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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hor: 구름잠
한지수의 다급한 외침이 멎자, 방 안에는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말도 안 되는 현실 앞에서 정신이 아찔해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출장 중이라던 이현민과 아프다던 한지수는 함께 있었던 것이었다.

그날 내가 전화기 너머로 토해 낸 울음은 두 사람의 뜨거운 밤에 기름을 붓는 자극제에 불과했다.

심지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사흘 동안에도 이현민은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장례가 끝난 뒤에도 나는 밤낮없이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고통 속에 빠져 살았다.

그런 나를 품에 안고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몇 번이고 달래 준 사람 역시 이현민이었다.

“괜찮아. 아버님은 별이 되어 계속 널 지켜 주실 거야. 나도 아버님을 대신해서 널 지켜 줄게.”

하지만 뒤늦게 드러난 진실은 너무도 추악해서 뺨을 얻어맞은 듯 정신이 아득했다.

이현민은 뒤늦게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깨달은 듯 겁먹은 얼굴로 내게 손을 뻗었다.

“미안해, 서린아. 내가... 감정이 격해져서 아무 말이나 내뱉었어.”

나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입안 가득 번졌다.

그리고 손에 잡히는 대로 방 안의 물건을 모조리 집어 던졌다. 얼마 전 찍은 결혼사진까지 벽에서 떼어 내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꺼져!”

액자 유리가 산산조각 나며 파편이 이현민과 나 사이로 길게 흩어졌다.

그때 다가오던 한지수가 내가 내던진 물건에 정면으로 맞았다.

“으악!”

한지수는 얼굴을 감싼 채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렀다.

이현민의 눈빛에 잠시 어렸던 죄책감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현민은 내 손목을 거칠게 움켜쥐더니 내가 들고 있던 앨범까지 쳐냈다.

앨범이 바닥에 세게 부딪히며 안에 있던 사진들이 사방으로 쏟아졌다.

바닥에 흩어진 사진마다 세 사람이 함께한 수많은 순간이 담겨 있었다.

이현민이 내게 고백했던 날.

내가 이현민에게 한지수를 처음 소개했던 날.

그리고 내 생일날, 이현민과 한지수가 소원을 비는 나를 바라보며 웃었던 순간까지.

“서린아, 무슨 소원 빌었어?”

“우리 셋이 평생 함께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내 손목을 움켜쥔 이현민의 손에서 조금씩 힘이 빠졌다.

이현민의 시선은 바닥에 흩어진 사진에 못 박혀 있었다.

이현민이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한지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현민 씨, 이마가 너무 아파... 피, 피 나는 것 같아!”

이현민은 곧바로 고개를 들어 바닥에 흩어진 사진을 짓밟으며 한지수에게 달려갔다.

내가 던진 보석함에 맞은 한지수의 이마에는 큰 상처가 생겨 피가 계속 흘러내렸다.

이현민은 한지수를 품에 안아 들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침실을 뛰쳐나갔다.

현관문 앞에 이르자 잠시 걸음을 멈췄지만, 끝내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지수는 네 가장 친한 친구잖아. 지수한테 이러면 안 되지. 지수도 충분히 힘들었어.”

이현민은 마지막 말을 남기고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한지수가 힘들었다고?

나와 한지수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다.

한지수의 집안 형편이 어렵다는 것을 알았기에 가장 좋은 것은 언제나 한지수에게 양보했다.

치킨을 먹을 때면 닭다리를 양보했고, 엄마가 새로 사 준 학용품도 모두 한지수에게 선물했다.

그런데 이제는 8년 동안 사랑한 남자까지 한지수에게 양보해야 했다.

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더는 흘릴 눈물조차 남지 않았는지,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밤이 되자 한지수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술에 잔뜩 취한 목소리였다.

“서린아, 나 정말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 나 좀 용서해 주면 안 돼? 널 잃고 싶지 않아... 우리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잖아. 남자 하나 때문에 우리 사이가 끝나는 건 싫어.”

한지수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만큼 서럽게 울었다.

잠시 뒤 술집 직원이 전화를 넘겨받아 말했다.

“저희 가게가 곧 마감인데요. 친구분이 너무 취하셔서 혼자 보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혹시 데리러 와 주실 수 있을까요?”

나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결국 외투를 챙겨 집을 나섰다.

한지수의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기 전, 나는 한지수를 잘 보살피겠다고 약속했었다.

나는 그 약속을 지키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집을 나섰다.

내가 술집에 도착했을 때, 이현민은 한지수를 벽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이현민은 벌이라도 주려는 듯 거칠게 한지수의 입술을 덮쳤다.

