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범은 일반병실로 옮겨졌다. 그의 얼굴은 전보다 훨씬 창백해 보였다.나태현이 따뜻한 물을 그에게 건네며 아무 말 없이 그를 지켜봤다.나태범은 물을 몇 모금 마시고 나서 힘없이 나태현에게 물었다.“나태웅 쪽 상황은 어때?”나태웅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나태범의 목소리에서 깊은 체념이 묻어났다. 나태현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대답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제 사람들이 잘 지켜보고 있습니다.”그 때문에 나태현도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로먼가문과 엮이면서 언제부터 그렇게 큰 세력을 가지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나태웅은 예전에 안지영 때문에 온갖 소란을 다 피웠었다. 그래서 그의 갑작스러운 변화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나태현은 전부터 사람의 감정은 쉽게 변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태웅이 그의 이런 생각을 완전히 깨뜨렸다.이때 나태범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어휴, 저 녀석...”“근데 안열이 어떻게 그 녀석 아이를 가지게 된 거죠?”나태현이 물었다. 그의 눈빛은 의심과 의혹으로 가득했다.나태웅이 안지영에 대한 태도를 생각하면 그가 그런 행동을 할 리 없었다. 그는 그동안 안지영에게만 관심을 보여왔다.배씨 가문에 있을 때도 그런 일은 없었다.하지만 안열에게 아이가 생긴 건 확실히 선을 넘은 일이었다.그 누구도 나태웅이 다른 여자와 아이를 가질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안열의 아이를 언급하며 나태범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누가 알겠냐, 저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자기 아들이지만 나태범도 나태웅을 이해할 수 없었다.나태현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이때 나태범이 말을 이었다.“됐어. 그 녀석 얘긴 그만하자. 네가 좀 더 신경 써줘야 해. 그리고 네 일도...”나태범은 나태웅을 완전히 포기한 상태였다.로먼가문 때문에 나태웅이 언제 돌아올지도 알 수 없었다. 자기가 살아서 그날을 맞이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나태현은 더는 대답하지 않고 미간을 찌푸리기만 했다.나태범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네 동생이 이런 망신을
나태범은 나태현이 의심을 품고 조사를 시작한 건 고은지와 나태현 사이에 무언가 있다고 한 희주의 말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역시 같은 나씨 가문 사람이었어. 자기가 비열하니 주변 사람들을 그렇게 의심하잖아.’“량천옥!”“네가 원하든 원치 않든 나태현은 이미 의심을 시작했어. 분명히 진실을 밝히려 할 거라고.”“아니, 그게 너한테 뭔 이득이 되는데?”“난 강성 사람들 사이에서 뻔뻔하다고 소문난 여자야. 이젠 그런 소문 하나둘쯤이야 신경 안 써.”‘이득이라? 그동안 량천옥이 이득을 본 적 있었나?’전에 배준우 집에 있을 때는 사모님의 신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밖에서 떠다니는 소문에 신경을 썼지만 이젠 배씨 가문과도 관계가 끊겼고 배행풍도 그녀를 버렸으니 더는 무서운 것이 없었다.그보다 고은지 때문에 걱정이 많았다. 그 사건 때문에 고은지가 자신을 싫어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은지는 그딴 거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지금의 량천옥에게는 신경 쓸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다.“너, 너 정말 미쳤구나.”나태범이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자 량천옥은 더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으니 주위는 조용해졌지만 그녀의 마음은 전혀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반대편에 앉아 있는 고은지를 보며 량천옥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한편, 병원에 있는 나태범은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삐 소리에 더욱 화가 치밀었다. 단집사가 곁에서 계속 달랬다.“어르신, 진정하십시오. 흥분하지 마세요.”“태현이와 신혜 일 빨리 처리해. 그놈이 모든 걸 밝혀내기 전에 결혼하는 게 최선이야.”나태범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그는 고은지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하는 나태현의 말을 믿지 않았다.그는 량천옥이 그렇게 뻔뻔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뻔뻔할 뿐만 아니라 체면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그 사건은 그녀에게 영웡한 상처로 남았고 나씨 가문에 큰 손실을 입혔다. 이제는 모든 걸 포
