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제5화
"비켜라, 렌. 그게 네놈이 150년이 걸린 전쟁터에서 배운 유일한 재주냐?"
가란의 목소리에는 살기가 서려 있었다. 20대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징검다리의 삭막함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차갑고 날카로운 음성이었다. 렌은 쌍단검을 쥔 손에 하얗게 힘을 주며 버텼다. 가란의 도끼가 렌의 어깨 근처를 위협하듯 호를 그리며 맴돌았다.
렌의 발밑으로는 흙먼지가 피어올랐고, 등 뒤에서 느껴지는 야츠키의 얕은 숨소리는 그를 더욱 절박하게 만들었다.
그 뒤에서 야츠키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잘려 나간 손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피는 그녀가 태어나 처음 느끼는 잔혹한 현실이었다. 뼈가 끊어지는 통증과 낯선 인간들의 광기,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를 사냥감으로 응시하는 저들의 눈빛이 그녀를 짓눌렀다. 야츠키는 렌의 넓은 등을 보았다.
자신을 향해 칼날을 겨누던 무사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방패가 되어준 사내.
‘왜…… 어째서 저 인간은 나를 지켜주는 거지?’
야츠키는 억울함과 공포가 뒤섞인 눈물을 뚝뚝 흘렸다. 흑, 흑 하며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는 징검다리의 무사들이 평생 들어본 적 없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가련한 소리였다. 그녀는 자신의 잘린 손목을 반대쪽 손으로 감싸 쥐며 몸을 웅크렸다. 상처 부위에서 느껴지는 타는 듯한 작열감은 그녀가 꿈꿔왔던 안온한 낙원의 기억을 산산조각 내기에 충분했다.
신지로는 조용히 그 광경을 관찰했다. 그는 안경 너머로 야츠키의 요기를 세밀하게 분석하기 시작했다.
‘피의 색과 요력의 밀도가 달라. 보통의 도깨비가 비린내를 풍기는 짐승이라면, 이 녀석은 안개 그 자체를 몸에 두르고 있어. 징검다리위 생존을 위해 공존해 사는 도깨비들의 얕은 요기와는 격이 다르지. 꽤나 오랜 세월 동안 하늘 위에서 홀로 존재해 온 모양이야.’
분석을 마친 신지로의 머릿속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고결한 요기를 가졌음에도, 정작 전투 능력은 갓 태어난 도깨비보다 못했다. 습격당해 당황한 것인가, 아니면 정말로 살생을 거부해온 탓인가. 그 기묘한 모순이 신지로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는 야츠키가 흘리는 눈물조차도 어떤 화학적 반응인지, 혹은 순수한 감정의 발로인지 계산하고 있었다.
가란은 도끼를 든 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전쟁통에 태어나 10년 이상 도깨비를 썰어버리는 것이 생업이었던 그에게,
도깨비가 자신을 보며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전투의 의욕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하지만 그가 이어받은 ‘도깨비 척결’이라는 혈통의 의무는 도끼를 내릴 명분을 허락하지 않았다.
"렌, 적당히 해라. 네놈이 짊어질 짐이 아니야." - 가란
"이 여인은 다릅니다. 보십시오, 놈들과는 피부터가 다릅니다!"
렌은 야츠키를 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지금 야츠키에게 닿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안개 요력이 요동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렌은 신지로를 똑바로 응시하며 설득을 시도했다.
"신지로 님, 도깨비라면 죽이는 게 끝이지만, 이 여인은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습니다. 데려가서 관찰하십시오. 그게 무사들의 생존을 위한 더 나은 전략 아닙니까?"
신지로는 옅은 미소를 띠며 가란의 도끼 끝을 손으로 부드럽게 눌러 내렸다.
"렌의 말이 일리가 있군. 가란, 녀석을 죽여봤자 시체 조각밖에 남지 않아. 일단 묶어서 우리 진영으로 끌고 가자. 놈의 요력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진영에서 천천히 파헤쳐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야츠키는 체념한 듯 고개를 숙였다. 도망칠 구석도, 반격할 힘도 없었다. 그녀는 잘린 손목을 반대쪽 손으로 꽉 쥐며 훌쩍였다. 그 모습이 너무나 무방비하여, 가란마저도 혀를 내두르며 밧줄을 꺼냈다. 가란은 야츠키의 팔을 거칠게 잡아 밧줄로 묶었다. 도깨비의 피부는 인간보다 훨씬 부드러웠고, 마치 닿으면 안 될 것을 만지는 것처럼 기분이 묘했다.
