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에 퍼진 시퍼런 멍 자국과 촘촘한 주삿바늘 자국들, 분명 누군가가 심한 고문을 당한 흔적이었다.‘하지만 이게 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이 사람이 누구예요?”남설아는 의아한 표정으로 배서준을 바라봤지만, 곧 그의 말속에서 실마리를 찾아냈다. 아까 분명 서유라가 괴롭힘을 당했다고 말했었다.그제야 사진 속 상처 입은 사람이 서유라라는 걸 깨닫고 남설아는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솔직히 말해 이런 모습이 그녀에게는 그저 통쾌하게만 보였다.남설아의 표정 변화를 읽어낸 배서준은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넌 학대가 어떤 처벌을 받는지 알기나 해?”“증거가 있으면 경찰에 신고해야죠. 이렇게 미친개처럼 내 앞에서 날뛰지 말고요. 나 바빠요. 할 말 끝났으면 내 앞에서 역겹게 굴지 말고 그 여자나 위로하러 가요.”남설아는 사진들을 다시 그에게 던졌다.이제야 알았다. 많은 말이 필요 없이 화를 내버리는 게 이렇게나 속이 시원한 일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뻔뻔한 사람이 되고 나니 온몸이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진작에 예의 따위 버리고 살았더라면 그렇게 답답한 시간을 보낼 필요도 없었을 텐데...’“너!”배서준은 눈앞의 남설아가 정말 자기 아내가 맞는지조차 믿을 수 없었다.소설 속 이야기처럼 혹시 자기 아내가 다른 사람에게 빙의라도 된 건 아니겠냐는 생각까지 들었다.하지만 곧 그는 이성을 되찾고 팔짱을 낀 채 느긋하게 남설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이게 네 새로운 수법이야? 남설아, 날 얻기 위해서 별의별 수단을 다 동원하는구나.”‘뭐라고?’남설아는 기가 막혔다. 이 상황에서도 이런 뻔뻔한 말을 당당하게 내뱉다니, 정말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정말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요. 당신 마음대로 해요.”쓸데없는 말은 낭비일 뿐, 어리석은 자와 논쟁할 필요도 없었다. 설마 자기 인생에서 이런 어이없는 일이 벌어질 줄 그녀는 꿈에도 몰랐다.남설아가 돌아서서 방으로 가
남설아는 말 그대로 온몸의 힘을 전부 쏟아부었다.그러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잔뜩 거들먹거리던 배서준도 지금은 갑작스레 브레이크를 걸 수밖에 없었고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마치 삶은 새우처럼 구부정한 자세로 멈춰 섰다.분노와 당혹함에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는 남설아를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남설아는 비틀거리며 책상에서 내려와 구석으로 굴러 들어가듯 몸을 웅크리고는 온몸을 껴안은 채 덜덜 떨며 소리쳤다.“오, 오지 마! 다 꺼져!”“너...”배서준은 입을 열어 뭐라 하려다가 말이 목구멍에서 멈췄다. 그제야 문득 조금 전 서도현이 남설아를 강제로 덮칠 뻔했던 일이 떠올랐다.알 수 없는 짜증이 마음속 깊이 일었다. 그는 화가 난 듯 옆에 있던 의자를 세차게 걷어찼고 그 충격에 하필이면 방금 자극된 부위까지 건드려 얼굴을 일그러뜨렸다.울컥 치미는 화를 누르며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외투를 집어 남설아 위로 툭 던졌다. 그리고 고통을 억지로 참아내며 자리에서 돌아서 성큼성큼 나가버렸다.문을 나서고 나서야 배서준은 약간의 후회를 느꼈다.오늘은 분명히 자신이 선을 넘은 것이었다.남설아 앞에서 배서준은 늘 냉정하고 절제된 태도를 유지해왔고 심지어 무정하다 싶을 정도로 선을 지켜왔다. 그런데 요즘 들어 뭔가 이상했다.무언가가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변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남설아는 배서준의 체취가 밴 외투를 확 집어던지고 힘겹게 일어서서 비틀거리며 계단 쪽으로 발을 옮겼다.여긴 더 이상 머물 수 없었다. 너무 위험했다.서랍을 열자 안에는 수십 개의 부동산 등기부등본이 있었다.남설아는 침대에 앉아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보다가 결국 회사와 가장 가까운 고급 평형의 아파트를 골랐다.“혹시... 저랑 같이 가고 싶은 사람 있어요?”남설아는 앞에 서 있는 도우미들을 바라보며 물었다.사실 이 집엔 줄곧 도우미들이 있었다. 하지만 배서준은 남설아가 여유를 부리는 걸 못마땅해했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났다.그렇게 좋은 자원을 손에 쥐고도 써먹을 줄 몰랐고 오히려 저런 도우미들한테 무시당하고 있었다니, 차라리 과거로 돌아가서 그때의 자기 따귀를 몇 대 때려주고 싶을 정도였다.역시 임신하면 바보 된다는 말이 틀린 게 아니었다.