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6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01 14:42:21

하지만 수혁의 시선은 달랐다.

그는 경력 사항이 아니라, 그녀가 지운 흔적들을 보고 있었다.

굳이 적지 않은 부모님의 직업, 비어 있는 가족 관계, 그리고 자기소개서에 적힌 문장 하나.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문제를 정의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쉬어가려는 사람의 문장이 아니었다.

수혁은 이력서를 한 번 더 펼쳤다.

종이 위에는 특별할 것 없는 문장들이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경력.

학력.

자격증.

하지만 그가 보는 것은 글자가 아니었다.

비어 있는 곳이었다.

해외 근무를 했으면서도 성과를 과장하지 않았다.

프로젝트를 나열하지도 않았다.

누구 밑에서 일했는지보다 무엇을 배웠는지만 남겨 두었다.

대부분은 이력서로 자신을 포장한다.

하나라도 더 보여 주려고 애쓴다.

그런데 이 사람은 달랐다.

굳이 보여 줄 수 있는 것들을 덜어낸 흔적이 보였다.

수혁은 그런 사람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정말 실력이 있는 사람은 설명보다 결과를 먼저 보여 준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하나같이...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수혁은 이력서를 조용히 덮었다.

“이 사람은,”

수혁이 입을 열었다.

시선은 여전히 이력서에 고정된 채였다.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대충 시간만 떼우는 직장인이 아니라.”

“네?”

“보통 잠깐 있다 갈 놈들은 목적이 분명해.”

수혁이 이력서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누르며 한 귀퉁이를 접었다.

다른 지원 서류에는 없던 표시였다.

“돈이든, 타이틀이든, 커리어든. 그래서 이력서가 시끄럽지. 내가 뭘 해냈는지, 뭘 더 원하고 있는지 줄줄이 써놔. 자기를 증명해야 다음 단계로 갈 수 있으니까.”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이력서를 다시 훑었다.

“근데 이 사람은 성과 자랑도 없고, 목표 선언도 없어. 대신…”

수혁이 자기소개서의 한 문장을 톡톡 두드렸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문제를 정의하는 것이 먼저.’”

그는 고개를 들었다.

“이 말은 자신감 없으면 못 써. 해결은 못 해도 정의는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착각하거든.”

수혁이 이력서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근데 이 문장은 달라. 자기가 답을 낼 수 있다는 전제 위에서, 굳이 먼저 문제를 본다는 태도지.”

회의실 공기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이 사람은 회사를 돈 벌러 온 것도 아니고, 능력 과시하러 온 것도 아니야.”

수혁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돈이 목적이라면 더 좋은 회사를 갔겠지. 이 사람은 회사를 보러 온 게 아니라 판을 보려고 오는 겁니다."

그제야 사람들은 깨달았다.

이력서가 담백한 게 아니라, 증명할 필요가 없어서 비어 있다는 걸.

수혁이 회의실을 나가자 남은 사람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대표가 왜 저렇게까지 이 지원자에게 집착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내일 면접은, 평소처럼 싱겁게 끝나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

한편, 약속된 면접 하나를 심드렁하게 마친 서린은 집으로 돌아왔다.

면접은 무난했다. 질문도 평범했고, 답변 역시 준비했던 선을 넘지 않았다.

불필요한 긴장도, 과한 관심도 없었다.

와인을 한 잔 따르고 나서야 몸의 힘이 조금 풀렸다.

서린은 소파에 앉아 잔을 비웠다.

취기가 오르기 전, 의식이 먼저 가라앉았다.

침대로 가서 누웠다.

내일은 또 어떤 질문들이 오갈까.

서린은 까무룩 잠이 들었다.

하지만 잠은 깊지 않았다.

수면이라기보다 잠시 의식이 꺼진 상태에 가까웠다.

이번 꿈에는 물이 없었다.

차도, 충돌도, 폐를 찌르는 고통도 없었다.

대신 말만 남아 있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형체들 사이로 목소리들만 떠다녔다.

―그거 위험한 거야.

―나를 믿어야지.

―누굴 믿겠다는 거야.

목소리는 지독하게 익숙했고 설득하듯 부드러웠다.