진영지로 돌아가는 길은 침묵뿐이었다. 숲의 비린내와 인간들이 피운 불길의 연기 냄새가 야츠키의 후각을 찔렀다.
렌은 야츠키의 옆에서 서투르게 발걸음을 맞췄다. 다른 무사들이 보이지 않는 틈을 타, 그는 야츠키에게 나직하게 속삭였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곧 붕대를 감아드릴 겁니다."
그 목소리에는 야츠키가 알지 못했던 따스함이 묻어 있었다. 야츠키는 렌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뺨에 맺힌 눈물 자국이 렌의 가슴을 저몄다. 한편, 앞서 걷던 신지로가 가란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가란, 저 여인의 잘린 단면을 보았나? 재생 속도가 일반 도깨비보다 훨씬 느려. 살생을 업으로 삼지 않은 도깨비가 요력을 어떻게 보존하는지, 그리고 저 무른 성품이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궁금하지 않나?"
가란은 묵묵부답이었다. 그에게 야츠키는 그저 베어야 할 대상이었지만, 그녀의 눈물은 그의 기억 속에 깊은 파동을 남겼다.
진영에 도착하자 신지로는 주저 없이 붕대를 꺼내 야츠키의 잘린 손목을 감싸기 시작했다. 야츠키는 붕대가 닿을 때마다 움찔거리며 눈물을 쏟아냈다. 잘린 부위에서 요기가 몽글몽글 피어오르며 살이 차오르는 기묘한 현상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도깨비는 원래 상처가 금방 회복되지. 조금만 있으면 살이 차오를 거야. 그러니까 그 미련한 울음소리 좀 그치라고. 듣는 내 귀가 다 피곤하군."
신지로의 말투는 퉁명스러웠지만, 붕대를 감는 손길만큼은 약제사답게 섬세했다. 그는 야츠키의 눈물 젖은 얼굴을 보며, 렌이 왜 이토록 그녀에게 집착했는지 서서히 이해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감정을 흉내 내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도깨비의 탈을 쓴 또 다른 존재인지.
야츠키는 신지로의 차가운 눈빛과 렌의 따뜻한 시선 사이에서, 자신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8명의 늑대들 사이에 갇혔음을 깨달았다. 안개 너머의 낙원은 그렇게 철저히 유린당했다. 이제 야츠키에게 남은 것은 오직 이 기묘한 포로 생활뿐이었다.
밤이 깊어지자, 진영의 불길은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야츠키는 묶인 채 렌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 등이 가져다준 낯선 온기가, 언젠가 자신을 파멸로 이끌지도 모른다는 예감과 함께 그녀의 심장 끝을 맴돌았다.
무사들의 진영은 긴장감과 묘한 흥분으로 가득 찼다. 렌은 야츠키의 곁을 떠나지 않은 채 밤을 지새웠고, 신지로는 계속해서 그녀의 잘린 손목과 혈흔을 기록했다.
그녀의 눈물은 징검다리 위 8명의 무사들에게 어떤 폭풍을 가져올 것인가. 야츠키는 서서히 눈을 감으며, 꿈속에서 다시 매화 향기 가득한 정원을 거닐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하지만 현실의 밧줄은 너무나도 차가웠다.
이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야츠키라는 아름다운 꽃을 두고 벌어질, 인간과 도깨비의 그 모든 운명이 뒤섞인
서사가 비로소 잔혹한 막을 올리고 있었다.
렌은 밤새 자신의 선택이 옳은 것인지 끊임없이 자문했으나 야츠키의 가녀린 숨결을 들을 때마다, 그는 자신의 결정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어둠 속에서 야츠키의 손목은 천천히 아물어가고 있었지만, 운명은 점점 더 깊은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무사들의 차가운 시선과 렌의 서툰 보호 그 사이에서 야츠키는 어떤 변화를 맞이하게 될까.
긴 밤은 그렇게 끝이 나고 있었다.