이제는 아무도 감히 반박하지 못했다. 뭐라 해도 어쨌든 한 집안 식구고 진짜로 남설아가 판을 뒤엎기라도 하면 결국 제일 손해 보는 건 저들 같은 하층 노동자들일 테니 말이다.속은 여전히 부글부글 끓었지만 다들 하나둘 짐 챙겨서 조용히 물러났다.겨우 집이 조용해졌으니 오늘 밤은 좀 쉴 수 있겠지 싶었는데 웬걸, 이번엔 또 불청객이 찾아왔다.‘이래서야 편히 살 수는 있는 거야?’남설아는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지금껏 살아온 날들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날들이었다는 걸.‘그때의 난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버티고 있었던 걸까?’과거의 자신이었지만, 공감할 수 없었다. 남설아는 그 낯선 감정을 처음으로 마주하고 있었다.“남설아! 이 못된 년! 당장 안 나와?”“시부모님 몸 안 좋은 거 몰라? 시아버진 누워계시는데 넌 어때? 코빼기도 안 비치잖아! 네가 며느리야? 에휴, 부모 없는 게 티가 나지. 그따위로 자랐으니 인성도 저 모양이지!”윤화진이 허리에 손을 얹고 거실 한가운데서 고래고래 악을 썼다.남설아는 이마를 문질렀다. 그러고는 장숙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걱정 말라는 눈짓을 보냈다.뒤이어 그녀는 혼자서 천천히 2층에서 내려와 일말의 예고도 없이, 다짜고짜 찬물 한 바가지를 들고 윤화진의 머리 위에 그대로 끼얹었다.“꺄악!”온몸이 흠뻑 젖은 채 윤화진은 비명을 질렀다.머리부터 발끝까지 죄다 명품이었건만 순식간에 다 망가졌고 꼴은 딱 물벼락 맞은 생쥐 꼴이었다.“남설아, 이 미친년이, 네가 감히!”윤화진은 망설임도 없이 손바닥을 들어 남설아를 때리려 들었다.하지만 남설아가 먼저 손목을 낚아채더니 힘껏 꺾어 바닥에 그대로 내던졌다. 그러고는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봤다.“여긴 내 집이에요. 어머님
“나를 내쫓겠다고? 그건 안 될 일이지!”“말해두는데 우리 배씨 가문 물건 안 내놓으면 난 절대 안 나가!”윤화진은 비웃듯 코웃음을 치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러고는 눈을 부릅뜨고 남설아를 노려봤다.그 꼴을 보고 있자니 우습기만 했다. 남설아는 콧방귀를 뀌며 손을 휘저었다.“그럼 여기서 죽든가요.”이 말만 남긴 채 캐리어를 끌고 그대로 돌아서 나가버렸다. 애초에 떠날 생각이었고 이 집에서 나갈 예정이었으니 미련 따윈 없었다. 윤화진이 자처해서 문지기 노릇을 하겠다는데 굳이 말릴 이유도 없었다.그런데 진짜로 남설아가 말도 없이 나가버리자 윤화진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순간 얼굴이 하얗게 질려 곧장 배서준에게 전화를 걸었다.“너 안 오면 내가 배건 그룹 정문 앞에서 목을 매달아 죽어버릴 거야!”사실 배서준은 어릴 때부터 윤화진한테서 정 같은 걸 느껴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대부분은 짜증과 피로감이었다.하여 지금도 이 말에 얼굴이 더 어두워졌고 단 한 줌의 기분 좋은 감정도 없었지만 결국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윤화진을 보자 배서준은 이맛살을 살짝 찌푸렸다.“무슨 일이에요?”“네가 뭘 안다고 그래? 너 아버지 중풍으로 쓰러졌잖아! 근데도 한 번 들여다보지도 않냐? 네가 사람이야? 너 아들 맞긴 해?”그러자 윤화진은 벌떡 일어나 눈을 치켜뜨고 소리쳤다.그 시선과 정면으로 마주했지만 배서준은 무표정했다.“집에 간병인 네 명 있잖아요. 부족해요?”“간병인이랑 네가 같아? 넌 우리 자식이야. 어떻게 그걸 똑같이 보냐! 같이 있지는 못해도 얼굴 한 번 보러 오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대체 너 왜 이러는 거야? 점점 더 말도 안 듣고 못된 애가 되잖아!”윤화진은 얼굴이 창백해질 정도로 흥분했고 목소리까지 떨리기 시작했다.“내가 기억하는 건 두 분이 날 여기저기 끌고 다니면서 놀러 다니던 기억밖에 없어요. 나한테 신경 쓴 적이나 있었어요? 애초에 관심도 없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 어쩌고저쩌고 말할 자격
그 말을 들은 남설아는 가볍게 웃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이렇게 바뀐 게 아니라 원래부터 이랬어요. 다만 서준 씨가 있어서 그 사람 때문에 그렇게 살았던 거예요. 근데 이제는 그냥 나대로 살고 싶어요.”이 말을 끝으로 남설아는 캐리어를 끌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결혼할 때, 배서준은 카드 한 장을 줬다. 그리고 이후로 줄곧 그 카드로 그녀를 조종했다.말 잘 안 들으면 돈을 끊고 생활비조차 안 줬다. 그녀에게는 그 카드가 유일한 경제수단이었다.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할아버지가 남겨준 유언장이 있으니 직접 은행에 가서 본인의 지분을 출금할 수 있게 된 것이다.손에 든 새 카드, 그걸 바라보던 남설아는 눈가가 붉어지더니 입술을 앙다문 채 작게 중얼거렸다.“그날 밤... 