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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을 떠나려던 날, 황제가 변했다
궁을 떠나려던 날, 황제가 변했다
Author: 연무

1 화

Author: 연무
대예 나라, 성화(盛和) 5년 겨울.

밤이 깊어지고 건청궁(乾清宫)의 등불도 하나둘 밝혀지기 시작했다.

강만여(江晚余)는 용상 앞에 서서, 새로 들어온 궁녀에게 황제의 침상을 준비하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침전궁녀의 지책으로 궁에 생활한지 어느덧 5년, 눈을 감고도 모든 일을 해낼 수 있을 정도로 능숙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사흘 뒤, 드디어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자신의 업무를 새 궁녀들에게 전수해주는 일만 남았다.

"만여 님처럼 고우시고 일도 잘 하시는 분이 출궁이라니, 너무 아까운 것 같아요."

그녀의 우아하고도 능수능란한 동작들을 보며 한 궁녀가 중얼거렸다.

"그런 말 마세요. 출궁이 좋은 일이에요. 궁 밖은 훨씬 넓고 자유롭잖아요. 좋은 분 만나서 평안하게 사는게 낫죠."

그러자 옆에서 곧바로 다른 궁녀가 반박했다.

"맞아요. 아주 옳은 말씀이에요. 이제 만여 님도 그만 고생하셔야죠. 정말 감축드립니다. 드디어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셨네요."

다른 궁녀들도 맞장구를 치며 강만여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러면서 나중에 좋은 사람 만나 혼인하게 된다면 꼭 전해달라고, 함께 기뻐하고 싶다고 했다.

'좋은 사람을 만나 혼인이라....'

그 말을 듣자 강만여의 뇌리에 수려한 옷을 입은 채 말을 타고 달리던 한 소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의 얼굴에 드물게 작은 미소가 맺혔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깐, 그녀의 시선에 익숙한 용포자락이 걸렸다.

그녀는 물론 궁녀들 모두 놀라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바닥에 일렬로 무릎을 꿇었다.

"모두 물러가거라."

어느새 황제 기양(祁让)이 뒷짐을 선 채 침전으로 들어온 것이다. 궁녀들은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엄에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강만여는 그대로 미동도 없이 자리를 지켰다. 그 명령은 자신을 제외한 말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곧 닥칠 치욕을 예감하고 있었다.

이건 매일 밤, 황제가 잠들기 전 지키는 의식같은 것이었다. 그는 마치 강만여를 모욕하지 않으면 잠에 들 수 없는 사람처럼 매일 밤 그녀를 괴롭혔다.

곧 기양의 그림자가 그녀의 위로 드리워졌고 순식간에 턱이 거칠게 들어올려졌다.

"그렇게 출궁하고 싶으냐?"

황제가 냉혹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강만여는 그저 눈을 깜빡일 뿐, 어떠한 대답도 내놓지 않았다. 그럴수록 황제는 더 분노가 끓어올랐고 점점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왜 대답을 못하느냐? 벙어리가 되었느냐?"

황제가 다시 재차 물었다. 그러나 여전히 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그는 그제야 기억난 듯 허탈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하, 그래. 맞아, 너 벙어리였지."

그 말을 들은 강만여는 눈가가 살짝 떨렸다. 벙어리 취급, 이곳에 오고 난 뒤로 늘 듣던 얘기지만, 여전히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반응을 보이면 황제는 더 심하게 그녀를 조롱할 터, 애써 무표정을 유지했다.

그러나 오늘따라 황제는 멈출 기색이 없었다. 그는 덤덤한 반응에 더 자극받아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행동을 했다. 바로 그녀를 강제로 끌어안아 침상 위로 내던졌다.

"니가 내 침전궁녀로 지낸지도 벌써 5년이지? 그동안 널 한 번도 품지 않았지만, 오늘은 예외로 두마. 너에게 내 은총을 입을 기회를 주마."

강만여는 갑자기 황제의 침상 위로 던져진 것도 당혹스러운데, 갑자기 은총을 내리겠다는 황제의 말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어떻게 지켜온 5년인데, 출궁을 사흘 앞두고 황제의 은총을 받게 되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다. 한번 황제에게 은총을 입게 된 여인은 평생 궁에 갇혀 지내야 한다. 그것 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강만여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다가오는 황제를 향해 두 손을 모아 빌기 시작했다.

제발 자신을 놓아달라고, 제발 이곳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황제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는 한 손으로 침상을 짚은 채 뚫어져라 절박하게 애원하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좀 전에 궁녀들에게 둘러싸여 미소 짓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다시 미간이 험하게 찌푸려졌다.

'출궁해 다른 사내와 혼인하겠다고? 하! 내가 허락할 것 같아?'

황제는 남은 손으로 지긋이 그녀의 핏기 없는 입술을 쓸었다.

"5년만에 처음으로 내게 애원하는 것이 고작 출궁 때문이냐? 그렇게 나가고 싶어? 도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기에 다들 날 못 떠나 안달이냐! 어서 말해 보거라!"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로 강만여를 추궁하는 황제, 그러나 이번에도 그녀는 떨고만 있을 뿐 그 어떠한 대답도 내놓지 못했다. 결국 황제는 폭발하였고, 거의 물어뜯듯 그녀의 입술을 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는 술 향기, 그녀는 그제야 왜 황제가 이성을 잃고 평소와 다른 행동을 보여주고 있는지 깨달았다. 모든 것이 술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이 남자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고 싶었으나, 상대는 황제였다. 입안에서 피맛이 느껴지고, 입술은 부르트고 부어올랐지만, 그녀는 흐느끼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미 술기운에 이성을 잃은 황제는 그런 그녀의 반응에 자극받은 듯, 황제는 더욱 거칠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의 입술이 가득 붓고 피로 불든 다음에야 그는 멈추었다. 하지만 마주 본 그의 눈동자엔 아직도 꺼지지 않는 감정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당장 짐에게 애원해 보거라. 목소리를 내어 보란 말이다! 그러면 놓아주마."

그러나 이번에도 강만여는 말없이 눈물로 젖은 얼굴로 그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그녀는 아이같이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이 남자가 밉지 않았다. 그저 불쌍했다.

그리고 이 감정은 황제에게도 전해졌다.

'감히 날 불쌍히 여겨? 어떻게 이 상황에서도 내게 겨우 그딴 감정을 내비치지?'

기양은 참을 수 없는 굴욕감을 느꼈다. 그는 이 건방진 여인에게 더 큰 형벌을 내리기로 했다.

곧 찌익하고 천이 찢기는 소리와 함께 강만여의 겉옷이 찢겨나갔다. 눈처럼 하얀 피부와 함께 분홍빛 복사꽃 수가 놓여 있는 속옷이 드러났다.

강제로 이루어진 노출, 강만여는 말할 수 없는 수치심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황제의 눈빛에 점점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들끓기 시작했다.

"과연 소문 자자할만했네. 확실히 얼굴만큼이나 살결도 곱구나. 내가 아주 귀한 걸 썩히고 있었군."

그가 조롱하며 천천히 속옷 매듭을 잡아당겼다. 이제 이 매듭만 풀리면 그녀는 더 이상 순결하다 말할 수 없게 된다.

강만여에게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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