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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회는 치명적
그 후회는 치명적
Author: 김희랑

제1화

Author: 김희랑
“대표님, 어르신께서 저녁에 작은 도련님 모시고 집에 한 번 들르실 수 있냐고 여쭤보시는데요.”

“상황 봐서.”

성지민은 막 회의를 마치고 병원 로비로 들어섰다.

가을철 소아 독감이 유행하는 시기라 병원 곳곳에 링거를 맞는 아이들이 있었고 기침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가 전화를 끊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침내 파란색과 흰색이 섞인 대기 의자에 홀로 링거를 맞고 있는 아들을 발견하고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아들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여자 의사를 보았다.

흰 가운은 그녀의 가녀린 몸매를 가리지 못했고 대충 묶은 중장발의 머리는 너무나도 익숙해서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수년이 흘렀어도 그 실루엣 하나만으로 성지민은 제자리에 못 박힌 듯 멈춰 섰다.

그녀는 여전히 온화한 눈길로 성지민의 아들을 내려다보며 나직이 물었다.

“왜 또 너 혼자서 링거 맞고 있어? 가족들은 어디 가고?”

7살이 된 성연우는 이 나이답지 않게 점잖고 어른스러웠다.

“방금 오셨어요. 바로 뒤에 계시네요.”

김도아가 살짝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고 그렇게 성지민의 시선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재회한 두 사람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녀는 한순간 멍해졌지만 금세 평정을 되찾고 몸을 일으켰다.

수년 만의 재회였지만 반가움의 인사 대신 김도아는 단지 의사로서의 공적인 태도를 보였다. 마치 지난날의 사랑과 증오는 덧없는 구름처럼 지나간 듯이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말했다.

“이렇게 아이 혼자 링거 맞는 건 위험해. 의사가 시시각각 지켜볼 수 없으니 다음부터는 최대한 혼자 두지 마.”

성지민은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 교수님, 잠시 이쪽으로 와보시죠!”

“네, 지금 갈게요.”

같은 과 동료 의사가 부르자 김도아는 알겠다고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날 때 자세가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외래 진료실로 가면서 걸음걸이가 조금 빨라지자 오른쪽 다리를 살짝 절뚝이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성지민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마치 바다 표면에 갑자기 이는 큰 파도처럼 표정이 심오하고 무거워졌다.

...

병원 응급실에 열이 나서 찾아온 아이들은 대부분 엄마와 단둘이었다.

이는 가장 흔한 풍경이기도 했다.

또한, 모든 엄마들은 보온병, 물티슈, 휴지 등 아이에게 필요한 온갖 잡동사니가 든 커다란 가방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검은색 롱코트 자락을 날카롭게 휘날리는, 마치 피투성이 갱단에서 막 걸어 나온 듯한 이 남자는 그런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결국, 옆에 있던 성연우는 병원에서 끓인 미지근한 물을 일회용 종이컵에 받아 마셔야 할 지경이었다.

아빠와 아들, 둘의 분위기는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성지민은 깊은 눈매에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틀에 갇히지 않고 냉랭하지도 않지만, 본능적으로 위험한 느낌을 주었다.

다만 그가 데리고 온 아들은 아빠와 성향이 사뭇 달랐다. 성지민에게서 풍기는 살벌하고 오만한 기세와는 달리 이 아이는 왠지 모르게 단정하고 차분했으며 이 또래에서는 보기 드문 내면의 성숙함이 있었다.

“다들 봤어요? 밖에 있던 꼬마 아빠가 성지민 씨였더라고요.”

“네, 봤어요. 방금 그분 뉴스 인터뷰도 봤는데.”

“혹시 내가 잘못 봤나? 왜 자꾸 저쪽 사무실만 쳐다보는 것 같지...”

“대박! 진짜네요. 누굴 보는 거지?”

의료 기기 업계의 거물 성지민은 각종 신문 1면을 장식하는 단골 인물이었다. 냉혹한 수완과 오만하고 지배적인 행동, 이 남자에겐 정해진 규칙 따위 없었다. 밑바닥에서부터 기어 올라온 그는 사생활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언론은 그에게 아들이 있다는 사실만 알 뿐 아이 엄마에 대한 소식은 단 한 번도 보도한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오늘 아들을 데리고 병원에 버젓이 나타난 것이다.

호기심이 발동한 몇몇 의사들은 그가 대체 누굴 보는 것인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유능한 부원장의 조수 조정원 의사일까 아니면 집안 배경도 좋고 얼굴도 예쁜 박서윤 의사일까?

그때 뜬금없는 목소리가 가볍게 흘러나왔다.

“저를 보고 있는 걸지도 모르죠.”

모두가 휙 돌아보았지만, 그곳에는 밤샘 근무로 머리도 못 감아 잔뜩 헝클어진 채 우유빵을 입에 욱여넣고 있는 초췌한 몰골의 김도아 교수밖에 없었다.

