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위탁자를 직접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했어요.”
강무겸이 전화를 끊으며 말했다.
“뭐래요?”
“내일 오전 11시에 경매장 상담실로 오랍니다.”
나는 곧바로 휴대전화 일정에 시간을 적었다.
“잘됐네요. 그 사람이 태광이에게 그림을 팔았다면 제작 과정도 알겠죠.”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요?”
“미술품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칩니다. 판매자가 작품의 제작 과정까지 아는 경우는 드뭅니다.”
나는 그를 바라봤다.
“강무겸 씨는 꼭 기대하려고 하면 현실적인 이야기부터 하네요.”
그가 잠시 웃었다.
“괜한 기대를 드리고 싶지 않아서요.”
“그래도 가능성은 있잖아요.”
“있습니다.”
“그럼 그거면 됐어요.”
무겸은 내 앞에 놓인 식사를 가리켰다.
“일단 드십시오. 다 식겠습니다.”
그제야 음식에 손도 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강무겸 씨도 먹어요.”
“저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왜요?”
“혼자 먹기 미안해서요.”
나는 뜻밖의 대답에 웃음을 터뜨렸다.
사건 이야기를 하면서 웃게 될 줄은 몰랐다.
◇
다음 날 오전 11시.
경매장 상담실에는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자신을 개인 미술품 중개인이라고 소개했다.
“이태광 씨와 거래하신 분이 맞습니까?”
내 질문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2023년에 작품 하나를 팔았습니다.”
“그림 제목이 뭐였죠?”
“푸른 정원입니다.”
나는 무겸과 눈을 마주쳤다.
“붉은 방이 아니고요?”
“그건 처음 듣는 제목인데요.”
남자는 가방에서 서류 봉투를 꺼냈다.
“당시 거래 명세서와 작품 사진입니다.”
사진에는 파란색과 초록색이 어우러진 풍경화가 담겨 있었다.
사람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게 태광 씨에게 팔았던 그림이라고요?”
“틀림없습니다.”
무겸이 사진을 자세히 살폈다.
“캔버스 크기가 같습니다.”
“맞아요. 그런데 그림은 완전히 다르잖아요.”
중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경매 목록을 보고 놀랐습니다. 작품 관리번호는 같은데 그림이 바뀌어 있었거든요.”
나는 서류를 받아 들었다.
작품번호 SW-204-17.
폐관한 서원미술관에서 사라졌던 그림과 동일한 번호였다.
“같은 캔버스에 다른 그림을 그린 걸까요?”
무겸이 대답했다.
“실물을 조사해야 알 수 있습니다. 기존 그림 위에 덧칠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나는 중개인에게 물었다.
“태광 씨는 왜 이 작품을 샀나요?”
“미술관에서 오래 보관했던 작품을 정리하려 한다고 했습니다.”
“그럼 태광이가 미술관 직원이었나요?”
“직원은 아니었습니다. 외부에서 작품 정리 업무를 맡았다고 들었습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태광은 내게 미술관에서 일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
상담실을 나온 나는 복도 의자에 앉았다.
무겸이 옆에 자리를 잡았다.
“생각보다 태광이에 대해 모르는 게 많네요.”
“모든 걸 숨겼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3년이나 만났는데요.”
나는 손에 든 거래 명세서를 내려다봤다.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다 안다고 생각했어요.”
무겸은 내 말을 조용히 들었다.
“사랑했던 시간이 전부 거짓말 같아요.”
“그 시간에 느꼈던 설주 씨의 감정까지 거짓은 아니었겠죠.”
나는 그를 돌아봤다.
“그런 말도 할 줄 알아요?”
“제가 그렇게 무뚝뚝합니까?”
“조금요.”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물었다.
“강무겸 씨는 왜 계속 도와줘요?”
“저도 사건의 진실을 알아야 하니까요.”
“그것뿐이에요?”
그의 시선이 내게 머물렀다.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지금은요?”
무겸은 잠시 생각했다.
“설주 씨가 혼자서도 끝까지 알아낼 사람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뜻밖의 대답이었다.
“그게 도와주는 이유가 돼요?”
“네. 저도 그런 사람과 일하고 싶거든요.”
나는 그를 바라보다가 먼저 일어났다.
“그럼 일하러 가죠.”
“어디로요?”
