수들은 특별히 주서용의 비석을 세웠고, 매년 청명절이면 적지 않은 이들이 애도를 표하러 갔었다.

배진휘는 떨리는 눈빛으로 주서용을 주시했고, 배진운은 분개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

“누이와 형은 어려서부터 정을 나눈 사이라 당연히 두 사람이 혼인할 줄 알았는데, 뜻밖의 사고로 누이는 죽고 형이 다른 사람과 혼인했어.”

주서용은 슬픈 표정을 지으며 애써 웃었다.

“오라버니를 원망하지 않아. 내가 오라버니 외에 누구와도 혼인하지 않겠다고 고집부린 탓이지. 이제 홀로 고독하게 늙어도... 흑흑… 자주 오라버니를 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해.”

눈물을 글썽이며 배진휘를 쳐다보던 그녀는 급기야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

“서용아!”

배진휘가 재빨리 달려가 품에 안고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죄책감에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내 처소에 데려가서 눕혀.”

노부인이 다급하게 지시하자 배진휘는 주서용을 안고 문 쪽으로 뛰어갔다.

마침 하녀들이 입구에 줄 서고 있어서 김희영을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다들 비켜!”

배진휘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여름은 재빨리 김희영을 뒤로 잡아당겼다.

지금까지 이토록 충동적인 그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는지, 김희영은 배진휘가 사라진 곳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녀 앞에서 항상 미소를 머금고 다정하게 말했기에, 화내기는커녕 충동적으로 행동할 사람도 아니라고 여겼다.

심지어 주서용을 위해 단 한 번도 합방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제 꿈에서도 그리던 첫사랑이 돌아왔으니 더는 가면을 쓰지 않고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녕국공이 된 것 같았다.

————

이틀 전, 경성에서 육 백 리 떨어진 호수로 둘러싼 계화촌에서 참혹한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한 집의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칼로 찔러 죽인 후에 집안의 모든 재산을 훔치고는 절음발이 남편과 네 살배기 아들을 버리고 도망간 것이었다.

마을 주민들은 그림 속 흰옷을 입은 여인을 보고 흥분하며 대답했다.

“이 여자, 경성으로 가는 마차에 타는 걸 본 적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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