“한지수, 대체 몇 번이나 더 밀어낼 거야!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너라는 걸 알면서 왜 자꾸 거절하는데!”

한지수는 눈시울을 붉힌 채 이현민을 밀어냈다. 굵은 눈물이 한 방울씩 바닥으로 떨어졌다.

“현민 씨를 사랑하지만 서린이는 내게 하나뿐인 친구야! 내가 어떻게 서린이의 행복을 빼앗을 수 있겠어...”

“넌? 네 행복은 어떡할 건데!”

이현민은 한지수의 어깨를 힘껏 움켜쥔 채 절박한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

순간 가슴 깊이 억눌러 왔던 사랑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듯, 한지수는 이현민의 품으로 뛰어들어 온 힘을 다해 그를 끌어안았다.

“나도 현민 씨를 사랑해. 하지만... 서린이는 어떡해...”

한지수가 흐느끼는 사이, 나는 이현민이 누구를 선택했는지 똑똑히 보았다.

“서린이가 반대하면 내가 널 데리고 떠날게.”

나는 기둥 뒤에 몸을 숨긴 채 허탈하게 웃었다.

눈물로 흐릿해진 시야에 오래전의 일들이 겹쳐 보였다.

한지수는 석 달 치 월급을 몽땅 털어 온천 여행을 제안했었다.

그때의 이현민은 과일을 깎아 입에 넣어 줄 정도로 내게 지극정성을 다했다.

이현민과 한지수는 누가 나를 더 잘 챙기나 경쟁이라도 하듯 유치하게 서로를 견제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눈앞에 떠오른 장면들은 물거품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때 느꼈던 사랑과 우정,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은 이제 과거 속에만 남아 있었다.

나는 휴대전화를 꺼내 메일함 깊숙이 묻어 두었던 오퍼 메일을 찾아냈다.

이현민을 위해 이곳에 남기로 했었지만 이제는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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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들을 떠난 뒤, 내 삶이 시작됐다   제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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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들을 떠난 뒤, 내 삶이 시작됐다   제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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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들을 떠난 뒤, 내 삶이 시작됐다   제5화

    엄마가 퇴원하려던 날, 잠시 아래층에 다녀오는 사이 병실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서둘러 병실로 돌아와 보니 한지수가 엄마의 침상 앞에 무릎을 꿇고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빌고 있었다.“죄송해요, 이모. 제가 서린이에게 상처를 주고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어요. 제가 뻔뻔한 짓을 했어요. 현민 씨를 유혹한 것도 저예요. 때리셔도 좋고 욕하셔도 좋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떠날게요. 서린이가 다시 행복해질 수 있게 할게요!”간신히 건강을 회복하던 엄마는 한지수의 말에 또다시 큰 충격을 받았다.엄마는 한지수를 향해 매섭게 손가락질하며 벌떡 일어섰다.“입 다물어! 난 절대로 서린이를 쓰레기 같은 놈과 다시 만나게 하지 않을 거야!”그러나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엄마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엄마는 가슴을 움켜쥔 채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고 헐떡였다.“이모! 이모, 왜 그러세요?”한지수가 손을 뻗어 엄마를 부축하려 하자, 나는 한지수의 팔을 거칠게 쳐냈다.“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놀라 몸을 움츠린 한지수는 입술을 떨며 말을 더듬었다.“서린아... 나, 나는 이모한테 사과하러 온 거야.”나는 응급 호출 버튼을 누른 뒤 엄마를 겨우 부축해 침상에 눕혔다.눈시울을 붉힌 한지수가 내 팔을 붙잡고 상황을 설명하려 했다.나는 한지수가 입을 열기도 전에 있는 힘껏 뺨을 후려친 뒤 증오 어린 눈으로 노려보았다.“내 남자 친구를 빼앗은 것도 모자라 이제 우리 엄마까지 죽이려고 해? 한지수, 어떻게 이렇게까지 악랄할 수 있어!”세게 얻어맞은 한지수는 고개가 옆으로 홱 꺾였다.한지수의 뺨은 금세 부어올라 선명한 손자국이 남았다.나는 한지수의 팔을 세게 붙잡아 병실 밖으로 끌어내려 했다.그 순간 문 앞에 이현민이 나타났다.이현민은 한지수의 부어오른 뺨을 보자마자 눈빛이 돌변했다.“너 미쳤어? 지수는 네 둘도 없는 친구잖아!”이현민은 나를 거칠게 밀쳐 낸 뒤 한지수를 품으로 끌어당겼다.“괜찮아? 많이 아파?”이현민이 한지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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