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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목소리를 기억했다

Author: 에이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03 02:57:12

“이번엔 빨리 받네요.”

한서림은 휴대폰을 귀에 댄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명 낮에 들었던 목소리였다.

낮고 차분한 목소리.

사람을 안심시키기 위해 일부러 속도를 늦춘 것 같은 말투.

그런데 지금은 그보다 조금 더 편안했다.

서림은 침대에서 내려왔다.

“번호를 또 바꾼 거예요?”

“네.”

“왜요?”

“차단하셨으니까.”

너무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이었다.

서림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니까 왜 다시 전화했냐고요.”

전화기 너머가 잠깐 조용해졌다.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을 생각인가 싶었을 때 남자가 말했다.

“확인할 게 있어서.”

“뭘요?”

“신고했습니까?”

서림의 표정이 굳었다.

낮에 작성했던 신고 화면이 떠올랐다.

그녀는 실제로 신고를 접수했다.

통화한 번호와 문자 내용도 캡처해 첨부했다.

“했으면요?”

“잘하셨네요.”

“…뭐라고요?”

서림은 어이가 없어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지금 본인 신고한 사람한테 잘했다고 한 거예요?”

“네.”

“당신 진짜 이상한 사람이네.”

“그 말도 아까 들었습니다.”

“기억까지 잘하시네요.”

남자가 작게 웃었다.

그 짧은 웃음이 또 귀에 걸렸다.

서림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 상황이 이상했다.

보이스피싱범과 두 번째 통화를 하고 있다는 것부터 정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건,

무섭기보다는 궁금하다는 사실이었다.

서림은 창가로 걸어갔다.

커튼 사이로 늦은 밤의 불빛이 보였다.

“나한테 돈 뜯으려고 전화한 거 맞죠?”

“처음에는.”

서림의 손이 멈췄다.

“처음에는?”

남자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 지금은 아닌가 봐요?”

“그 질문에는 대답 안 하겠습니다.”

“왜요?”

“대답하면 더 이상해질 것 같아서.”

“이미 충분히 이상해요.”

서림은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다.

“내 번호랑 이름은 어디서 구했어요?”

“….”

“직장까지 알고 있었잖아요.”

“그건 잊으세요.”

“내 개인정보를 갖고 있는 범죄자가 잊으라면 내가 네, 하고 잊어요?”

목소리가 조금 날카로워졌다.

이번에는 남자도 장난스럽게 넘기지 않았다.

“그 정보로 뭘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걸 내가 어떻게 믿어요?”

“안 믿어도 됩니다.”

“그런데?”

“그냥 그렇게 될 겁니다.”

서림은 잠깐 말을 잃었다.

이 남자는 자꾸 이상한 식으로 말한다.

믿으라고 하지도 않는다.

겁을 주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이 결정한 일을 통보하듯 말했다.

서림이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정적.

“내 이름은 알잖아요.”

“….”

“불공평하잖아.”

“사기꾼하고 공평한 관계를 기대합니까?”

서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건 또 맞네.”

이번에는 두 사람 모두 잠시 조용해졌다.

낯선 침묵이었다.

불편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그렇지 않았다.

서림은 문득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쪽 몇 살이에요?”

“그게 왜 궁금합니까?”

“목소리가 생각보다 젊어서.”

“생각보다?”

“보이스피싱범이면 왠지 중년 아저씨일 줄 알았거든요.”

남자가 낮게 웃었다.

“편견이 심하네요.”

“그쪽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잠깐의 침묵 뒤 남자가 말했다.

“서른셋.”

서림은 자신도 모르게 눈썹을 올렸다.

“나랑 한 살 차이네.”

말을 뱉고 나서 멈췄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지?

마치 소개팅 상대의 나이를 물어본 사람 같았다.

서림은 바로 목소리를 굳혔다.

“아니,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알아요.”

“뭘 알아요.”

“지금 후회하는 거.”

“….”

“괜히 나이 물어봤다고.”

정확했다.

서림은 창문에서 돌아섰다.

“사람 심리 읽는 게 일이에요?”

“어느 정도는.”

“그래서 잘 속이나 보네.”

남자의 목소리가 잠깐 낮아졌다.

“잘 속인다고 생각합니까?”

“적어도 처음 전화했을 때는 그럴듯했어요.”

“그런데 바로 들켰잖아요.”

“내가 관련 업무를 해서 그렇죠.”

“다른 사람이었으면?”

서림은 답하지 않았다.

남자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넘어갔겠죠.”

이번에는 목소리가 달랐다.

조금 무거웠다.

처음으로 죄책감 같은 것이 묻어나왔다.

서림은 그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그럼 실제로 많이 속였어요?”

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그 침묵이 대답처럼 느껴졌다.

서림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얼마나?”

“그건 묻지 마세요.”

“사람들 돈 뺏은 건 괜찮고 내가 묻는 건 싫어요?”

“괜찮다고 한 적 없습니다.”

“그럼 왜 해요?”

이번에는 침묵이 길었다.

서림은 입술을 다물었다.

멀리서 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한참 뒤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만둘 수 있을 때 그만뒀어야 했는데.”

서림의 눈빛이 달라졌다.

“무슨 뜻이에요?”

“그대로입니다.”

“못 그만둬요?”

남자가 대답하지 않았다.

서림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잡혀 있는 거예요?”

그 순간 전화기 너머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이어 누군가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누구랑 그렇게 오래 통화해?

서림은 숨을 멈췄다.

남자의 목소리가 급격히 낮아졌다.

“끊겠습니다.”

“잠깐.”

“이번에는 정말 끊어야 합니다.”

“당신—”

“그리고.”

남자가 말을 끊었다.

“내일부터 모르는 번호 받지 마세요.”

서림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또 그 말이야?”

“특히 오전 10시부터 오후2시 사이.”

서림의 표정이 굳었다.

“왜?”

남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왜 그 시간인데요?”

짧은 숨소리.

그리고 아주 작게 들렸다.

“당신 번호가 넘어갔으니까.”

서림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디로?”

뚝.

전화가 끊겼다.

“여보세요?”

서림은 화면을 바라봤다.

통화 종료.

곧바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연결되지 않았다.

한 번 더.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서림은 휴대폰을 움켜쥐었다.

당신 번호가 넘어갔으니까.

그 말이 머릿속에서 반복됐다.

누구에게 넘어갔다는 걸까.

그리고 왜 그 남자는 자신에게 그걸 알려준 걸까.

다음 날 오전.

은행 건물로 들어가던 서림은 휴대폰 진동에 걸음을 멈췄다.

오전 10시 07분.

처음 보는 번호였다.

서림은 화면을 한참 바라봤다.

받지 마세요.

지난밤 남자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서림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몇 초 뒤 전화가 끊겼다.

그리고 바로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한서림 씨 맞으시죠? 금융감독원입니다.]

서림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때 또 다른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에는 어제 그 남자가 마지막으로 사용했던 번호였다.

서림은 망설이지 않고 받았다.

“여보세요.”

거친 숨소리.

그리고 남자의 목소리.

“받지 말랬잖아요.”

“안 받았어요.”

짧은 침묵.

“다행이네요.”

서림이 바로 물었다.

“내 번호 누구한테 넘겼어요?”

남자가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 조직이에요?”

“…네.”

“당신이 넘긴 거예요?”

이번에는 침묵이 더 길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서림의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남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런데 지금은 되돌리고 있습니다.”

서림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처음으로 확실하게 깨달았다.

이 남자는 자신을 속이러 왔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자신을 다른 사기꾼들로부터 숨기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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