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복원 작업을 맡았던 분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경매장 직원의 말에 나는 곧바로 몸을 돌렸다.
“만날 수 있대요?”
“오늘 오후 3시 이후에 가능하다고 합니다.”
“주소 알려주세요.”
강무겸이 옆에서 물었다.
“복원가가 직접 만나겠다고 했습니까?”
“네. 다만 작품 관련 자료를 가져오라고 하셨어요.”
나는 가방에 넣어 둔 서류를 확인했다.
“충분하겠네요.”
경매장을 나서자 무겸이 차 열쇠를 꺼냈다.
“시간이 조금 남았습니다. 점심부터 드시겠습니까?”
“또 밥부터 먹자고요?”
“아침도 안 드셨잖습니까.”
나는 그를 돌아봤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아까 배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강무겸 씨!”
그가 웃음을 참으며 차 문을 열었다.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나는 민망해서 얼른 조수석에 올라탔다.
이 남자는 처음 만났을 때와 분위기가 꽤 달랐다.
차갑고 무표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가끔 이렇게 능청스럽게 굴었다.
◇
점심을 먹은 뒤 도착한 곳은 오래된 상가 건물이었다.
3층에 있는 작은 복원 공방에는 캔버스와 액자가 가득했다.
“경매장에서 연락받고 오셨죠?”
작업복을 입은 중년 여성이 우리를 맞았다.
나는 먼저 명함을 건넸다.
“채설주입니다. 서원미술관 작품 때문에 왔어요.”
여자는 강무겸을 알아봤다.
“강 감정사님이시네요.”
“오랜만입니다.”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보자 조금 의아했다.
“서로 아는 사이예요?”
“전에 복원 작업을 함께한 적 있습니다.”
무겸이 설명했다.
여자는 우리를 작업대 앞으로 안내했다.
“어떤 작품인지 보여주시겠어요?”
나는 사진과 거래 명세서를 꺼냈다.
여자는 사진을 보는 순간 안경을 고쳐 썼다.
“이 그림이 왜 경매에 나왔죠?”
“아시는 작품인가요?”
“제가 작업했던 액자예요.”
“그림은요?”
여자가 고개를 저었다.
“그림은 다릅니다.”
나는 무겸과 눈을 마주쳤다.
“무슨 뜻이에요?”
여자는 서랍에서 작업 기록을 꺼냈다.
“2025년 8월에 이태광 씨 이름으로 의뢰가 들어왔어요. 오래된 풍경화의 액자를 수리해 달라는 요청이었죠.”
“직접 태광이를 만나셨어요?”
“아니요. 작품은 운송업체에서 가져왔어요.”
그녀는 당시 촬영한 사진을 보여줬다.
푸른 정원.
중개인이 보여줬던 바로 그 풍경화였다.
“작업을 끝내고 돌려보냈는데, 지금 보니 안에 들어간 그림이 바뀌었네요.”
무겸이 사진을 확대했다.
“액자 안쪽 고정 장치가 교체됐군요.”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분은 제가 작업한 게 아닙니다.”
나는 곧바로 물었다.
“그럼 누군가 액자 안에 있던 그림을 바꿨다는 거네요?”
“그럴 가능성이 높아요.”
“언제 바뀌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제가 작업을 마친 뒤라는 것까지만 말씀드릴 수 있어요.”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경매장에 나온 초상화는 원래 풍경화와 같은 작품이 아니었다.
누군가 그림을 바꿔 넣고 동일한 관리번호를 사용한 것이다.
◇
무겸은 복원가와 작업 기록을 확인했다.
나는 그동안 공방에 진열된 그림들을 구경했다.
작은 캔버스마다 색과 질감이 달랐다.
“그림 좋아하십니까?”
뒤에서 무겸의 목소리가 들렸다.
“보는 건 좋아해요.”
“어떤 그림이요?”
“잘 모르겠어요. 그냥 오래 보고 싶은 그림?”
“좋은 기준입니다.”
“감정 전문가가 듣기에는 너무 단순하지 않아요?”