고은영과의 전화를 마친 고은지는 량천옥을 바라봤다. 스피커를 켜고 있었기에 량천옥도 고은영 쪽에서 한 말을 똑똑히 들었다.“지금 상황이 어떻게 된 거라고 생각해요?”고은지가 물었다.“지금으로선 나랑 나태현에게 원한 있는 사람이 희주를 데려간 건 아닌 것 같아.”둘 중 한 사람과 연관된 사람이었다면 절대 배준우에게 연락할 리 없었다. 사실 연락이라고 하기도 애매했다. 그저 정보를 배준우에게 전달한 것뿐이다.“준우 씨도 확인해 봤지만 영상을 누가 보냈는지는 못 찾았대요. 그저 단서만 받은 거죠.”고은영이 말한 대로라면 배준우는 이미 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단서를 발견했을 때 직접 조사에 들어갔으니까 말이다. 희주가 화장터에 가지 않은 것을 완전히 확인한 후에야 고은영에게 알린 것이었다.량천옥은 깊은 생각에 잠기더니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내 생각엔 말이야. 지금은 당분간은 프랑스로 가지 않는 게 좋겠어.”지금 정보만으로는 상황을 분석할 수 없으니 모든 걸 확실히 확인한 뒤에 움직이라는 말이었다.그 말에 고은지는 고개를 저었다.“아뇨, 가야 해요.”상대가 어떤 목적이든 희주가 지금 누군가 손에 있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었기에 고은지는 그걸로 충분했다. 그래서 지금 당장 가야만 했다.“은지야.”량천옥이 답답한 표정으로 고은지를 바라봤다.“전 가야 해요.”량천옥은 그녀의 마음을 이해했다. 마치 옛날에 자신이 고은지를 잃었을 때의 그 심정과도 같을 것이다. 그 쓰라림은 지금도 생생했으니 말이다.“알았어. 그럼 도와줄게.”자신의 아이를 위해서라면 앞길이 아무리 캄캄하고 위험해도 상관없었다.두 사람이 더할 말을 주고받으려 할 때, 량천옥의 전화가 울렸다. 나태범의 번호였다.량천옥이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이야기 좀 하지.”전화 너머에서 나태범의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 안에는 극한으로 억눌린 분노가 묻어 있었다.량천옥은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나태현은 의심 많은 사람이었기에 사무실에서
고은영이 이런 소식을 알고 있는 건 아마 배준우가 알려줬기 때문이다.량천옥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고은지가 먼저 말했다.“저 당장 출국할 거예요.”“너...”량천옥은 놀라 눈을 번쩍 떴다.“가야 해요.”고은지의 말투는 아주 단호했다. 그녀 마음 깊은 곳에서 희주가 아직 살아 있다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꼭 살아 있을 거라는 믿음 때문에 그녀는 희주가 사라진 그곳으로 가야만 했다.량천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네 마음은 알겠어. 근데 지금은...”“제가 출국했다는 거 나태현이 모를 수 있게 숨겨줄 거죠?”량천옥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뻔히 아는 듯 고은지는 단숨에 그녀의 말을 잘랐다.천락 그룹에서 갓 빠져나온 지금, 나태현 쪽의 감시가 있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고은지는 더 기다릴 수 없었다. 희주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그녀를 붙잡지 못하게 했다.량천옥은 고은지를 바라보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내가 너 유학 보내는 걸로 위장할게. 일단 M국에 들렀다가 프랑스로 넘어가.”“알겠어요.”고은지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어떤 상황이든 그녀는 반드시 희주가 사라진 그곳으로 가야 했다.량천옥은 다시 말했다.“그리고 록담 씨도 데려가.”정록담은 량천옥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었다. 고은지가 출국하는 건 희주를 찾기 위한 것이니 그가 반드시 곁에 있어야 했다.고은지도 그 제안을 흔쾌히 수긍했다.“알겠어요.”혼자선 아무것도 못 할 것이었기에 정록담을 데리고 가는 건 최선의 선택이었다....고은영이 회사에 막 도착했을 때였다. 고은지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은영아, 나 프랑스로 갈 거야.”고은영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벌써?”“만약 희주가 아직 살아 있다면 지금도 이미 늦은 거야.”“알겠어.”고은영은 조용히 대답했다.사실 그녀도 돌아오는 길 내내 생각했었다. 고은지가 이 일에 있어서 한 치도 망설이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그녀의 생각은 틀리
