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서린은 괜히 와인잔만 만지작거렸다.막상 수혁의 입으로 듣고 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근데 대표님.”유정이 턱을 괴며 물었다.“그 정도면 본인이 먼저 좋아한 거 인정하는 거죠?”“그런 것 같네요.”너무 쉽게 인정하는 대답에 서린이 수혁을 쳐다봤다.“왜 그렇게 봐?”“아니요.”서린은 얼른 시선을 피했다.유정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아, 진짜. 두 사람 보고 있으니까 내가 다 간지럽네.”그러다 웃음이 조금 잦아든 유정이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그리고 서린을 바라보는 눈빛이 조금 진지해졌다.“아무튼 축하해, 서린아.”“…….”“네가 도망 안 가고, 누군가 옆에 이렇게 든든하게 서 있는 거. 보기 좋아.”가볍게 던진 말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심을 서린은 알았다.5년 전, 모든 걸 버리고 도망쳐야 했던 친구.늘 불안해하고 숨어 지내던 친구가 이제야 제 자리를 찾은 것 같아 안도하는 마음.유정은 수혁을 힐끗 보며 말했다.“대표님. 얘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속은 좀 복잡한 애예요. 상처도 많고, 겁도 많고.”“유정아.”“가만있어 봐. 내가 보호자로서 한마디 하는 거야.”유정은 수혁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그래도, 애는 진국이에요. 그러니까, 꽉 잡으세요. 놓치면 대표님만 손해니까.”장난기 어린 말투 속에 뼈 있는 당부가 담겨 있었다.수혁은 잠시 서린을 바라보았다.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의 옆모습을 눈에 담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알아. 그래서 절대 안 놓을 거야.”그 대답에 서린의 고개가 들렸다.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유정은 흐뭇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어우, 달다 달아. 와인이 필요 없네.”“뭐-? 하하하”“푸하하하”세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유정이 디저트 접시를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나 이제 진짜 간다. 부모님 기다리셔.”그리고 서린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너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다.”“고마워.”“다음엔 나한테 먼저 말해
수혁은 더 묻지 않았다.서린이 말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대신 그는 핸들을 꺾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자.”“네?”“지금 상태로 집에 가면 아무 말도 못 할 것 같아. 그리고 나도 배고프고.”그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가볍게 웃어 보였다.“산 사람은 밥을 먹어야지. 맛있는 거 먹으면 기분 좀 풀릴 거야.”차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레스토랑 앞에 멈췄다.수혁은 익숙하게 창가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통유리 너머로 검은 강물 위로 도시의 불빛이 보석처럼 부서지고 있었다.잔잔한 음악과 따뜻한 조명 때문인지, 차 안에서부터 굳어 있던 서린의 어깨가 조금씩 풀렸다.“여기 자주 오세요?”“그렇게 자주는 아니고, 오늘은 그냥… 분위기라도 좋으면 나을까 해서.”그 담백한 배려에 서린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곧이어 주문한 스테이크와 붉은 와인이 테이블에 놓였다.“맛있어?”“네. 정말 맛있어요.”서린이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긴장을 풀려던 찰나였다.“야.”등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서린이 놀라 고개를 돌리자, 화려한 원피스를 입은 성유정이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너 여기서 뭐 해?”서린의 눈이 동그래졌다.“유정아?”“전화는 안 받더니, 여기서 데이트 중이었어? 아주 깨가 쏟아지네.”유정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장난스럽게 웃었다.“아니 그게 아니라—”“농담이야. 대표님, 오랜만이에요.”유정은 능청스럽게 수혁에게 인사를 건넸다.수혁도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오랜만이네요, 작가님.”“여기서 다 뵙네요. 저 오늘 부모님이랑 저녁 먹으러 왔거든요.”유정이 뒤쪽, 가장 안쪽의 조용한 테이블을 가리켰다.그곳에는 중후한 인상의 중년 부부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서린은 그중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 숨을 들이켰다.성. 도. 형.여당의 실세이자 혁신위원장.그리고 유정의 아버지.“아…….”서린이 당황하는 사이, 수혁이 먼저 반응했다.“위원장님이