“그림을 다시 보러요. 사진만 보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
경매장 직원의 안내를 받아 작품 앞에 섰다.
무겸은 작은 손전등을 꺼내 직원의 허락을 받고 그림 표면을 살폈다.
“여기 보십시오.”
그가 오른쪽 아래를 가리켰다.
붉은 드레스 끝부분에 미세하게 갈라진 자국이 있었다.
“오래된 그림이라서 그런 거 아니에요?”
“다른 부분과 균열 형태가 다릅니다.”
나는 중개인이 보여준 풍경화 사진을 다시 확인했다.
그러다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잠깐만요.”
“왜 그러십니까?”
“여기요. 원래 그림에도 같은 자국이 있어요.”
푸른 정원 사진의 오른쪽 아래에는 캔버스가 손상돼 수리한 흔적이 있었다.
위치가 정확히 일치했다.
무겸의 눈빛이 달라졌다.
“잘 찾으셨습니다.”
“같은 그림 위에 덧칠했다는 뜻이죠?”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과학적인 검사가 필요합니다.”
나는 경매장 직원에게 다가갔다.
“이 작품의 정밀 검사를 요청하고 싶어요.”
직원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위탁자의 동의와 별도 절차가 필요합니다.”
“경찰에도 관련 자료를 제출했습니다. 담당 형사에게 연락해 주시겠어요?”
직원은 확인하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무겸이 말했다.
“오늘은 제가 할 일이 별로 없군요.”
“왜요?”
“설주 씨가 다 하고 있으니까요.”
“제 얼굴이 걸린 그림이잖아요. 제가 움직여야죠.”
그가 작게 웃었다.
“맞는 말씀입니다.”
나는 다시 그림을 바라봤다.
붉은 드레스.
거울 속 얼굴.
그리고 원래 그림을 덮어 버린 붉은 물감.
누군가 이 그림을 의도적으로 바꿨다.
그 이유가 태광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잠시 뒤 직원이 돌아왔다.
“채설주 씨, 추가로 확인된 게 있습니다.”
“뭔데요?”
“위탁자가 제출한 작품 상태 기록에 복원 작업 날짜가 적혀 있습니다.”
직원이 서류를 펼쳤다.
복원 작업일은 2025년 8월 14일.
태광이 죽기 정확히 2개월 전이었다.
“그때 그림이 바뀐 걸까요?”
내 질문에 무겸이 대답했다.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나는 날짜를 다시 확인했다.
그러다 서류 맨 아래에서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복원 작업 의뢰인.
이태광.
태광은 죽기 직전 직접 그림을 바꾸는 작업을 맡겼던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왜 내 얼굴을 그려 넣으라고 했을까.
나는 서류를 가리켰다.
“이 작업을 실제로 진행한 복원가를 만나고 싶어요.”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해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때 무겸이 내게 말했다.
“설주 씨, 이제 조사해야 할 사람이 분명해졌습니다.”
나는 다시 그림을 바라봤다.
처음으로 막연한 의심이 아닌 구체적인 단서를 손에 쥔 기분이었다.