나한테도 이 카드가 있었더라면 우리 나은이는 떠나지 않았을 텐데.”“사모님, 아가씨가 세상을 떠난 건... 마음 아프지만 병이 워낙 깊었잖아요. 하루를 더 살아도 하루가 더 고통이었을 테니... 그렇게 간 게 어쩌면 하늘의 뜻일지도 몰라요.”장숙자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같은 여자로서, 남설아가 아이를 잃은 그 고통을 진심으로 공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속 그 자리에 머무를 수만은 없었다.그 말을 들은 남설아는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우리 나은이 정말 착했어요. 떠나기 전에 제 손 꼭 잡고 엄마 혼자일까 봐 걱정된다고, 꼭 잘 살아야 한다고 그렇게 말하고 갔어요. 그래서 나 꼭 잘 살 거예요. 내 딸이 하늘에서 마음 놓을 수 있도록.”남설아의 말에 장숙자는 뭐라 말할 수가 없었고 결국 깊은 한숨만 내쉬며 고개를 떨구었다.배서준과 결혼한 이후로 남설아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쇼핑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쇼핑몰에 들어서자마자 그야말로 폭풍처럼 카드를 긁기 시작했다.문제는 이 카드가 연결 계좌라는 점이었다.회의 중이던 배서준의 핸드폰이 끊임없이 진동을 울렸다.귀찮은 듯 핸드폰을 든 그는 알림창에 뜬 문자들을 확인하곤
배서준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지만 끝내 이를 악물고 말했다.“세상이 연훈 테크놀로지 하나만 있는 건 아니잖아. 다음 달에 위화 그룹 쪽에서도 들어올 거다. 두 회사는 앙숙이니까 우리한테도 기회는 있어.”“이번 한 달, 진짜 보여줄 만한 결과 안 나오면 프로젝트팀 전부 다 나가떨어질 줄 알아!”이 말을 내뱉고는 그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회의실을 나가버렸다.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남겨진 팀원들 전부 하나같이 허탈함에 빠졌다.팀이 만든 결과물은 원래부터 수준급이었다. 정작 판단을 잘못한 건 배서준이었고 그 때문에 제대로 경쟁조차 못 해본 건데 마치 실력이 모자라서 진 것처럼 몰아붙이니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사무실로 돌아오자 천기준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대표님, 위화 그룹도 물론 괜찮긴 한데 그래도 연훈 테크놀로지랑은 비교가 안 되잖아요. 제 생각엔... 우리 쪽에서도 한 번 더 시도해보는 게 낫지 않을까요? 듣자 하니까 연훈 테크놀로지가 강연찬이랑 협력하긴 했지만 기술적인 부분에서 아직 난관이 있어서 꼭 협상이 끝난 건 아닌 것 같던데요?”조심스럽게 떠보는 말이었다.‘강연찬과 협력?’배서준은 그 말이 끝나자마자 단칼에 잘랐다.“나는 강연찬이랑 손잡을 생각 없어.”“네. 그럼 저는 먼저 나가보겠습니다.”천기준은 이제야 확실히 알았다. 배서준은 이미 강연찬에 대해 감정이 깊게 상해 있다는 것을.하지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배서준이 왜 그렇게 강연찬을 신경 쓰는 건지.그전까지는 철저하게 이익을 기준으로 움직였고 사람이 누가 됐든, 무슨 일이 있었든 항상 계산부터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명백히 손해가 되는 상황인데도 감정 하나로 일을 놓아버렸으니 말이다.핸드폰이 계속 진동하고 있었지만 배서준은 볼 생각조차 없었다. 머릿속은 온통 강연찬과 남설아가 함께 있는 장면으로 가득 차 있었다.손은 무의식중에 꽉 움켜쥐어 주먹이 되었고 관자놀이까지 벌떡거렸다.결국 노트북을 열어 남설아의 위치를 확인한 그는
“사실을 왜곡하고 고마운 일에도 보답할 줄 모르고... 당신은 머리만 나쁜 게 아니라 인격에도 문제가 있어요.”남설아는 말을 끝내자마자 배서준의 발을 있는 힘껏 밟았다.진심을 다해 짓밟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억눌린 감정을 쏟아내기 위한 발버둥이었다.예상대로 배서준은 고통에 휘청하며 남설아를 놓아버렸다. 그러고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미쳤어?!”“그래요, 이제야 눈치챈 거예요? 당장 꺼져요. 나 내일 출근해야 하니까.”남설아는 더 이상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 돌아서서 계단을 올라갔다. 그 남자를 한 번이라도 더 쳐다보는 것조차 역겨웠다.“남설아, 너 잊지 마! 여긴 내 별장이야!”“좋아요. 그럼 당신 부모부터 내보내요. 난 본가로 돌아갈게요.”계단 위에서 돌아선 남설아는 냉소를 머금은 눈빛으로 배서준을 내려다봤다.지금 이 순간, 한 사람은 위에서 내려다보고 한 사람은 아래에서 올려다보았다. 남설아의 눈엔 조롱과 냉소가 가득했고 말투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잊지 마. 본가는 애초에 할아버지가 내게 물려준 재산이에요. 내가 지금까지 조용히 있었던 건 당신 체면이라도 봐준 거예요. 그러니까 그 체면 좀 소중히 여겨요. 