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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떠난 뒤, 내 삶이 시작됐다

그들을 떠난 뒤, 내 삶이 시작됐다

By:  구름잠Completed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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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당일, 사회자가 결혼반지 교환 순서를 알리자, 맞은편에 서 있던 이현민이 불쑥 입을 열었다. “사실 나 지수랑 만나고 있어.” 충격으로 굳어 버린 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는데도 이현민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마치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를 꺼낸 듯 목소리마저 태연했다. “네가 웨딩드레스를 입어 보러 갔던 날, 지수랑 바로 옆 탈의실에서 했어. 지수가 참지 못하고 몇 번 신음을 흘렸는데, 넌 몸이 안 좋은 줄 알고 한참이나 걱정했지. 그러고 나서 네 옆에 섰을 때는 나도 다리가 후들거리더라.” 순간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했다. 나는 굳어 버린 몸을 억지로 돌려 하객석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절친 한지수를 바라보았다. 한지수는 손에 든 부케를 높이 치켜들며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한지수는 눈물을 글썽이며 내 드레스 자락을 정리해 주고는 반드시 행복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심지어 조금 전, 네가 메이크업을 받을 때도 지수는 내 허벅지 위에 올라타 있었어. 너무 긴장한 나머지 내 등에 상처가 날 만큼 손톱을 세웠더라고.” 모든 말을 마친 이현민은 손에 들린 결혼반지를 내려다보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강서린, 난 전부 말했어. 그래도 이 결혼을 이어 갈지는 네 선택에 맡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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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하객석은 무서울 만큼 조용했다. 모두가 신랑과 신부가 결혼반지를 주고받는 아름다운 순간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엄마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벅차오르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온몸의 힘이 모조리 빠져나간 듯 꼼짝도 하지 못했다.“왜... 하필 오늘이야?”팔다리는 피가 돌지 않는 듯 감각이 사라졌고, 손에 쥔 반지는 쇳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졌다.무언가가 가슴을 짓누르는 듯하여 숨이 턱 막혔다.이현민은 망연자실한 내 모습을 보고도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지수를 원망하지 마. 지수는 죽을 때까지 너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어. 하지만... 서린아, 난 더는 숨기고 싶지 않아. 지수를 만날 때마다 너한테 거짓말로 둘러대는 것도 지긋지긋하고, 잠자리를 가질 때마다 지수가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이제는 싫어.”한지수를 언급할 때 이현민의 눈빛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마치 나와의 결혼을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처럼 보였다.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이현민은 너무 들뜬 나머지 밤새 잠도 이루지 못하고 이불 속에서 바보처럼 웃기만 했다.“서린아, 우리가 정말 결혼하게 된다니. 꼭 꿈만 같아.”하지만 지금 이현민은 잔뜩 짜증이 난 얼굴로 선택을 재촉하고 있었다.“이현민, 이 개자식!”나는 눈물을 쏟으며 반지를 이현민의 얼굴에 내던졌다. 그리고 놀란 하객들을 뒤로한 채 결혼식장을 뛰쳐나갔다.내가 갑작스럽게 결혼을 깨 버리자, 모두가 충격에 빠졌다.한지수가 곧바로 내 뒤를 쫓아와 손목을 붙잡았다.“서린아, 왜 그래? 현민 씨가 너한테 무슨 짓 했어?”한지수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다급하면서도 화가 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하지만 내 눈에는 한지수의 목덜미에 선명하게 남은 키스 마크만 보였다.한지수에게 호감을 느끼는 사람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가장 먼저 축하부터 건넸다.