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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hor: 서린화
태자는 정신을 차리고는, 눈앞에서 조심스레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배명월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닐 것이다.”

“그럼… 언니는 제가 싫은 걸까요?”

배명월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안 그래도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외모에, 이렇게 눈물까지 머금으니 더욱 애처로워 보였다.

태자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닐 것이다. 예의 범절에 조금 엄격한 편이라 딱딱해 보이는 것뿐이다. 이리도 사랑스러운 너를 싫어할 사람이 대체 누가 있겠느냐?”

그 말을 듣자 배명월은 눈물을 닦으며 수줍게 미소 지었다.

“정말요? 다들 절 좋아해 줄까요?”

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배명월이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태자 전하께서도… 저를 좋아하시는 건가… 요?”

태자는 그 질문에 바로 답하지 않았지만, 그 대신 손을 뻗어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 위에 내려앉은 잔설을 살며시 털어 주었다.

배명월은 입술을 살짝 깨문 채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이미 수많은 생각이 팽팽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한편, 침소 앞에 다다른 금영의 눈에 초조하게 서성이는 여 시종인 해수의 모습이 들어왔다. 동시에 해수 또한 그녀를 발견했는지 서둘러 다가왔다.

“아가씨,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그 말과 함께 해수는 무심결에 침소 쪽을 힐끗 바라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주인 어르신과 부인께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두 분 다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

그 말을 들은 금영은 잠시 걸음을 멈추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빨리 그들을 다시 마주하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가씨, 무슨 일 있으신가요?”

해수가 의아해하며 묻자, 금영은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는 옅게 웃었다.

“아니.”

그렇게 말하며 금영은 자신의 침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날은 이미 저물어 있었고 방 안에는 촛불이 밝혀져 있었다.

침소의 상석에는 영안후와 부인 송정희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나이 차가 크지 않은 사십 대 부부였으나 인상은 사뭇 달랐다. 영안후와 달리 송정희에게서는 오랜 세월 몸가짐을 가꿔 온 흔적이 엿보였다.

두 사람은 말없이 자리에 앉아 방으로 들어오는 금영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영안후의 얼굴이 유독 굳어 있었다.

금영의 머릿속에 잠시 여러 생각이 스쳤지만, 곧 표정을 가다듬고 걸음을 멈춰 예를 올렸다.

“아버지, 어머니, 인사 올립니다.”

“집에 돌아올 생각을 했긴 했나 보구나?”

금영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영안후가 차갑게 꾸짖었다. 그러자 송정희가 옆에서 나지막이 달래듯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아이가 언제 함부로 규범을 어긴 적이 있습니까? 오늘 일은 분명 뭔가 착오가 있었을 것입니다. 너무 노하지 마세요.”

“규범을 어긴 적이 없어? 그렇다면 이 늦은 시간까지 밖에서 외간 남자를 만나고 오는 일은 없었어야지!”

영안후가 전보다 더 노한 표정으로 다그쳤다.

평소의 금영이었다면 그저 얌전히 고개를 숙인 채 아버지의 훈계를 들었을 터였다. 하지만 이미 미래를 아는 금영에게는 모든 것이 우습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녀는 용서를 빌기는커녕 오히려 고개를 들어 영안후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버지께서도 저에게 태자와 자주 왕래하라며 조언하지 않으셨습니까? 앞으로 함께할 인연이니 미리 정을 쌓아 두는 것도 중요하다면서요. 그래서 규범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태자 전하께서 부르셨기에, 아버지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예상과 달리 이런 대답이 들려오자, 그는 분노에 들고 있던 찻잔을 탁자에 거세게 쾅 하고 내려놓았다.

금영은 그가 진심으로 분노했음을 알아차렸다.

과거 그녀는 부모가 노하는 것을 극히 두려워했었다. 그것은 그들이 무서워서라기보다는, 그들에게 걱정을 끼쳤다는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항상 최고가 되기 위해 끝없이 노력했었다. 글 공부면 글 공부, 거문고면 거문고, 말과 행동 하나하나를 단정히 하여 기품을 잃지 않도록 유지했다.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면, 그것이 곧 효도이며, 부모를 기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죽음을 한 번 겪고 나니 많은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그런 허울뿐인 것에 연연하고 싶지 않았다.

“삼 년을 곁에 두지 못했더니 아주 버릇없어졌구나! 감히 이 아비에게 대들다니, 정녕 내가 직접 네 버릇을 고쳐 주기 위해 나서야겠느냐!”

영안후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그러나 금영은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허리를 곧게 세운 채 그를 마주 보며 당당하게 말했다.

“제 말이 잘못되었습니까?”