“설주 씨, 어제 일은 후회하지 않습니까?”강무겸의 질문에 나는 커피잔을 내려놓았다.그의 작업실에서 마주 앉은 지 1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얼굴이 뜨거워졌다.“어제 일이라면…….”“입맞춤 말입니다.”“그렇게 대놓고 말해야 해요?”무겸이 희미하게 웃었다.“다른 뜻으로 알아들으실까 봐요.”“후회 안 해요.”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그런데 우리 관계가 너무 빨리 변하는 것 같아서 조금 무서워요.”“저도 조심스럽습니다.”“무겸 씨도요?”“좋아하는 사람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으니까요.”그 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나는 괜히 책상 위 서류를 집어 들었다.“그럼 오늘은 그림부터 확인해요.”“또 도망가시는군요.”“도망 아니거든요.”무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우리는 이태광의 수첩과 '밤의 창' 감정 기록을 나란히 펼쳤다.“태광이가 원본은 팔지 않았다고 적었잖아요.”“네. 실제 작품이 어디로 이동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무겸은 과거 자신이 촬영했던 사진을 보여주었다.어두운 방 안에 창문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창밖에는 희미한 달빛이 비쳤다.“생각보다 예쁘네요.”“제가 처음 감정했을 때도 인상적인 작품이었습니다.”“그런데 왜 가짜를 만들었을까요?”“진품을 따로 보관한 채 복제품을 거래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나는 사진을 확대했다.“잠깐만요. 여기 창문 아래에 작은 흠집이 있어요.”무겸이 고개를 끄덕였다.“기존 상태 보고서에 기록된 손상입니다.”“그럼 이 흔적이 있으면 진짜인지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되겠네요.”“맞습니다. 물론 그것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지만요.”그때 무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담당 형사였다.운송업체 보관 창고에 남아 있던 작품 상자 3점을 확보했다는 연락이었다.무겸은 전화를 끊고 나를 바라봤다.“작품 확인을 요청받았습니다.”나는 바로 가방을 챙겼다.“그럼 가요.”“설주 씨도요?”“당연하죠. 태광이가 남긴 단서잖아요.”◇오후 2시.경찰의 입회 아래 보관 창고에서 작품 확인
“그날 이태광이 왜 거래를 취소하려 했는지 알고 싶어요.”내 질문에 오정민의 표정이 굳어졌다.우리는 서원미술관 재단 상담실에서 다시 마주 앉아 있었다.“이미 경찰에 전부 설명했습니다.”“그럼 저한테도 설명해 주세요.”“채설주 씨, 이 사건에 너무 깊이 관여하시는 것 아닙니까?”나는 가방에서 계약서 사본을 꺼냈다.“제 이름으로 동의서를 위조한 사람들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오정민은 입을 다물었다.“태광이가 거래를 취소하려고 했던 이유, 정확히 뭐예요?”한참 뒤 그가 대답했다.“처음에는 이태광 씨도 동의했습니다. 작품 등록번호를 통합하는 작업이라고 설명했으니까요.”“그런데요?”“실제 작품과 서류에 적힌 작품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나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그걸 누가 바꿨는데요?”“그건 저도 모릅니다.”“또 모른다고요?”목소리가 높아졌다.오정민은 불쾌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채설주 씨는 이태광 씨가 피해자라고만 생각하시겠죠.”“무슨 뜻이에요?”“그 사람도 처음에는 수수료를 받으려고 했습니다.”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알아요. 계약서 봤어요.”“그럼 왜 계속 저만 추궁합니까?”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태광이가 잘못했다면 그것도 밝혀야죠. 하지만 그렇다고 죽어도 되는 건 아니잖아요.”오정민은 대답하지 못했다.“그리고 그 사람이 죽은 다음 날, 이의신청을 철회한 사람은 당신이잖아요.”그의 손이 멈췄다.“왜 그랬어요?”긴 침묵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제가 처리했습니다.”나는 숨을 삼켰다.“태광이 이름으로요?”“재단이 문을 닫기 전에 거래를 정리해야 했습니다.”“사람이 죽었는데 서류부터 정리했다고요?”“그 일이 살인 사건으로 번질 줄은 몰랐습니다.”나는 의자에서 일어났다.“적어도 당신이 뭘 숨겼는지는 알겠네요.”◇상담실을 나온 나는 강무겸에게 전화를 걸었다.“오정민 만났어요.”“어떻게 됐습니까?”“이의신청을 자기가 철회했다고 인정했어요.”“중요한 진술이군요.”