괜히 건드리지 말고.”배서준이 뭐라고 더 말하려던 찰나 다음 순간 들려온 건 문이 쾅 하고 닫히는 소리뿐이었다.“진짜 누가 체면 안 지키는 건데? 남설아, 너 그렇게 계속 연기해봤자야. 나는 너 같은 여자 눈곱만큼도 관심 없어! 교활하고 악독한 년!”배서준은 아래에서 마치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러댔다.예전 같았으면 남설아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마음이 아픈 대신 그저 역겹기만 했다. 저 사람, 정신 상태가 좀 위험한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배서준은 잠시 반응을 기다렸지만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자 화만 잔뜩 난 채 돌아서 나가버렸다.고개를 돌리자 문 앞에 서 있던 사람이 벽에라도 붙어 숨고 싶은 듯한 표정으로 안쓰럽게 배서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에는 어
“정말이야? 서준아, 나 진짜 너희 회사에서 일할 수 있는 거야? 근데 내가 듣기로는 설아 씨도 너희 회사에 있다던데 화내진 않겠지?”서유라는 말하다가 눈빛이 어두워졌다.배서준이 가장 못 참는 건 서유라가 속상해하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바로 말했다.“그 사람 그냥 평범한 직원일 뿐이야. 너한테는 부팀장 자리 줄게. 절대 너한텐 부족함 없게 할 거야.”“서준아, 넌 나한테 정말 잘해줘. 만약 서준이 너 없이 살아야 한다면 그다음부터의 날들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상상이 안 돼.”말을 마친 서유라는 곧장 배서준에게 몸을 기대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그리고 곧 두 사람은 서로를 탐하듯 격렬하게 얽혔다. 온갖 고민과 피로는 그 뜨거운 순간 속에서 모두 사라져버렸다.배서준은 역시 서유라와 함께 있을 때가 가장 편하고 가장 자유롭다고 느꼈다.다른 여자들은 그저 피곤하게 만들 뿐이었다.서유라는 예전부터 배건 그룹에 들어가고 싶어 했지만 번번이 기회를 잡지 못했다.이번에도 그저 기대 없이 시도해본 것이었는데 설마 배서준이 남설아에게 화가 나서 진짜로 받아줄 줄은 몰랐다.원하던 걸 이루었다면 기뻐해야 할 일인데 정작 서유라는 웃음이 잘 나오지 않았다.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온 배서준이 어떤 사람인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어떤 일이 있어도 늘 냉정하게 중심을 잡고 사적인 감정으로 일을 흐리는 법이 없던 사람, 그런 그가 남설아 때문에 원칙을 무너뜨렸다는 건 분명 좋지 않은 신호였다.서유라가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저 배서준의 손을 절대 놓지 않고 꽉 붙잡는 것뿐이었다.곁에서 잠든 배서준을 바라보며 서유라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손을 뻗어 그의 뺨을 살며시 쓸며 중얼거렸다.“서준아, 내 탓 하지 마. 난 이제 너 하나뿐이야.”한편 남설아는 침대에 눕자마자 곧장 잠에 빠졌다.감옥 같은 공간에서 벗어났을 뿐인데 이렇게 편안하게 잘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다음 날 아침, 남설아는 일찍 일어나 깔끔하게 옷매무새를 다듬었다.거울
“유라 씨였군요.”차혜미는 담담하게 말했다. 말투에는 약간의 거리감이 느껴졌다.“서준 씨도 같이 왔네요.”“사모님, 안녕하세요.”배서준도 서유라 뒤를 따라 인사를 건넸다.“유라 씨, 몸은 좀 어때요? 괜찮아졌나요?”차혜미는 의례적인 말투로 물었다.“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많이 좋아졌어요.”서유라는 웃으며 대답했고 그 얼굴에는 자신감이 엿보였다.이번 기회에 차혜미 앞에서 이미지를 조금 회복해보려는 속셈이었다.그녀는 차혜미가 들고 있던 가방을 보며 곧장 칭찬을 시작했다.“사모님, 정말 안목이 좋으세요. 저 가방은 이번 시즌 신상인데 저도 얼마 전에 소개 영상 봤거든요.”서유라는 자연스럽게 자신도 그 가방에 관심이 있다는 듯 말하며 호감을 얻어보려 했다.하지만 차혜미는 그녀의 의도를 알아채지 못한 척 고개를 돌려 남설아를 향해 말했다.“설아 씨, 이 가방은 설아 씨가 추천해준 거잖아요. 어때요, 괜찮죠?”“네, 사모님께 정말 잘 어울리실 거예요.”남설아는 차분하게 대답했다.“그렇죠, 나도 마음에 들어요.”차혜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럼 이걸로 하죠.”그녀는 점원에게 말했다. “이 가방 포장해주세요.”“네, 사모님.”점원은 공손하게 대답했다.서유라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 차혜미가 이렇게까지 대놓고 그녀를 무시할 줄은 몰랐다.게다가 사람들이 많은 매장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자 그녀는 공개적으로 망신당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모욕감과 질투심이 동시에 끓어올랐다.