영안후는 처음으로 금영의 눈에서 굽혀지지 않은 고집을 보게 되었다. 순간 그는 멍해졌다. 이토록 불순한 눈빛이라니, 누구보다 예를 중시하던 아이의 변한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다 문득 그녀가 자신의 출생에 대해 무언가 알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영안후의 분노는 더욱 치솟았다.

금영이 누구의 소생이었든 그는 분명 최선을 다해 그녀를 키웠다. 배명월의 일로 불만을 품고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이라면 더 엄히 다스려야 마땅했다.

“무릎 꿇어라.”

그 말을 듣는 순간 금영은 잠시 놀란 기색을 보였다.

“어서 꿇지 못하겠느냐!”

영안후는 눈을 부릅뜨고 호통쳤다.

“금영아, 어서 무릎을 꿇고 네 아버지께 잘못을 빌어라. 이제 막 돌아왔지 않느냐. 벌써 아버지를 노하게 하지 말거라.”

송정희는 다급한 기색으로 금영을 바라보았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딸을 걱정하는 어미의 모습이었다.

금영은 담담하게 말했다.

“제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용서를 빌어야 합니까?”

“금영아, 아버지도 다 너를 위해 이러는 것 아니겠느냐. 아직 태자 전하와 정식으로 혼례를 올린 것도 아닌데, 괜한 소문이 나면 좋을 것이 무엇 있느냐? 더구나 설림은 행궁 밖이라 사람의 손길이 잘 닿지 않아 험한 곳인데 얼마든지 위험에 빠질 수 있지 않느냐?”

송정희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얼굴에는 자애로움이 가득했다.

“그만 말리시오. 내 오늘 반드시 이 아이에게 규범을 가르쳐야겠으니! 규수의 본분이 무엇인지 오늘 똑똑히 알려야겠소. 여봐라, 거기 누구 없느냐! 가법대로 시행하라!”

영안후가 분노에 차 외쳤다.

그러자 곧바로 연륜이 느껴지는 여 시종 둘이 밖에서 들어왔는데, 한 사람은 긴 판자를, 또 다른 한 사람은 가는 회초리를 들고 있었다. 그것들은 바로 영안후부 가법(家法: 가문 규율)에 사용되는 처벌 도구들이었다.

두 여 시종은 물건을 내려놓고 영안후의 안색을 살핀 뒤 금영에게 다가왔다.

금영은 영안후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그러니까 아버지께서는 제가 태자 전하와 만남을 가진 것이 가법을 들어 올릴 정도로 잘못된 행동이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태자 전하를 들먹인다고 해서 내가 너에게 벌을 주지 못할 것이라 착각하지는 말거라. 네가 출가하지 않은 이상 너는 여전히 이 영안후부의 규수다. 이런 행실은 영안후부 이름에 먹칠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영안후는 냉정하게 말했다.

“뭘 망설이는 것이냐! 당장 집행해라!”

그러자 여 시종 둘이 금영의 어깨를 붙잡았고 그중 한 명이 낮게 말했다.

“아가씨,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금영은 입가를 비틀어 올리며 다시 말을 꺼내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문밖에서 발랄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어머니.”

그와 동시에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배명월이 방 안에 놓인 판자와 여 시종 둘에게 붙잡혀 있는 금영을 바라보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안 그래도 이제 막 집에 돌아왔을 텐데, 이게 무슨 일이에요? 왜 언니를 벌하고 계세요?”

그러자 송정희가 나지막이 금영에게 말했다.

“금영아, 너도 들었을 것이다. 우리 집안에 있었던 일을… 이 아이가 바로 네 동생, 명월이다.”

그러자 금명이 가볍게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안 그래도 좀 전에 봤습니다.”

“언니가 무슨 잘못을 했든, 무슨 이유로 아버지께서 노하셨든, 부디 소녀를 봐서라도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배명월의 말을 듣자 영안후는 아까 들려 했던 찻잔을 집어들며,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십여 년 동안 공들여 키웠더니 네 동생 반도 못 하는구나. 하지만 오늘은 그 누가 와서 간청해도 소용없다. 더럽혀진 가문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엄히 다스릴 것이다.”

그러자 배명월은 이번엔 금영을 바라보며 타이르듯 말했다.

“언니, 어서 아버지께 잘못했다고 용서를 비세요.”

하지만 금영은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말을 마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아버지께서는 저에게 이 아이의 반도 못 따라간다고 하셨지요? 그런데 이 아이는 알고 있을까요? 아버지께서 저를 벌하시려는 이유를 말이에요.”

“그러게요. 도대체 무슨 연유로 아버지께서 이러시는 거예요?”

배명월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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