고은지가 숟가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는 말했다.“은영이가 그러는데 희주를 화장터로 보냈던 차랑 화장터에서 나온 차가 다르게 생겼대요.”“뭐라고?”량천옥의 숨이 턱 막히며 동공이 흔들렸다. 고은지는 고개를 들면서 말했다.“나태현이 들고 간 유골도 희주 게 아니래요.”순간, 량천옥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은지를 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고은지는 다시 한번 숨을 깊게 쉬었다.“차가 바뀐 거예요. 같은 차가 아니었어요.”“그럼... 가는 도중에 차가 바뀐 거 아냐?”량천옥이 다급하게 물었다.“차는 멈춘 적 없어요.”“그럼 희주는? 희주는 어디 있는 거야?”량천옥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났다.‘차가 멈추지도 않았고 유골이 희주의 것이 아니라면... 그럼 희주는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량천옥의 머릿속엔 외국에서 나태현과 벌였던 그 치열한 싸움이 스쳐 갔다. 그때 나태현이 사람들을 처리할 때의 분노는 정말 무서울 정도였다.량천옥은 그때의 기억을 되짚으며 말했다.“나태현이 한 짓은 아닐 거야.”방금 고은지가 한 말의 의미를 그녀는 확실히 이해했다.고은지는 나태현을 의심하고 있었다.“정말 아니에요?”“절대 아니야.”량천옥의 목소리엔 떨림이 묻어 있었다.‘절대 아니라고? 그럼 누굴까?’고은지는 량천옥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누가 했을 것 같아요?”고은지는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녀에게 원한이 있을 만한 사람이라 해도 그렇게 능력 있는 인물은 드물었다.결국 희주를 데려간 사람은 나태현 혹은 량천옥과 관련된 사람이란 뜻이었다.량천옥은 그 말에 다시 얼어붙었다.‘도대체 누굴까?’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데다가 그녀도 지금 머릿속이 엉망이라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그건 내가 알아보고 알려줄게.”“...”“나한테 원한 있는 사람도 아닐 거야. 만약 나랑 연관이 있는 사람이면 분명 나한테 연락했겠지.”‘그렇게까지 힘들게 사람을 데려가 놓고 아무런 말도 없다면 목적이
고은지는 식탁 의자에 앉아 국물을 한 숟갈 뜨더니 조용히 말했다.“이 의자는 앉을 때 너무 차가워요. 이따가 방석 좀 사서 깔아둘게요.”고은지는 식사뿐만 아니라 집 안 인테리어까지도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왜 갑자기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는 걸까. 예전에 고희주가 살던 곳이라서 그런가?’량천옥의 마음이 다시 조여들었다.“은지야...”“국물 정말 좋네요. 향이 좋아요.”고은지가 담담하게 량천옥의 말을 끊었다. 그 순간의 고은지는 마치 삶에 대한 애정이 다시 피어난 사람 같았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오히려 량천옥을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이건 약재예요?”“맞아, 조금 넣었어. 네 몸보신하라고.”“약재는 이렇게 이것저것 섞으면 안 돼요. 맛이 섞이거든요.”“그래, 알겠어. 다음부턴 뭐 넣을지 네가 알려줘.”“그럴게요.”국 끓이는 것만큼은 고은지보다 잘 아는 사람이 없었다. 조보은네 집에서 살 때, 아이가 잘 크도록 영양을 챙기느라 늘 정성을 들였었으니 말이다.량천옥은 슬쩍 물었다.“천락 그룹은 요즘 무슨 일 없어? 내가 뭘 준비해야 하니?”그녀는 고은지가 요즘 육명호와 만나는 건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뭘 했는지는 몰랐다. 원래는 회사 일엔 관심 두지 않으려 했지만 오늘은 좀 물어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지금 고은지가 정말 모든 걸 끝내버린 건 아닌지 너무 걱정됐다.고은지는 조용히 대답했다.“준비할 건 딱히 없어요.”더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량천옥은 그녀가 말을 아끼는 걸 보며 괜히 더 불안해졌다.“그때 장원에서 말인데요. 혹시 마지막까지 희주를 지켜봤었나요?”갑자기 희주 이야기를 꺼낸 고은지를 보며 량천옥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응.”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죽은 거 확실해요?”이렇게 말하는 고은지의 목소리는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량천옥은 얼떨결에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은지야, 너...”“그때 나태현은 어떤 반응이었어요?”량천옥은 말이 막혔다.‘그때 상황이 어땠더라... 희주가 떠난 걸 보고선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