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라가 소미란 쪽으로 몸을 바짝 기울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미란 씨, 잘 생각해 봐요. 강연찬이 미란 씨한테 조금만 마음을 열면 기회는 바로 미란 씨한테 오는 거잖아요. 남설아는 지금 몸 상태도 안 좋고 지금이야말로 미란 씨가 틈을 노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아니겠어요?”소미란은 컵을 손끝으로 천천히 문지르며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거실은 다시 정적에 휩싸였고 벽에 걸린 시계 초침 소리만 공허하게 울렸다.서유라는 마음속으로 조급해하며 소미란이 결정을 내리길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소미란이 찻잔을 내려놓았다.“이 일에 대해서는 좀 생각해 볼게요.”소미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차도 마셨고, 저는 이만 가볼게요.”“현관까지 바래다줄게요.”서유라도 함께 일어났다.소미란이 문을 나서자마자 서유라의 입꼬리가 더는 감춰지지 않았다.그녀는 휴대폰을 들어 인사팀에 전화를 걸었다.“각 부서에 다과 좀 돌려줘요. 최고급 디저트와 음료는 다양한 맛으로 준비하고요. 배씨 가문 사모님이 직원들 노고를 격려하고 싶으시다고 전해요.”전화를 끊은 그녀는 치맛자락을 정리하고 하이힐을 신고 우아한 자세로 저택 정문을 나섰다.배건 그룹 직원들은 갑작스레 쏟아진 호사에 수군대며 떠들썩해졌다. 막 회의를 마친 배서준도 이 소식을 듣고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유라야, 오늘 기분이 좋은가 보네?”그가 사무실에 들어설 때 서유라는 비서에게 고급 디저트를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게 하고 있었다.서유라는 몸을 빙 돌려 배서준의 팔을 자연스럽게 끼고 소파 쪽으로 이끌었다.“서준아, 다과 어때? 요즘 다들 고생 많잖아.”그녀는 손수 포장을 풀어 디저트를 하나 꺼내 배서준의 앞에 내밀었다.“이거 새로 나온 디저트야. 한번 먹어봐.”배서준은 손을 내밀지 않고 그녀를 바라봤다.“제법 돈을 썼네. 평소 네 스타일은 아닌데.”서유라는 디저트를 내민 손을 잠깐 멈췄다가 아무렇지 않은 듯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서준아, 이제 나도 배씨 가문의 안주인인데 직원들 챙기는 게
소미란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잔이 탁자에 닿으며 톡 하고 가볍게 울렸다.“참 공교롭기도 하죠.” 그녀는 살짝 비웃는 듯한 말투였다. “그 난리 속에서도 남설아가 살아남았어요. 이제는 강연찬이 저렇게 감싸고도니, 앞으로는 손도 못 대겠어요.”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을 서성거렸다. 고급스러운 치맛자락이 걸음에 따라 우아하게 흔들렸다.“강연찬은 겉보기엔 점잖아도 행동은 칼 같아요. 이번에 남설아가 당한 걸 보면 그 사람이 가만 있을 것 같진 않아요.”서유라는 소미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굴렸다.“미란 씨, 저는 또 꼭 막다른 길에 놓인 건 아니라고 봐요.”그녀는 목소리를 낮추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소미란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서유라가 계속 말을 이어가길 기다리는 눈치였다.“속담에도 그런 말이 있잖아요.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요.” 서유라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소씨 가문이 배건 그룹을 도우려 했던 일을 이참에 활용해보는 거 어때요?”“활용하라고요?” 소미란은 그 말에 거부하는 태도를 보였다.“유라 씨, 제정신이에요? 지금 이 시점에 소씨 가문을 끌어들인다니, 그럼 제가 강연찬한테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우리 가문이 배건 그룹에서 한몫 챙기려는 거라고 말할까요? 아니면 제가 다른 속셈이 있다고 말할까요?”그녀의 말투는 차가워졌고 소씨 가문 장녀다운 기세가 느껴졌다.서유라는 급히 손사래를 치며 다급하게 말했다.“미란 씨, 그게 아니에요. 제 말 좀 들어봐요.”서유라는 잠시 숨을 고르며 말을 가다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곰곰이 생각해봐요. 어쨌든 배건 그룹은 원래 남설아의 회사였고 남설아도 한때 거기서는 가족 같은 존재였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소씨 가문이 손을 내미는 건, 남설아를 봐주는 것이라고 해도 되고, 혹은 남설아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서 그냥 무너지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는 명분을 세울 수도 있어요.”서유라는 소미란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이어갔다.“그렇다면 강연찬이 뭐라고 할
