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해수가 웃으며 말했다.“마마께서 뭐가 그리 무서우시겠사옵니까.”“저분들이 먼저 마마께 실례를 범했으니 마음이 불안해서 겁을 먹은 것이옵니다.”말을 마친 해수가 앞쪽을 바라보다가 눈을 반짝였다.“마마, 저기 보시옵소서. 앞에 납매 한 그루가 있사옵니다. 가서 한번 보시겠사옵니까?”금영은 방금 전의 일을 그다지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다.그대로 천천히 납매나무 아래로 걸어갔다.노란 옥을 빚어 놓은 듯한 꽃들이 때맞춰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가지와 꽃잎 위에는 아직 희끗희끗 눈이 쌓여 있어 더욱 운치가 있었다.금영은 한동안 납매꽃을 바라보았다.볼수록 마음에 들었다.그녀는 뒤따르던 내관에게 분부했다.“가서 가위 하나 가져오너라.”오늘 금영을 따라나선 내관은 모두 넷이었다.한 명을 보내도 곁에는 아직 셋이나 남아 있었다.금영은 납매나무 아래에 서서 조용히 기다렸다.마침 이날 태자도 태후와 서 황후께 문안을 올리기 위해 궁에 들어와 있었다.태후의 처소로 가려면 어화원을 가로질러야 했다.길을 걷던 태자는 어느 순간 걸음을 멈췄다.멀지 않은 납매나무 아래 두 사람이 서 있었다.그중 한 사람은……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알아볼 수 있었다.금영이었다.태자의 발걸음이 잠시 굳었다.본래 다른 길로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그는 뜻밖에도 방향을 틀어 금영 쪽으로 걸어갔다.뒤따르던 신귀안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전하, 여기는 어화원이옵니다! 원비마마 곁에는 시종들도 있사옵니다. 혹시 폐하께서 아시기라도 하시면……”태자는 담담히 말했다.“원비마마도 이제는 내게 웃어른이시다. 마주쳤으니 문안을 올리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않겠느냐.”신귀안은 태자의 뒤를 따르면서도 가슴이 조마조마했다.하필이면 왜 저분께 문안을 올리겠다는 것인가!예전의 신귀안은 태자에게 금영까지 태자부로 들이라 여러 차례 부추긴 적이 있었다.하지만 그때의 금영은 아무런 뒷배도 없는 서녀에 불과했다.세월이 흐르고 형세가 달라진 지금, 금영은 이제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금영이 입을 열었다.“여비는 아이를 잃은 일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하다.”오늘 여비가 보인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었다.해수가 의아한 듯 되물었다.“그 일이 사고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어찌하여 진상을 알아보지 않으신 것이옵니까?”금영이 말했다.“그녀가 알아보지 않았다고 네가 어찌 아느냐?”“본궁은 공 상궁이 남몰래 돕고 있는데도 알아낸 것이 그리 많지 않다. 하물며 여비야 오죽하겠느냐.”후궁의 비빈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세력이 있었고, 뒤를 받쳐 줄 가문도 있었다.하지만 궁에서 안하무인으로 구는 여비를 보면 정작 곁에 쓸 만한 사람은 몇 되지 않는 듯했다.서 황후나 현비가 굳이 손을 쓰지 않더라도 황제와 조정의 대신들이 여비가 대량 조정 안에서 자기 세력을 키우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터였다.결국 여비는 겉으로만 화려할 뿐 실속은 없는 처지였다.그런 그녀가 혼자 힘으로 구 년 전의 진상을 밝혀내려 했으니 어찌 쉬웠겠는가.물론 금영이 여비에게 접근한 것도 동정해서는 아니었다.이 궁에서 가장 쓸모없는 것이 넘쳐 나는 동정심이었다.금영에게는 여비를 칼로 삼아 서 황후를 찌를 생각도 있었다.“이제 여비가 본궁이 호의로 내민 연고를 받아들였으니, 오늘 본궁이 한 말도 진지하게 생각해 볼 것이다. 언젠가 본궁을 믿게 되는 날이 오면 그때는 손을 잡을 수도 있겠지.”금영이 옅게 웃었다.구 년 전의 일이 순조롭게 파헤쳐진다면 꽤나 볼 만한 판이 벌어질 터였다.게다가 구 년 전에는 금영이 아직 입궁하기도 전이었다.아무리 일이 커져도 그 불똥이 금영에게 튈 까닭은 없었다.이제는 그저 여비가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협방전을 나온 금영은 곧장 돌아가지 않고 어화원으로 향했다.그동안 좀처럼 밖을 나서지 못해 답답함이 쌓일 대로 쌓여 있었다.사실 아이를 낳고 산후 몸조리를 시작한 뒤에만 외출을 삼간 것이 아니었다.배가 점점 불러오기 시작한 뒤부터 금영은 이미 바깥출입을 크게 줄인 상