‘설주 이름은 빼.’나는 계약서 뒷면에 남은 글씨를 한참 바라봤다.이태광의 필체였다.3년 동안 함께하면서 수없이 봤던 글씨. 마지막 획을 길게 빼는 버릇까지 똑같았다.“태광이는 저를 지키려고 했던 걸까요?”강무겸이 내 옆에 앉았다.“적어도 설주 씨 이름이 거래에 들어가는 걸 원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그런데 왜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을까요?”“그건 아직 모르겠습니다.”나는 계약서를 접었다.“정말 이상해요. 태광이를 미워해야 할지, 그리워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무겸은 잠시 내 얼굴을 바라봤다.“둘 다 하셔도 됩니다.”“그렇게 간단해요?”“사람 마음이 꼭 하나일 필요는 없으니까요.”그의 말에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나는 고개를 돌렸다.“무겸 씨는 너무 침착해서 가끔 얄미워요.”“그럼 앞으로 조금 덜 침착해 보겠습니다.”“그게 마음대로 돼요?”“설주 씨 앞에서는 이미 잘 안 됩니다.”나는 그를 돌아봤다.무겸이 웃고 있었다.그 미소를 보는 순간, 조금 전까지 무겁던 마음이 이상하게 가벼워졌다.◇우리는 계약서에 적힌 내용을 다시 확인했다.태광이 남긴 메모 바로 위에는 초상화의 모델 동의에 관한 항목이 있었다.나는 손가락으로 문장을 짚었다.“여기요. 작품 판매에 모델이 동의했다는 부분.”“네.”“그럼 제 동의가 없으면 거래에 문제가 생기는 거죠?”“초상권 사용 범위와 계약 내용에 따라 다르지만, 서명이 위조됐다면 분명히 다툴 수 있습니다.”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경매장에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할래요.”무겸도 일어났다.“제가 준비를 도와드리겠습니다.”“아니요. 이번에는 제가 직접 할게요.”그가 나를 바라봤다.“무겸 씨는 옆에서 확인만 해줘요. 내 이름으로 벌어진 일이니까.”잠시 후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좋습니다.”◇경매장에 도착한 나는 담당 직원에게 관련 서류를 제출했다.“제 동의 없이 제작되고 거래에 이용된 초상화입니다. 서명 위조 정황도 경찰에 신고했어요.”직원은 자료를 확인했다
“오정민 씨를 직접 만나려고요.”내 말을 들은 강무겸은 잠시 침묵했다.“약속은 잡으셨습니까?”“네. 오늘 오후 2시요.”“혼자 가실 생각이었습니까?”“처음에는요.”무겸의 표정이 굳어졌다.“왜 저한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어제 무겸 씨한테 화냈잖아요. 또 같이 가자고 하기가 좀 그랬어요.”“설주 씨.”“네?”“서운한 일과 사건 조사는 구분했으면 좋겠습니다.”나는 그를 바라봤다.“무겸 씨도 화났었어요?”“화보다는 속상했습니다.”솔직한 대답에 마음이 찔렸다.“미안해요.”“사과받으려고 한 말은 아닙니다.”그가 내 앞에 섰다.“함께 가도 되겠습니까?”나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대신 오늘 질문은 제가 할게요.”무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그렇게 하십시오.”◇오후 2시.오정민은 약속 장소인 재단 상담실에 먼저 도착해 있었다.그는 우리를 보자 표정부터 굳혔다.“강 감정사님까지 오셨군요.”나는 맞은편에 앉았다.“제가 부탁했어요.”“무슨 일로 만나자고 하셨습니까?”나는 가방에서 서류를 꺼냈다.“이태광이 작성했다는 최초 확인서 때문이에요.”오정민의 시선이 서류에 머물렀다.“이미 경찰에 제출한 자료입니다.”“알아요. 그래서 직접 설명을 듣고 싶어요.”“무엇을 말입니까?”“태광이가 왜 작품 등록 정보 변경에 동의했는지요.”오정민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이태광 씨도 거래 당사자였습니다. 처음부터 내용을 알고 있었어요.”“어떤 내용이요?”“작품 3점을 묶어서 관리번호를 정리하는 일이었습니다.”“그럼 작품을 바꿔치기하는 것도 알고 있었나요?”그의 얼굴이 굳었다.“말을 조심하셔야겠습니다.”나는 물러서지 않았다.“가짜 감정서가 발견됐어요. 제 이름으로 작성된 동의서도 있었고요. 그게 정상적인 거래예요?”오정민은 대답하지 못했다.“태광이는 사망하기 하루 전에 이의를 제기했어요.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꿨죠?”한참 뒤 그가 입을 열었다.“처음에는 단순한 등록 정리라고 생각했겠죠.”“그런데요
