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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강유리의 말에 저택은 기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성신영과 왕소영 모녀는 잔뜩 경계 어린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성홍주는 커다래진 눈으로 물었다.

“너 어제 남자친구랑 헤어진 거 아니었니? 그런데 오늘 바로 결혼이라니. 이게 무슨...”

성홍주의 말에 강유리의 마음이 다시 무겁게 가라앉았다.

생물학적 아버지로서 조금이나마 가지고 있던 연민마저 산산조각나는 순간이었다.

“하, 아빠도 제가 어제 헤어진 걸 알고 계셨네요. 제가 연애를 하고 있는 것도 그렇게 예뻐하는 작은 딸이 자기 언니 남자친구를 빼앗은 것도 까맣게 모르고 계시는 줄 알았는데.”

강유리의 팩폭에 성홍주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었지만 곧 다시 근엄한 표정으로 그녀를 꾸짖기 시작했다.

“가족끼리 그런 일로 꼭 얼굴을 붉혀야 속이 시원하겠니!”

성홍주가 자기 편을 들어주자 의기양양해진 성신영이었지만 또다시 불쌍한 척을 하기 시작했다.

“나랑 천강 오빠가 언니한테 잘못한 게 맞는걸. 언니가 저렇게 화내는 것도 이해가 가. 우린 그냥 언니가 상처를 받을까 봐 제대로 날 잡고 사과하고 얘기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오해가 커질 줄은 몰랐어. 내가 맞아도 싸지 뭐.”

눈시울을 붉히는 성신영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성홍주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지만 성홍주의 눈에 성신영은 한없이 착하기만 한 예쁜 딸이었고 강유리는 자기 엄마를 꼭 닮아 강압적이고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히는 딸이었기에 마음이 성신영에게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

“네가 이렇게 뻣뻣하게 구니까 남자가 도망가는 거 아니야. 네 동생 반만 닮아봐. 천강이가 바람을 피웠겠어?”

“아빠, 죄송해요. 저한테 많이 실망하셨죠. 비록 신영이랑 제 남자친구가 저 몰래 바람을 피우긴 했지만 그래도 한 가족이니 축북해줬어야 했는데 맞죠? 그 집도 엄마가 저한테 남겨주신 주식까지 다 신영이한테 줄 걸 그랬어요.”

강유리가 성신영의 말투와 표정을 따라하고 이건 또 무슨 수작인가 싶어 세 사람이 어벙한 표정을 짓는다.

‘뭐? 집에 주식까지 전부?’

의아함 속에 살짝 깃든 탐욕을 캐치한 강유리가 피식 웃었다.

“저한테 이런 걸 바라세요?”

그제야 농락당했음을 인지한 성홍주가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쾅 하고 내리쳤다.

“너...”

“죄송한데 전 이런 역겨운 연기는 질색이라서요.”

말을 마친 강유리가 턱끝으로 계약서를 가리켰다.

“각설하고 사인이나 하시죠. 저도 저 두 사람 얼굴 보는 거 거북하니까요.”

잠시 후, 계약서 내용을 전부 확인한 성홍주가 벌떡 일어선다.

“서재로 따라와!”

두 사람이 사라지고 방금 전까지 생글생글 웃고 있던 왕소영이 성신영을 다그친다.

“천강이랑 강유리 정말 헤어진 거 맞아? 갑자기 결혼이라니.”

왕소영의 말을 듣고 있던 성신영의 표정도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까... 어제 강유리랑 결혼은 할 수 있다고 했었지? 설마...’

“지금 바로 오빠한테 물어볼게.”

한편, 서재.

성홍주가 계약서, 혼인신고서와 강유리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다.

소파에 앉은 채 긴 손가락으로 컵 변두리를 어루만지는 강유리의 모습에서 더 이상 3년 전 잔뜩 소녀의 얼굴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예상했다시피 성홍주는 강유리와 임천강, 성신영의 막장 이야기는 물론 지난 3년간 강유리가 해외에서 쌓은 성과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건방지고 제멋대로인 강유리는 결코 성공할 재목이 아니라고 그는 확신했다.

‘아무것도 안 주겠다고 하면 저 성깔에 또 날뛸 테니 대충 계열사 하나 던져주는 게 낫겠어.’

강유리가 집문을 들어선 순간부터 화만 내던 성홍주가 깊은 한숨과 함께 인자한 아버지인 척 미소를 지어보인다.

“아빠도 네 마음 이해해. 지난 3년간 네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도. 하지만 유강그룹이 구멍가게도 아니고. 네가 원한다고 바로 넘겨줄 수 있는 게 아니야...”

‘하, 왜 갑자기 불쌍한 척 해보시겠다?’

강유리가 바로 반박하려던 그때, 성홍주가 말을 이어갔다.

“유강그룹 산하의 엔터회사부터 맡아보는 게 어떻겠니? 너도 갑자기 대기업 총수가 되는 건 좀 무리지 않겠어? 요즘 엔터회사 상황도 아주 좋아. 곧 상장도 앞두고 있고. 올해 말까지 네가 만족스러운 성과를 낸다면 그땐 기꺼이 유강그룹을 내어주마. 네가 이번 일만 제대로 해낸다면 이사들도 다른 소리 못할 테고.”

