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제4화
벽류진(碧流陣)의 공기는 렌이 떠난 직후에도 여전히 탁하고 무거웠다. 신지로는 자신의 침통을 꼼꼼히 점검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약초가 다 떨어졌어. 경계선 너머, 안개가 짙은 곳까지 가봐야겠어."
그의 말에 가란이 말없이 묵직한 도끼를 챙겨 들었다. 가란은 FM(Field Manual)대로 움직이는 무사였고, 도깨비 척결을 위해 태어난 자였다. 둘의 정찰은 지극히 건조한 업무였으나, 그 뒤를 밟는 렌의 마음은 천 길 낭떠러지를 걷는 것 같았다.
렌은 숨을 죽인 채, 거리를 두고 그들의 뒤를 쫓았다. '제발 그곳만은 들키지 않기를.'
안개는 신지로와 가란 같은 강자들에게는 장애물이 아니었다. 마침내 그들이 안개의 핵심부에 다다랐을 때, 눈앞에 거짓말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매화 향기가 진동하는 작은 계곡, 그곳에서 야츠키가 막 목욕을 마치고 얇은 기모노를 걸치고 있었다.
"……저게, 도깨비라고?"
가란이 도끼를 고쳐 쥐며 나직이 읊조렸다. 신지로는 침통에서 침을 꺼내려다 말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기모노 틈새로 언뜻 드러난 야츠키의 등과 매끄러운 엉덩이 선은, 그들이 갈라지는 지상위에 봐온 흉측한 도깨비와는 차원이 달랐다. 생전 처음 보는, 인간 이상의 관능이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가란의 눈은 곧바로 요기를 감지했다.
"전투가 가능한 놈이다. 즉시 베어야 한다."
가란이 도끼를 들어 올리는 순간, 신지로가 그의 팔을 가로막았다. 그의 눈빛은 관음증적인 흥분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는 야츠키가 무방비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뇌리에 새겼다. 그때, 젖은 머리카락을 털어내던 야츠키가 멈칫했다. 도깨비 특유의 감각으로 이질적인 기운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녀는 다급히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그녀의 가녀린 손끝에서부터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기묘하고 아름다운 노랑꽃들이 순식간에 피어났다. 관상용으로 보일 만큼 화려한 꽃잎들이 흩날리며 안개를 타고 무사들을 향해 쏟아졌다. 그 꽃들이 내뿜는 매혹적인 향기는 인간의 오감을 즉각적으로 마비시키는 강력한 방어 요력이었다.
하지만 그 향기가 신지로와 가란의 코끝에 닿기도 전, 신지로가 미리 준비해둔 은침을 날려 우산을 튕겨냈고, 가란은 도끼로 꽃송이들을 허공에서 짓이기며 돌진했다. 요력을 섞은 향기도, 숙련된 무사들의 광기 앞에서는 역부족이었다.
"놓치지 마!"
가란이 거대한 도끼를 휘두르며 야츠키를 압박했다. 도끼날이 스칠 때마다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야츠키는 놀라 비명을 지르며 다시 한번 주변의 꽃향기를 끌어올리려 했지만,
가란의 칼날이 그녀의 손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툭.
잘려 나간 손목에서 피가 솟구쳤다. 바닥에 흩뿌려진 야츠키의 피는 선명한 붉은색이었다.
100년 동안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생경한 통증이 야츠키의 뇌를 찔렀다. 뼈가 잘려 나가는 감각, 신경이 끊어지는 비명. 그녀는 세상이 하얗게 점멸하는 충격 속에서 바들바들 떨었다.
잘려 나간 부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신의 피를 보며, 그녀는 비로소 자신이 이 징검다리 위의 지옥에서 얼마나 무력한 존재였는지를 실감했다.
"아……."
야츠키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고통보다 먼저 밀려온 것은 당혹감과 슬픔이었다. 그녀는 살생을 위해 전투한 적이 없었다. 그저 혼자 조용히 평화롭게 살고 싶었을 뿐인데. 그녀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청초하고 가련하고,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그 모습은 수많은 전장을 누빈 가란마저 멈칫하게 만들었다.
신지로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이 순간을 기록하듯 눈에 담았다. 그는 가란을 저지하며 야츠키에게 다가갔다.
