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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hor: 만보운단
김희영은 기분이 가라앉은 상태로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침상에 누워 눈을 감고 뒤척이다가 한참 뒤에야 비몽사몽한 채로 잠에 들었다.

그러다 악몽을 꾸었다.

꿈에서 온몸이 피범벅으로 물든 어머니가 울면서 반드시 진범을 찾아 김씨 가문을 위해 복수하라 신신당부하시고, 팔이 부러진 남동생이 과일 꼬치를 사달라 졸랐다.

그리고 깨끗하고 예쁜 것을 좋아하던 여동생은 몸에 묻은 피도 마다하고 활짝 웃으면서 예쁜 진주 비녀를 김희영의 머리에 꽂아주며 선물이라고 전해 주었다.

과묵한 아버지는 조용히 그녀만 쳐다보고, 조부와 조모는 서로 부축하며 맞은편에 서 있었다.

“아…”

김희영은 식은땀을 흘리며 악몽에서 깨어났다.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혔고, 눈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5년 전, 녕국공 저택에 시집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태부 저택은 하룻밤 사이에 도륙당했다.

그녀가 그 소식을 듣자마자 미친듯이 뛰어서 저택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저택 마당에는 절단된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가장 소중한 가족이 전부 살해당하여 비참하게 죽은 모습은 지금도 눈앞에 선했다.

그 뒤로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배후를 찾았지만 모든 증거는 이미 깨끗이 지워져서 어떤 단서도 찾아내지 못했다.

지금은 쓸데없는 감정 따위에 신경 쓰지 말고, 오로지 피맺힌 원한을 갚는 것이 우선이었다.

현재 배진휘가 조정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일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기에, 이 사건을 깊이 조사하려면 그의 권력과 인맥이 필요했다.

김희영은 눈을 감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옥정이 놀란 소리를 듣고 재빨리 달려오더니 침상 가리개를 걷고는 그녀를 부축하여 앉혔다.

“부인, 악몽을 꾸셨어요?”

김희영의 입술이 하얗게 질리고 눈동자가 흐리멍덩했다.

겨우 한마디 대답하고 조용히 옥정의 어깨에 기대어 정신을 차렸다.

그때 마침 배진운의 유모가 밖에서 뵙기를 청했다.

조 어멈은 턱을 치켜들고 공손하게 부탁했다.

“부인, 둘째 도련님께서 백 년 산 인삼을 노부인 처소로 보내시랍니다. 서용 아가씨가 그동안 온갖 고생으로 몸이 허약해져서 반드시 인삼을 복용해야 몸의 고통을 완화할 수 있답니다.”

김희영의 외조부 댁은 백 년을 이어온 의사 가문이었지만 안타깝게 외조부에게 여식 한 명뿐이라 의술을 물려줄 계승자가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돌아간 뒤, 외조부와 외조모는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김희영이 시집올 때 적지 않은 약재를 갖고 왔는데, 노부인이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다가 그녀가 가져온 인삼 덕분에 차차 건강이 회복되었다.

또 2년 전에 배진운이 심한 고뿔에 걸려 하마터면 숨이 넘어갈 뻔할 때에도 김희영이 백 년 산 인삼을 내놓은 덕에 서서히 완치되었다.

모든 사람이 그녀의 손에 어떤 패를 들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에, 엄청난 혼수를 가져오지 않았더라면 뒷배인 태부가 없는 그녀를 누구도 녕국공 부인 취급을 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주서용이 돌아오고 기절한 지금, 자연스럽게 김희영의 손에 있는 인삼이 떠올랐다.

김희영이 대답하지 않자 조 어멈이 경멸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조 어멈도 예전에 그녀의 덕을 많이 보았지만 배진운처럼 달갑게 여기지 않았었다.

그저 녕국공 부인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불만을 참으며 체면을 줬을 뿐이었는데, 이제 주서용이 돌아온 이상 그녀도 더 이상 참지 않았다.

조 어멈의 눈에 주서용은 다정하고 순수하며 국공 나리와 죽마고우이니 당연히 두 사람이 천생연분이라 생각했다.

‘이제 서용 아가씨가 돌아왔으니 녕국공 부인의 자리를 반드시 되찾을 거야.’

