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결혼식 당일, 사회자가 결혼반지 교환 순서를 알리자, 맞은편에 서 있던 이현민이 불쑥 입을 열었다. “사실 나 지수랑 만나고 있어.” 충격으로 굳어 버린 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는데도 이현민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마치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를 꺼낸 듯 목소리마저 태연했다. “네가 웨딩드레스를 입어 보러 갔던 날, 지수랑 바로 옆 탈의실에서 했어. 지수가 참지 못하고 몇 번 신음을 흘렸는데, 넌 몸이 안 좋은 줄 알고 한참이나 걱정했지. 그러고 나서 네 옆에 섰을 때는 나도 다리가 후들거리더라.” 순간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했다. 나는 굳어 버린 몸을 억지로 돌려 하객석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절친 한지수를 바라보았다. 한지수는 손에 든 부케를 높이 치켜들며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한지수는 눈물을 글썽이며 내 드레스 자락을 정리해 주고는 반드시 행복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심지어 조금 전, 네가 메이크업을 받을 때도 지수는 내 허벅지 위에 올라타 있었어. 너무 긴장한 나머지 내 등에 상처가 날 만큼 손톱을 세웠더라고.” 모든 말을 마친 이현민은 손에 들린 결혼반지를 내려다보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강서린, 난 전부 말했어. 그래도 이 결혼을 이어 갈지는 네 선택에 맡길게.”
View More8년.그래, 나는 이미 이현민에게 8년이라는 시간을 낭비했다.인생에 8년이라는 시간이 대체 몇 번이나 있을까.이현민은 연신 이마를 바닥에 찧었다. 그 강도는 점점 더 세졌다. 피를 흘리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지난 8년 동안 내게 준 상처에 대해 속죄하려는 듯했다.주변에는 행인들이 하나둘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걸음을 멈추고 저마다 한마디씩 보태며 무슨 일인지 추측했다.누구보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온 이현민이었지만, 지금은 주변의 시선 따위는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이마를 바닥에 찧을 뿐이었다.“일어나.”하지만 이현민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세게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이현민, 이렇게 한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아? 이미 벌어진 일은 되돌릴 수 없고, 엄마도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됐어. 이제 와서 이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서린아...”이현민은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내가 이렇게 너를 찾아오면 안 된다는 것도 알아. 네가 나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 너한테 너무 많은 잘못을 저질렀고, 이제 와 아무리 미안하다고 해도 소용없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난 정말... 정말 너를 잃을 수 없어.”이제 와서 절절하게 진심을 털어놓는 이현민을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그동안 꾹 눌러 두었던 설움이 다시 목 끝까지 차올랐다.나는 더는 참지 않고 몸을 숙여 이현민의 뺨을 힘껏 후려쳤다.“너 같은 쓰레기는 용서받을 자격도 없어. 정말 미안하면 차라리 죽어 버려. 그러면 내 속이라도 조금 풀릴 테니까.”이현민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뺨을 맞은 충격에 고개가 옆으로 홱 돌아갔고 얼굴에는 붉은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이현민이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이미 회사 안으로 들어간 뒤였다.경비원들이 몰려와 이현민을 에워쌌다.“자, 이제 그만 일어나서 나가세요! 회사 직원도 아니면서 여기서 무슨 소란입니까? 또 찾아와 행패를 부리면 바로 경찰에 신고하겠습니다!”이현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현민이 내 행방을 알아낸 건 한 달이 훌쩍 지난 뒤였다.이현민은 아는 사람들에게 닥치는 대로 연락하며 내 소식을 수소문했다.그러다 알고 지내던 지인에게서 연락을 받았다.“안주에서 서린 씨를 본 것 같아.”연락을 받은 이현민은 그날 바로 안주행 항공권을 샀다.비행기에서 내린 이현민은 공항 출구에 서서 낯선 도시를 바라보았다. 막상 도착하고 보니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 막막했다.안주시는 생각보다 훨씬 넓은 데다 회사도 셀 수 없이 많았다.이현민은 안주시에 있는 회사들을 검색해 일일이 전화를 걸었다.강서린이라는 직원은 없다고 답하는 곳도 있었고 용건을 듣자마자 전화를 끊어 버리는 곳도 있었다.오후부터 밤까지 전화를 건 탓에 휴대전화 배터리는 완전히 방전됐고 목까지 쉬었다.다음 날부터는 회사를 한 곳씩 직접 찾아다녔다.내 사진을 보여 주며 혹시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대부분은 미친 사람을 보듯 경계했지만 몇몇 친절한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이라며 다른 곳에도 알아보라고 했다.시간이 흐를수록 이현민은 눈에 띄게 야위었다. 눈은 점점 더 퀭해졌고 수염도 덥수룩하게 자랐다.어떤 날에는 편의점에서 산 빵 하나로 길가에 앉아 끼니를 때우면서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나를 찾을 수 있을지는 이현민도 확신하지 못했다.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그러던 어느 날 오후, 흥원구에 있는 한 디자인 회사를 찾아갔을 때, 안내 데스크 직원은 내 사진을 보더니 잠시 멈칫했다.“강서린 씨를 찾으세요?”이현민의 심장이 순간 덜컥 내려앉았다.“잠시만 기다리세요. 외부 미팅 때문에 나가셨는데 곧 돌아오실 거예요.”이현민은 로비에서 기다리는 대신 회사 건물 밖에 서서 조용히 나를 기다렸다.헝클어진 머리를 계속 매만졌고 손바닥에는 긴장한 탓에 땀이 흥건했다.회사로 돌아온 나는 입구에 서 있는 이현민을 보고 잠시 놀랐다.이현민이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난 건 처음이었다.예전의 이현민은 외모에 무척 신경을 쓰는 사람이었다.외출하기 전에는 반