"가란, 죽이지 마. 생포해서 연구할 가치가 충분해."
그때였다. 숲을 가르며 쌍단검을 든 렌이 튀어나와 야츠키 앞을 가로막았다.
"그만하십시오! 이 여인은…… 아무 죄도 없습니다!"
렌의 눈은 절박함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시온을 비롯한 다른 이들이 회의실에서 욕망의 칼날을 갈고 있을 때, 렌은 이미 마음속으로 이 ‘꽃’을 지키기로 맹세했던 것이다. 렌의 쌍단검이 자신의 스승이나 다름없는 가란의 도끼를 향해 겨누어졌다.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단호했다.
가란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비켜라, 렌. 너 지금 제정신인가? 이 도깨비 놈 하나 때문에, 동료의 앞길을 막고 칼을 겨누는 것이냐? 설마, 그 흉물스러운 계집에게 반해서 우리를 베려는것이냐?"
가란의 서늘한 질문이 렌의 가슴을 후벼 팠다. 렌은 단검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야츠키의 얕은 숨소리, 그리고 잘린 손목에서 풍기는 비릿하면서도 매혹적인 꽃향기가 렌을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죽이려면, 저를 먼저 베고 가십시오."
렌의 맹목적인 대답에 신지로는 안경을 고쳐 쓰며 차가운 비웃음을 흘렸다.
"막내가 완전히 도깨비의 꽃향기에 취했군. 이거 참, 곤란하게 됐어."
계곡의 붉은 핏자국 위로 무사가 가진 각기 다른 욕망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야츠키는 이제 단순한 사냥감이 아닌, 징검다리 위 8명 모두를 파멸로 이끌 거대한 태풍의 핵이 되어 있었다. 도깨비 여인은 떨리는 어깨를 감싼 채, 자신을 지키기 위해 동료를 배신한 어린 무사의 등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인간을 향한 낯선 감정에 휩싸였다. 그것은 파멸의 서막이었다.
제 35화 붉은 비녀의 ‘관찰자’ 영주들의 거처는 본래 그들의 명예와 안온함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풍요로운 풀숲과 빽빽한 나무들이 외부의 시선을 완벽히 차단하고, 높고 견고한 돌담이 고풍스러운 기와지붕을 감싸 안은 세상과 단절된 안식처. 그러나 지금 그곳은 기묘한 안개와 퀘퀘한 먹구름 같은 요기가 뒤섞여, 숨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살육의 무대로 변해 있었다.불 꺼진 마루 안은 죽은 듯 고요했다. 그 침묵을 뚫고 가파른 계단을 밟아 올라가면, 가장 높은 곳인 2층 창가에 붉은 꽃 비녀를 꽂은 여인이 서 있었다.참화의 리더, 카가야였다. 그녀는 창밖으로 펼쳐진 아수라장을 차가운 눈빛으로 관찰하고 있었다.“꽤나 오래 버티는군. 저들 사이에 수장이 없는 것 같아. 고작 정찰이 목표였던 건가?”그녀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감정의 동요도 없었다. 마치 지루한 연극을 관람하는 평론가처럼 아래에서 벌어지는 죽음의 행진을 관망할 뿐이었다.그녀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참혹한 실외 중앙이었다. 가란의 거대한 도끼가 허공을 가를 때마다 쿠로기리는 연기처럼 흩어지며 그를 농락했다. 쿠로기리는 공격을 멈추고 한쪽 처마 끝에 가볍게 착지하며, 마치 춤을 추듯 여유로운 태도로 가란을 내려다보았다.“말로만 듣던 무사의 기개구나. 왜 우리 안의 피만 보면 흥분하는 도깨비들이 너희를 상대로 이토록 고전했는지 이제 알겠어. 꽤나 눈꼴시린 투쟁심이군.”가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도끼 자루를 고쳐 쥐었다. 그의 근육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눈빛만은 형형했다. 도끼날에 묻은 안개가 뱀처럼 엉겨 붙어 쇠를 갉아먹는 소리가 들렸다. 치이익— 하는 불쾌한 부식음과 함께 도끼날 곳곳이 녹아내리고 있었다.“네놈은 무엇을 위해 영주를 사칭하며 이곳에 터를 잡았나? 왜 이런 참극을 벌이는 거지?”쿠로기리는 섬뜩할 정도로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명예? 그런 건 진작에 죽은 지 오래지. 이곳에 맺힌 원념과 증오가 도깨비들의 그것보다 더 깊고 진하거든. 뭐, 그렇게 만든 건 여기 주인