한지수는 내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상대와 통화하며 노골적으로 애정을 표현했고, 하룻밤에 몇 번이나 관계를 했는지 자랑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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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한지수는 제자리에 얼어붙은 채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이현민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전부 말했어? 오늘은 두 사람 결혼식이 있는 날이잖아. 꼭 오늘 말해야 했어?”이현민이 대답할 새도 없이 한지수는 내게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서린아, 내 말 좀 들어 봐. 이건 실수였어!”실수라고?이현민이 나와 싸우고 집을 나갈 때마다 한지수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것도 단순한 우연이었을까?이현민과 함께 한지수의 집에 놀러 갔을 때, 정작 이현민이 나보다 집 안 구조를 훨씬 잘 알고 있었던 것도 우연이었을까?한지수가 키우는 강아지마저 이현민만 따랐다.어쩌면 나는 진작 눈치채야 했다.하지만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이었기에, 의심하면서도 애써 외면하며 바보가 되기를 택했다.“한지수, 너 정말 뻔뻔하구나!”분노가 이성을 집어삼켰다.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한지수의 뺨을 때린 뒤였다.이현민이 순식간에 달려와 나를 거칠게 밀쳐 냈다.“강서린! 너 미쳤어?”이현민은 한지수 앞을 막아선 채 혐오 어린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우리가 너한테 잘못한 건 맞아. 하지만 지수가 지금까지 너한테 얼마나 많이 양보했는지 잊었어? 같이 밥을 먹을 때마다 늘 네가 좋아하는 메뉴만 시켰고, 열이 펄펄 끓는데도 너와 콘서트에 가려고 끝까지 버텼어! 심지어 네 기분이 상할까 봐 온갖 수모를 견디면서도 5년 동안이나 관계를 숨겨 왔다고!”이현민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이번 한 번만 네가 지수한테 양보하면 안 돼?”이현민의 고함에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귀에서는 날카로운 이명만 울렸다.나와 이현민은 8년을 만났다.그런데 이현민과 한지수는 5년을 만났다고 했다.지난 5년 동안 이현민과 한지수는 내 코앞에서 부적절한 관계를 이어 왔다는 말이었다.이현민은 한지수와 잠자리를 가진 뒤에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나와 사랑을 나눴다.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뒤늦게 나를 쫓아온 엄마는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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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엄마의 입원 수속을 마친 뒤, 나는 간병에 필요한 짐을 챙기기 위해 집으로 돌아왔다.벽에는 나와 이현민이 눈이 시릴 만큼 환하게 웃고 있는 결혼사진이 여전히 걸려 있었다.액자를 걸던 날, 내 손이 닿지 않자 이현민은 나를 번쩍 안아 올려 주었다.침대에는 이현민과 함께 골랐던 새하얀 신혼 침구가 깔려 있었다.둘이 하나하나 쌓아 온 행복은 오늘 하루 만에 산산조각이 났다.침대 위에 캐리어를 펼치자마자 이현민이 돌아왔다.이현민은 또 내가 홧김에 짐을 싸는 줄 알았는지 곧장 침실로 들어왔다.“이 집은 네 거니까 굳이 나갈 필요 없어. 내가 나갈게. 전에 준 돈도 돌려주지 않아도 돼. 너한테 주는 보상이라고 생각해. 대신 지수는 더 이상 괴롭히지 마. 지수도 많이 힘들었어.”마지막 말을 듣는 순간, 애써 억눌렀던 감정이 다시 폭발했다.“이현민, 한지수가 힘들었다고? 그러면 나는? 가진 것 하나 없던 너를 만나 지금까지 곁을 지킨 나는...”“그만해.”이현민은 짜증스럽게 내 말을 끊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가진 것 하나 없던 때부터 내 곁을 지켜 주느라 네가 고생한 건 알아. 나도 다 알고 있어. 그래서 선택권을 너한테 준 거잖아. 강서린,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거 아니야?”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고,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이현민을 사랑한 세월만 8년이었다.물이 새는 허름한 자취방에서 함께 살았고, 라면 한 봉지를 나눠 먹으면서도 계란 하나 넣는 것조차 아까워했다.한창 꾸미고 다닐 나이에도 변변한 치마 한 벌조차 사 입지 못했다.그때는 부모님도, 한지수도 나를 안타까워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이현민은 내가 바라는 게 너무 많다고 했다.