전화가 연결되자 소미란 특유의 느긋한 말투가 들려왔다.“누구세요?”“미란 씨, 저 유라예요.”서유라는 일부러 목소리를 낮춰서 더 가냘프게 들리도록 했다.“혹시... 시간 좀 있어요? 차라도 한잔하러 와줄 수 있을까요?”잠시 침묵이 흐른 뒤, 소미란이 물었다.“배 대표님은요?”“서준이는... 회사 일이 많아서 정신이 없어.”서유라는 목소리를 낮추며 한껏 서운한 말투로 말했다.“혼자 있으려니까 너무 답답해서 그래요.”“알겠어요. 저도 마침 한가해서요.”소미란은 의외로 빠르게 수락했다.전화를 끊자 서유라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녀는 옷장 거울 앞에 서서 자기 모습을 살폈다. 일부러 화장도 하지 않았고 머리도 헝클어진 채로 느슨하게 풀어놨다.병색이 도는 지친 모습을 보여야 소미란이 조금이라도 동정심을 가질 거로 생각했다.30분쯤 지나자 초인종이 울렸고 서유라는 서둘러 문을 열었다.“미란 씨, 와줘서 고마워요.”서유라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소미란을 안으로 들였다.소미란은 현관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본 뒤 서유라를 바라보았다. 수수한 옷차림에 평소보다 조금 창백한 얼굴이었다.“배씨 가문도 이제 조용하네요.”소미란은 별 감정 없는 말투로 말했다. 슬리퍼로 갈아신은 그녀는 서유라를 따라 거실로 들어섰다.거실은 예전 그대로, 호화롭긴 했지만, 어딘가 휑하고 생기 없었다.“편하게 앉아요.”서유라가 소파를 가리켰다.“뭐 마실래요? 홍차 드릴까요? 커피 드릴까요?”“홍차 주세요.”소미란은 여유롭게 앉았다.서유라는 차를 준비하러 주방으로 향했다.그녀가 다과와 찻잔을 들고나왔을 때, 소미란은 벽에 걸린 강렬한 색채의 유화를 올려다보고 있었다.서유라는 시선을 따라 그림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그 그림은 제가 좋아할 것 같다면서 서준이가 특별히 사 온 거예요.”소미란은 시선을 거두고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녀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말했다.“그래요? 배 대표님이 세심한 면이 있네요.”서유라의 미소가 굳어졌고 손가락이
“회사 일은 천 비서님한테 자료 좀 받으라고 했어. 프로젝트가 어떻게 진행 중인지 보고 싶어서.”“그래. 근데 일단 집에 가서 좀 쉬어. 의사도 말했잖아, 연기를 마셔서 목이랑 폐 다 상했대. 무리하면 안 돼.”남설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겠어, 말 들을게.”강연찬도 웃으며 말했다. “그래, 말 들어.”집에 도착하자 강연찬은 남설아를 소파에 앉히고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넸다.“목 좀 축여. 난 가서 욕실에 물 좀 받아놓을게. 옷 갈아입으면 좀 나을 거야.”“응.” 남설아는 물을 조금씩 마시며 욕실로 향하는 강연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곧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남설아는 컵을 내려놓고 휴대폰을 들었다.천기준에게서 몇 통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전부 회사 운영에 관한 일반적인 내용이었다.그녀는 대충 훑어보고 나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배서준의 경영이 자신만 못한 건 사실이지만, 그린라이트 테크와의 협업이 다른 프로젝트의 공백을 메워준 덕분에 배건 그룹이 완전히 멈추지는 않았다.그 외의 문제들은 모두 배서준 스스로 초래한 일이니, 그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강연찬이 욕실에서 나왔다. “물 다 받아놨어. 잠옷도 챙겨놨고. 씻고 오면 좀 나을 거야.”남설아는 일어나며 대답했다. “응.”욕실 안은 수증기로 가득했다. 샤워를 마치고 부드러운 잠옷으로 갈아입은 남설아는 온몸이 한결 가벼워진 듯했다.거실로 나오자 강연찬이 그녀의 노트북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배 좀 채우자. 죽이랑 간단한 음식들 시켜놨어.” 강연찬이 식탁을 가리켰다.남설아는 웃으며 강연찬의 무릎에 그대로 누웠다.강연찬은 한 손을 그녀 어깨에 얹고 손끝으로 다독여주었다.“설아야.” 강연찬이 입을 열었다. “이설 그룹 쪽은 요즘 어때? 배건 그룹이 그렇게 흔들렸는데 영향이 없었어?”남설아는 느릿하게 대답했다. “괜찮아. 내가 배건 그룹 맡았을 때부터 이설 그룹 쪽으로 자원을 좀 옮겨뒀거든. 일종의 방화벽처럼 말이야. 지금 배서준이 배건 그룹을 저