제 34화 안개 너머의 기만, 무너지는 오감(五感) 영주의 거처를 감싼 안개,그것은 마치 굶주린 짐승의 숨결처럼 무사들의 폐부로 파고들어 예민한 신경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마당 한복판에서 영주의 화려한 예복을 걸친 쿠로기리는 기괴한 미소를 머금고 서 있었다. 그가 서 있는 자리 주위로 안개가 뱀처럼 똬리를 틀며 일렁였다.“어찌하여 그리 경직되어 있습니까? 영주를 뵙고자 오신 게 아니었습니까?”렌이 즉각 반응했다. 요기를 정화하는 단검을 고쳐 쥔 그녀의 몸이 바람을 갈랐다. 정면을 파고드는 무사의 일격은 허공을 가르는 찰나의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예리했다.렌의 배후에서 솟구쳐 오른 가란이 거대한 도끼를 내리꽂았다. 지면을 박차고 도약한 가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위압감. 대지를 뒤흔들 파괴력이었으나 쿠로기리는 연기처럼 흩어지며 자취를 감췄다.가란은 허공을 가른 도끼를 땅에 짓이긴 채, 안개 너머 어딘가에 숨어 있을 쿠로기리를 향해 차갑게 읊조렸다.“영주의 예복을 걸치고 영주를 사칭하는 요물같은 자식이,경비병들은 어디에 있지? 숨어있지 말고 당장 기어 나와라.”안개 속에서 쿠로기리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저는 그저 이곳의 주인이 사라진 자리를 지키는 관리자일 뿐입니다.”가란은 도끼날 끝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감각에 미간을 찌푸렸다. 도끼가 안개와 맞닿을 때마다 날의 강철이 마치 녹슨 고철처럼 미세하게 부식되고 있었다. 저 녀석은 대상을 갉아먹는 술법을 쓰고 있다. 자신의 전력을 다 보여주었다간 이 도끼가 형체도 없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뇌리를 스쳤다. 가란은 이를 악물었다.이 간보기식 대치는 렌과 시온이 정체를 파악할 시간을 벌어주는 유일한 생명줄이었다. 쿠로기리 또한 가란의 힘을 경계하며 안개 속에서 교묘하게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그때였다. 숲 어딘가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름 끼치는 파열음이 울렸다.슈슈슉—!보이지 않는 곳에서 날아든 수리검이 렌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렌은 반사적으로 몸을
제 33화 안개 속에 잠긴 고풍스러운 기와집벽류진을 떠나 영주의 영역으로 향하는 길은 지옥도와 다를 바 없었다. 험준한 산세와 날카로운 가시덤불을 뚫고, 세 무사는 마침내 영주 거처의 뒷문 앞에 도달했다. 그곳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했다. 성 전체가 흐린 먹구름 같은 안개에 뒤덮여 있었고, 보초를 서야 할 경비원들은 온데간데없었다.무사라면 본능적으로 오감이 예민하고 반사신경이 뛰어나기 마련이나, 이곳은 차원이 달랐다. 만약 시온의 극도로 발달한 청각과 시각 탐지 능력이 없었다면, 렌과 가란은 보이지 않는 함정에 벌써 몇 번이나 목숨을 잃었을 터였다. 시온은 허공을 떠도는 미세한 요기의 파동을 읽어내며 렌과 가란에게 수신호를 보냈다.‘왼쪽이다.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지만 공기의 흐름이 뒤틀려 있어.’시온의 속삭임에 렌은 요기를 정화하며 은밀하게 움직였고, 가란은 거대 도끼의 묵직한 존재감을 숨기며 그림자 속을 파고들었다. 성은 겉으로 보기엔 흔적 하나 없이 멀쩡했지만, 마치 유령들이 깃든 듯 스산한 기운만이 감돌았다. 안개는 단순한 기상 현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무사들의 발밑을 감아쥐고 그들의 기운을 서서히 갉아먹고 있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느껴지는 끈적한 저항감에 가란은 미간을 찌푸렸다.“이 안개… 평범한 게 아닙니다. 