그는 내 옆에 섰다.
“그림의 가격을 아는 것과 좋아하는 건 다른 일이니까요.”
나는 그를 바라봤다.
“그런데 강무겸 씨는 그림을 볼 때마다 진짜인지부터 따지잖아요.”
“직업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도 그렇게 봐요?”
그가 고개를 돌렸다.
“무슨 뜻입니까?”
“진짜인지 가짜인지부터 의심하냐고요.”
무겸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사람은 그림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왜요?”
“그림은 시간이 지나도 마음을 바꾸지 않으니까요.”
이상하게 오래 남는 말이었다.
나는 괜히 다른 그림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는 사람을 너무 쉽게 믿었던 것 같아요.”
무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광이가 그렇게 많은 걸 숨기고 있었는데 전 하나도 몰랐어요.”
“설주 씨.”
“네?”
“속았다는 사실과 사람을 믿었다는 건 다른 문제입니다.”
나는 그를 돌아봤다.
“그 말, 위로예요?”
“그렇게 들렸다면 다행입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
조사를 마친 복원가가 우리를 불렀다.
“이것도 확인하셔야겠어요.”
그녀가 내민 것은 작품 인수증이었다.
작업 완료일은 2025년 8월 21일.
그런데 수령인 이름이 이상했다.
“이태광이 아니네요?”
“네. 처음 의뢰할 때부터 대리 수령한다고 했어요.”
“누가 가져갔어요?”
복원가는 당시 기록을 확인했다.
“신분증 확인하고 인계했는데, 이름은 여기 적혀 있어요.”
나는 서류를 받아 들었다.
수령인의 이름은 낯설었다.
무겸이 그 이름을 휴대전화에 적었다.
“직접 수령했습니까?”
“네. 남자분이었어요. 작품을 차량에 싣고 바로 가셨습니다.”
“차량번호도 남아 있나요?”
“출입 기록을 확인해 봐야 해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기록, 경찰에 제출해 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죠.”
복원가는 서류 사본을 건넸다.
“그런데 이상한 게 하나 더 있어요.”
“뭔데요?”
“이 그림을 맡긴 사람이 작업 비용을 두 번 냈어요.”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왜요?”
“처음에는 액자 수리비를 냈고, 나중에는 별도로 보관료를 입금했거든요.”
“보관료요?”
“작품을 이미 찾아갔는데 한 달 치 보관료를 더 냈어요.”
무겸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 돈을 환불했습니까?”
“아니요. 연락이 안 됐어요.”
“입금자 이름은요?”
복원가가 장부를 펼쳤다.
그녀는 잠시 기록을 살펴보더니 말했다.
“채설주 씨네요.”
나는 그대로 굳었다.
“저요?”
“네. 여기 적혀 있어요.”
나는 장부를 확인했다.
분명 내 이름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공방에 돈을 보낸 적이 없었다.
무겸이 내게 물었다.
“당시 은행 거래 내역을 확인할 수 있습니까?”
“네. 지금 확인할게요.”
나는 휴대전화로 계좌 내역을 검색했다.
해당 날짜에 공방으로 송금한 기록은 없었다.
“제 계좌에서는 보낸 적 없어요.”
무겸은 장부를 내려다봤다.
“동명이인이거나 누군가 설주 씨 이름을 사용했을 수 있습니다.”
나는 복원가에게 물었다.
“입금 계좌까지 확인할 수 있나요?”
“은행에 문의해야 할 것 같아요.”
무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찰에 자료를 제출하고 확인 요청을 하죠.”
나는 장부 사본을 챙겼다.
누군가 내 이름으로 서명하고, 돈을 보내고, 그림까지 관리하고 있었다.
단순한 우연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
공방을 나와 차에 올랐을 때 무겸이 물었다.
“괜찮습니까?”
“화가 나요.”
“그럴 만합니다.”
“누군가 제 이름을 이렇게 마음대로 쓰고 있었다는 게요.”
나는 안전벨트를 맸다.
“그 사람 반드시 찾을 거예요.”
