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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مؤلف: 김빠진 콜라
고상윤은 심해린이 그러겠다고 하자마자 이성록더러 자료를 가져오라고 했다.

심해린이 할머니의 병실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이성록이 프린트한 ‘해명 원고’를 들고 급히 다가왔다.

“심해린 씨, 이제 시작해도 됩니다. 대표님께서 이 원고 그대로 읽으면 된다고 하셨어요.”

심해린이 원고를 내려다봤다. 심건우가 범인이고 명서아는 그저 속아서 변호를 맡았을 뿐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건...”

그녀가 입술을 달싹였다. 망설이는 기색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지금은 할머니의 행방이 더 중요했기에 그대로 따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심해린은 속으로 할머니만 무사히 하다면 반드시 증거를 찾아 심건우의 누명을 벗기겠다고 마음먹었다.

“심해린 씨 할머니가 입원하실 병실은 이미 다 준비했어요. 해경시에서 가장 실력 있는 의료진이 대기 중입니다.”

이성록이 금테 안경을 밀어 올리면서 무뚝뚝하게 말했다.

이건 거래였다. 할머니의 목숨을 살릴 수 있는 거래 말이다.

심해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고상윤은 더 이상 가면조차 쓰지 않았다. 명서아가 그토록 중요한 사람이라면 그때 왜 심해린과 결혼했을까?

그녀는 휴대폰을 들고 종이에 적힌 글을 읽어 내려갔다.

“저의 동생 심건우의 사건에 관해 많은 오해가 있어서 이렇게 해명을 드립니다. 명서아 변호사는 법정에서 자신의 소임을 다했습니다. 제가 사실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동생을 충분히 알지 못해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드린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이성록이 찍은 영상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 전달할게요. 할머니 곧 이쪽으로 이송될 겁니다.”

할 말을 마친 이성록은 심해린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가버렸다.

비서가 나간 뒤 병실 안에 숨 막히는 정적이 감돌았다. 갑자기 뼛속까지 시린 한기가 전해졌고 심건우에 대한 죄책감이 그녀를 덮쳤다.

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확인해보니 은행에서 온 메시지였다.

해경 병원의 십 년 치 병원비를 너끈히 지불할 수 있는 거액이 그녀의 계좌로 입금되었다.

이게 바로 고상윤의 방식이었다. 돈으로 사람의 입을 막는 것.

심해린은 고상윤이 그녀에게 대시했던 그 시절조차 진심이었는지 의심이 갔다. 명서아가 돌아온 지금 그 모든 시간이 더 허망하게 느껴졌다.

이혼하고 해외로 유학을 가고 싶은 마음이 점점 더 커졌다.

...

할머니는 곧바로 VIP 1인실로 옮겨졌다. 기계음이 규칙적으로 울렸고 할머니가 평온한 얼굴로 병상에 누워 있었다.

심해린은 침대 옆에 앉아 따뜻한 수건으로 할머니의 손을 닦아줬다. 주름진 얼굴을 보던 그녀는 할머니가 깨어난 후에 심건우의 상황을 물을까 봐 두려웠다.

그때 병실 문이 열리더니 명서아가 들어왔다.

패션쇼에나 어울릴 법한 의상과 액세서리가 소박하고 텅 빈 병실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할머니 뵈러 왔어요.”

명서아의 말투에 가식적인 걱정이 담겨 있었다.

“병실 좋네요. 오빠가 신경 많이 썼나 봐요.”

심해린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 고개를 숙인 채 계속 할머니의 손을 닦아줬다.

명서아도 개의치 않고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높지 않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오빠가 마음이 약해서 남이 힘들어하는 걸 못 보거든요. 서아 씨 동생 일도 그래요. 겉으로 무심한 척해도 속으로 얼마나 골치 아파했는지 몰라요. 영상 덕분에 여론도 잠잠해졌으니 오빠도 한숨 돌릴 수 있겠어요.”

그녀는 심해린을 내려다보면서 승리한 자의 미소를 지었다.