붉어진 내 눈을 본 이현민은 잠시 멈칫하더니 몸을 숙여 나를 품에 안고 예전처럼 달래기 시작했다."서린아, 말했잖아. 선택은 네가 하는 거야. ""모든 사실을 알고도 나와 결혼하고 싶다면, 결혼식은 다시 올리면 돼. ""하지만 지수도 정말 많이 상처받았어. 네가 나를 안을 때마다 지수는 애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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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한지수의 다급한 외침이 멎자, 방 안에는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말도 안 되는 현실 앞에서 정신이 아찔해졌다.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출장 중이라던 이현민과 아프다던 한지수는 함께 있었던 것이었다.그날 내가 전화기 너머로 토해 낸 울음은 두 사람의 뜨거운 밤에 기름을 붓는 자극제에 불과했다.심지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사흘 동안에도 이현민은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장례가 끝난 뒤에도 나는 밤낮없이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고통 속에 빠져 살았다.그런 나를 품에 안고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몇 번이고 달래 준 사람 역시 이현민이었다.“괜찮아. 아버님은 별이 되어 계속 널 지켜 주실 거야. 나도 아버님을 대신해서 널 지켜 줄게.”하지만 뒤늦게 드러난 진실은 너무도 추악해서 뺨을 얻어맞은 듯 정신이 아득했다.이현민은 뒤늦게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깨달은 듯 겁먹은 얼굴로 내게 손을 뻗었다.“미안해, 서린아. 내가... 감정이 격해져서 아무 말이나 내뱉었어.”나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입안 가득 번졌다.그리고 손에 잡히는 대로 방 안의 물건을 모조리 집어 던졌다. 얼마 전 찍은 결혼사진까지 벽에서 떼어 내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꺼져!”액자 유리가 산산조각 나며 파편이 이현민과 나 사이로 길게 흩어졌다.그때 다가오던 한지수가 내가 내던진 물건에 정면으로 맞았다.“으악!”한지수는 얼굴을 감싼 채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렀다.이현민의 눈빛에 잠시 어렸던 죄책감은 순식간에 사라졌다.이현민은 내 손목을 거칠게 움켜쥐더니 내가 들고 있던 앨범까지 쳐냈다.앨범이 바닥에 세게 부딪히며 안에 있던 사진들이 사방으로 쏟아졌다.바닥에 흩어진 사진마다 세 사람이 함께한 수많은 순간이 담겨 있었다.이현민이 내게 고백했던 날.내가 이현민에게 한지수를 처음 소개했던 날.그리고 내 생일날, 이현민과 한지수가 소원을 비는 나를 바라보며 웃었던 순간까지.“서린아, 무슨 소원 빌었어?”“우리 셋이 평생 함께할 수 있게 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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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엄마가 퇴원하려던 날, 잠시 아래층에 다녀오는 사이 병실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서둘러 병실로 돌아와 보니 한지수가 엄마의 침상 앞에 무릎을 꿇고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빌고 있었다.“죄송해요, 이모. 제가 서린이에게 상처를 주고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어요. 제가 뻔뻔한 짓을 했어요. 현민 씨를 유혹한 것도 저예요. 때리셔도 좋고 욕하셔도 좋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떠날게요. 서린이가 다시 행복해질 수 있게 할게요!”간신히 건강을 회복하던 엄마는 한지수의 말에 또다시 큰 충격을 받았다.엄마는 한지수를 향해 매섭게 손가락질하며 벌떡 일어섰다.“입 다물어! 난 절대로 서린이를 쓰레기 같은 놈과 다시 만나게 하지 않을 거야!”그러나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엄마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엄마는 가슴을 움켜쥔 채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고 헐떡였다.“이모! 이모, 왜 그러세요?”한지수가 손을 뻗어 엄마를 부축하려 하자, 나는 한지수의 팔을 거칠게 쳐냈다.“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놀라 몸을 움츠린 한지수는 입술을 떨며 말을 더듬었다.“서린아... 나, 나는 이모한테 사과하러 온 거야.”나는 응급 호출 버튼을 누른 뒤 엄마를 겨우 부축해 침상에 눕혔다.