금영은 담담하게 말했다.“해수야, 물건은 다시 거두어라.”애초에 연고를 가져온 것은 구실에 불과했다.금영이 이곳까지 찾아온 진짜 목적은 구 년 전의 일을 떠보기 위해서였다.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그 이야기로 화제를 돌릴 수 있을지 생각하던 찰나, 여비가 먼저 입을 열었다.“어제는 왜 본궁을 도와준 것인가?”금영이 여비를 바라보았다.여비가 말을 이었다.“그대가 어제 서둘러 안 첩여를 지목하지 않았더라면, 본궁은 자칫 황자를 해치려 했다는 죄까지 뒤집어쓸 뻔했네.”아무리 여비의 신분이 특별하다 해도 황자를 해치려 했다는 죄가 확실해진다면 황제 역시 그녀를 용납하지 않을 터였다.금영이 차분하게 답했다.“본궁은 여비마마께서 그런 분이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여비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그대가 어찌 본궁이 아니라는 걸 아는가? 본궁이 질투심에 눈이 멀어 생칠로 그대의 아이를 해치려 했을 수도 있지 않나.”금영은 속으로 생각했다.당연히 알고 있었다.생칠은 애초에 자신이 꾸민 일이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 사정까지 여비에게 털어놓을 생각은 없었다.금영은 여비를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본궁은 아이를 잃어 본 어미라면 다른 어미에게까지 자식을 잃는 고통을 안기지는 않을 거라 믿었습니다.”사실 금영 자신도 그 말을 온전히 믿는 것은 아니었다.이 세상에는 여비 같은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서 황후 같은 사람도 있었다.제 자식은 멀쩡히 살아 있는데도 남의 자식이라면 거리낌 없이 해칠 수 있는 사람이 아닌가.그 말을 들은 여비의 눈빛이 순간 아득해졌다.아마 오래전 잃었던 그 아이가 떠오른 모양이었다.금영이 그런 여비를 바라보며 물었다.“여비마마께서는 당시 누가 아이를 해쳤는지 알아내고 싶지 않으십니까?”여비가 금영을 바라보며 낮게 되물었다.“해쳤다고?”금영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천천히 물었다.“구 년 전, 대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마마께서는 아직 기억하고 계십니까?”여비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었다.“원비,
금영이 협방전을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아니……처음이 아니었다.귀신으로 떠돌던 때 한 번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그때 여비에게 순장을 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금영은 황제가 죽음을 앞두고 정신이 흐려진 것이 아닌가 생각했었다.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여비를 순장시키는 데 동의할 수 있단 말인가.이 궁에서 어느 비빈이 석연치 않게 죽는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지만, 여비만큼은 함부로 죽게 둘 수 없는 사람이었다.여비는 동이 출신이었다.동이는 비록 작은 나라였고 대량의 속국이었지만 상당히 부유한 데다 군세까지 강성했다.그러니 여비가 궁 안에서 아주 큰 사고만 치지 않는다면, 차라리 상징적인 존재처럼 궁에 두고 대우할지언정 순장시켜서는 안 될 일이었다.설령 언젠가 큰 죄를 저지른다 해도 동이로 돌려보내면 그만이지, 함부로 목숨을 거둘 수는 없었다.자칫 동이가 이를 빌미로 다른 마음을 품고 움직일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대량은 이제 겨우 편안한 날을 조금 보내기 시작했을 뿐이었다.북융조차 아직 완전히 평정하지 못했는데 동쪽에서까지 분쟁이 일어난다면 제 발로 골칫거리를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었다.그때 금영이 협방전에 찾아왔던 것도 사실 여비가 죽은 뒤 귀신이 되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서였다.하지만 아쉽게도……금영 자신을 제외하면 죽은 뒤 귀신이 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그 생각에 이르자 금영은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마치 자신이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잊고 있는 듯했다.“마마?”협방전에 들어온 뒤부터 금영이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있자 해수가 조심스럽게 불렀다.금영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마음속에 떠오른 묘한 느낌을 애써 떨쳐 냈다.다시 살아 돌아온 지도 벌써 일 년이었다.그 일 년 사이 금영은 입궁했고, 아이까지 낳았다.그러다 보니 귀신으로 떠돌던 시절의 감각도 어느새 마음속에서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었다.이제야 정말 자신이 살아 있다는 실감이 점점 또렷해지는 듯했다.금영이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자운이 문 앞에서 그녀를 막아