“오늘은 사건 이야기 안 하기로 했잖아요.”강무겸의 말에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딱 하나만 물어볼게요.”“벌써 세 번째입니다.”“그렇게 많았어요?”“네. 첫 번째는 감정서, 두 번째는 거래대금, 이번에는 뭡니까?”나는 멋쩍게 웃었다.“이태광이 처음부터 거래에 가담했을 가능성이요.”무겸이 나를 조용히 바라봤다.“설주 씨.”“네.”“지금 식사하는 남자가 누군지는 알고 계십니까?”“강무겸 씨잖아요.”“그런데 계속 다른 남자 이야기만 하시네요.”순간 젓가락을 쥔 손이 멈췄다.“질투해요?”그가 물잔을 내려놓았다.“조금은요.”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죽은 사람한테도 질투해요?”“그 사람이 설주 씨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이었는지 압니다. 그래도 지금 마주 앉아 있는 저도 조금은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차갑고 무서운 남자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지금은 그가 웃는 모습 하나에도 마음이 흔들렸다.“무겸 씨.”“네.”“나 아직 준비 안 됐어요.”그의 미소가 옅어졌다.“알고 있습니다.”“태광이가 죽은 지 1년밖에 안 됐어요. 그런데 내가 다른 사람한테 설레는 게…….”나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무겸은 재촉하지 않았다.“죄책감이 들어요.”“저 때문에요?”“무겸 씨 잘못은 아니에요.”나는 손가락으로 컵 가장자리를 문질렀다.“태광이를 사랑했던 마음이 진짜였는데, 무겸 씨한테 끌리는 마음도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아서요.”그의 시선이 깊어졌다.잠시 후 무겸이 말했다.“저는 태광 씨를 대신할 생각이 없습니다.”“…….”“설주 씨가 그 사람을 사랑했던 시간까지 지우고 싶지도 않고요.”가슴이 먹먹해졌다.“그럼 뭘 원하는데요?”“앞으로 설주 씨가 저와 함께하고 싶어지는 순간이 오면 좋겠습니다.”나는 고개를 숙였다.이 남자는 왜 이렇게 사람 마음을 흔드는 걸까.◇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우리는 차를 세워 둔 곳까지 천천히 걸었다.“무겸
“그 사람들이 왜 이태광 씨의 입을 막으려 했는지 알 수 있는 대화입니다.”강무겸의 말을 듣는 순간 손끝이 차가워졌다.나는 맞은편에 앉은 박연호를 바라봤다.그는 여전히 태연한 표정이었다.“박연호 씨. 회의 영상 전체를 보여주세요.”“이미 보셨잖습니까.”“일부만 봤죠. 앞뒤 내용까지 확인하겠다는 거예요.”박연호의 미소가 사라졌다.“강무겸 씨한테 물어보시면 되겠네요.”“그럴 생각이에요. 하지만 이 영상도 경찰에 제출해 주세요.”나는 담당 형사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박연호가 의자를 밀며 일어났다.“채설주 씨, 지금 저를 범인 취급하는 겁니까?”“아니요. 증거를 확인하자는 거예요.”“그 남자가 뭐라고 하든 믿겠다는 겁니까?”나는 가방을 집어 들었다.“믿을지 말지는 제가 결정해요.”그 말을 남기고 사무실을 나왔다.◇건물 밖에는 강무겸이 기다리고 있었다.나를 발견한 그가 다가왔다.“괜찮습니까?”“아니요.”나는 걸음을 멈췄다.“무겸 씨, 나한테 또 숨긴 게 있었잖아요.”그의 표정이 굳었다.“맞습니다.”“어제 분명히 말했죠. 중요한 건 전부 알려 달라고.”“제가 잘못했습니다.”“왜 그랬어요?”“그 회의에서 오정민 씨와 박연호 씨가 제게 부당한 감정을 요구했습니다. 그 사실은 말씀드렸지만 직접 만났던 일까지 설명하지 않았습니다.”나는 그를 바라봤다.“그런데 왜 나한테는 그렇게 잘해줬어요?”무겸이 잠시 말을 멈췄다.“그건 별개의 문제입니다.”“나한텐 별개가 아니에요.”목소리가 떨렸다.“태광이도 나한테 중요한 걸 숨겼어요. 난 그 사람을 믿었고요. 그런데 무겸 씨까지 그러니까…….”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무겸이 한 걸음 다가왔다가 멈췄다.“설주 씨를 속이려던 건 아닙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신뢰를 깨뜨린 건 제 책임입니다.”나는 고개를 숙였다.화를 내고 싶은데 그의 사과가 마음을 흔들었다.“녹음 들려줘요.”“여기서요?”“네. 지금 확인하고 싶어요.”◇무겸의 차 안에서 녹음 파일을 재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