하룻밤 사이 조회수가 늘어난 걸 보고 감동했어요 .. 제가 애정하고 좋아하는 글을 쓰면서도 읽어주시는 분들이 계시기에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정성껏 써내려가고 있답니다 진심으로 고마워요
제 52화 [번외] 등장인물 설정집&작품 배경 🌸 세계관 요약 세계관의 근본: 도깨비의 기원도깨비는 단지 외딴곳에서 튀어나온 괴물이 아니라 인간이 내다 버린 수많은 감정들이 지하로 스며들어 빚어져 나온 존재들입니다. 인간의 내면이 그대로 비치는 거울인 셈이죠.그 속에서 극단적인 어둠(비열, 쾌락, 질투 등 악함)을 대변하는 쿠로기리와, 반대로 가장 눈부신 결백함(순수, 배려, 천진난만함)을 품고 태어난 야츠키라는 두 축이 이 이야기의 거대한 뼈대를 이룹니다. 주인공: 야츠키 ( 夜月| 夜ツキ) 종족:도깨비\여성( 나이 약 100살)정체: 인간이 버린 감정의 거울. 순수, 배려, 천진난만함을 극한으로 품고 태어난 원념의 소산. 도깨비의 본질인 '착취와 파괴'를 거부하고 인간의 형상과 마음을 유지하고 있다.참고로 작중에 등장하는 '도깨비의 혈통'은 오랜 연식을 지녔거나 타고난 요기가 압도적으로 강함을 뜻하는 장치입니다능력 및 특징: 반투명한 요기를 지니고 감정적 요동에 따라 정도가 다르다. 늘 빨간 지우산을 휴대하며 주변에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고유한 능력을 지녔다. 이 지우산을 매개로 비행 능력이나 주변에 강력한 돌풍을 일으키는 풍력 조작도 가능하다. ✔️ 미관상의 아름다움 꽃: 분홍, 빨강 ✔️ 방어 (일시적인 오감 마비 효과 동반)의 꽃: 노랑, 파랑✔️ 극대노 (분노 폭발): 보라, 검정최고정예 무사들의 거처 ‘벽류진’의 도깨비 멸살이라는 살의 속에서 가장 취약하면서도 동시에 세상의 비극을 정화할 상징적인 존재로 그려졌다. 벽류진 정예 무사 8인 관계도 및 소개+모두 인간, 남성의 인물 렌|20살무기:이도류 _칼을 휘두를 때 ,은빛 잔상을 일으키며 일시적으로 도깨비가 내뿜는 요기나 독성을 제거야츠키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벽류진의 살육 병기가 아닌 '한 명의 여인'로 지켜내고자 했던 인물. 비극의 끝에서 야츠키의 곁을 지키며 새로운 평화를 맞이한다.가란|20대 중반무기:도끼_압도적인 힘과 파괴력으로 대지를
제 51화 에필로그(Epilogue) 영원히 흩날리는 꽃잎 아래의 밤[夜] 렌은 벽류진의 총대장 가란을 보좌하며 쉴 틈 없이 전장을 누볐고, 야츠키는 안개 너머 정원에서 묵묵히 그를 기다렸다. 가끔씩 렌이 비번(非番)을 받아 야츠키를 찾아가는 날은, 정원 전체의 공기가 옅은 분홍빛으로 물드는 듯했다. 낮에는 함께 꽃을 가꾸고 차를 나누며 평범한 연인처럼 시간을 보냈지만, 밤이 깊어지면 두 사람의 관계는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그리움만큼이나 뜨겁게 달아올랐다.어느덧 밤공기가 서늘해진 날, 정원에서 꽃잎을 정리하던 야츠키의 뒤로 다가온 렌이 그녀의 허리를 가만히 감싸 안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렌의 넓은 가슴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온기에, 야츠키는 비로소 온전한 안식처를 찾은 듯 긴장을 풀었다."오늘따라 꽃향기가 짙군요, 야츠키 님."렌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는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전장에서 렌이 마주하던 것은 언제나 피와 먼지, 그리고 죽음의 냄새뿐이었다. 그러나 이곳 야츠키의 품 안에서는 오직 평온함만이 존재했다. 렌에게 야츠키는 그가 지켜야 할 삶의 이유이자, 돌아올 수밖에 없는 유일한 항구였다."렌, 매번 이렇게 비번마다 찾아와주어 고마워요. 당신이 다시 떠날까 봐 늘 마음이 쓰였는데..."야츠키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렌의 눈동자에는 전장의 긴장감을 내려놓은, 오직 그녀만을 향한 뜨거운 열망이 일렁이고 있었다. 렌은 대답 대신 그녀의 옷고름을 천천히 풀어내렸다. 달빛 아래 드러난 그녀의 하얀 살결은 그가 7년 동안 벼려온 집착과 그리움을 동시에 깨우기에 충분했다."지난 7년 동안, 이 순간만을 꿈꿨습니다. 이제는 나의 밤을 오직 당신으로만 채우고 싶습니다."렌의 손길은 더없이 조심스러웠지만, 그 안에는 억눌러왔던 갈망이 묵직하게 담겨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서로의 옷을 서두르지 않고 벗겨내며, 서로의 온몸을 눈에 담았다. 야츠키는 그를 향해 보랏빛 요기 대신, 가장 부드럽고