서유라는 남설아를 향해 노골적으로 매서운 눈빛을 보냈다.지금이라도 당장 남설아를 물어뜯고 싶을 만큼 분노가 치밀었다.배서준 역시 표정이 굳어 있었다.차혜미가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남설아를 편들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자신들과의 관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듯한 태도에 그는 기분이 몹시 상했다.서유라의 얼굴을 바라보던 차혜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여전히 상냥한 말투로 말했다.“유라 씨, 아직 몸도 다 회복 안 됐을 텐데 무리하지 마세요.
식탁 위에서 남설아는 정신없이 밥을 먹고 있었다.식사 예절도 신경 쓰지 못할 만큼 서둘러 먹는 모습이었다.마치 무언가 급하게 가야 할 일이 있는 듯했다.강연찬은 그녀가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보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설아야, 좀 천천히 먹어. 체하겠다.”그는 말하며 조심스럽게 물 한 잔을 따라 그녀 앞에 놓아주었다.“오빠, 괜찮아.”남설아는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하며 계속해서 음식을 입에 넣었다.“서강 그룹 사모님이랑 쇼핑 약속이 있어서 빨리 먹고 가야 해.”“쇼핑?”강연찬은 예상치 못한 말에 놀란 눈치였다.“너랑 사모님이 그렇게 가까운 사이였어?”“회사 일 때문이지.”남설아는 밥을 삼킨 뒤 설명했다.“서강 그룹이 우리 쪽 프로젝트에 관심을 보여. 이런 기회는 꼭 붙잡아야 하잖아.”“그렇구나.”강연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여전히 걱정되는 마음에 덧붙였다.“그래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 안전도 챙기고.”“응, 알겠어.”남설아는 웃으며 말했다. 음식을 다 삼킨 후 그녀는 먼저 제안했다.“쇼핑 끝나면 오빠가 데리러 와줄래?”“응, 당연하지.”예상하지 못한 제안에 강연찬은 기분이 좋아졌고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오빠는 천천히 먹어. 과일 좀 준비해올게.”남설아는 차혜미와 시내 중심에 있는 대형 쇼핑몰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다.약속 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한 그녀는 쇼핑몰 입구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그녀 앞에 멈췄다.차 문이 열리고 차혜미가 차에서 내렸다.“사모님, 오셨어요.”남설아는 서둘러 다가가며 밝고 단정한 미소를 지었다.“설아 씨, 오래 기다리셨죠?”차혜미는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아니에요, 저도 방금 도착했어요.”남설아가 대답했다.“그럼 들어가 볼까요?”“네.”두 사람은 웃으며 함께 쇼핑몰 안으로 들어갔고 본격적인 쇼핑이 시작되었다.차혜미는 비록 연배가 있는 사람이었지만 전혀 거들먹거리는
전화를 끊자마자 남설아는 기쁨에 겨워 벌떡 일어났다.그녀는 이 좋은 소식을 곧바로 강연찬에게 알렸다.“오빠, 서강 그룹이 우리랑 협력하기로 했어!”남설아는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해냈어!”“정말이야?”강연찬도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정말 잘 됐다. 난 처음부터 네가 잘 해낼 거라 믿었어.”“이건 다 오빠 덕분이야.”남설아는 진심으로 말했다.“오빠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이렇게 순조롭진 않았을 거야.”“나한테 그럴 필요 없어.”강연찬은 웃으며 말했다.“이건 우리 둘이 함께 이뤄낸 성과잖아.”“응!”남설아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서강 그룹이라는 큰 파트너를 얻었으니 오늘은 제대로 축하해야겠어.”“좋아.”강연찬이 말했다.“어떻게 축하하고 싶어?”“오빠가 정해줘.”남설아가 웃으며 말했다.“난 오빠를 믿어.”“그럼 내가 준비할게.”강연찬이 말했다.“분명 마음에 들 거야.”“응, 기다릴게.”남설아가 환하게 웃었다.그날 저녁, 강연찬은 직접 요리를 해 한 상 가득 맛있는 음식을 준비했다. 또한, ‘협력 성사 축하’라는 문구가 적힌 케이크도 샀다.“와 너무 푸짐하다.”남설아는 차려진 음식을 보고 감탄했다.“오빠, 진짜 대단해.”“맛있게만 먹어주면 돼.”강연찬은 웃으며 말했다.“얼른 먹어봐.”“응.”남설아는 젓가락을 들고 한입 먹어보았다.“맛있어. 오빠, 요리 실력 엄청나게 늘었네.”“맛있다니 다행이다.”강연찬이 말했다.“앞으로 자주 해줄게.”“좋아.”남설아는 웃으며 말했다.“그럼 나는 매일 맛있는 거 먹겠네.”두 사람은 식사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분위기는 무척 따뜻하고 편안했다.“이번 일도 오빠가 곁에서 도와준 덕분이야.”남설아는 기쁜 얼굴로 잔을 들며 말했다.“오빠가 함께해줘서 나도 버틸 수 있었어. 정말 고마워, 오빠.”남설아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오빠가 있어서 나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야.”“설아야, 넌 원래부터 훌륭한 사람이야. 난 단지 옆에서 조금 도왔을 뿐이야
