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어젯밤, 어둠 속에서 머릿속으로 그렸던 탈출 경로였다.마을로 이어지는 도로는 위험하다.무조건 산을 넘어서 반대편 도로로 나가야 살 수 있다.하지만, 겨울 산은 숨을 내쉴 때마다 폐를 찢어놓는 듯 했다.신발도 없이 맨발로 뛰어나온 발바닥은 얼어붙은 돌부리와 나뭇가지에 찢겨 이미 감각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피가 흐르는지도 몰랐다.얇은 원피스 한 장만 걸친 몸은 추위에 덜덜 떨렸고, 찢어진 원피스 자락과 얼굴에는 긁힌 흔적이 선명했다.서린은 한계에 다다른 다리를 이끌고 비탈길을 내려가고 있었다.그때였다.“아악!”발밑에 쌓인 젖은 낙엽을 헛디딘 서린의 몸이 아래로 쑤욱 꺼졌다.“아—”그대로 가파른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졌다.온몸이 나무 기둥과 바위에 부딪히며 끔찍한 고통이 전신을 강타했다.“으윽…….”비탈길 아래 평평한 곳에 처박힌 서린은 신음을 삼키며 몸을 웅크렸다.여기서 멈추면 끝이다.서린은 이를 악물고 두 팔로 바닥을 짚으며 기어갔다.몸을 숨길 커다란 바위 아래 틈새로 기어 들어가, 숨을 죽이고 파들파들 떨었다.하아...조금만, 조금만 쉬자.들키지 않게.서린은 더 깊숙이 몸을 웅크렸다.그 순간,바스락.바스락.산등성이 위쪽에서 낙엽 밟는 소리가 들렸다.“— 안아아.”멀리서 강민재의 목소리가 들렸다.“지안아아—.”서린의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어디 숨었어, 우리 지안이.”강민재는 산 기슭에서 서린의 옷자락이 찢겨진 채로 매달린 것을 발견했다.‘이 쪽으로 갈 줄 알았어.’“오빠가 다 용서해 줄게.”낙엽 밟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아이스크림 사 왔잖아. 같이 먹어야지. 얼른 나와.”강민재의 얼굴은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몸을 낮추고 낙엽이 쌓인 산 기슭을 살폈다.“공— 지— 아아안—”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서린은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지만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강민재와 함께 서울로 같이 갈까도 생각해 봤다.하지만 이내 그 생각을 접었다.
“음, 음음~.”적막한 해안가 도로 위, 검은 세단 안에서 기분 좋은 콧노래가 흘러나왔다.운전석에 앉은 강민재의 입가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조수석에는 배스킨라빈스 쇼핑백이 놓여 있었다.그 안에는 서린이 먹고 싶다고 했던 ‘슈팅스타’ 아이스크림이 드라이아이스와 함께 담겨 있었다.‘귀엽기는.’아이스크림이라니.5년 전, 대학생이던 지안이 입버릇처럼 찾던 간식이었다.자신에게 앙탈을 부리듯 아이스크림을 사다 달라고 조르던 그 목소리가, 오늘 아침에 똑같이 재현되었다.강민재는 핸들을 가볍게 두드리며 속도를 냈다.지안이 마음을 열었다.세상의 모든 근심이 사라진 기분이었다.이제 차수혁 그 새끼만 처리하면 된다.그러면 나는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지금 태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 채.차가 숲길을 돌아 별장의 녹슨 철문 앞에 멈춰 섰다.강민재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조수석의 쇼핑백을 챙겨 들었다.가벼운 발걸음으로 마당을 지나 현관문으로 향했다.빠지직.발밑에서 불쾌한 소리가 났다.강민재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고개를 숙이자, 구두 밑창에 밟혀 산산조각 난 날카로운 유리 파편들이 보였다.“……?”싸늘한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훑고 지나갔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굳게 닫혀 있어야 할 별장 거실의 통유리창이, 산산조각이 나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쩍 벌어진 창틀 사이로 매서운 겨울 바닷바람이 흉흉하게 불어 들고 있었다.강민재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지안아?”손에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 봉지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그는 미친 듯이 박살 난 창문을 넘어 거실로 뛰어 들어갔다.“지안아!! 공지안!”침실 문을 열어젖혔다.침대 기둥에 묶여 있어야 할 여자는 온데간데없었다.대신, 날카로운 손톱깎이로 처참하게 끊어낸 실크 넥타이의 잔해만이 덩그러니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아아아아악!!”강민재가 짐승처럼 포효했다.그녀가 또 나를 속였다.자신을 비웃으며, 철저하게 연기하며 내