간밤에 배진휘가 밤새 주서용을 돌본 것으로 보아, 아직도 사랑이 애틋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화가 치밀어 오른 조 어멈은 그새를 참지 못하고 비아냥거렸다.

“부인, 옹졸하게 서용 아가씨를 질투해서 인삼을 주지 않는 거죠? 5년 전에 아가씨가 나리를 위해 희생한 것을 봐서라도 거절하면 안 되죠.”

조 어멈의 무례한 태도에 옥정은 너무 화가 나서 가슴이 아팠다.

‘이제는 늙은 노친네까지 부인 앞에서 대놓고 비아냥거려?’

옥정이 뒤돌아보았다.

“부인.”

물론 김희영이 조 어멈의 무례와 불경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주서용이 배진휘를 살린 것과 몸이 허약하면 인삼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니 녕국공 부인으로서, 그리고 배진휘의 아내로서 당연히 넓은 아량으로 주서용을 챙겨줘야 했다.

하지만 노부인의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인삼을 끊이는 것은 안 되었기에, 그녀가 계속 망설이자 조 어멈은 이제 대놓고 짜증을 부리며 독촉했다.

“부인, 얼른 주세요. 서용 아가씨가 급히 필요해요.”

말이 끝나기 바쁘게 배진휘가 관복차림으로 밖에서 걸어 들어오더니, 조 어멈을 보고 눈썹을 치켜세웠다.

“서용을 돌보지 않고 여기는 어쩐 일로 왔는가?”

조 어멈은 서둘러 그에게 인사를 올렸다.

하지만 김희영은 일어나지 않고 조용히 아랫것들에게 배진휘의 시중을 들라하자, 배진휘가 조금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왜냐면 예전에 그의 옷 시중은 김희영이 직접 나서서 해줬기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하인에게 시켰다고, 안색을 굳히며 덤덤하게 그녀를 흘려보았다.

병풍을 사이로 두고 조 어멈이 다시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서용 아가씨의 몸이 허약하여 인삼을 약재로 써야 회복할 수 있습니다. 둘째 도련님이 말씀하길 일반 인삼은 효과가 미비하니, 오직 부인께서 갖고 있는 백 년 산 인삼을 사용해야 뛰어난 효과를 볼 수 있답니다. 해서 저를 부인에게 보내어 인삼을 가지러 왔습니다. 그런데 부인이… 서용 아가씨에게 인삼을 주는 게 싫으신지 지금도 대답을 하시지 않습니다.”

배진휘가 옷소매를 만지더니 천천히 병풍 안으로 들어오며 김희영을 내려보았다.

“인삼은 부인한테 많을 텐데, 왜 내어주지 않는 거요?”

그의 싸늘한 말에 김희영의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

부부로 5년을 살면서 한 번도 차가운 말투로 말한 적이 없었는데, 역시나 첫사랑이 오니 사람이 확 달라졌다.

예전에는 하인들 앞에서까지 항상 김희영의 체면을 세워주더니, 이제는 주서용이 돌아왔다고 아예 대놓고 무시하는 것이었다.

옥정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리, 부인이 주기 싫어하는 게 아니라 인삼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그동안 노부인의 병을 치료하느라 백 년 산 인삼 두 개와 영지 같은 희귀 약재들을 많이 사용했어요. 게다가 둘째 도련님과 아가씨 몸이 허약하여 부인께서 약재를 내놓은 덕에 몸보신을 했지요. 지금은 정말 얼마 남지 않았거든요.”

눈치 빠른 조 어멈은 방금 배진휘가 주서용을 두둔해 나선 것에 힘입어 자신감이 생겼다.

“얼마 남지 않아도 있다는 걸 설명하잖아요. 노부인과 둘째 도련님, 아가씨한테 아낌없이 주셨으면서 서용 아가씨한테는 주기 싫은가요? 결국은 부인이 아가씨와 나리를 질투해서 안 주시는 거겠죠.”

“입을 쳐라!”

참다 못한 김희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소리를 질렀다.

촤아악!

옥정은 기다렸다는 듯이 뛰어가 주저하지 않고 뺨을 내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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