제 50화 영원 그리고 우리의 재회[본편 완결]야츠키는 긴 어둠의 끝에서 서서히 눈을 떴다. 칠흑 같던 무의식의 강을 건너 현실로 돌아오는 과정은 마치 찢어진 살점이 다시 이어지는 듯한 고통과 안온함이 교차하는 과정이었다. 흐릿한 시야가 서서히 초점을 찾아가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의 손을 투박하고도 소중하게 감싸 쥐고 있던 렌의 젖은 눈가였다. 렌은 야츠키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포착하자마자, 며칠간의 긴장이 녹아내리는 듯한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 속에는 그동안 혼자 감내해야 했던 외로움과 그녀가 다시 돌아오리라는 믿음이 한데 섞여 있었다. 렌의 손은 따뜻했고, 그 온기는 야츠키가 아직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렌은 야츠키가 깨어난 것을 확인하자마자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안도감을 숨기지 못했다."야츠키 님, 정말... 정말 깨어나셨군요.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하실까 봐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릅니다. 당신이 없는 세상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어요."야츠키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쿠로기리와 맞서 싸우던 그날 밤, 핏빛 안개 속에서 보랏빛 요기를 내뿜으며 자신의 모든 것을 태워버렸던 기억은 이제 현실감이 없는 먼 꿈처럼 아득했다. 그녀는 희미한 기억의 파편을 짚어보려 애쓰며 갈라진 목소리로 떨리는 질문을 던졌다."렌님..벽류진은... 다들, 무사한가요?.. 미츠키 님은요? 그 자는, 그 괴물은 대체 어떻게 된 거죠? 저희가 그를 이긴 게 맞나요?"렌은 야츠키의 손을 더욱 따뜻하게 감싸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 무사합니다. 미츠키 님도 이미 안정을 되찾으셨고요. 당신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건 우리 모두의 내일입니다. 이제 두려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야츠키는 비로소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를 옥죄던 죄책감의 덩어리가 서서히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이제는 안식을 취해도 좋다는 안도감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며칠 후, 벽류진의 연무장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엄숙함과 비장함으로
제 49화 시대의 이음과 떠나는 그림자테츠잔이 떠난 뒤, 도깨비의 근원을 밝혀냈다는 승전보는 허망할 정도로 공허했다. 훈련장 도장 곳곳에는 그가 살아있을 때의 흔적이 박제처럼 남아 있었다. 매일 새벽이면 낮은 기합 소리와 함께 대나무를 가르던 칼소리가 울려 퍼지던 훈련장은 이제 텅 비어 있었다. 무사들은 그가 늘 앉아있던 평상 근처를 지날 때마다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평상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그의 낡은 찻잔과 훈련이 끝나면 툭툭 먼지를 털어내던 대장의 투박한 뒷모습이 눈앞에 선연했다." ’대장’님은... 이제 존재할 수없는 건가…."막내 렌이 훈련장 한구석에서 검의 손잡이를 꽉 쥔 채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대장이 없는 벽류진이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 우리는 무엇을 위해 다시 칼을 잡아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대장의 죽음은 그들의 세계가 무너져 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사들은 각자의 방에서, 혹은 연습장에서 혼자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늘어갔다. 도장 전체를 휘감은 무거운 침묵은 마치 거대한 늪처럼 생존자들을 옭아매고 있었다. 각자의 가슴 속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상실감과 동료를 잃었다는 죄책감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 깊은 침묵을 깬 것은 미츠키였다. 죽음의 문턱에서 며칠째 숨만 붙어있던 그가 깨어난 것은 발표이후 이틀이 지난 새벽이었다. 미츠키의 의식은 여전히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숨조차 쉬어지지 않는 답답한 공간, 그곳에서 미츠키는 홀로 길을 걷고 있었다.'야츠키를 지켰으니, 그걸로 됐다. 내가 없어도 훌륭한 자들이 있으니 우리가 이긴 거야.'미츠키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그 어둠의 길을 걸었다. 그것은 살아남은 자가 죽은 자에게 바치는 마지막 변명이었고 스스로를 짓누르는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듯한 고독함이 미츠키를 덮쳐왔다. 그때, 저 멀리서 희미한 형체가 보였다. 테츠잔이었다. 미츠키는 숨이 턱까지 차오를 정도로 달려갔다. 테츠잔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내려다보
