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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13 12:42:41

재혁이 그 인턴을 다시 만난 건 퇴사 후 몇 달 뒤였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의 만남. 직급도, 회사도, 이해관계도 모두 벗어던지고 남자 대 여자로 마주한 것이 바로 그때였다.

런던에서 사장단과의 출장을 마치고 나니 일주일 정도 여유가 생겼다. 원래대로라면 곧장 서울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재혁은 귀국편을 바꿨다. 파리를 거쳐 취리히에서 아웃하는 일정으로 항공권을 변경하고, 오랜만에 혼자 여행을 하기로 했다. 파리는 혜원과 자주 왔던 곳이었다. 혜원은 화려한 도시를 좋아했다. 파리, 밀라노, 바르셀로나, 뉴욕. 좋은 호텔과 좋은 레스토랑을 찾아다니는 것도 좋아했지만, 무엇보다 미술관을 좋아했다. 직업 때문이기도 했다.

루브르, 오르세, 오랑주리, 퐁피두. 혜원과 파리에 오면 하루에 미술관을 두 군데씩 돌 때도 있었다. 재혁은 미술에 별다른 조예가 없었다. 혜원이 그림 앞에 서서 한참을 움직이지 않으면 옆에서 기다렸고, 설명하면 들었다.

“이거 봐. 색 미쳤지?”

재혁에게는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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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냥 지루했을 뿐이야   97

    본일은 태블릿을 넘기던 손을 잠시 멈췄다. 비서가 가져다 놓은 커피에서는 아직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한 모금 마시는 순간, 요 며칠 머릿속 한편을 맴돌던 얼굴이 예고도 없이 떠올랐다.본일은 딱히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적어도 어린 유건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게다가 처음부터 반가울 이유가 없는 아이였다. 달갑지 않은 남자의 아이, 물론 자신 좋아했던 여자의 아이이기도 했지만 그때의 본일에게는 전자의 사실이 조금 더 컸다.그래서 처음 유건을 만났을 때도 별다른 감정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혜원의 곁에 서 있는 조그만 아이를 내려다봤을 때 말없이 자신을 올려다보는 눈을 잠시 바라보다 본일은 자기도 모르게,“건아.”라고 부르고는 흠칫했다.한 번도 그렇게 부르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그 뒤로 이상하게도 입에 붙었다.“건아”어릴 적 유건을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본일뿐이었다.그래서였는지도 몰랐다. 본일은 자신의 아이를 갖고 싶었다. 내 아이가 생기면 어떤 기분일까. 나를 닮은 아이가 자신을 올려다보면, 지금보다 더 깊은 감정이 들까.하지만 아이는 생기지 않았고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난 유건은 어느새 스무 살의 청년이 되어 있었다. 그날 식당에서 마주 앉은 유건을 보며 본일은 몇 번이나 묘한 기분을 느꼈다. 훌쩍 자란 얼굴 위로 스무 살 무렵 자신의 모습이 얼핏얼핏 겹쳤다.웃을 때보다 무표정할 때 더 그랬다. 눈썹을 살짝 찌푸리는 버릇, 상대의 말을 들을 때 고개를 조금 기울이는 모습.—-우연이겠지그렇게 생각했다. 사람이 사람을 닮는 데 꼭 피가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 그런데 하필 그날 마주친 회장이 웃으며 말했다.‘아들이 자네를 꼭 빼닮았네.’그 자리에서는 웃어넘겼다. 회장님의 눈이 많이 안 좋아지신 모양이라고 농담까지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가 목에 걸린 가시처럼 남았다.“하…….”본일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커피를 다시 들이켰다. 벌써 조금 식어 있었다.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혜원이 재혁과 결

  • 그냥 지루했을 뿐이야   96화

    서하는 한참 동안 휴대전화를 바라봤다. 유건은 전화도 받지 않고, 메시지도 읽지 않았다. 어느새 카페는 마감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직원이 테이블을 닦고, 의자를 하나둘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결국 서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집으로 돌아와 별 의미도 없는 유튜브 영상을 틀어놓았다. 화면에서는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데 내용은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자꾸 휴대전화로 시선이 갔다.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슬픈 건 슬픈 거였다. 돌이켜보면 서하에게는 언제나 끝이 아닌 듯 끝난 관계만 있었다. 연락이 뜸해지고, 만나는 횟수가 줄고, 어느 순간 서로 찾지 않게 되고.그렇게 흐려지다가 사라지는 관계들. 매듭을 지은 적은 없었다.어쩌면 서하는 그게 두려웠는지도 몰랐다. 언제든 만날 수 있지만 지금 만나지 않는 것과, 이제부터 우리는 만나지 않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말이니까.겨우 잠이 들었지만 새벽 무렵, 창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빗소리에 눈을 떴다. 방 안은 어두웠다. 서하는 한동안 누운 채 빗소리를 들었다.그러다 이유도 없이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유건]통화 버튼을 눌렀다. 왜 전화했는지는 자신도 몰랐다. 속초에 갔던 밤처럼, 충동으로 시작했던 두 사람의 관계처럼.신호가 길어졌다. 역시 안 받나 보다. 휴대전화를 귀에서 떼고 종료 버튼을 누르려던 순간이었다. 통화가 연결됐다.“여보세요?”대답이 없었다. 대신 빗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의 목소리인지 안내방송인지 모를 소리도 뒤섞여 있었다.“유건?”서하가 몸을 일으켰다.“여보세요?”한참 뒤 무언가를 억지로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그리고—“누……나.”서하의 표정이 굳었다. 평소의 유건 목소리가 아니었다.“응. 나야.”다시 긴 침묵.“어떡해…….”그 한마디에 서하는 침대에서 내려왔다.“어디야?”대답을 들으며 옷을 걸쳤다.차 키를 집어 들고 집을 빠져나왔을 때도 아직 바깥에는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비가 미친 듯이 쏟아졌다. 와이퍼를 가장 빠르게 움직