눈시울을 붉힌 한지수가 내 팔을 붙잡고 상황을 설명하려 했다.나는 한지수가 입을 열기도 전에 있는 힘껏 뺨을 후려친 뒤 증오 어린 눈으로 노려보았다.“내 남자 친구를 빼앗은 것도 모자라 이제 우리 엄마까지 죽이려고 해? 한지수, 어떻게 이렇게까지 악랄할 수 있어!”세게 얻어맞은 한지수는 고개가 옆으로 홱 꺾였다.한지수의 뺨은 금세 부어올라 선명한 손자국이 남았다.나는 한지수의 팔을 세게 붙잡아 병실 밖으로 끌어내려 했다.그 순간 문 앞에 이현민이 나타났다.이현민은 한지수의 부어오른 뺨을 보자마자 눈빛이 돌변했다.“너 미쳤어? 지수는 네 둘도 없는 친구잖아!”이현민은 나를 거칠게 밀쳐 낸 뒤 한지수를 품으로 끌어당겼다.“괜찮아? 많이 아파?”이현민이 한지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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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다음 날 이른 아침, 강렬한 햇살이 얼굴 위로 쏟아지자, 이현민은 잠에서 깨어났다.햇빛을 가리려고 팔을 들려던 이현민은 한지수가 자신의 팔을 베고 곤히 잠든 모습을 보고 멈칫했다.한지수의 평온한 얼굴을 바라보는 데도 마음은 이상할 만큼 공허했다.어제부터 지금까지 내게서는 메시지 한 통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예전 같았으면 나는 걱정부터 하며 어디에 있느냐고 따져 묻고 당장 집으로 돌아오라고 재촉했을 것이다.하지만 지나치게 조용한 휴대전화가 오히려 이현민을 초조하게 만들었다.이현민은 병원에서 나를 마지막으로 본 순간을 떠올렸다.당시 나는 바닥에 처참하게 쓰러져 있었고, 등 쪽 옷은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그러고도 조금씩 병실 밖으로 기어 나가 의사를 불러 달라고 외쳤다.이현민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당장이라도 나를 일으켜 주고 싶었다.하지만 내가 한지수를 매몰차게 밀어내는 모습을 보자 이번 기회에 따끔한 교훈을 줘야겠다고 마음먹었던 터였다.그래야 내가 앞으로 자기의 뜻대로 잘 따라줄 거라고 생각했을 테니까.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알 수 없는 불안이 점점 커지며 이현민을 옥죄었다.이현민은 한지수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팔을 빼냈지만, 한지수는 결국 잠에서 깨어났다.한지수는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채 눈을 비볐다.“현민 씨, 왜 그래?”“회사에 급한 일이 생겼어. 잠깐 나가서 전화 좀 하고 올게.”이현민은 적당히 둘러댄 뒤 침대에서 일어나 발코니로 향했다.이현민은 내게 전화를 걸었다. 이제라도 등의 상처는 괜찮은지, 엄마의 상태는 어떤지 묻고 싶었지만, 휴대전화 너머로는 부재중 안내 음성만 반복해서 흘러나왔다.“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삐 소리 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되며 통화료가 부과됩니다.”이현민은 그대로 굳어 버렸고, 불길한 예감이 서서히 밀려왔다.심상치 않은 기색을 알아차린 한지수도 침대에서 내려와 이현민의 곁으로 다가갔다.“혹시 서린이 찾는 거야?”한지수는 이현민의 휴대전화 화면을 힐끗 바라보다가, 내게 건 전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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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이현민은 문득 엄마가 쓰러진 이유를 떠올렸다.병실에 도착했을 때 엄마는 이미 기력이 다한 듯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당시 나는 한지수를 붙잡은 채 울부짖고 있었다.‘서린이가 괜히 화를 내며 고집을 부린 게 아니었어. 지수 때문에 장모님이 쓰러지신 거였어...’그런데도 이현민은 내 편에 서기는커녕 나를 밀쳐 냈다.심지어 등에 난 상처조차 외면한 채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이현민은 끝내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휴대전화를 쥔 손이 덜덜 떨렸다.“미안해, 서린아. 내가 잘못했어. 전부 내가 잘못했어. 제발... 제발 전화 좀 받아 줘.”이현민은 내 번호로 몇 번이고 전화를 걸며 제발 내가 받기를 간절히 바랐다.하지만 끝내 휴대전화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 음성만 들려왔다.이현민은 그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짓눌려 어떻게 병원을 빠져나왔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정신을 차리고 보니 차는 어느새 집 앞에 세워져 있었다.이현민은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집 안에 들어섰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소파 위에는 내가 입던 잠옷이 개어져 있었다.