한때는 그 다정함이 구원이라고 믿었던 적도 있었다.

안개 너머로 누군가의 손이 보였다.

자신을 향해 내밀어지는 손.

하지만 가까워질수록 이상했다.

붙잡아줄 것 같던 손은 끝내 닿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손은 자신을 향하는 대신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꿈속의 서린은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다만 속이 텅 비어버린 듯한 서늘한 공허함만이 가슴 안쪽에 고였다.

서린은 눈을 떴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대신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알람 소리가 울리고 있었고, 커튼 틈으로는 햇빛이 비집고 들어왔다.

어젯밤의 결심과 꿈속의 혼란이 무색할 만큼 평온한 아침이었다.

이 고요함이 불안했다.

언제나 꿈을 꾸고 난 아침은 꿈과 현실의 경계가 이질적이었다.

마치, 다른 세상에서 툭 떨어진 것처럼.

그 세상이 아직도 자신의 발목을 잡고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은 잔잔했다.

마치 폭풍 전의 고요처럼.

“이번엔 물이 아니었어.”

서린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서 내려와 발을 디디자 차가운 바닥의 감촉이 꿈의 잔재를 밀어냈다.

욕실로 들어가 거울을 보았다.

창백하지만 흔들림 없는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서린은 찬물로 세수를 하고 미리 준비해 둔 옷을 꺼내 입었다.

가방을 챙기고 문 앞에 섰을 때, 서린은 손잡이를 잡은 채 잠깐 멈췄다.

면접 일정은 정해졌지만, 그 문 너머에서 무엇을 보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이제는 스스로 확인하고 싶었다.

거짓 속에 숨겨진 진실이든,

진실을 가장한 거짓이든.

달그락.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와 함께 서린은 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나섰다.

오늘.

그녀는 자신도 모른 채, 모든 것을 바꿀 첫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그날, 나는 죽지 않았다.   110화.

    서린은 잠시 멍하니 수혁을 바라보다가—푸흡-작게 웃음이 터졌다.“웃어?”“대표님, 도윤이 말이에요.”“어, 도윤인지 도분인지.”“제 동생이에요.”수혁의 숟가락이 허공에서 딱 멈췄다.“……뭐?”“친동생이요. 공도윤.”“동……생?”“네. 강민재가 제게 접근하니까, 남자친구인 척해준 거예요.”“하―”수혁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이마를 짚었다.그리고 잠시 후.“푸하하하하!”박장대소를 터뜨렸다.식탁이 들썩거릴 정도로 시원한 웃음이었다.“와- 대박이다 진짜.”눈가를 닦으며 말을 잇는다.“그럼 강민재 그 새끼, 어제 처남한테 질투하고 시비 건 거야?”다시 웃음이 터졌다.“와- 새끼, 완전 물먹었네. 꼴 좋-다.”방금 전까지의 묵직한 긴장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연하남이 아니라 처남이라니.세상에 이렇게 반가운 소식이 또 있을까.“그럼 굳이 밝히지 마.”수혁이 여전히 웃음을 참지 못한 채 말했다.“그 새끼한테는 계속 오해하게 둬. 너 양다리 걸치는 나쁜 여자라고 욕하면서도 못 놓는 꼴— 상상만 해도 재밌다.”“너무 좋아하시는 거 아니에요?”“당연하지.”수혁은 장난기 어린 눈으로 서린을 봤다.“처남이었으면 어제 밥이라도 사 먹여서 보냈을 텐데. 나중에 같이 보자. 제대로 인사해야지.”서린도 따라 웃었다.어제의 피비린내 나는 밤과 카페의 싸움, 경찰서까지 이어진 소란이,이 아침 웃음 속에서 조금은 멀어지는 것 같았다.두 사람이 나란히 차를 타고 출근길에 올랐다.수혁의 차가 한도오토링크 정문 앞에 멈췄다.“먼저 내려. 난 주차장으로 갈게.”“네.”서린은 차에서 내려 옷매무새를 다듬었다.엘리베이터 앞에서 김다은 대리가 서린을 보고 반갑게 인사하려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어? 부장님!”“어, 김 대리. 좋은 아침.”“부장님…… 어제 그 옷 아니에요?”김 대리의 시선이 서린의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위아래로 훑었다.“… 집에 안 들어가셨어요?”주변에 있던 직원들의 귀가 쫑긋 세워지는 게 느껴졌다.서린은 침착하

  • 그날, 나는 죽지 않았다.   109화.