“해린 씨가 억울한 거 알아요. 하지만 자기 것이 아닌 걸 억지로 가지려 하면 탈이 나는 법이거든요. 난 오빠가 해린 씨한테 할 만큼 다했다고 생각해요.”

명서아가 고상윤에게 선물 받은 파텍필립 시계를 슬쩍 흔들어 보였다. 조명 아래 다이아몬드가 눈부시게 빛났다.

“사람은 분수를 알아야 해요. 분수에 맞지 않는 자리를 탐내어 오래 머물다가는 결국 화를 입게 될 거예요.”

심해린이 멈칫하더니 표정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눈앞의 화려한 여자를 빤히 쳐다봤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말 다 했어요? 다 했으면 나가요. 할머니 쉬시는 데 방해하지 말고요. 내 주제가 어떤지 정도는 나도 잘 알아요. 분수에 넘치는 자리를 애초부터 탐낸 적도 없고요. 이 자리를 원한다면 그냥 줄게요.”

명서아는 순간 멍해졌다. 심해린이 발끈하거나 우는 상황은 예상했지만 이토록 차분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해린 씨...”

“나가요.”

심해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쳐다보면서 다시 한번 말했다.

명서아가 분한 듯 입술을 깨물더니 콧방귀를 뀌고는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병실을 나갔다.

문이 닫힌 순간 심해린의 몸이 휘청거렸다. 서둘러 침대 가장자리를 잡고서야 중심을 잡았다.

이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더는 찰나의 충동이 아니었고 쇠못처럼 심해린의 머릿속에 단단히 박혀버렸다.

그녀는 할머니와 함께 이 숨 막히는 곳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심건우의 누명을 반드시 벗겨낼 생각이었다.

...

다음 날, 할머니가 아직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의사가 말했다. 심해린은 간병인에게 할머니를 부탁하고 곧장 구치소로 향했다.

두꺼운 방탄유리 너머로 심건우가 보였다.

불과 며칠 사이에 늘 해맑게 웃던 얼굴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광대뼈가 앙상하게 튀어나왔고 눈이 움푹 들어갔다. 헐렁한 죄수복을 입고 있는 모습은 어른 옷을 몰래 훔쳐 입은 아이처럼 더 야위고 볼품없어 보였다.

“누나.”

심해린을 보자마자 심건우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유리에 바짝 달라붙어 오열하기 시작했다.

심해린이 수화기를 들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건우야...”

“누나, 나 아니야. 정말 내가 죽인 게 아니야.”

수화기 너머로 심건우의 통곡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룸에 들어갔을 땐 그 여자 이미 소파에 누워 있었어. 미동도 없길래 술에 취해 잠든 줄 알고 깨우려던 찰나에 최태식 일행이 들이닥친 거야. 그러면서... 내가 죽였다고 몰아갔어. 누나, 정말 내가 안 죽였어. 제발 나 좀 믿어줘.”

심건우가 차가운 유리에 이마를 대고 눈물을 쏟았다.

아버지 심창엽이 심해린을 입양한 그날부터 몇 살 어린 동생은 껌딱지처럼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용돈을 아껴 누나에게 사탕을 사줬고 누나가 친구들에게 괴롭힘당할 때면 제일 먼저 나섰으며 나중에 크면 누나를 지켜주겠다고 했다.

그런 아이가 어찌 사람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심해린은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심건우의 유일한 희망이 심해린이었다.

그녀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

“무서워하지 마, 건우야. 누난 널 믿어.”

심해린의 말을 듣고서야 심건우는 조금씩 진정되는 듯했다. 그녀가 계속하여 또박또박 말했다.

“누나 말 잘 들어.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그 누구와도 충돌을 일으켜선 안 돼. 안에서 밥 잘 챙겨 먹고 잠도 잘 자고 몸조심해. 나머지는 전부 누나한테 맡겨.”

“누나...”

고상윤이 도와줄 생각이었다면 진작 나섰을 것이다. 심씨 가문이 망한 뒤에도 심해린은 떠나지 않았고 심건우와 할머니를 잘 돌봤다. 누나에 대한 미안함이 점점 더 커졌다.