“야, 경찰에 알리고 같이 가! 혼자 가면 위험해!”민우가 말렸지만, 수혁은 듣지 않았다.차 키를 쥐고 미친 듯이 지하 주차장으로 내달렸다.민우가 김 지검장에게 보고했다.즉시 태안 관할 지구대와 해경에 긴급 수색 명령이 하달되었다.수혁의 차가 밤의 고속도로를 질주했다.‘조금만 버텨... 제발.’다음 날 아침.별장의 두꺼운 암막 커튼 틈으로 희미한 아침햇살이 스며들었다.강민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잘 잤어, 지안아?”서린은 부스스 눈을 떴다.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강민재가 침대 가까이 다가왔다.“배고프지? 아침 해 줄게.”“오빠.”서린이 강민재를 불렀다.“나……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아이스크림?”“응. 배스킨라빈스 슈팅스타.”“슈팅스타?”“그거 먹으면... 머리가 좀 맑아질 것 같아.”강민재는 서린의 요구가 반가웠다.연인 사이에서나 할 법한 부탁이라니.“그래. 사 줄게. 우선 아침을 먼저 먹고.”“응. 메뉴는 뭐야?”“네가 좋아하는 순두부찌개”흡—숨이 막혔다.서린이 머리를 숙이고 손으로 입을 틀어 막았다.하마터면 울음이 터질 뻔했다.‘하필이면...’“왜... 속이 안 좋아?”강민재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아니... 반가운 메뉴라서.”서린은 어깨를 살짝 비틀어 빼고 고개를 들었다.“빨리 먹고 싶어.”“알았어. 조금만 기다려.”강민재가 서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나갔다.문이 닫혔다.서린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입술을 깨물었다.하지만...흑―— 뜨거우니까 천천히 먹어.— 콩이 몸에 좋아.— 혼자 살면 잘 챙겨 먹기 힘들잖아.으윽...윽...따뜻했던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보고 싶어.’서린은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곧 갈게요.어떻게 해서든 갈게요.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찾아줘요.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잠시 후, 얼굴에 남은 눈물 자국을 지웠다.후우—‘기회는 한 번뿐이야.’침실 문이 살짝 열렸다.“지안아, 밥 먹자.”강민재가 들어와 손
“……내가 어리석었어.”갈라진 입술 사이로, 서린의 목소리가 힘없이 새어 나왔다.강민재의 눈동자가 커졌다.“그동안…… 오빠 마음, 내가 너무 몰랐어.”서린의 눈가에서 투명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그래 내가 당신을 너무 몰랐어.나를 그렇게 죽게 할 줄도 몰랐고,또다시 비틀린 욕망으로 나를 가둘 줄은 더더욱 몰랐다.나는 그렇게 어리석었다.사랑이...사랑이 나를 죽일 줄은 정말 몰랐다.내가 공지안이길 바란다면,그래 기꺼이 공지안이 되어 줄게.당신이 그렇게도 원하는 공지안.“오빠…….”순간, 강민재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했다.“나…… 아파. 이거, 풀어줘.”“도망 안 갈게. 진짜야…….”서린은 붉게 피멍이 든 손목을 바라보며 흐느꼈다.‘오빠’라고 불렀다.강민재의 머릿속에서 도파민이 미친 듯이 터져 나왔다.“그래. 그래, 지안아. 오빠가 미안해. 아프게 해서 미안해.”강민재는 환하게 웃으며 서린의 손목을 옥죄고 있던 넥타이를 풀어냈다.툭.결박이 풀리자, 서린의 두 손이 매트리스 위로 툭 떨어졌다.피가 통하지 않아 저릿저릿한 고통이 밀려왔지만—서린은 웃었다.“지안아, 뭐 먹을래? 오빠가 맛있는 거 해 줄게.”“아무거나... 오빠가 해 주는 건 뭐든지 좋아.”강민재의 얼굴에 안도감이 스쳤다.‘이제 됐다. 나도 살고 너도... 너도, 나하고 같이 살자.’토마토 파스타가 식탁 위에 놓였다.서린은 포크를 들었다.입에 넣었다. 삼켰다.속에서 신물이 올라왔다.구역질이 치밀었다.그래도—입꼬리를 억지로 올렸다.“맛있어?”강민재가 턱을 괴고 다정하게 물었다.“응. 맛있어.”속이 뒤집히는 걸, 웃으면서 삼켰다.“생각해 보니까…… 오빠랑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내 삶은 너무 힘들었어.”포크를 살며시 내려놓았다.“차라리 그때 오빠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내 고집대로 해서 이렇게 된 것 같아. 미안해.”서린이 자책했다.그때 바로 검찰에 넘겼어야 했는데, 그게 너무너무 후회가 돼.강민재의 입이 활짝 벌