    커튼 틈으로 새어 들어온 아침 햇살이 침대 위를 길게 비췄다.수혁은 천천히 눈을 떴다.낯선 천장이었지만, 옆에서 느껴지는 온기 때문에 낯설지 않았다.그는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서린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헝클어진 머리카락,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어깨, 그리고 붉게 부어오른 입술.어젯밤의 격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흔적들이었다.수혁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서린의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부드러운 살결이 손끝에 닿았다.쪽.그는 서린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으음…….”서린이 작게 뒤척였지만, 깊은 잠에 취해 깨어나지는 못했다.수혁은 시계를 확인했다.오전 7시.출근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다.‘좀 더 자게 둬야겠네.’그는 소리 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바닥에 흩어진 옷가지들을 줍다가, 문득 어제 일이 떠올라 피식 웃었다.서로를 탐하느라 정신없었던 밤.그 기억이 온몸을 짜릿하게 만들었다.수혁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민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이제 시작할 때가 된 것 같다. 준비해. 나중에 보자.]짧은 문장이었지만, 담긴 의미는 무거웠다.한도전자 인수.강민재가 서린을 노리기 시작했고, 한도오토링크를 흔들며 자신을 공격해 오고 있다.방어만으로는 부족하다.‘지켜야 하니까.’수혁은 방문 너머 잠든 서린을 떠올리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그리고는 부엌으로 향했다.냉장고를 열어보니 다행히 지난번에 사둔 포장된 국이 냉동실에 있었다.황태국이었다.어제 술도 마셨고, 무엇보다 체력을 많이 썼으니 해장이 필요할 터였다.그는 능숙하게 쌀을 씻어 밥을 안치고, 냄비에 국을 데웠다.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소리와 구수한 냄새가 집 안을 채웠다.반찬까지 정갈하게 챙겨 식탁에 올린 뒤, 그는 다시 침실로 들어갔다.서린은 여전히 이불속에 파묻혀 있었다.수혁은 침대에 걸터앉아 서린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일어나, 공 부장. 지각한다.”“으으…….”“아침 먹고 가

  • 그날, 나는 죽지 않았다.   108화.

    그의 눈빛은 상처받은 짐승처럼 날카롭고 슬펐다.화가 난 건 강민재 때문만이 아니었다.자신이 그렇게까지 곁에 있겠다고 했는데도, 서린은 또 다른 남자를 앞에 세웠다.위험하면 같이 버티자고 했고, 무슨 일이 생겨도 혼자 감당하지 말라고 했다.그런데 돌아온 건 또다시 밀어내는 일이었다.수혁에게는 그게 거절보다 더 지독하게 느껴졌다.자신은 아직도 그녀가 믿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같아서.“그런데 너는, 항상 마지막 순간에 도망가. 그것도 딴 놈을 방패막이 세워서.”그는 카페에서의 상황을 오해하고 있었다.서린이 도윤을 이용해 자신을 밀어내려 했다고, 혹은 정말로 양다리라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지금 병원으로 가시겠어요?”“싫어”“상처가 덧나기전에 치료를 해야 해요.”“내 걱정하는거야?”“... ... ”“집으로 가. 별거 아니야.”서린은 핸들을 꽉 쥐었다.그의 터진 입술이,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전부 자신의 죄처럼 느껴졌다.그를 지키고 싶어서 밀어냈는데, 결과적으로 그를 진흙탕에 끌어들이고 말았다.서린은 수혁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도어록을 열고, 비틀거리는 그를 부축해 거실 소파에 앉혔다.조명이 켜지자, 수혁의 얼굴이 더 선명해졌다.입술이 터져 있었고, 광대뼈 아래가 푸르게 올라오고 있었다.“약 상자 어디있어요?”“집에 가.”서린은 대답 대신 거실 서랍을 하나씩 열어봤다.없었다.“주방에 있어요?”서린이 주방으로 가려 하자 수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기다려.”수혁이 약상자를 꺼내오자 서린이는 그것을 낚아채듯 받아 들었다.뚜껑을 열고 약솜에 소독약을 적셔 그의 입가에 조심스럽게 가져갔다.수혁이 고개를 살짝 틀었다.“건들지 마.”“상처 덧나요.”“놔 둬.”서린의 손이 잠시 멈췄다.“왜 그런 표정이야.”수혁이 낮게 물었다.“미안해서?”“…대표님.”“그 자식이 뭐라 하든, 네가 뭐라 하든 상관없어.”그가 피 묻은 입술을 손등으로 거칠게 훔쳤다.“근데.”눈이 정면으로 꽂혔다.“내가 밀어내지

