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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충격으로 일렁이는 육경서의 눈동자는 제발 이 모든 게 거짓말이라고 말해 달라고 호소하는 듯했지만 육시준은 그의 시선을 무시한 채 비서에게 분부했다.

“강유리, 그리고 그 집안에 대해 제대로 알아봐줘요.”

3년 동안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사라졌다가 귀국하자마자 결혼이라니.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을 강행하는 걸 보면... 뭐에 쫓기는 듯한데.

육시준은 그 답이 그녀의 집안에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알겠습니다. 해외 유학생활에 대해서도 알아볼까요?”

어제 비서가 급하게 구한 자료에선 그저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3년 간 도피 유학을 떠났다는 정보가 전부, 그 3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적혀있지 않았다.

“아니요.”

‘그건 그 여자 입으로 직접 들어야겠어...’

하지만 육경서는 여전히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린 모습이다.

여기 오면서 비서에게 대충 들은 바로는 어제 일부러 육시준 차에 스크래치를 내놓고 오늘 못 알아보는 척 결혼 제안을 한 여자라던데...

‘아무리 생각해도 꽃뱀 같단 말이야. 뭔가 냄새가 나... 구린 냄새가...’

“형, 그 여자 진짜 형 얼굴 모르는 거 맞아?”

서울시에서 한정판 롤스로이스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육시준 한 사람뿐.

그의 차가 곧 그의 얼굴이자 이름 같은 존재인데 아무리 갓 귀국했다지만 그걸 못 알아봤다는 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동생의 질문에 잠깐 고민하던 육시준 역시 고개를 저었다.

“글쎄..”

“그런데 왜...”

“내가 알아서 해.”

동생의 말을 잘라버린 육시준이 말을 이어갔다.

“아, 아주머니한테 내 짐 좀 정리해 달라고 부탁해 줘. 오늘부터 와이프랑 같이 살아야 하니까.”

한편, 강유리는 외할아버지를 만나러 병원에 들른 뒤에야 집으로 향했다.

마침 저녁 시간, 문 앞에 차를 댄 강유리는 검은색 철문 옆에 적힌 글씨를 보고 미간을 찌푸린다.

“성홍주”

강민영이 세상을 뜬 뒤로 성홍주는 강유리가 아직 어리다는 핑계로 재산을 전부 빼앗은 것도 모자라 첫사랑과 낳은 사생아까지 집안에 들였다.

빨리 어른이 되어 그녀만의 가정을 차리고 엄마가 남겨준 재산을 되찾는 것이 지금까지 그녀의 꿈이나 마찬가지였는데...

하필 남자친구, 아니 전 남자친구의 바람 상대가 사생아 성신영이라니.

악연도 이런 악연이 있나 싶었다.

“또각또각.”

깊은 한숨을 내쉰 강유리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문 비밀번호를 입력한 순간, “잘못된 비밀번호입니다”라는 기계음이 흘러나오고 강유리가 누르고 누르던 분노의 불꽃이 화르륵 타오르기 시작했다.

‘어쭈, 비밀번호까지 바꾸셨다?’

그리고 강유리는 휴대폰 앱을 꺼내 도어락을 스캔하고

“띠디딕.”

그녀를 문전박대할 생각으로 비밀번호를 바꾼 이의 마음이 무색하게도 문은 1초만에 열리고 말았다.

그리고 문이 열리는 순간, 거실에서 도란도란 들리던 대화 소리가 어색하게 멈춤과 동시에 수많은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언니, 어떻게 들어왔어?”

‘하, 너구나. 그 깜찍한 짓을 벌인게.’

소파에서 벌떡 일어난 성신영은 자신의 말실수를 눈치채고 바로 고개를 돌려버리고 왕소영이 어색한 미소와 함께 다가온다.

“어머, 유리, 정말 귀국했구나. 그이 전화도 계속 안 받고 그래서 난 신영이가 거짓말 하는 줄 알았잖아.”

친절한 목소리와 달리 가시 돋친 말에 성홍주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한편, 왕소영의 가식적인 미소를 마주하고 있자니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역겨움이 밀려오는 듯한 기분에 홱 손을 빼낸 강유리는 바로 성신영을 향해 쏘아붙였다.

“내가 내 집 오는데 네 허락까지 맡아야 하니?”

강유리에게 투명인간 취급을 당한 왕소영은 기분이 언짢았지만 그 동안 성홍주 앞에서만큼은 지고지순한 이미지를 유지해 왔음으로 다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신영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야. 집 비밀번호도 정기적으로 바꿔주는 게 좋다고 해서 우리끼리 상의해서 바꿨어. 사실 네 아빠도 오늘 바뀐 비밀번호 알려주려고 전화한 건데 네가 안 받아서 그만...”

“하, 의논? 누구 맘대로 우리 엄마 집 비밀번호를 당신들끼리 상의해.”

“...”

강유리의 말에 다른 세 사람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었다.

성홍주는 강씨 가문의 데릴사위, 평생 알게 모르게 눈칫밥을 먹다 아내인 강민영이 죽고 나서 그제야 허리를 펴고 가장 노릇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아이를 낳은 첫사랑과의 만남, 강민영과 달리 지고지순한 성격의 왕소영과 함께 살며 겨우 남자로서의 자존감을 되찾는 중이었는데 전 처 딸인 강유리가 다시 돌아오면서 그 알량한 자존심이 박살나버리고 만 것이다.

“강유리! 내가 그 동안 널 너무 오냐오냐 하면서 키웠지? 3년 동안 밖에서 보고 배운 게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배운 게 겨우 이거야?”

성홍주의 호통에 성신영, 왕소영 모녀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실렸다.

그리고 이때가 기회라고 판단한 건지 성신영이 바로 잔뜩 불쌍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아빠, 언니한테 너무 화내지 마. 언니가 오늘은 기분이 별로인가 봐.”

“참, 그건 그렇고 너 어제는 왜 그랬어? 네 동생이랑 미래의 제부를 한밤중에 쫓아냈어야 했어?”

이른 아침 눈물바람으로 달려와 어제 겪은 일을 털어놓던 딸의 얼굴을 떠올리니 성홍주는 다시 화가 치밀었다.

“그리고 네 동생한테 음식까지 던졌다면서. 너 그게 뜨거운 거였으면 어쩔 뻔했어. 네 여동생은 앞으로 대한민국 최고의 여배우가 될 아이야. 얼굴에 흉이라도 지면 어쩔 뻔했냐고!”

하지만 길길이 날뛰는 성홍주와 달리 강유리는 여전히 차분한 얼굴이다.

“어차피 다 뜯어고친 얼굴, 수술 한번 더 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너!”

“아빠, 자경원은 엄마가 나한테 남겨준 아파트예요. 저 계집애랑 임천강 그 찌질한 자식이 거기서 무위도식하는 걸 그럼 보고만 있어요? 무단침입으로 경찰에 신고 안 한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지.”

그의 호통에 강유리가 겁을 먹긴커녕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따박따박 대들자 성홍주는 더 대꾸도 못하고 부들부들 떨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 밤의 충격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니, 이제부터 시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강유리가 혼인신고서를 테이블에 툭 던졌다.

“저 결혼했어요. 이제 내 거였던 걸 다시 돌려받을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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