도윤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카톡 못 보신 거야?’강민재의 눈이 가늘어졌다.‘어?’공기 결이 바뀌었다.이건 단순한 부모의 호기심이 아니었다.‘이상한데.’의심이 고개를 들려는 순간—쾅—!공대현이 탁자를 내리쳤다.“이 녀석이-! 너 제정신이야?”찻잔이 달그락 소리를 냈다.“같은 공 씨는 안 되는 거 몰라?”강민재의 눈썹이 미묘하게 움직였다.“우리 집안이 얼마나 보수적인지 알잖아! 족보 따져보면 다 엮여 있어. 동성동본은 안된다!”윤정희도 다급히 거들었다.“도윤아… 정말이야? 공 씨라고?”그녀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저었다.도윤은 잠시 얼어 있다가, 뒤늦게 분위기에 올라탔다.“아니, 요즘 누가 그런 걸 따져요! 법적으로도 문제없다니까요!”“안 돼!”“허락 안 해줘도 만날 거예요!”부자간의 고성이 오갔다.거실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강민재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아니, 더 있다가는 괜히 불똥이 튈 판이었다.“제가 괜한 화제를 꺼냈군요.”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오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가게! 이 녀석 교육을 다시 시켜야겠어!”공대현은 도윤을 노려보느라 강민재를 보지도 않았다.현관문이 닫혔다.차에 올라탄 강민재는 한동안 시동을 걸지 않았다.룸미러에 저택이 비쳤다.“역시… 아닌 건가.”죽은 사람이 돌아올 리 없다.만약 그렇다면, 이름을 말했을 때의 반응은 달랐을 것이다.공대현은 화를 냈고, 윤정희는 놀랐다.충분히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그게 또 거슬렸다.이미 너무 많은 우연을 겪어서 그런가.공서린이라는 이름과 함께 나오는 반응들이 강민재의 신경을 날카롭게 긁었다.강민재는 주주총회에 참석하고서 계속 서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그래서 알 수 있었다.뒷모습은 영락없는 지안이었다.앉아있는 폼새, 손목을 문지르던 습관.긴장하면 움츠러들던 어깨의 잔떨림까지.그래서 확인해 보기 위해 왔다.얻은 답은 애매했다.가족들의 반응만 놓고 보면 자신의 의심이 틀린 것 같았다.그렇다고
도윤은 거실을 서성이다가 다시 휴대폰을 들여다봤다.방금 전, 강민재에게서 걸려온 전화.— 집 근처야. 곧 도착해. 아버님, 어머님 곧 들어오신다니까 너도 잠깐 얼굴 보자.그 한 마디가 심장을 내려앉게 했다.“미친… 왜 갑자기 집으로 와.”욕을 삼킨 도윤은 가족 단톡방을 열었다.[도윤]엄마 아빠 민재형 온다며?전송.숫자 2에서 1이 되었다.[도윤]급함누나 얘기야카페에서 만났는데 누나가 민재형 피하는 것 같아서내가 남자친구인 척 했어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이번엔 숫자 2.사라지지 않았다.“왜 안 봐…”거실 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손바닥이 미끄러울 만큼 젖어 있었다.“제발 좀 보라고…”소파에 털썩 앉았다가 다시 벌떡 일어났다.결국 도윤은 서린에게 전화를 걸었다.강민재가 집에 오고 있음을 알렸다.그때.삐—.인터폰이 울렸다.기계음 뒤로 경비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강민재 의원 도착했습니다. 지금 들어가십니다.”심장이 바짝 조였다.정문을 통과했다는 말은, 이제 돌릴 수 없다는 뜻이었다.그 시각, 강변도로를 달리는 차 안.서린은 수혁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저기, 그게…….”말끝이 흐려졌다.부모님.그 단어가 목구멍에 가시처럼 걸렸다.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모든 걸 말할 용기도 나지 않았다.수혁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유난히 작아 보였다.그때였다.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도윤]서린은 수혁을 향해 미안하다는 듯 눈짓을 하고 전화를 받았다.“어, 도윤아.”— 누나, 지금 어디야?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고 빠르다.“밖이야. 무슨 일 있어?”잠시 숨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강민재 형이 집으로 오고 있어.서린의 숨이 멎었다.“왜…? 갑자기 왜 온대?”— 나도 정확히는 몰라. 근데 느낌이 좀 이상해.— 걱정 마. 그냥 알고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서린이 입을 꾹 다문채 머리를 젖혔다.“……어.”— 도착한 것 같아. 끊