  • 그날, 나는 죽지 않았다.   107화.

    카페 안의 공기가 서늘하게 얼어붙었다.수혁의 시선은 서린의 어깨에 올려졌던 도윤의 손을 스쳐, 비릿하게 웃고 있는 강민재에게 고정되었다.“이게 무슨 상황입니까.”낮게 깔린 목소리.그 한마디에 도윤이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강민재는 턱을 괴고 앉은 채 느긋하게 수혁을 올려다보았다.“보시는 대롭니다, 차 대표님.”그의 입꼬리가 길게 올라갔다.“공 부장님 관리가 좀 느슨하신 거 아닙니까?”“……뭐?”“아니, 며칠 전엔 대표님이 남자친구라더니, 오늘은 또 다른 연하남이랑 애틋하시길래요. 그림이 아주 다채롭네요.”혀를 찬다.“알고 계셨습니까? 공 부장님 취향이 이렇게 화려한 거.”노골적인 조롱이었다.‘공서린은 네 여자가 아니다’라는, 수혁의 자존심을 노리고 던지는 칼날.서린이 입을 열려는 순간, 수혁이 먼저 움직였다.“재밌네.”차갑게 웃으며 한 걸음 다가섰다.“남의 사생활 걱정해 줄 시간에, 본인 앞가림이나 하시지.”강민재의 눈이 가늘어졌다.“무슨 뜻입니까?”“심재호 변호사. 누가 대줬는지 내가 모를 줄 알았나.”강민재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그러나 이내 웃음으로 덮었다.“대표님, 무슨 소릴 하시는지 모르겠는데요.”“모르는 척은 집에 가서 하시고.”수혁이 테이블에 손을 짚었다.낮은 음성이지만, 살기가 스며 있었다.“감옥에 있는 놈 부추겨서 회사에 흙탕물 튀기면, 내가 무너질 줄 알았어?”서린의 심장이 세게 뛰었다.‘지금… 여기서 그 얘기를 꺼낸다고?’강민재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차 대표.”이번에는 웃지 않았다.“근거도 없이 국회의원을 범죄자로 몰아가면, 그건 명예훼손입니다.”“국회의원?”수혁이 코웃음을 쳤다.“양아치가 뱃지 달았다고 신사가 되나.”“이 자식이!”의자가 뒤로 밀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두 사람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니가 무슨 생각을 하는 줄 내가 모를 것 같아?”수혁의 눈이 번득였다.“나를 건드리면, 공 부장이 너한테 갈 것 같아? 웃기고 있네.”도윤은 놀

  • 그날, 나는 죽지 않았다.   106화.