무겸이 나를 바라봤다.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믿어도 되는 거죠?”
그는 잠시 침묵했다.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그럼요?”
“제가 하는 일을 보고 판단하십시오.”
나는 그를 한참 바라봤다.
적어도 지금까지 강무겸은 내가 확인할 수 있는 증거를 내놓았다.
무작정 믿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함께 조사할 이유는 충분했다.
“좋아요. 대신 앞으로 알게 되는 건 전부 공유해요.”
“약속하겠습니다.”
그때 복원가에게서 전화가 왔다.
“채설주 씨, 아까 말씀드린 차량 기록을 찾았어요.”
“정말요?”
“그런데 차량번호보다 먼저 보셔야 할 게 있어요.”
“뭔데요?”
“작품 인수할 때 촬영한 사진이 남아 있거든요.”
나는 무겸을 바라봤다.
“사진 보내주세요.”
잠시 후 휴대전화에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
공방 입구에서 액자를 싣고 있는 남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손목에 찬 시계가 선명했다.
나는 화면을 확대했다.
은색 시계.
짙은 파란색 가죽 시곗줄.
뒷면에 새겨진 작은 이니셜.
그 시계는 내가 직접 골랐던 것이었다.
이태광의 서른 번째 생일 선물.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복원가의 설명대로라면 그날 그림을 가져간 남자는 태광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태광의 시계를 차고 있었을까.
나는 사진을 무겸에게 보여줬다.
“이 시계, 태광이 거예요.”
그가 화면을 자세히 살폈다.
“확실합니까?”
“제가 선물했어요.”
나는 사진을 다시 확대했다.
그리고 시계 아래쪽에 보이는 남자의 왼손을 확인했다.
손등에 길게 남은 흉터.
어디선가 본 적 있는 흔적이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 한 장면이 떠올랐다.
태광의 장례식.
그날 빈소에 찾아와 내게 악수를 청했던 남자.
나는 휴대전화를 움켜쥐었다.
“강무겸 씨.”
“네.”
“이 사람…… 저 만난 적 있어요."
“설주 씨, 어제 일은 후회하지 않습니까?”강무겸의 질문에 나는 커피잔을 내려놓았다.그의 작업실에서 마주 앉은 지 1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얼굴이 뜨거워졌다.“어제 일이라면…….”“입맞춤 말입니다.”“그렇게 대놓고 말해야 해요?”무겸이 희미하게 웃었다.“다른 뜻으로 알아들으실까 봐요.”“후회 안 해요.”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그런데 우리 관계가 너무 빨리 변하는 것 같아서 조금 무서워요.”“저도 조심스럽습니다.”“무겸 씨도요?”“좋아하는 사람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으니까요.”그 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나는 괜히 책상 위 서류를 집어 들었다.“그럼 오늘은 그림부터 확인해요.”“또 도망가시는군요.”“도망 아니거든요.”무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우리는 이태광의 수첩과 '밤의 창' 감정 기록을 나란히 펼쳤다.“태광이가 원본은 팔지 않았다고 적었잖아요.”“네. 실제 작품이 어디로 이동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무겸은 과거 자신이 촬영했던 사진을 보여주었다.어두운 방 안에 창문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창밖에는 희미한 달빛이 비쳤다.“생각보다 예쁘네요.”“제가 처음 감정했을 때도 인상적인 작품이었습니다.”“그런데 왜 가짜를 만들었을까요?”“진품을 따로 보관한 채 복제품을 거래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나는 사진을 확대했다.