차는 집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저녁 도시의 불빛이 유리창을 스쳐 지나갔다.라디오도 켜지지 않은 차 안은 조용했다.엔진 소리와 간헐적인 방향지시등 소리만이 공간을 채웠다.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수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어릴 때 말이야.”그는 앞을 본 채였다.“아버지는 회사 얘기를 집에서는 거의 안 하셨어.”의외라는 듯 서린이 고개를 돌렸다.“그럼요?”“대신 공장 데려가는 걸 좋아하셨어.”입가에 아주 옅은 웃음이 스쳤다.“초등학생 때였는데, 작업복 입혀서 라인 한 바퀴 돌게 했지. 사람들한테 ‘내 아들이다’ 자랑도 하고.”“대표님이요?”“그땐 그냥 애였지, 근데 그날 이후로, 제품 하나 볼 때마다 ‘저건 누가 만들었을까’ 생각하게 됐어.”차가 신호에 멈췄다.붉은 불빛이 그의 옆얼굴을 물들였다.“어머니는 완전 반대였고.”“어떻게요?”“회사 얘기만 나오면 ‘밥 먹을 때는 밥만 먹자’고 하셨어.”그가 짧게 웃었다.“주말이면 무조건 가족 시간. 산에 가거나, 바다 보러 가거나.”이번엔 웃음이 조금 더 선명했다.“그래도 아버지 얘기 제일 잘 들어준 사람도 어머니였어.”그가 천천히 덧붙였다.“결국 밤에 두 분이 앉아서 다 얘기하셨겠지.”차가 다시 움직였다.“사고 소식 들은 날….”그는 말을 멈췄다가, 조용히 이어갔다.“처음엔 실감이 안 나더라. 아버지가 늘 출장 다니셨으니까, 이번에도 금방 돌아올 것 같았어.”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살짝 들어갔다가 풀렸다.“근데 집이 조용해지니까 알겠더라고. 진짜로 안 오는구나.”차 안 공기가 조금 가라앉았다.서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후회되는 거 있으세요?”수혁은 잠시 생각했다.“유학 가기 전날, 아버지가 술 한잔 하자고 하셨거든.”그가 희미하게 웃었다.“귀찮아서 핑계 대고 방으로 들어갔어. ‘다녀와서 하자’고.”짧은 숨이 흘렀다.“그게 마지막이었지.”말은 담담했지만, 여운이 길었다.차는 점점 도심을 벗어나고 있었다.가로등 사이
모두가 빠져나간 한도전자 본사 20층.한때 선대 회장이 사용하던 옛 집무실은 고요했다.차윤호가 회장 자리에 오른 뒤 새로 꾸민 집무실을 사용하면서,이곳은 오랫동안 비워진 채 남아 있었다.정기적인 관리는 되고 있었지만,사람의 온기만큼은 오래전에 끊어진 공간이었다.문패는 이미 떼어졌고,벽에는 아무 이름도 걸려 있지 않았다.유리창 너머로 저녁 노을이 길게 드리워지고 있었다.수혁은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책상 앞으로 가 의자에 손을 얹었다.짙은 나무 결.손잡이에 남은 희미한 사용감.오랫동안 비어 있었는데도,이상하게 아버지의 흔적은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았다.그는 의자를 천천히 돌려 앉아 보려다가,이내 멈췄다.“좋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무겁네.”민우가 캔커피를 던지듯 건넸다.“원래 왕관은 액세서리가 아니야. 폼 잡으려고 쓰는 거면 아예 쓰지를 마.”수혁은 피식 웃으며 캔을 땄다.치익, 하는 소리가 방 안에 맴돌았다.한 모금.쓴맛이 오래 남았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아래로 펼쳐진 도심. 퇴근 시간의 차량 행렬.건너편 빌딩 유리창에 번지는 붉은 노을.정문 앞에는 아직도 취재 차량 몇 대가 남아 있었다.새로운 대표의 얼굴을 한 컷이라도 더 담으려는 듯.“아버지가 이 자리 좋아하셨어.”낮고, 차분한 목소리였다.“여기 서서 저 불빛들 보면서 그러셨지. 저 중에 우리 냉장고 쓰는 집도 있고, 우리 부품 들어간 휴대폰 쓰는 사람도 있고.”그가 미세하게 웃었다.“눈에 안 보여도 다 연결돼 있다고.”잠시 멈췄다.“그래서 이 자리는 권력이 아니라 책임이라고.”서린은 그의 옆모습을 바라봤다.말보다 눈빛에 더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벽 한쪽에 걸린 대형 세계지도가 눈에 들어왔다.색색의 핀이 촘촘히 꽂혀 있었다.“저건…?”“해외 거래처 표시야.”수혁이 다가가 손끝으로 핀 하나를 건드렸다.“아버지가 직접 꽂았다고 들었어.”그는 특정 지점을 짚었다.동남아 해안 도시.“사고 나기 직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