거실 탁자에는 반쯤 마시다 만 물컵이 놓여 있었고 컵 가장자리에 남은 물기마저 완전히 말라 있었다.이현민은 침실로 들어가 옷장 문을 열었다.옷장 안은 텅 비어 있었다.그제야 이현민은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정말 떠났어...’나는 아무 말도 남기지 않은 채 이현민의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침대 가장자리에 주저앉은 이현민은 협탁 위에 놓인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종이를 집어 들자, 병원에서 발급한 사망진단서라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엄마의 이름과 사망 원인, 사망 시각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엄마가 세상을 떠난 시각, 이현민은 한지수와 저녁을 먹고 있었다.당시 한지수는 불안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이렇게 가 버려도 정말 괜찮을까? 서린이 혼자 병원에 있잖아.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아무 일도 없을 거야. 괜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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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이현민은 전국 장례식장과 추모공원을 샅샅이 돌며 엄마의 이름을 확인했다.그러다 기적처럼 꽃이 가장 많이 피어 있는 추모공원에서 엄마의 이름을 찾아냈다.새로 세운 묘비에는 환하게 웃는 엄마의 사진이 새겨져 있었다.사진 속 미소는 엄마가 이현민을 만날 때마다 보여 주던 익숙한 미소였다.엄마는 늘 이현민의 손을 꼭 잡고, 눈꼬리를 곱게 휘며 말했다.“현민아, 이제 서린이를 너한테 맡길게. 우리 서린이한테 꼭 잘해 줘야 해.”이현민은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두 무릎이 바닥에 세게 부딪혔지만 통증조차 느끼지 못했다.“장모님...”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지만 목소리는 알아듣기 힘들 만큼 잠겨 있었다. 더는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내가 등이 찢어져 열일곱 바늘이나 꿰맬 정도로 다쳤을 때, 한지수의 상처에 냉찜질해 주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내가 수술실 앞에 홀로 무릎을 꿇고 엄마를 살려 달라고 빌던 순간, 한지수를 달래 잠재우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이현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오후부터 해가 완전히 저물 때까지도 묘비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관리인이 다가와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다시 오라고 재촉했지만, 이현민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관리인은 한숨을 내쉬고 결국 자리를 떠났다.밤이 되자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공기는 뼛속까지 시릴 만큼 차가워졌다.그래도 이현민은 묘비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머릿속에서는 지난날의 기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끊임없이 스쳐 갔다.이현민이 처음 우리 집에 인사하러 왔던 날, 엄마는 상다리가 휘도록 음식을 차려 놓고 쉴 새 없이 이현민의 그릇에 반찬을 올려 주었다. 그리고 너무 말랐다며 많이 먹으라고 했다.당시 이현민은 말주변도 없어 바보처럼 웃기만 했다.결혼을 약속한 날에는 엄마가 이현민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힘겨운 환경 속에서 일찍 철이 든 내가 늘 안쓰럽고 미안했다며 이현민에게 반드시 나를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했다.이현민은 엄마 앞에 무릎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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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이현민이 내 행방을 알아낸 건 한 달이 훌쩍 지난 뒤였다.이현민은 아는 사람들에게 닥치는 대로 연락하며 내 소식을 수소문했다.그러다 알고 지내던 지인에게서 연락을 받았다.“안주에서 서린 씨를 본 것 같아.”연락을 받은 이현민은 그날 바로 안주행 항공권을 샀다.비행기에서 내린 이현민은 공항 출구에 서서 낯선 도시를 바라보았다. 막상 도착하고 보니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 막막했다.