“잠깐만요. 여기 창문 아래에 작은 흠집이 있어요.”무겸이 고개를 끄덕였다.“기존 상태 보고서에 기록된 손상입니다.”“그럼 이 흔적이 있으면 진짜인지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되겠네요.”“맞습니다. 물론 그것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지만요.”그때 무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담당 형사였다.운송업체 보관 창고에 남아 있던 작품 상자 3점을 확보했다는 연락이었다.무겸은 전화를 끊고 나를 바라봤다.“작품 확인을 요청받았습니다.”나는 바로 가방을 챙겼다.“그럼 가요.”“설주 씨도요?”“당연하죠. 태광이가 남긴 단서잖아요.”◇오후 2시.경찰의 입회 아래 보관 창고에서 작품 확인
“그날 이태광이 왜 거래를 취소하려 했는지 알고 싶어요.”내 질문에 오정민의 표정이 굳어졌다.우리는 서원미술관 재단 상담실에서 다시 마주 앉아 있었다.“이미 경찰에 전부 설명했습니다.”“그럼 저한테도 설명해 주세요.”“채설주 씨, 이 사건에 너무 깊이 관여하시는 것 아닙니까?”나는 가방에서 계약서 사본을 꺼냈다.“제 이름으로 동의서를 위조한 사람들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오정민은 입을 다물었다.“태광이가 거래를 취소하려고 했던 이유, 정확히 뭐예요?”한참 뒤 그가 대답했다.“처음에는 이태광 씨도 동의했습니다. 작품 등록번호를 통합하는 작업이라고 설명했으니까요.”“그런데요?”“실제 작품과 서류에 적힌 작품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나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그걸 누가 바꿨는데요?”“그건 저도 모릅니다.”“또 모른다고요?”목소리가 높아졌다.오정민은 불쾌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채설주 씨는 이태광 씨가 피해자라고만 생각하시겠죠.”“무슨 뜻이에요?”“그 사람도 처음에는 수수료를 받으려고 했습니다.”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알아요. 계약서 봤어요.”“그럼 왜 계속 저만 추궁합니까?”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태광이가 잘못했다면 그것도 밝혀야죠. 하지만 그렇다고 죽어도 되는 건 아니잖아요.”오정민은 대답하지 못했다.“그리고 그 사람이 죽은 다음 날, 이의신청을 철회한 사람은 당신이잖아요.”그의 손이 멈췄다.“왜 그랬어요?”긴 침묵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제가 처리했습니다.”나는 숨을 삼켰다.“태광이 이름으로요?”“재단이 문을 닫기 전에 거래를 정리해야 했습니다.”“사람이 죽었는데 서류부터 정리했다고요?”“그 일이 살인 사건으로 번질 줄은 몰랐습니다.”나는 의자에서 일어났다.“적어도 당신이 뭘 숨겼는지는 알겠네요.”◇상담실을 나온 나는 강무겸에게 전화를 걸었다.“오정민 만났어요.”“어떻게 됐습니까?”“이의신청을 자기가 철회했다고 인정했어요.”“중요한 진술이군요.”
‘설주 이름은 빼.’나는 계약서 뒷면에 남은 글씨를 한참 바라봤다.이태광의 필체였다.3년 동안 함께하면서 수없이 봤던 글씨. 마지막 획을 길게 빼는 버릇까지 똑같았다.“태광이는 저를 지키려고 했던 걸까요?”강무겸이 내 옆에 앉았다.“적어도 설주 씨 이름이 거래에 들어가는 걸 원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그런데 왜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을까요?”“그건 아직 모르겠습니다.”나는 계약서를 접었다.“정말 이상해요. 태광이를 미워해야 할지, 그리워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무겸은 잠시 내 얼굴을 바라봤다.“둘 다 하셔도 됩니다.”“그렇게 간단해요?”“사람 마음이 꼭 하나일 필요는 없으니까요.”