제 48화 도깨비의 탄생의 진실영주 거처의 참화는 여전히 매캐한 잿내를 뿜어내며 폐허의 전경을 드러내고 있었다. 불에 탄 목재가 타다 남은 검은 뼈대 사이로 스산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신지로와 가란 그리고 엄선된 세 명의 전령은 무너진 기와집의 잔해를 하나하나 걷어내며 흔적을 찾고 있었다. 뼈대만 남은 무거운 서까래를 들어 올리던 전령 중 하나가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멈칫하며 신지로를 급히 불렀다."신지로 님, 이쪽을 봐주십시오... 바닥이 어딘가 이상합니다."전령이 가리킨 곳은 화마를 처절하게 겪고도 기이할 정도로 온전하게 보존된 거대한 돌문이었다. 주변의 모든 것이 재로 변했음에도 그 문만은 세월의 때와 음산한 기운을 그대로 머금고 있었다. 가란이 무거운 팔로 문을 밀어젖히자, 퀴퀴하고 낡은 종이 냄새가 훅 끼쳐왔다. 그것은 오랜 세월 외부와 차단된 지하 비밀 서고의 냄새였다. 그 안에는 쿠로기리가 남긴 수백 년의 방대한 기록이 어둠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신지로는 떨리는 손으로 횃불을 높이 들고 가죽 장정의 낡은 일기장을 펼쳤다. 책장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그동안 그들이 겪어왔던 도깨비들의 정체와 파편들이 퍼즐처럼 끔찍하게 맞춰지기 시작했다.인간과 도깨비가 지상을 두고 핏빛 전쟁을 벌인 끝에 항복을 받아내기까지 무려 150년이 걸렸다. 그리고 그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시작부터 끝까지, 어둠 속에서 인간의 파멸을 비웃으며 살아남은 자가 바로 오백 년을 넘게 살아온 쿠로기리였다.일기장의 갈피마다 기록된 지상의 역사는 충격적이었다. 쿠로기리가 태어났을 무렵의 지상에는 오직 인간들만이 번성해 있었고, 지하에는 무리도 짓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져 서로를 물어뜯던 몇 안 되는 원시적인 도깨비들만 살아가고 있었다. 놈들은 서로를 갉아먹다 우연히 지상이라는 신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밤의 어둠을 틈타 몇 명씩 기어올라와 인간을 사냥하기 시작했다.인간의 살과 피가 지고의 맛이라는 것을 깨달은 도깨비들의 밤마실은 갈수록 대담해졌고, 그
제 47화 재(灰) 위에 남겨진 진실벽류진의 의무실은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짙은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신지로는 익숙한 손길로 약재를 섞으며 회진을 시작했다. 그의 발걸음은 긴 전쟁사의 기록을 쫓는 연구자의 그것처럼 침착했으나, 내면에서는 수만 가지 가설이 뒤섞여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테츠잔과 유우의 빈자리가 의무실 전체의 무게를 바꿔놓은 듯했다.가장 먼저 야츠키의 곁에 멈춰 섰다. 재생은 더디지만 확실했다. 그 옆, 의식을 잃고 잠든 미츠키의 상태를 살핀 뒤, 그는 시온의 침상으로 향했다. 시온은 눈을 뜰 수 없음에도 신지로의 기척을 정확히 짚어냈다."신지로.""시온."신지로는 시온의 곁에 놓인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시온은 옅은 쓴웃음을 지었다. 보이지 않는 눈이 허공을 향했다."이제….무사로서는 끝이군.... 은퇴해야겠어. 다른 녀석들은 어떤가?.. 야츠키는... 아직도 상태가 안 좋은가?"신지로는 묵묵히 시온의 펄스를 짚었다. "야츠키는 살아있다. 모두 제 몫을 다했어. 오히려 의료라는 핑계로 최전선을 지켜보기만 했던 내가 면목이 없을 뿐이다. 시온, 너는 무사로서 할 일을 다했다.""아니. 전투원으로서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만 된 것 같아 찜찜하군.""그런 소리 마라. 네가 버텨준 덕분에 우리가 틈을 파고들며 움직일 수 있었던 거야."신지로는 특유의 무뚝뚝한 말투로 시온의 마음을 다독였다. 이어 그는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쿠로기리는 야츠키의 요기가 깃든 공격에 재생력을 잃었다. 그 틈을 타 마무리를 지었지. 하지만 이 모든 걸 감추기엔 상황이 너무 복잡해. 쿠로기리가 죽어간 그 영주 거처에 다시 가볼 생각이다. 뭔가 우리가 놓친 근거가 있을 거야."시온은 더 묻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회진의 마지막은 렌과 가란이었다. 둘의 몸은 만신창이였으나, 도깨비 사냥꾼 특유의 경이로운 회복력으로 상처는 눈에 띄게 아물고 있었다. 신지로는 가란의 어깨를 짚으며 상태를 확인했다."너희라도 멀쩡해서 다행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