서유라는 병원에서 며칠 더 머물렀고 그 며칠 동안 배서준은 거의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그녀 곁을 지켰다.그 모습에 서유라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역시 이 계략은 언제 써도 효과 만점이다.하지만 그녀도 단순히 아픈 척만 해서는 오래 가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다.배서준이 완전히 자기에게 빠지도록 더 확실한 방법이 필요했다.이날도 배서준은 평소처럼 병상 옆에 앉아 사과를 정성스레 깎고 있었다.서유라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서준아, 나 계속 민폐만 끼치는 거 같아. 회사 일은 괜찮아?”“괜찮아, 신경 쓰지 마.”배서준은 깎은 사과를 서유라에게 건네며 말했다.“회사는 내가 알아서 할게. 넌 몸이나 잘 추슬러.”“하지만...”서유라는 말을 맺지 못하고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왜? 무슨 일 있어?”배서준은 다정하게 물었다.“그냥 내가 이렇게 아프기만 해서 너한테 짐이 되는 건 아닐까 해서.”서유라는 눈을 내리깔며 연약한 모습을 보였다.“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배서준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넌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야. 그런 널 짐처럼 느낄 리가 있겠어?”“그래도...”서유라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회사 상황이 안 좋다는 말도 들리고 다 나 때문인 것 같아서...”“그런 소리 하지 마.”배서준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회사의 일은 나 혼자 감당 못 해서 그런 거야. 너랑은 아무 상관 없어.”“날 위로하려는 거라면 그런 말 안 해도 돼.”서유라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나도 알아. 결국 나 때문에 네가 이렇게까지...”“유라야, 그건 진짜 네가 오해하고 있는 거야.”배서준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회사 일은 내가 잘 정리할 테니까 넌 아무 걱정하지 말고 푹 쉬어.”“응.”서유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무척 기뻐했다.역시나 배서준은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에 가장 약했다.불쌍한 척, 약한 척, 조금만 애교를 부리면 뭐든 들어줄 것이다.“난 처리할 일
“설아는 잘못한 게 없어요. 배 대표님이 뭔데 이렇게 몰아붙이는 거죠?”강연찬이 단호하게 말했다.“이건 나랑 남설아 사이의 일이에요. 강 대표님이 끼어들 일은 아닙니다.”배서준은 냉랭하게 응수했다.“지금 설아는 내 파트너이자 내 친구입니다.”강연찬의 말투는 확고했다.“배 대표님이 이렇게 막무가내로 설아를 몰아붙이는 걸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요.”“몰아붙인다고요?”배서준은 비웃으며 말했다.“내가 언제 남설아를 몰아붙였다는 겁니까?”“아닌가요?”강연찬이 되물었다.“됐어, 오빠. 그만해.”남설아가 나섰다.“나는 괜찮아. 이런 사람들과는 굳이 말 섞을 필요 없어.”남설아의 말투는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그래도 나 지켜줘서 고마워, 오빠.”“우리가 그런 말 할 사이야?”강연찬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너만 괜찮으면 됐어.”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송우민은 조용히 상황을 관찰하고 있었다.그는 배서준이 아직 남설아에게 미련이 남아 있다는 걸 눈치챘고 그 점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지 속으로 계산을 시작했다.배서준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다.그런 그가 남설아에게 밀린다는 사실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만약 남설아가 아직도 배서준을 좋아한다고 믿게 만든다면 그는 분명 어떻게든 다시 붙잡으려고 할 것이다.그러면 그 틈을 이용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연회가 끝난 후, 배서준과 서유라는 차로 돌아왔다.차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서준아, 나 너무 쓸모없는 사람이지?”서유라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계속 너한테 민폐만 끼치고, 나 너한테는 짐 같은 존재지?”“바보야, 그런 말 하지 마.”배서준이 다정하게 달랬다.“넌 짐이 아니라 내 소중한 사람이야.”“하지만 난 자꾸 널 힘들게 하고 화나게 하잖아.”서유라의 눈에 금세 눈물이 맺혔다.“나 진짜 무능한 사람 같아.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어.”“울지 마, 유라야. 울지 마.”배서준은 그녀를 안으며 애틋하게 말