    서린의 입이 막혔다.‘뭐라고 둘러대지? 회사 후배? 동네 동생?’불안한 눈으로 도윤을 돌아보는데.그가 먼저 움직였다.서린이 옆자리로 와서 그녀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팔을 둘렀다.“제 여자친구예요.”공기가 잠깐 멎었다.“……!”서린의 눈이 커졌다.강민재의 손이 의자 등받이에 걸린 채 멈췄다.“... 여자친구?”강민재가 되물었다.도윤은 태연하게 웃으며 서린을 자신의 쪽으로 당겼다.“네. 만난 지 좀 됐어요. 아직 집에는 말씀 안 드렸거든요. 형도 아시잖아요. 우리 집 분위기.”장난스럽게 덧붙였다.“비밀 좀 지켜 주세요.”도윤의 연기는 완벽했다.서린은 차마 도윤을 밀어내지도, 그렇다고 자연스럽게 기대지도 못했다.어깨에 둘러진 팔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지만 지금은 그 어색함조차 들켜서는 안 됐다.결국 입술을 꾹 다문 채 도윤의 거짓말에 장단을 맞췄다.‘비밀 연애’라는 설정은 그들이 왜 외진 카페 구석에 있었는지, 왜 서린이 당황했는지 모든 것을 설명해 주었다.잠시 정적이 흘렀다.강민재가 서린을 빤히 쳐다보았다.그리고 이내,“푸하하하하!”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카페 안의 사람들이 쳐다볼 정도였다.“와, 이거 진짜…… 대박이네.”강민재는 눈물까지 닦으며 웃었다.그리고는 서린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의외입니다, 공 부장님.”“……뭐가 말입니까.”“아니, 며칠 전에는 차수혁 대표가 남자친구라고 나서지 않았습니까? 내 여자 앞에서 꺼지라면서.”강민재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그런데 오늘은 또 이런 그림이라.... 설마, 양다리였습니까?”서린은 주먹을 꽉 쥐었다.모욕적이었다.하지만 부정할 수도 없었다.“사생활입니다.”서린이 싸늘하게 대꾸했다.“그러시겠죠.”강민재는 혀를 찼다.“그런데 좀 서운하네요. 나한테는 일말의 기회조차 안 주더니. 차 대표에, 도윤이에…… 공 부장님 취향이 참 다양하십니다?”그는 서린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예전의 애틋함은 사라지고, 경멸과 흥미가 뒤섞인 눈빛이었다.“이건 뭐,

  • 그날, 나는 죽지 않았다.   105화.

    같은 시각, 서울 구치소 접견실.차가운 철문이 열리며 죄수복 차림의 심재호가 들어왔다.헐렁한 소매가 손목을 덮고 있었고, 걸음은 느긋했다.이미 바깥 소식을 다 알고 있는 사람의 여유였다.맞은편에는 수혁과 민우가 앉아 있었다.심재호는 의자에 앉자마자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렸다.“여기가 어디라고 오셨나, 대표님.”시선이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담고 있었다.“꼴 보아하니 회사 꼴이 말이 아니던데. 침수차라니, 아주 화끈하더라.”그는 일부러 천천히 다리를 꼬았다.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톡톡 두드리며, 상황을 즐기는 듯했다.수혁은 말없이 서류 한 장을 꺼냈다.유리벽에 붙이는 동작조차 군더더기가 없었다.“네 짓인 거 다 알아.”건조한 한 문장.심재호의 눈이 서류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뭘 안다는 거지?”수혁의 시선이 서류 하단을 가리켰다.“구형 정비 이력서. 업데이트 이전 양식.”“그리고 결재란 오른쪽 하단 도장 자국.”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정확했다.“도장 찍고 오른손으로 한 번 더 눌러서 각이 살짝 틀어지는 버릇. 네 습관이잖아.”순간, 심재호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꿈틀했다.그러나 곧 비웃음으로 덮었다.“그래서? 그게 증거야?”그는 의자에 몸을 깊이 기대며 말했다.“심증만으로 여기까지 온 거면 헛걸음이네. 나 곧 나가. 변호사 잘 썼거든.”“그 변호사, 누가 사줬을까.”민우가 끼어들었다.“네 계좌로 들어온 자금. 가족 명의로 생긴 오피스텔. 자금 흐름 다 추적 중이야.”“꼬리 자르기 당할래, 아니면 우리랑 손잡고 형량 줄일래?”공기가 잠시 가라앉았다.그러나 심재호는 하품을 했다.“마음대로 해.”심재호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걸렸다.“여기서 몇 년 더 사나 덜 사나, 나한테는 같아. 나가면 떵떵거리고 살 돈이 있는데 내가 왜 니들 말을 들어?”수혁의 턱선이 단단하게 굳었다.제대로 물었나보네 이 새끼.후우-호흡을 길게 내 뱉은 수혁이 천천히 일어나려는 순간—“쳐 봐.”심재호가 고개를 들었다.“쪼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