소씨 사모님은 강연찬이 요지부동인 모습을 보고 눈을 굴리더니 소미란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미란아, 연찬이가 이렇게 말하는데 설아 씨의 건강이 우선이지. 우리 다음에 다시 오는 게 좋겠어.”그러고는 곧바로 강연찬을 향해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연찬아, 설아 씨가 입원한 비용이랑 앞으로 회복하는 데 드는 비용, 영양제 같은 것도 전부 우리 소씨 가문에서 책임질게. 사양하지 마. 당연히 우리가 해야 할 일이야.”강연찬은 고개를 저으며 정중히 말했다.“사모님, 과분한 말씀입니다. 그런 부분은 저희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번거롭게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공손한 말투였지만 분명하게 거절하는 의미였다.소미란이 다시 나서려 하자 소씨 사모님은 슬쩍 그녀의 팔을 꼬집으며 제지했고 곧바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래, 알겠어. 연찬아, 너도 좀 쉬어. 다크서클이 많이 내려왔어. 몸조심해야지.”잠시 뜸을 들인 그녀가 말을 이었다.“그럼 우리는 이만 가볼게. 설아 씨가 좀 회복되면 다시 올게.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전화해.”“네, 사모님. 조심히 가세요.” 강연찬이 짧게 대답했다.병실 안, 남설아는 창가에 서서 소씨 가문 모녀의 차가 멀어지는 걸 지켜보다가 코웃음을 쳤다.“오스카에서 여우주연상 하나 줘야겠네.”목소리는 아직 약간 쉬어 있었지만, 정신은 많이 돌아온 상태였다.“서유라가 봤으면 감탄했을걸. 연기력 하나는 정말 수준급이야. 가식 떠는 것도 레벨이 다르더라.”강연찬은 뒤에서 그녀를 안고는 턱을 어깨에 기대었다.“저런 사람들한테 감정 낭비할 필요 없어.”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병원 측엔 얘기 다 해놨어. 다시는 아무도 못 들어올 거야.”남설아는 뒤돌아 그의 품에 안겨서 그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말했다.“퇴원하고 싶어.”그녀는 고개를 들어 피곤함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말했다.“저 사람들 분명 또 올 거야. 아예 아파트로 돌아가고 싶어.”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회사 일도 내가 직접 확인해
소미란은 어머니의 말을 듣고 숨겨두었던 마음속의 불순한 생각이 다시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그래, 이렇게 헛수고로 끝낼 순 없어.’다음 날, 새벽 여명이 막 비칠 무렵, 소씨 사모님은 소미란을 재촉해 과일 바구니와 영양제를 들고 부랴부랴 병원으로 향했다.병실 안에서는 남설아가 깨어 있었고 침대 머리맡에 기대앉아 있었지만,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다.강연찬은 보온 용기에 담긴 죽을 조심스럽게 그릇에 따르며 그녀에게 먹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똑똑.”노크 소리가 조용한 병실 안에서 또렷하게 들렸다.강연찬은 죽 그릇을 내려놓고 남설아에게 조용히 손짓해 잠깐만 기다리라는 표시를 했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병상 앞 커튼을 돌아 나가 바깥쪽 문으로 향했다.문을 열자 소씨 사모님과 소미란이 나란히 서 있었고 한 사람은 과일 바구니를, 다른 한 사람은 영양제를 들고 있었다. 두 사람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강연찬은 티 나지 않게 눈썹을 살짝 치켜들더니 병실 문을 닫고 문 앞을 막아섰다.“사모님, 미란아.”그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고 공손하지만, 거리감을 두는 말투였다.“연찬아.” 소씨 사모님이 먼저 다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설아 씨가 깨어났다는 얘기를 듣고 이렇게 찾아왔어. 설아 씨는 괜찮아? 어젯밤 일은 정말...”그녀는 말끝을 흐리더니 고개를 저으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소미란도 재빨리 말을 이었다.“맞아, 연찬아. 리조트에서 그런 일이 벌어질 줄은 우리도 전혀 몰랐어. 정말 미안해. 설아 씨는... 괜찮아? 우리가 직접 만든 전복죽이랑 과일을 가져왔는데 꼭 전해주고 싶어. 그리고 꼭 얼굴 보고 직접 사과하고 싶어.”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고 시선은 병실 안으로 향했다.하지만 강연찬은 미동도 하지 않고 여전히 병실을 가로막고 있었다. 목소리에는 큰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설아가 아직 잠들어 있어. 조금 더 쉬는 게 좋을 것 같아. 의사 선생님도 당분간 안정이 필요하다고 하셨어. 얼굴 보기는 어려울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