배서준은 고개를 홱 돌려 남설아를 노려보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거기서 뭐 해? 빨리 의사부터 부르러 가야 할 거 아냐!”남설아는 이 광경을 바라보며 속으로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서유라의 연기는 참으로 어설펐다.이렇게 진부한 수법으로 배서준을 속이려 들다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하지만 굳이 그녀를 들춰내고 싶지도 않았다.어차피 배서준은 이미 모든 게 자기 탓이라고 믿고 있었고 무슨 말을 해도 변명으로밖에 안 들릴 것이다.“알겠어요, 의사 부를게요.”남설아는 담담히 대답하고 돌아섰다.그녀는 한쪽 구석으로 가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전화를 끊은 뒤, 입가에는 비웃는 듯한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서유라, 이번에는 네가 망가질 차례야. 기다려 봐.’연회장 안은 서유라의 모습으로 인해 술렁이기 시작했다.여러 사람이 몰려와 그녀의 상태를 걱정하며 물었다.“유라 씨, 괜찮아요?”“병원 가야 하는 거 아냐?”“배 대표님, 유라 씨 빨리 병원으로 모셔야겠어요.”사람들이 각자 떠들어대며 현장은 점점 어수선해졌다.배서준은 서유라를 품에 안고 초조함에 휩싸였다.그는 서유라가 왜 갑자기 아픈 건지 몰랐지만 속으로는 분명 남설아가 무슨 말을 해서 그녀를 자극한 게 틀림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그렇게 생각하자 남설아에 대한 미움은 더욱 깊어졌다.“비켜주세요. 다들 좀 비켜줘요.”배서준은 크게 외쳤고 그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 실려 있었다.“유라가 쉬어야 하니까 제발 좀 그만들 하세요.”사람들은 그의 기세에 눌려 더는 말을 하지 못하고 길을 비켜주었다.배서준은 서유라를 안은 채 서둘러 연회장을 빠져나갔다.그는 그녀를 차에 태우고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가는 내내 그의 얼굴은 잔뜩 어두워 있었고 운전대를 쥔 손에는 핏줄이 불쑥불쑥 솟아 있었다.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조수석에 기댄 서유라는 슬며시 배서준의 표정을 살폈다.그가 자신을 이렇게까지 걱정하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는 의기양양했다.예상대로였다. 자신이 아픈 척
서유라는 싸움에서 진 사람처럼 기가 죽고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배서준의 이미지도 사람들 눈에 한순간에 추락했고 그는 무척이나 난처하고 부끄러웠다.그는 점점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기 시작했다.만약 그때 남설아와 이혼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초라해지진 않았을 텐데 말이다.연회가 끝난 뒤 배서준과 서유라는 함께 차에 올랐다.“서준아, 미안해.”서유라는 고개를 숙인 채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오늘 내가 괜히 설아 씨한테 차를 우리라고 제안했어. 설아 씨가 그렇게까지 잘할 줄은 몰랐어...”“너 잘못 아니야.”배서준은 그녀의 말을 끊으며 피곤한 어조로 말했다.“남설아가 괜히 잘난 척을 한 거지.”그는 서유라가 마음 아파하는 게 안쓰러워 모든 잘못을 남설아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그래도 난 아직도 미안해.”서유라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다.“내가 너를 많은 사람 앞에서 망신당하게 했잖아.”“바보야, 네 탓이라고 한 적 없어.”배서준은 그녀의 등을 다정하게 토닥였다.“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응.”서유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배서준의 품에 안겼다.하지만 배서준의 마음은 딴 데로 향하고 있었다.그는 과거의 남설아를 떠올리고 있었다.한때 그녀는 단지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매일 자신과 아이만 바라보며 살아가던 그녀가 도대체 언제 다도를 배운 건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그 다도 실력이 이 정도라니, 서 회장 부부가 칭찬을 아끼지 않을 정도였다.‘지금 저 여자가 내가 알던 남설아가 맞는 건가?’그는 마음속 깊이 혼란스러웠다.남설아는 분명 변해 있었다. 더 이상 자신이 쉽게 이해하거나 조종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서유라는 배서준의 시선이 자꾸만 허공으로 향하는 걸 느끼고는 그가 또다시 남설아를 생각하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그녀의 마음속에 위험 신호가 울렸다. 그녀는 반드시 이 둘의 접촉을 막아야만 했다.‘남설아, 가만 안 둬. 네가 어떻게 되나 두고 보자.’서유라는 속으로 이를 악물며 다짐했다.그녀의