기척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있어. 시온, 계속해서 주변 기류를 살펴주시죠. 조금이라도 수상한 움직임이 있으면 즉시 알려주세요.”렌이 낮게 읊조리며 정면을 주시했다. 가란은 언제든 도끼를 휘두를 준비를 하며 묵직한 돌파구를 확보했다. 렌은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며, 요기를 정화하며 조심스럽게 마당으로 진입했다. 바로 그때였다.“누구시죠?”낮고 서늘한 음성이 정적을 깨뜨렸다. 마당 한가운데, 영주들이 입는 화려한 예복을 걸친 젊은 남성이 서 있었다. 180센티미터의 큰 키에 등까지 내려오는 검은 생머리, 육안으로는 20대 초반이라 해도 믿을 만큼 빼어난 용모였다. 그러나 그에게서 뿜어져 나
제 32화 변질된 생명과 어둠의 예고신지로의 연구실은 밤늦도록 꺼지지 않는 등불 아래, 비릿한 약품 냄새가 진동했다. 차가운 금속 테이블 위에는 죽은 까마귀 요괴의 사체가 놓여 있었다. 핀셋을 든 신지로의 손은 분주했고, 야츠키는 그 곁에서 조용히 관찰하며 보조를 맞췄다. 조명은 사체의 기괴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비췄다. 테이블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검은 액체 소리가 정적을 깼다.“이 장기들의 위치를 봐. 분명 까마귀의 생태와는 전혀 달라. 비정상적으로 뒤틀려 있고, 군데군데 부식된 흔적이 있어. 게다가 이 끈적한 약물… 대체 무엇을 섞은 거지?”신지로가 메스를 깊숙이 찔러 넣자,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인간인 그에게는 맡기 힘든 짙은 비린내였다. 분석을 거듭할수록 까마귀의 내부에서 기묘한 기운이 새어 나왔다. 사체에서 피어오르는 회색 안개는 연구실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고, 등불의 빛마저 왜곡시켰다. 그때, 야츠키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녀는 순식간에 손을 뻗어 신지로의 코와 입을 단단히 막았다.“숨을 쉬지 마세요.”야츠키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길을 통해 전달되는 기운은 불쾌할 정도로 오래된, 썩은 늪과도 같은 고대의 요기였다.“이건 보통의 요기가 아니에요. 저보다 훨씬 오래된 기운이죠. 도깨비의 혈통을 타고난 자들이라면 정신력이 흐려지는 정도로 그치겠지만, 일반적인 생물이나 평범한 무기라면 이 까마귀의 장기들처럼 순식간에 썩어 문드러질 거예요. 인간인 당신에겐 더 치명적일 테니 조심하세요.”신지로는 야츠키의 손을 부드럽게 내리며, 굳은 표정으로 사체를 응시했다. 메스를 쥔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의학자로서 이토록 뒤틀린 생명체를 마주하는 것은 일종의 고문과도 같았다. 사체의 단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저주받은 기운은 단순한 독이 아니라 생명의 근간을 갉아먹는 침식에 가까웠다.“까마귀가 무언가 잘못 먹은 게 아니야. 누군가의 철저한 계획… 연구와 융합의 산물이지. 그쪽에도 나 같은 의학자가 있는 모양이
제 31화 누군가의 ‘도구’가 된다는 것벽류진의 하늘 위로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렸다. 구름을 뚫고 내려온 테츠잔의 독수리가 긴 비행 끝에 지친 날개를 접으며 연무장 한가운데로 곤두박질치듯 내려앉았다. 테츠잔이 두꺼운 가죽 장갑을 낀 오른팔을 뻗자 독수리는 익숙한 듯 사뿐히 내려앉았다. 발목에 묶인 서신 매듭은 이질적일 정도로 매끄럽고 차가웠다.테츠잔은 매듭을 푸는 손끝에서 묘한 떨림을 느꼈다. 종이에서는 평소와 다른 기분 나쁜 향이 났고 서신을 펼친 그의 미간이 서서히 좁혀졌다. 영주들의 회의를 거쳐 정리된 글감은 빈틈없이 빽빽했다. 하지만 테츠잔은 영주들의 실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평생 자신들의 가문과 유복함만을 내세우며 무사들을 그저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피 흘리는 방패로만 여기던 자들이었다. 