그의 말에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나는 고개를 돌렸다.“무겸 씨는 너무 침착해서 가끔 얄미워요.”“그럼 앞으로 조금 덜 침착해 보겠습니다.”“그게 마음대로 돼요?”“설주 씨 앞에서는 이미 잘 안 됩니다.”나는 그를 돌아봤다.무겸이 웃고 있었다.그 미소를 보는 순간, 조금 전까지 무겁던 마음이 이상하게 가벼워졌다.◇우리는 계약서에 적힌 내용을 다시 확인했다.태광이 남긴 메모 바로 위에는 초상화의 모델 동의에 관한 항목이 있었다.나는 손가락으로 문장을 짚었다.“여기요. 작품 판매에 모델이 동의했다는 부분.”“네.”“그럼 제 동의가 없으면 거래에 문제가 생기는 거죠?”“초상권 사용 범위와 계약 내용에 따라 다르지만, 서명이 위조됐다면 분명히 다툴 수 있습니다.”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경매장에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할래요.”무겸도 일어났다.“제가 준비를 도와드리겠습니다.”“아니요. 이번에는 제가 직접 할게요.”그가 나를 바라봤다.“무겸 씨는 옆에서 확인만 해줘요. 내 이름으로 벌어진 일이니까.”잠시 후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좋습니다.”◇경매장에 도착한 나는 담당 직원에게 관련 서류를 제출했다.“제 동의 없이 제작되고 거래에 이용된 초상화입니다. 서명 위조 정황도 경찰에 신고했어요.”직원은 자료를 확인했다
“오정민 씨를 직접 만나려고요.”내 말을 들은 강무겸은 잠시 침묵했다.“약속은 잡으셨습니까?”“네. 오늘 오후 2시요.”“혼자 가실 생각이었습니까?”“처음에는요.”무겸의 표정이 굳어졌다.“왜 저한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어제 무겸 씨한테 화냈잖아요. 또 같이 가자고 하기가 좀 그랬어요.”“설주 씨.”“네?”“서운한 일과 사건 조사는 구분했으면 좋겠습니다.”나는 그를 바라봤다.“무겸 씨도 화났었어요?”“화보다는 속상했습니다.”솔직한 대답에 마음이 찔렸다.“미안해요.”“사과받으려고 한 말은 아닙니다.”그가 내 앞에 섰다.“함께 가도 되겠습니까?”나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대신 오늘 질문은 제가 할게요.”무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그렇게 하십시오.”◇오후 2시.오정민은 약속 장소인 재단 상담실에 먼저 도착해 있었다.그는 우리를 보자 표정부터 굳혔다.“강 감정사님까지 오셨군요.”나는 맞은편에 앉았다.“제가 부탁했어요.”“무슨 일로 만나자고 하셨습니까?”나는 가방에서 서류를 꺼냈다.“이태광이 작성했다는 최초 확인서 때문이에요.”오정민의 시선이 서류에 머물렀다.“이미 경찰에 제출한 자료입니다.”“알아요. 그래서 직접 설명을 듣고 싶어요.”“무엇을 말입니까?”“태광이가 왜 작품 등록 정보 변경에 동의했는지요.”오정민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이태광 씨도 거래 당사자였습니다. 처음부터 내용을 알고 있었어요.”“어떤 내용이요?”“작품 3점을 묶어서 관리번호를 정리하는 일이었습니다.”“그럼 작품을 바꿔치기하는 것도 알고 있었나요?”그의 얼굴이 굳었다.“말을 조심하셔야겠습니다.”나는 물러서지 않았다.“가짜 감정서가 발견됐어요. 제 이름으로 작성된 동의서도 있었고요. 그게 정상적인 거래예요?”오정민은 대답하지 못했다.“태광이는 사망하기 하루 전에 이의를 제기했어요.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꿨죠?”한참 뒤 그가 입을 열었다.“처음에는 단순한 등록 정리라고 생각했겠죠.”“그런데요