얼핏 들으면 그녀를 위해 하는 말인 듯한 말투와 표정, 하지만 강유리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대한민국 엔터업계는 LK그룹 산하의 로열 엔터가 굴지의 1위를 차지하고 있고 최근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스타인 엔터가 그 뒤를 바짝 따르고 있는 그야말로 레드오션.

게다가 유강그룹의 엔터회사는 해마다 적자를 내고 있는 계열사 중 하나, 도대체 무슨 염치로 상황이 좋다고 하는 건지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괜히 찔리는지 성홍주가 뭔가 덧붙이려던 그때, 강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대신 이 시간부로 엔터회사에서 진행되는 모든 사안의 결정은 제가 내립니다.”

그의 제안에 강유리가 응하자 성홍주의 눈동자에 순간 비열한 웃음기가 서린다.

‘역시 아직 순진하단 말이야. 이런 미끼를 덥석 무는 걸 보면.’

행여나 강유리가 다시 말을 바꿀까 걱정됐던 건지 양도 계약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20분 뒤, 계약서를 든 강유리는 성신영 모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집을 나서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왕소영은 불안감으로 가슴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설마... 정말 유강그룹을 넘겨주기로 한 건가?’

곧이어 성홍주 역시 서재에서 나오자 모녀가 다급하게 달려간다.

“아빠, 정말 유강그룹 지분을 전부 언니한테 넘긴거야?”

초조하긴 왕소영도 성신영 못지 않았지만 앓던 이를 뺀 듯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남편의 얼굴을 본 순간 안심이 되었다.

“얘는. 그건 처음부터 유리 거였잖니. 다시 돌려주는 게 맞지.”

“그런 소리하지 마. 유강그룹은 우리 가족 거야. 엔터회사 하나 대충 던져줬어. 이 정도도 아직 살아있는 강학도 그 영감탱이만 아니었으면 이 정도도 안 줬어.”

최근 적자를 이어가고 있는 엔터회사만 양도했다는 말에 성신영과 왕소영이 말없이 눈을 마주치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참, 아빠 이만 화 풀어. 조금 있다가 천강 오빠 올 거야. 우리 오랜만에 가족끼리 오붓하게 저녁식사나 해.”

“천강이가 갑자기 왜?”

임천강, 그는 대영그룹 임철인 회장의 사생아이다.

비록 본처에게서 낳은 딸인 강유리보다 성신영을 훨씬 더 아꼈지만 워낙 남 얘기 좋아하는 이 바닥에서 알게 모르게 성신영을 사생아라고 비웃는 이들이 아직 많다는 걸 성홍주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성신영이 하필 역시 사생아인 임천강과 사귄다니.

끼리끼리 만난 거란 소리를 듣게 될까 봐 처음엔 반대했지만 최근 임천강이 경영 중인 스타인 엔터가 신생 엔터회사로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뒤로 대영그룹에서의 입지도 높아지자 못 이기는 척 성신영과의 교제를 허락하게 되었다.

“그냥 언니가 결혼을 했다고 하니까 직접 오겠다고 하던데?”

곧이어 성신영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형부는 어떤 사람인지 물어봤어?”

솔직히 방금 전, 어떻게 하면 회사 지분을 홀랑 가져가려는 강유리를 막을까에 대해서만 생각하다 보니 사위되는 사람의 이름도 확인하지 않은 성홍주였다.

‘성이 특이했지. 육 씨였던가...’

“언니가 유강그룹을 되찾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알잖아. 그래서 그 동안 천강 오빠한테 그렇게 집착했던 거고... 행여나 3년 전 같은 실수를 하진 않을지 걱정돼.”

“정신머리가 제대로 박혀있으면 다시 그런 짓은 못하겠지. 일단 누구랑 결혼했는지부터 알아봐야겠어.”

한편, 차에 탄 강유리는 계약서를 조수석에 휙 던져버렸다.

오늘 강유리는 애초에 정말 지분을 전부 빼앗으려고 본가를 찾은 게 아니었다.

성홍주, 어머니인 강민영을 말려죽인 것도 모자라 그녀가 유산을 이어받는 걸 막기 위해 자기 딸에게 말도 안 되는 루머를 뒤집어 씌워 해외로 유배를 보낸 사람이다.

외할아버지인 강학도까지 병상에 누워있는 지금, 애초에 이 한번으로 모든 걸 되찾을 수 있을 거라 기대도 하지 않았으니까.

강유리가 시동을 걸려던 그때, 또 다른 차 한 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익숙한 차량에서 내린 사람은 바로 임천강, 가로등 불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어 순간 눈이 부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때는 정말 눈부신 사람이라고 믿었었지... 이 더러운 바닥에서 진주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으니까...’

“강유리, 너 결혼했어? 하, 너도 다른 남자 만나고 있었으면서 어제 나한테 그 난리를 피운 거야? 네 남편은 네가 클럽 죽순이에 남자 더럽게 밝히는 걸레라는 거 알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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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미
18 연기하고 짜빠졌네 난 왜 감정 이입이 잘 될까? 18 작가가 글을 잘 써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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