안주시는 생각보다 훨씬 넓은 데다 회사도 셀 수 없이 많았다.이현민은 안주시에 있는 회사들을 검색해 일일이 전화를 걸었다.강서린이라는 직원은 없다고 답하는 곳도 있었고 용건을 듣자마자 전화를 끊어 버리는 곳도 있었다.오후부터 밤까지 전화를 건 탓에 휴대전화 배터리는 완전히 방전됐고 목까지 쉬었다.다음 날부터는 회사를 한 곳씩 직접 찾아다녔다.내 사진을 보여 주며 혹시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대부분은 미친 사람을 보듯 경계했지만 몇몇 친절한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이라며 다른 곳에도 알아보라고 했다.시간이 흐를수록 이현민은 눈에 띄게 야위었다. 눈은 점점 더 퀭해졌고 수염도 덥수룩하게 자랐다.어떤 날에는 편의점에서 산 빵 하나로 길가에 앉아 끼니를 때우면서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나를 찾을 수 있을지는 이현민도 확신하지 못했다.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그러던 어느 날 오후, 흥원구에 있는 한 디자인 회사를 찾아갔을 때, 안내 데스크 직원은 내 사진을 보더니 잠시 멈칫했다.“강서린 씨를 찾으세요?”이현민의 심장이 순간 덜컥 내려앉았다.“잠시만 기다리세요. 외부 미팅 때문에 나가셨는데 곧 돌아오실 거예요.”이현민은 로비에서 기다리는 대신 회사 건물 밖에 서서 조용히 나를 기다렸다.헝클어진 머리를 계속 매만졌고 손바닥에는 긴장한 탓에 땀이 흥건했다.회사로 돌아온 나는 입구에 서 있는 이현민을 보고 잠시 놀랐다.이현민이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난 건 처음이었다.예전의 이현민은 외모에 무척 신경을 쓰는 사람이었다.외출하기 전에는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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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8년.그래, 나는 이미 이현민에게 8년이라는 시간을 낭비했다.인생에 8년이라는 시간이 대체 몇 번이나 있을까.이현민은 연신 이마를 바닥에 찧었다. 그 강도는 점점 더 세졌다. 피를 흘리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지난 8년 동안 내게 준 상처에 대해 속죄하려는 듯했다.주변에는 행인들이 하나둘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걸음을 멈추고 저마다 한마디씩 보태며 무슨 일인지 추측했다.누구보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온 이현민이었지만, 지금은 주변의 시선 따위는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이마를 바닥에 찧을 뿐이었다.“일어나.”하지만 이현민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세게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이현민, 이렇게 한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아? 이미 벌어진 일은 되돌릴 수 없고, 엄마도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됐어. 이제 와서 이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서린아...”이현민은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내가 이렇게 너를 찾아오면 안 된다는 것도 알아. 네가 나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 너한테 너무 많은 잘못을 저질렀고, 이제 와 아무리 미안하다고 해도 소용없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난 정말... 정말 너를 잃을 수 없어.”이제 와서 절절하게 진심을 털어놓는 이현민을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그동안 꾹 눌러 두었던 설움이 다시 목 끝까지 차올랐다.나는 더는 참지 않고 몸을 숙여 이현민의 뺨을 힘껏 후려쳤다.“너 같은 쓰레기는 용서받을 자격도 없어. 정말 미안하면 차라리 죽어 버려. 그러면 내 속이라도 조금 풀릴 테니까.”이현민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뺨을 맞은 충격에 고개가 옆으로 홱 돌아갔고 얼굴에는 붉은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이현민이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이미 회사 안으로 들어간 뒤였다.경비원들이 몰려와 이현민을 에워쌌다.“자, 이제 그만 일어나서 나가세요! 회사 직원도 아니면서 여기서 무슨 소란입니까? 또 찾아와 행패를 부리면 바로 경찰에 신고하겠습니다!”이현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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