“...”

뭇사람들은 시선을 거두고 건조한 웃음으로 난감함을 달랬다.

김도아는 빵을 입안에 가득 채워 넣어서 볼이 빵빵해졌지만 태연한 척 손을 털었다.

“농담이에요.”

당연히 농담이겠지.

김도아는 병원에서 가장 젊은 부교수이자 미르에서 스카우트해 온 최고급 인재였다. 병원 의사 소개 패널에는 그녀와 몇몇 교수진, 병원장, 부원장의 경력만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전문 능력에는 감복했지만 절대 성지민과 연관 지을 리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도아는 미인도 아니고 거기에 다리까지 절뚝였으니까.

아무도 그녀가 성지민의 전 부인일 거라고 믿지 않았다.

이것은 편견이자 세속적인 시선이었다.

잠시 후 수술이 예정되어 있던 터라 김도아는 하루도 넘게 못 씻은 머리를 다시 한번 대충 낮게 묶었다.

바깥에는 여전히 비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녀는 병원 복도 대기 의자에 앉아 환자가 병실에 빠트린 필름을 가져오길 기다리고 있는데 등 뒤에서 문득 발소리가 들려왔다.

수년이 흘렀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이 발소리가 변함없이 익숙했다.

“언제 돌아왔어?”

김도아는 진지하게 생각하다가 머리를 살짝 기울이고 습관처럼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반년쯤 됐나.”

몇 초간의 침묵 후, 상대가 다시 물었다.

“그동안 잘 지냈어?”

“그럭저럭, 겨우 살 만했어.”

두 사람의 대화는 마치 오랜 친구가 안부를 묻는 것처럼 평온했다.

하지만 당시 그들의 결별은 사실 꽤나 추악했고 심지어는 뼈를 깎는 듯 아픈 이별이었다. 늘 밝고 명랑했던 김도아는 혹독한 시련으로 반쯤 죽은 사람처럼 변해버렸고 몇 번이고 무너져 내릴 듯한 절망에 빠졌다. 눈물이 메말라버렸고 벌겋게 부은 두 눈은 생기를 잃어서 퀭한 모습으로 겨우 한 마디만 내뱉었다.

“이제 그만 놓아줘.”

그녀는 성지민을 증오했다.

더 나아가 한진이라는 이 도시가 자신에게 안겨준 모든 것을 증오했다.

10년 넘게 함께 자라며 한때는 뼛속 깊이 사랑했었고 나중에는 또 그만큼 원망했었다.

긴 침묵이 흐른 뒤, 환자 보호자가 내려오지 않자 김도아는 병동으로 올라가려 몸을 일으켰다. 그때 마침 빗물이 튀어 발밑이 살짝 미끄러지며 걸음을 휘청거렸다.

허리에 손이 닿는 순간, 그녀는 마치 흉악한 것이라도 피하듯 휙 하고 몸을 뒤로 뺐다. 눈가에 스친 혐오감은 금세 사라졌고 그녀는 또다시 평온하고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심지어 성지민을 향해 가볍게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고마워. 먼저 갈게.”

“도아야.”

뒤에서 낮고 거친 목소리가 들렸지만 김도아는 돌아보지도 않고 곧게 앞으로 걸어갔다. 결국, 그녀의 그림자마저 눈앞에서 모조리 사라졌다.

병원 벽걸이 TV에서는 두 시간 전 성지민이 회의에서 발표하던 모습이 여전히 재생되고 있었다. 언론 앞에 선 그는 거침없고 비범한 기세를 뽐내고 있었다.

그러나 불과 몇십 분 후, 지금의 그는 무겁고 침울한 뒷모습만 그림자로 드리워졌다.

...

깊은 밤.

오늘은 이달 초하루이고 현관에는 작은 불당이 마련되어 있었다.

위엄 있고 신성한 관우상은 커다란 검을 쥐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홀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에는 사납고 위협적인 기운이 가득했다.

성지민이 집사가 건넨 향을 받을 때, 부주의로 향 한 개비가 부러져 버렸다.

이에 집사가 물었다.

“도련님, 혹시 무슨 근심거리라도 있으신가요?”

천둥 번개가 치고 별장 밖에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성지민은 훤칠한 몸매로 홀 앞에 서서 옆모습이 여러 번 조명에 비쳤다. 초점이 깜빡거렸지만, 그는 시종일관 태연했다.

“옛 지인을 만났어요.”

오랜 시간 그의 곁에 나타나지 않았던, 그의 아내 김도아를 만났다.

성지민은 마음을 다잡고 다시 향을 피웠다.

관우상에 예를 갖추자 옅은 연기가 가늘게 피어올라 천장으로 흩어지며 마치 숲처럼 자욱해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향이 다 타들어 갈 때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성연우가 그의 뒤에 서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빠가 말씀하신 그 옛 지인이 혹시 내 엄마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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