  • 그냥 지루했을 뿐이야   95화

    정신없이 뛰어간 병원에서는 수술이 진행 중이었다. 중환자실 앞 의자에서 기다리는 시간은 영원히 멈춘 것 같기도, 영겁인거 같기도 했다. — 무슨 일이냐고, 도대체 왜.유건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채 바닥만 내려다봤다. 얼마 지났을까. 복도 끝에서 한 중년 여자가 거의 뛰다시피 들어왔다. 사색이 된 얼굴이었다. 여자는 경찰을 붙잡고 몇 번이고 같은 질문을 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우리 애가 왜 여기 있는 거냐고, 누가 그런 거냐고.경찰이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설명했다.— 학교 건물, 3층, 남학생의 폭행, 반항, 추락 떨어져 나온 단어들이 파편이 되어 유건의 가슴에 박혔다. - - -병원을 나왔을때는 어스름히 해가 뜨려고 했다. 아직은 밤같은 새벽이다. 몸이 이끄는대로 지하철로 내려간다. 첫차를 탄다. 채원에게 전화를 건다. 그냥 아무렇지 않게 받을거 같다. “왜, 유건!” 하고 밝게 얘기 해줄거 같다. 신호음조차 가지 않는 전화에서는 만이 반복됐다. 몇번이고 건다. [일어났어?]항상 칼답하던 톡의 1이 없어지지 않는다. 유건은 숨이 콱 막힌다. 어디에도 출구가 없는 미로에 떨어진 거 같다. —미친 새끼, 미친 새끼 유건은 계속 머릿속으로 되뇌인다. 그때 태클로 다리를 부러뜨렸어야 했다. 다시는 걷지 못하게 하반신 불구를 만들었어야 했다. 아니 그냥 죽여 버릴 걸. 유건이 주먹으로 자기 허벅지를 세게 내리친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가 흠칫하며 유건을 바라봤다. 그러다 자리에서 일어나 몇 칸 떨어진 곳으로 옮겨 앉았다.“……나랑 사귈래?” 달빛에 비추던 채원의 얼굴, 조심스레 말하던 입술. 그 때 그러자고 했어야 했다. 생각할 게 뭐가 있었을까. — 그래, 그러자.아니면, — 나도 너 좋아해.그 한마디면 됐었는데. 그랬다면, “안 사귀는 거지?” 그 새끼가 물었을 때 내 여친이니까 건드리지 말라고,

  • 그냥 지루했을 뿐이야   94화

    그냥 평범한 하루였다. 나중에는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날씨도, 사람들도, 거리의 풍경도 특별할 게 없었다. 살면서 천 번쯤 반복됐을 법한 하루였다.유건은 오전에 동아리 축구 연습을 갔다. 비슷한 패스를 하고, 비슷한 킥을 찼다. 공을 빼앗기면 욕을 했고, 골이 들어가면 웃었다. 쉬는 시간에는 잔디에 드러누워 천천히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기도 했다.딱 하나 옥에 티가 있었다면 그 자식의 도발뿐이었다. 연습 중간, 유건은 벤치에 앉아 이온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올리는데 누군가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누군지 알았다.그 자식이었다. 유건은 모른 척 병을 기울였다. 잠시 후 놈이 희미하게 웃으며 물었다.“너 채원이랑 사귀냐?”유건이 병에서 입을 뗐다.“뭐?”“아니. 애들이 너랑 걔랑 사귀는 것 같대서.”“뭔 소리야. 아니.”대답하고 나니 괜히 기분이 더러웠다. 사귀어도 너 같은 놈한테 보고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놈이 다시 물었다.“그래?”유건이 옆을 봤다.“뭐가.”“안 사귀는 거지?”이번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유건은 빈 병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야.”뒤에서 다시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그대로 필드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평범한 하루에 끼어든, 잠깐의 불쾌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연습이 끝난 뒤에는 잠깐 집에 들렀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오랜만에 휴가를 나온 친구를 만났다. 몇 명이 더 합류해서 볼링을 치고, 스크린 야구를 하고, 술을 마셨다. 시끄럽게 웃었다. 별것 아닌 이야기를 했고, 별것 아닌 일로 욕을 했다.그 사이 채원에게서 전화가 한 번 왔다.[부재중 전화]유건은 화면을 확인하고도 바로 전화하지 않았다.— 조금 있다 해야지.그러고는 다시 친구들에게 돌아갔다.늦은 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야 생각이 나 전화를 걸었다.신호는 오래 갔다. 채원은 받지 않았다.‘자나.’그게 전부였다.다음 날 유건은