집무실 안에서는 공대현이 직접 실시간으로 보고를 받고 있었다.“아버지.”“어, 그래 도윤아 뭐 다른 소식이라도 있어?”“그게 아니라, 방금 매형한테서 연락이 왔는데요, 검찰이 강민재 공개수배까지 들어갈 거래요.”“뭐-?”“중앙지검장님을 직접 만났나 봐요. 그런데 영장 청구가 윗선에서 막힐 수도 있―”“알았다.”도윤의 말을 끊은 공대현은 즉시 중앙지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는 곧바로 연결됐다.“내용은 들었네.”공대현이 인사도 없이 대뜸 한 말에 중앙지검장이 놀랐다.― 대통령님? 이 일을 벌써 알고 계셨습니까?“배지 먼저 떼고 보내려고 했는데 시간이 급박해졌어.”― 아...예.“뒷일은 내가 책임집니다. 걱정 말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당장 수배령 내리겠습니다.대한민국의 가장 거대한 공권력 두 개가,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오직 강민재 한 사람을 잡기 위해.하지만, 정작 세상이 자신을 향해 맹렬하게 좁혀오고 있다는 사실을,강민재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그는 별장 근처의 한적한 읍내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었다.서린이 이틀째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구토만 반복하자, 억지로라도 먹일 죽과 수프 종류를 잔뜩 담고, 자신이 먹을 식재료까지 챙기기 위해서였다.마트 계산대 위, 벽걸이 TV에서는 가요무대가 재방송되고 있는데, 아래 뉴스 속보 띠가 흘러가고 있었다.하지만 강민재는 지갑에서 현금을 꺼내느라 화면을 보지 못했다.[속보/ 현역 국회의원 강민재 공개수배]강민재가 계산을 마치고 마트 문을 나서는 순간, 화면에는 가요무대가 뉴스 속보로 바뀌었다.화면에는 강민재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떠 있었다.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마트 밖으로 걸어 나왔다.주변을 한 번 훑어본 뒤, 대포차에 올라탔다.잠시 후, 계산대 직원이 무심코 TV를 올려다보았다.화면 속 남자의 얼굴과 방금 전 계산을 마치고 나간 손님의 얼굴이 겹쳐졌다.직원의 표정이 서서히 굳었다.그가 황급히 마트 밖을 바라봤지만, 검은 세단은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 부장검사실 문이 열렸다.문턱을 넘는 순간, 공기가 단번에 바뀌었다.창문은 블라인드로 완전히 가려져 있었고, 외부의 빛과 소음은 철저히 차단되어 있었다.그 안으로, 수혁이 들어섰다.손에는 묵직한 서류봉투가 들려 있었고, 그의 뒤를 민우가 따라 들어왔다.“어서 오게.”김 지검장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맞았다.“예, 지검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청해 법무법인 정민우 변호사입니다.”두 사람은 차례로 악수를 청했다.김 지검장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맞잡았고, 곧바로 소파 쪽으로 그들을 안내했다.“자, 앉으시죠.”세 사람이 자리에 앉자마자, 방 안의 공기는 다시 한 번 조용히 가라앉았다.잠깐의 정적.김 지검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그럼 들어볼까요.”“과연 공개수배까지 갈 수 있는 사안인지.”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수혁이 들고 있던 가방을 조용히 열었다.그리고 안에 들어 있던 서류 뭉치를 꺼내, 탁자 위에 단단히 내려놓았다.툭.가벼운 소리였지만, 방 안의 공기를 가르는 듯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수혁이 입을 열었다.“이 사건은,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수혁이 고개를 들고 김 지검장의 눈을 마주 보았다.“한도전자의 반도체 핵심 기술이 정치권과 결탁해 해외로 유출됐습니다.”서류를 넘기는 소리만이 방 안을 채웠다.민우가 그 옆에서 자료를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베트남 현지에 설립된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자금이 세탁됐습니다.이건 그 장부 원본입니다.”또 다른 파일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그리고 이건… 전임 법인장의 유품에서 나온 녹음 파일입니다.강민재 의원의 육성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김 지검장의 눈빛이 서서히 굳어졌다.기술 유출 경로, 자금 흐름, 정치권 개입 정황,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한 국가적 손실 규모까지.수혁이 기술적인 부분을 짚으면,민우가 그것이 국가 차원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냉정하게 덧붙였다.두 시간이 지나도록 그 누구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