이현민은 전국 장례식장과 추모공원을 샅샅이 돌며 엄마의 이름을 확인했다.그러다 기적처럼 꽃이 가장 많이 피어 있는 추모공원에서 엄마의 이름을 찾아냈다.새로 세운 묘비에는 환하게 웃는 엄마의 사진이 새겨져 있었다.사진 속 미소는 엄마가 이현민을 만날 때마다 보여 주던 익숙한 미소였다.엄마는 늘 이현민의 손을 꼭 잡고, 눈꼬리를 곱게 휘며 말했다.“현민아, 이제 서린이를 너한테 맡길게. 우리 서린이한테 꼭 잘해 줘야 해.”이현민은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두 무릎이 바닥에 세게 부딪혔지만 통증조차 느끼지 못했다.“장모님...”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지만 목소리는 알아듣기 힘들 만큼 잠겨 있었다. 더는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내가 등이 찢어져 열일곱 바늘이나 꿰맬 정도로 다쳤을 때, 한지수의 상처에 냉찜질해 주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내가 수술실 앞에 홀로 무릎을 꿇고 엄마를 살려 달라고 빌던 순간, 한지수를 달래 잠재우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이현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오후부터 해가 완전히 저물 때까지도 묘비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관리인이 다가와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다시 오라고 재촉했지만, 이현민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관리인은 한숨을 내쉬고 결국 자리를 떠났다.밤이 되자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공기는 뼛속까지 시릴 만큼 차가워졌다.그래도 이현민은 묘비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머릿속에서는 지난날의 기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끊임없이 스쳐 갔다.이현민이 처음 우리 집에 인사하러 왔던 날, 엄마는 상다리가 휘도록 음식을 차려 놓고 쉴 새 없이 이현민의 그릇에 반찬을 올려 주었다. 그리고 너무 말랐다며 많이 먹으라고 했다.당시 이현민은 말주변도 없어 바보처럼 웃기만 했다.결혼을 약속한 날에는 엄마가 이현민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힘겨운 환경 속에서 일찍 철이 든 내가 늘 안쓰럽고 미안했다며 이현민에게 반드시 나를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했다.이현민은 엄마 앞에 무릎을
이현민은 문득 엄마가 쓰러진 이유를 떠올렸다.병실에 도착했을 때 엄마는 이미 기력이 다한 듯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당시 나는 한지수를 붙잡은 채 울부짖고 있었다.‘서린이가 괜히 화를 내며 고집을 부린 게 아니었어. 지수 때문에 장모님이 쓰러지신 거였어...’그런데도 이현민은 내 편에 서기는커녕 나를 밀쳐 냈다.심지어 등에 난 상처조차 외면한 채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이현민은 끝내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휴대전화를 쥔 손이 덜덜 떨렸다.“미안해, 서린아. 내가 잘못했어. 전부 내가 잘못했어. 제발... 제발 전화 좀 받아 줘.”이현민은 내 번호로 몇 번이고 전화를 걸며 제발 내가 받기를 간절히 바랐다.하지만 끝내 휴대전화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 음성만 들려왔다.이현민은 그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짓눌려 어떻게 병원을 빠져나왔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정신을 차리고 보니 차는 어느새 집 앞에 세워져 있었다.이현민은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집 안에 들어섰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소파 위에는 내가 입던 잠옷이 개어져 있었다.거실 탁자에는 반쯤 마시다 만 물컵이 놓여 있었고 컵 가장자리에 남은 물기마저 완전히 말라 있었다.이현민은 침실로 들어가 옷장 문을 열었다.옷장 안은 텅 비어 있었다.그제야 이현민은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정말 떠났어...’나는 아무 말도 남기지 않은 채 이현민의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침대 가장자리에 주저앉은 이현민은 협탁 위에 놓인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종이를 집어 들자, 병원에서 발급한 사망진단서라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엄마의 이름과 사망 원인, 사망 시각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엄마가 세상을 떠난 시각, 이현민은 한지수와 저녁을 먹고 있었다.당시 한지수는 불안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이렇게 가 버려도 정말 괜찮을까? 서린이 혼자 병원에 있잖아.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아무 일도 없을 거야. 괜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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