도깨비가 마을을 짓밟고 사람들이 울부짖을 때, 그들은 가장 먼저 하늘로 도망칠 궁리를 하던 비겁한 자들이 아니었던가. “이게… 영주들의 서신입니까?” 곁을 지키던 미츠키가 다가와 서신을 훑어보았다. 그의 눈빛도 테츠잔과 다르지 않았다. 지나치게 정중하고, 지나치게 이상적이며 너무도 완벽했다. 테츠잔은 과거, 영주들이 무사들의 목숨을 담보로 자신들의 성벽을 높이 쌓던 날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무사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위로 대신 '대체할 인력은 없는가'를 먼저 물었다. 그런 자들이 '공생'을 운운하다니 이 서신은 독이 든 사탕과 같았다. 그는 독수리의 깃털에 묻은 핏자국을 보며, 이 서신이 도착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것이 희생되었을지 짐작했다.벽류진과 떨어진 또 하나의 무사들의 거처 훈련장 한쪽에서는 일반 무사들이 땀범벅이 된 채 훈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목검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그들은 영주가 보낸 서신 따위는 알지 못한 채, 오직 살아남기 위해 오늘 하루를 견디고 있었다. 렌은 그들 사이를 지나치며 무사들의 자세를 교정해주었다. 한 무사가 힘겨운 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훈련으로 인해 바닥에 파
제 30화피비린내가 잦아든 벽류진의 마당은 다시 기묘한 정적에 잠겼다. 괴물 까마귀들이 남긴 검은 깃털과 파괴된 잔해들 사이로, 야츠키가 정성껏 키워온 꽃들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붉고 선명하게 피어올랐다. 야츠키는 손에 든 지우산을 털며,전투의 여파로 엉망이 된 화단 앞에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눈가에는 살육의 전율 대신에 짓밟힌 꽃잎을 향한 안타까움만이 서려 있었다."이 꽃들은... 다 제가 직접 피워낸 것들인데."그녀의 시선은 놈들의 흉측한 사체보다 꺾여버린 줄기들에 고정되어 있었다. 야츠키에게 이곳은 자신을 가둔 요새였지만, 동시에 매일 아침 함께 꽃향기를 나누고 정원을 가꿔온 무사들과의 터전이기도 했다. 그녀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타인과 마음을 나누는 법을 배웠고 그것은 그녀에게 지배가 아닌 '생존'과 '정(情)'이라는 이름의 유대감이었다.야츠키는 전투 중에 렌의 팔에 깊게 패인 상처와 놈들의 공격을 받아내느라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시온을 번갈아 보았다. 시온은 방금 전까지 참월도를 휘두르며 그녀의 앞을 막아섰던 그 모습 그대로, 피비린내가 밴 칼날을 쥔 채 야츠키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그들의 갑옷 곳곳에는 놈들의 끈적한 체액과 잿빛 먼지가 가득했지만, 그들의 눈은 오직 그녀에게만 향해 있었다. "시온님, 괜찮아요? 렌도요. 다들 너무 무리한 거 아니에요?"야츠키의 말투에는 어떠한 권위도 전략적인 계산도 없었다. 그저 함께 정원을 돌보던 이들이 다치지 않았는지 묻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순수한 걱정만이 배어 있었다. 그녀가 렌의 상처 입은 팔을 조심스럽게 살피려 하자 렌이 뒤로 물러서며 조심스레말했다."야츠키님,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피가 묻습니다. 당신의 옷이 더러워지는 것이 두렵습니다."가란은 도끼를 땅에 내려놓으며 헛기침을 했다. 그는 평소 야츠키를 '가둬야 할 위험한 도깨비'라고만 정의해 왔다. 하지만 방금 전,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전장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어 위험을 감수했던 그녀의 등을 보았던 기억이 뇌리에 박혀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