결국 그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버렸다.금영은 황제에게 단단히 붙들린 채 꼼짝도 하지 못하고 그의 거센 감정을 온몸으로 받아 냈다.워낙 오랫동안 부부의 정을 나누지 않았던 탓도 있었고……아니, 애초에 제대로 경험해 본 적부터 많지 않았다.그래서인지 황제의 품에 완전히 붙들리고 나자 금영은 조금 불편함을 느꼈다.금영은 이 뜨거운 불길이 꽤 오래 이어질 거라 생각했다.조금 힘들더라도 참아 낼 마음의 준비까지 하고 있었다.그런데 뜻밖에도……얼마 지나지 않아 불길이 금세 잦아들었다.금영은 순간 어리둥절했다.‘폐하께서…… 설마 정말로…… 문제가 있으신 건 아니겠지?’다행히 황제는 금영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오가는지 알지 못했다.알았더라면 오늘 밤이 이리 쉽게 끝나지는 않았을 터였다.황제는 그저 금영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는 것을 보았을 뿐이었다.아직 몸이 완전히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라 여긴 것이다.태의가 괜찮다고 하기는 했지만, 궁의 태의들은 아무래도 황제의 뜻을 먼저 살피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었다.궁비의 몸을 진심으로 얼마나 세심하게 헤아렸을지는 알 수 없었다.황제는 금영의 몸을 염려해 욕심을 거두고 일찍 멈춘 것뿐이었다.그런데도 엉뚱한 오해를 받고 있었으니 참으로 억울할 노릇이었다.그리고 그런 오해를 한 사람은 금영 하나만이 아니었다.문밖을 지키고 있던 손복안과 위명 역시 황제가 씻을 물을 들이라 명하자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위명이 작게 중얼거렸다.“폐하께서 들어가신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씻을 물을 들이라 하시는 겁니까……”손복안은 그 말을 듣자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그러고는 얼굴을 굳히며 목소리를 낮췄다.“위 총령, 목숨이 아깝지 않으십니까? 무슨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하십니까!”손복안은 순간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전에 황제가 후궁을 찾지 않는 것이 몸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라는 소문도 혹시 위명이 퍼뜨린 것이 아닐까 하고.입으로는 위명을 호되게 나무랐지만, 손복안의 머릿속에서도 어느새 엉뚱한 생각이
금영이 조금 전 덥다고 한 것은 거짓이 아니었다.방 안의 숯불이 너무 세게 타오르고 있었던 탓이다.황제가 들어올 때 바깥의 찬 기운도 함께 스며들어 처음에는 오히려 한결 시원해진 기분이었다.하지만 지금은……“더…… 더워졌사옵니다.”금영의 두 볼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온몸이 불 위에 올려져 달궈지는 듯 뜨거웠다.황제의 눈빛은 갈수록 깊어졌다.그 검은 눈동자 속에도 불길이 번진 듯했다.커다란 손이 금영의 몸을 제 쪽으로 더욱 바짝 끌어당겼다.그 순간 금영은 황제의 몸속에서 억누르기 힘들 만큼 뜨겁게 들끓는 기운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황제의 힘차고 빠른 심장 소리마저 귓가에 선명하게 들려오는 듯했다.황제가 낮게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금영아, 짐을 유혹하지 말거라.”그토록 애써 참는 황제의 모습을 보자 금영은 문득 웃음이 날 것 같았다.생각해 보면 자신과 황제가 제대로 밤을 함께 보낸 것은 아무리 헤아려도 고작 두 번뿐이었다.그 밖의 친밀함은 그저 당장의 갈증만 잠시 달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나중에는 황제조차 그것마저 함부로 하지 못했다.한번 달래고 나면 오히려 갈증만 더욱 심해졌으니 말이다.결국 금영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맑고 청아한 웃음소리에는 평소와 달리 묘하게 부드럽고 애교 어린 기운이 묻어났다.금영은 두 팔로 황제의 목을 감싸고 발끝을 살짝 세웠다.그리고 황제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폐하.”황제의 몸이 순간 굳었다.그가 이를 악문 채 낮게 말했다.“배금영! 지금 무엇을 하는 것이냐?”금영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신첩은 그저 어명을 거역하면 어떤 벌을 받게 되는지 궁금해서 그러옵니다.”“폐하께서는 신첩더러 유혹하지 말라 하셨지만…… 신첩은 그 명을 따르고 싶지 않사옵니다.”품 안의 금영은 물러서기는커녕 더욱 대담하게 굴었다.마치 발톱을 세운 어린 짐승처럼 몇 번이고 황제가 간신히 지켜 내고 있던 마지막 선을 건드렸다.황제가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경고했다.“배금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