“오늘은 사건 이야기 안 하기로 했잖아요.”강무겸의 말에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딱 하나만 물어볼게요.”“벌써 세 번째입니다.”“그렇게 많았어요?”“네. 첫 번째는 감정서, 두 번째는 거래대금, 이번에는 뭡니까?”나는 멋쩍게 웃었다.“이태광이 처음부터 거래에 가담했을 가능성이요.”무겸이 나를 조용히 바라봤다.“설주 씨.”“네.”“지금 식사하는 남자가 누군지는 알고 계십니까?”“강무겸 씨잖아요.”“그런데 계속 다른 남자 이야기만 하시네요.”순간 젓가락을 쥔 손이 멈췄다.“질투해요?”그가 물잔을 내려놓았다.“조금은요.”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죽은 사람한테도 질투해요?”“그 사람이 설주 씨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이었는지 압니다. 그래도 지금 마주 앉아 있는 저도 조금은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차갑고 무서운 남자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지금은 그가 웃는 모습 하나에도 마음이 흔들렸다.“무겸 씨.”“네.”“나 아직 준비 안 됐어요.”그의 미소가 옅어졌다.“알고 있습니다.”“태광이가 죽은 지 1년밖에 안 됐어요. 그런데 내가 다른 사람한테 설레는 게…….”나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무겸은 재촉하지 않았다.“죄책감이 들어요.”“저 때문에요?”“무겸 씨 잘못은 아니에요.”나는 손가락으로 컵 가장자리를 문질렀다.“태광이를 사랑했던 마음이 진짜였는데, 무겸 씨한테 끌리는 마음도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아서요.”그의 시선이 깊어졌다.잠시 후 무겸이 말했다.“저는 태광 씨를 대신할 생각이 없습니다.”“…….”“설주 씨가 그 사람을 사랑했던 시간까지 지우고 싶지도 않고요.”가슴이 먹먹해졌다.“그럼 뭘 원하는데요?”“앞으로 설주 씨가 저와 함께하고 싶어지는 순간이 오면 좋겠습니다.”나는 고개를 숙였다.이 남자는 왜 이렇게 사람 마음을 흔드는 걸까.◇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우리는 차를 세워 둔 곳까지 천천히 걸었다.“무겸
“그 사람들이 왜 이태광 씨의 입을 막으려 했는지 알 수 있는 대화입니다.”강무겸의 말을 듣는 순간 손끝이 차가워졌다.나는 맞은편에 앉은 박연호를 바라봤다.그는 여전히 태연한 표정이었다.“박연호 씨. 회의 영상 전체를 보여주세요.”“이미 보셨잖습니까.”“일부만 봤죠. 앞뒤 내용까지 확인하겠다는 거예요.”박연호의 미소가 사라졌다.“강무겸 씨한테 물어보시면 되겠네요.”“그럴 생각이에요. 하지만 이 영상도 경찰에 제출해 주세요.”나는 담당 형사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박연호가 의자를 밀며 일어났다.“채설주 씨, 지금 저를 범인 취급하는 겁니까?”“아니요. 증거를 확인하자는 거예요.”“그 남자가 뭐라고 하든 믿겠다는 겁니까?”나는 가방을 집어 들었다.“믿을지 말지는 제가 결정해요.”그 말을 남기고 사무실을 나왔다.◇건물 밖에는 강무겸이 기다리고 있었다.나를 발견한 그가 다가왔다.“괜찮습니까?”“아니요.”나는 걸음을 멈췄다.“무겸 씨, 나한테 또 숨긴 게 있었잖아요.”그의 표정이 굳었다.“맞습니다.”“어제 분명히 말했죠. 중요한 건 전부 알려 달라고.”“제가 잘못했습니다.”“왜 그랬어요?”“그 회의에서 오정민 씨와 박연호 씨가 제게 부당한 감정을 요구했습니다. 그 사실은 말씀드렸지만 직접 만났던 일까지 설명하지 않았습니다.”나는 그를 바라봤다.“그런데 왜 나한테는 그렇게 잘해줬어요?”무겸이 잠시 말을 멈췄다.“그건 별개의 문제입니다.”“나한텐 별개가 아니에요.”목소리가 떨렸다.“태광이도 나한테 중요한 걸 숨겼어요. 난 그 사람을 믿었고요. 그런데 무겸 씨까지 그러니까…….”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무겸이 한 걸음 다가왔다가 멈췄다.“설주 씨를 속이려던 건 아닙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신뢰를 깨뜨린 건 제 책임입니다.”나는 고개를 숙였다.화를 내고 싶은데 그의 사과가 마음을 흔들었다.“녹음 들려줘요.”“여기서요?”“네. 지금 확인하고 싶어요.”◇무겸의 차 안에서 녹음 파일을 재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