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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Author: 서린화
금영은 대답하는 대신 서둘러 침상에서 내려와 대충 옷을 걸친 뒤 자신의 물건들을 줍고는, 곧바로 전각 문을 밀치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자리를 떠나 버렸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한 번도 황제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곳에 남아 황제에게 자신의 신분을 들켜 처분을 기다리느니, 한 발 물러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두 발자국을 내딛기 위해서는 한 발자국 정도는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었다.

한편, 문 앞에 기둥처럼 서 있던 위명 또한 갑작스러운 상황에 금영의 얼굴은커녕, 눈보라 속으로 사라지는 뒷모습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그렇게 상황은 흐지부지 종지부를 찍지 못한 채 일단 보류되었고, 황제는 다시 작산행궁으로 향했다.

산기슭을 지나던 도중, 마부가 마차 두 대를 끌고 가는 모습이 보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중 하나가 태자의 마차인 것 같았다.

위명이 그들에게 다가가 몇 마디를 묻고는 돌아와 황제에게 일렀다.

“태자 전하께서 영안후부 아가씨와 함께 금풍대로 가시고 있답니다. 모셔올까요?”

그러자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것 없다. 안 그래도 이제 막 상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라, 서로 할 말이 많을 테다. 괜히 방해할 필요는 없지.”

그의 목소리는 꽤나 부드러웠다.

한편, 금영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작산행궁으로 돌아왔다. 회귀 전의 기억과 현생의 기억이 한꺼번에 가슴을 짓누른 탓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는데, 조금 전 폐궁의 편전에서 있었던 일까지 겹치며 기력은 이미 바닥난 상태였다. 지금 그녀가 바라는 것은 오직 자신의 처소로 돌아가 잠시 몸을 눕히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방매전의 외원을 지나 막 문턱을 넘는 순간, 갑자기 한 소녀의 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그와 동시에 눈덩이 하나가 금영의 얼굴을 향해 날라왔다. 차가운 감각에 잠시 정신을 잃은 금영이 이내 고개를 들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키가 훤칠한 한 젊은 남자의 등이었고, 그 맞은편에는 요염한 분위기의 소녀가 있었다.

금영은 단번에 그녀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바로 영안후부의 진짜 적녀, 배명월이었다.

회귀 전이었다면 이 시점에서 배명월을 마주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처음 배명월을 본 것은 다리를 다친 뒤, 사람들에게 들려 작산행궁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그제야 자신이 적녀가 아니라 시비 소생의 서녀(庶女: 정실이 아닌 첩에게서 태어난 딸)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배명월은 영안후부 부부가 잃어버렸던 친딸인데, 금영이 조부를 대신해서 상을 치르던 사이, 그들이 마침내 진짜 적녀를 찾아낸 것이었다.

비록 이는 비극적인 바꿔치기 같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과거 영안후부 부인이 아이를 낳은 직후 도적 무리의 습격으로 딸을 잃었고, 슬픔을 견디다 못해 서녀였던 금영을 대신 품게 되었다는 사연이었다.

그동안 부인은 실제로 금영을 친딸처럼 아껴왔으나, 배명월이 돌아온 순간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금영은 이 일로 영안후부 부부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함께 배명월을 아끼고 보듬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와 반면, 그들의 생각은 달랐다. 함께 보냈던 세월이 무색할 만큼, 그들은 금영을 거치적거리는 장애물처럼만 대할 뿐이었다.

그들에겐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다. 마치 죽음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듯, 금영을 몰아세웠다.

금영을 마주한 배명월은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이런 곳에서 마주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곧이어 금영은 등을 돌리고 있던 사내를 향해 몸을 낮추며 예의를 올렸다.

“소녀 금영,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러자 사내가 돌아섰다. 용모가 빼어나고 풍채가 단정한 인물, 젊은 나이에 비해 이례적으로 침착한 기운을 지닌 황제의 적장자, 태자 소한이었다.

배명월은 천천히 다가와 태자의 뒤에 몸을 숨긴 채 호기심 어린 눈으로 금영을 살폈다.

금영이 태자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일 년 전이었다. 태자가 남순 길에 일부러 회양으로 들러 궁중 과자를 건네주었던 때였다.

태자가 입을 열었다.

“예는 그쯤이면 됐다.”

단 한마디에 담긴 거리감이 금영의 가슴을 조여왔다.

“명월아, 이쪽이 네 언니다.”

배명월도 앞으로 나와 공손히 인사했다.

“명월이 언니께 인사드려요.”

금영은 태자를 바라보다가 힘겹게 물었다.

“태자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오늘 설림에 나오지 않으셨습니까.”

이미 마음은 식었지만, 끝내 풀지 못했던 의문의 답만큼은 이번에야말로 듣고 싶었다. 태자가 설명하려 입을 여는 순간, 배명월이 먼저 나섰다.

“언니, 태자 전하를 탓하지 마시지요. 제가 약속이 있는 줄 모르고 금풍대에 함께 가자고 조른 겁니다.”

금풍대는 이 작산 행궁 인근에 자리했기에, 경치를 감상하며 차를 달이기 좋았다.

게다가 금풍 옥로 한 번의 해후가 인간 세상 무수한 인연보다 낫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기에, 남녀가 마음을 정하고 정을 맺는 장소로 자주 찾는 곳이기도 했다.

금영은 배명월이 금풍대에 가려는 속뜻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배명월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진지하게 소한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니까, 태자께서는 분명 설림에서 저를 만나자고 하셨으면서도 결국 약속을 어기신 것이군요.”

배명월이 다시 말을 보태려 했다.

“금영 언니,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그건 제가…”

금영은 표정을 가다듬고 다시 소한을 향해 물었다.

“저는 태자의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소한은 몹시 지쳐 보이는 모습이었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차가운 금영의 눈빛을 바라보자 마음 한 쪽이 불안해졌다.

그러고는 드물게 사과의 뜻을 내비쳤다.

“오늘은 내가 잘못했다. 우선 돌아가 쉬도록 하자. 내일은 내가 너를 데리고 사냥을 하겠다.”

태자가 그녀를 만나기로 한 일은 사실이었고 다만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뿐이었다.

금영은 소한을 깊이 바라보았는데, 그 눈빛에는 또래의 처녀에게서 좀처럼 보기 힘든 냉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이내 그녀는 차갑게 말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춘 뒤 다시 덧붙였다.

“앞으로는 태자께서 더 이상 저를 따로 부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녀 역시 다시는 태자와 단둘이 만나지 않고 싶었다.

말을 마친 금영은 이내 무거운 몸을 끌듯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침소로 돌아가려는 참이었다.

금영이 소한의 곁을 스쳐 지나가려는 순간, 그가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배금영...!”

금영은 담담하고도 냉정한 시선을 자신의 붙잡힌 손목에 잠시 두었다가 이내 고개를 들어 소한을 바라보며 낮고 정중하게 말했다.

“태자 전하, 자중해 주십시오.”

그녀는 손에 힘을 주어 뿌리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눈보라가 얼굴을 스치며 눈가에 맺혀 있던 물기가 흘러내렸다. 그것이 녹은 눈 때문인지, 눈물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흰 눈 속에서 붉은 옷자락이 멀어져 갔다. 고고하고도 처연한 금영의 뒷모습에 태자는 잠시 넋을 잃었다. 마치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눈발과 함께 잃어버린 듯한 감정이었다.

배명월은 그 모습을 보고 불안한 듯 이내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태자 전하, 언니가 저 때문에 화난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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