“서 회장님, 사모님, 과찬이세요.”남설아가 겸손하게 말했다.“그냥 가볍게 내린 것뿐이에요.”“남 대표 너무 겸손하시네.”서기찬이 말했다.“이건 아무렇게나 내려서 나올 맛이 아니야. 확실히 기본기와 실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지.”“그러게요, 설아 씨.”차혜미도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차 내리는 솜씨가 정말 대단해요. 제가 제자로 들어가고 싶어질 지경이에요.”“사모님, 또 농담하시네요.”남설아가 고개를 숙이며 미소 지었다.“이런 사소한 재주가 어찌 사모님의 눈에 찰 수 있겠어요?”“설아 씨가 너무 겸손하신 거예요.”차혜미는 찻잔을 바라보며 더욱 남설아에게 호감을 드러냈다.“차를 이렇게 잘 내리시는 걸 보니 정말 감탄밖에 안 나와요.”“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모님.”남설아는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유라는 마음속에 질투심이 더욱 불타올랐다.남설아가 이렇게까지 다도에 능할 줄은 몰랐다.게다가 자신이 의도한 모욕은커녕 오히려 남설아는 그 자리에서 주목을 한 몸에 받으며 칭찬을 독차지하고 있었다.서유라는 쉽게 물러설 수 없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설아 씨의 다도 실력 정말 대단하네. 그런데 듣기로 다도도 여러 유파가 있다고 하던데 설아 씨는 어느 쪽이야?”그녀는 남설아의 다도를 비하하려는 의도로 체계 없는 아마추어 수준이라고 암시하고자 했다.“특정 유파를 따로 배우진 않았어.”남설아는 침착하게 말했다.“그저 내가 좋아하는 방식대로, 내 느낌에 따라 우려내는 것뿐이야.”“그래?”서유라는 다시 비웃듯 말했다.“그럼 설아 씨만의 파가 생긴 거네? 대단해.”그녀는 남설아만의 파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강조하며 남설아의 다도가 비전문적이라는 뉘앙스를 풍겼다.“유라 씨, 또 농담하네.”남설아는 작게 웃으며 조롱이 섞인 말투로 답했다.“나는 그냥 취미로 하는 아마추어일 뿐이야. 감히 한 유파라니.”“남 대표님 너무 겸손하세요.”차혜미가 곧장 나섰다. 그녀는 서유라의 말에 담긴 악의를 알아차리고
“고마워.”남설아가 말했다.“설아 씨, 예전에 서준이 곁에 있을 때도 이렇게 늘 꾸미고 다녔어?”서유라가 불쑥 물었다. 말투에는 살짝 떠보는 뉘앙스가 묻어 있었다.그녀는 일부러 남설아가 한때 배서준의 곁에 있었던 시절을 언급하며 남설아의 과거를 상기하려 했다.남설아는 서유라의 의도를 바로 알아차렸다. 그녀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유라 씨, 농담이 지나치네. 그때의 나는 그저 서준 씨의 아내로서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을 했을 뿐이야.”“그래?”서유라는 다소 우쭐한 말투로 말했다.“나는 설아 씨가 차를 따라주고 시중드는 데 능한 줄 알았어. 내조를 하는 데는 정성이 필요하잖아?”그녀는 차를 따라주고 시중든다는 것을 일부러 강조해서 말하며 남설아를 모욕하려 했다.“유라 씨 말이 맞아. 내조를 하는 데는 정말 정성이 필요해.”남설아는 차분하게 말했다.“하지만 나는 그런 것보다는 사업을 하는 데 더 능한 편이야.”“그래?”서유라는 비꼬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그럼 오늘 설아 씨가 잘해야겠네. 여기 모인 분들 다 업계 내로라하는 분들이니까 실수라도 하면 큰일이겠어.”“걱정해줘서 고마워, 유라 씨.”남설아는 작게 미소 지으며 빈정거림이 담긴 말투로 답했다.“하지만 나는 유라 씨를 실망하게 할 일은 없을 거야.”“그래야지.”서유라는 속으로 비웃으며 남설아가 뭘 할 수 있을지 지켜보겠다는 듯 말했다.“설아 씨, 차 따르는 데 능하다니까 오늘 여기서 차 한 번 내려보지?”서유라가 제안했다. 말투에는 노골적인 도발이 묻어 있었다.“여기 좋은 차도 있고 멋진 다기 세트도 있어. 설아 씨의 손재주로는 딱 어울릴 것 같네.”그녀는 손재주라는 말을 다시금 강조하여 말하며 남설아를 하찮은 시중 드는 사람으로 몰아가려 했다.하지만 남설아는 그런 의도를 바로 눈치챘음에도 전혀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도전을 받아들였다.“좋아, 유라 씨가 이렇게 운치 있는 제안을 하니 한 번 해볼게.”남설아는 여유 있는 말투로 대답했다.“다만 한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