  • 그냥 지루했을 뿐이야   93화

    서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엎드려 있었다. 방금 전까지 이어졌던 격렬한 시간의 잔상이 아직 아래쪽에 뻐근하게 남아 있었다. 침대 옆 테이블에는 콘돔과 딜도가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유건도 그랬었는데. 그 애와 함께 있을 때도 이런 순간이 있었다. 첫 만남부터 알몸으로 시작했었는데. 욕실 문이 열렸다. 씻고 나온 재혁이 침대로 다가와 서하의 등을 천천히 쓸었다.“마사지해줄까?”서하가 고개만 옆으로 돌렸다.“잘해요?”“그럼.”재혁아 오일을 가져왔다. 손바닥에 덜어 비빈 뒤 서하의 등에 골고루 펴 발랐다. 생각보다 손힘이 좋았다.“아…… 시원해.”“그렇지?”뭉친 어깨에서 등으로, 다시 허리까지 손이 천천히 내려왔다. 서하가 간지러운 듯 몸을 움찔했다.“가만있어.”“간지러워요.”“흡수되게 잠깐만 더 누워 있어. 나 메일만 확인하고 올게.”“맨날 바빠.”“금방.”“다녀와요. 나 잠들지도 몰라.”재혁이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그럼 깨우면 되지.”“안 일어날 건데.”“방법은 많아.”“웃겨.”서하는 다시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잠시 후 서재 쪽에서 희미한 키보드 소리가 들려왔다. 서하는 눈을 감고 듣다가 침대 위에 놓인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메시지 하나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유건이었다. 그날 그렇게 헤어진 뒤로 온 연락은 딱 하나였다.[누나 언제 시간 돼. 할 말 있어.]서하는 아직 답하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서였을까. 여자친구가 생겼을 수도 있었다. 처음에는 장난이었다. 미래의 내연관계니 뭐니, 웃으면서 시작한 사이. 하지만 서로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런 관계를 오래 끌 수 없다는 것쯤은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다.만약 또래였다면? 어쩌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귀자고 했을거다. 그런 것치고는 꽤 오래 만났다. 젊고 싱싱한 몸, 그리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순수했던 마음.서하는 화면 속 문장을 한참 바라봤다.—이제 끝낼 때가 왔나 보다.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였다.[주말에 시간 괜찮아.]

  • 그냥 지루했을 뿐이야   92화

    마지막 일반물리학 시험까지 끝났다. 유건은 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치고 교정을 빠져나왔다. 며칠 동안 붙들고 있던 시험이 전부 끝났는데도 이상하게 홀가분하지 않았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어깨를 툭 쳤다.“어, 안녕?”채원이었다.“치. 뭐야. 전화는 또 왜 안 받아.”“미안. 시험공부하느라 바빠서.”채원이 유건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유건이 눈썹을 찌푸렸다.“왜. 뭐 묻었어?”“아니.”채원이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그냥 그동안 잘 살았나 해서. 시험 다 끝났어?”“응. 넌?”“나도.”채원이 곧바로 물었다.“지금 시간 돼?”유건이 잠시 망설였다. 시험은 끝났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다.지금은 그냥 집에 가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자고 싶었다.“아, 나…….”그 순간 채원이 유건의 팔을 낚아챘다.“나한테 시간 좀 내줘.”“야.”“가자.”“어디 가는데.”“일단 와.”결국 유건은 채원에게 끌려갔다.도착한 곳은 남산공원 초입의 오래된 왕돈가스집이었다.둘은 돈가스와 짬뽕을 하나씩 시켜 가운데 놓았다.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난 탓인지 2층 홀에는 둘뿐이었다.“와.”채원이 돈가스를 한입 먹고 눈을 크게 떴다.“나 이거 처음 먹어봐. 맛있다.”“왕돈가스를 처음 먹어?”“응.”“제주에는 돈가스 없어?”“죽을래?”유건이 돈가스를 먹기 좋은 크기로 하나하나 자르며 피식 웃는다. “왜 웃어?”“그냥.”“뭐야.”유건은 대답하지 않고 짬뽕 국물을 한 숟갈 떠먹었다. 채원이 다시 돈가스를 한 입 넣고 말했다.“웃으니까 좋네.”유건의 손이 잠깐 멈췄다.“뭐가.”“요즘 맨날 똥 씹은 얼굴이었잖아.”“내가 언제.”“계속.”유건은 며칠 동안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던 것들이 잠깐 멀어진 기분이었다.“먹고 뭐 하고 싶은데?”“남산타워 가야지.”“케이블카?”“아니.”채원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나름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걸어서.”유건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미쳤냐?”“하아…… 잠깐만.”“그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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