“누나만 믿어.”

심해린은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봐 걱정하는 동생을 보며 위로를 건넸다.

“누나가 꼭 여기서 꺼내줄게.”

면회 시간이 끝났다.

심해린은 교도관에게 끌려가면서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던 심건우의 눈빛을 뒤로한 채 수화기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휴대폰을 꺼내 고상윤의 모든 연락처를 삭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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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자 아내, 떠나는 방식   제30화

    명서아의 말에 심해린이 경악하며 바로 반박했다.“팔았다간 절대 가만 안 둬요.”“그러니까 더 팔기 싶은데요? 이건 오빠가 이미 나한테 준 거예요. 음... 색깔도 좋고 품질도 좋네요.”명서아의 목소리에 과시가 은근히 섞여 있었다.심해린이 흠칫하더니 더는 참지 않고 협박했다.“팔아버렸다간 두 사람이 나한테 해명 영상을 강요했던 일을 전부 다 폭로해버릴 거예요.”이 펜던트는 그녀가 기억을 하는 순간부터 항상 몸에 지녔던 물건이었다. 심씨 가문에 온 뒤 할머니도 비취의 상태가 좋다는 걸 알아보고 잘 간직하라고 당부했었다.심해린은 한때 진짜 사랑을 찾았다고 믿었다. 하여 더는 가족을 찾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펜던트를 고상윤에게 선물했다. 그런데 고상윤이 그녀가 선물한 걸 명서아에게 줘버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돌려줘요.”심해린이 명서아를 빤히 쳐다봤다.명서아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보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러고는 다시 펜던트를 꺼내 흔들어 보였다.“지금 나한테 명령하는 거예요? 심해린 씨?”‘드디어 심해린한테서 무표정 말고 다른 표정을 봤어.’이 상황이 재미있었던 명서아는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쁜 장난기가 발동했다. 심해린이 어떻게 할지 너무나 궁금했다.“내 거라고 했어요.”심해린이 한 걸음씩 다가갔다. 시선이 펜던트에서 단 한 번도 떨어지지 않았다.“돌려줘요.”“해린 씨 거라고요?”명서아가 피식 웃더니 펜던트를 손바닥 안에 숨겼다.“지금은 내 손에 있잖아요. 그럼 내 거죠.”그녀의 눈에 노골적인 도발과 경멸이 담겨 있었다. 명서아는 심해린이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심해린은 감옥에 있는 동생을 위해, 거의 죽어가는 할머니를 위해 뭐든 참고 견디는 사람이었으니까.“돌려달라고 분명히 말했어요.”심해린이 이를 악물고 글자마다 분노를 눌러 담아 내뱉었다.“싫어요.”명서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일부러 심해린의 앞까지 걸어가 펜던트를 들어 올렸다.“어쩔 건데요? 상윤 오빠한테 가서 고자질할 거예요?

  • 그림자 아내, 떠나는 방식   제29화

    ‘차라리 잘됐어. 지금 가장 보기 싫은 사람이 고상윤인데.’심해린은 지친 몸을 이끌고 습관처럼 창고 방으로 이어지는 복도를 향해 걸어갔다. 그곳이 지금 그녀에게 허락된 유일한 공간이었다.두 걸음쯤 걸었을 때 2층 계단 쪽에서 부드럽고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언니, 왔어요? 할머니는 좀 어떠세요?”심해린이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명서아가 맨발로 계단 위에 느긋하게 서 있었다. 이 집의 여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리고 얼굴에 걱정이 적당하게 걸려 있었다.그녀와 연기할 생각이 없었던 심해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지나치려 했다.그런데 스쳐 지나가던 순간 심해린이 갑자기 굳어버렸다.명서아가 목에 붉은 실을 하고 있었는데 붉은 실 끝에 맑고 투명한 비취 펜던트가 달려 있었다.이건 심해린이 예전에 고상윤에게 선물한 펜던트였다.심해린은 순간 머리가 윙 했다. 몸이 통제되지 않을 정도로 떨리기 시작했고 발바닥에서 올라온 차가운 기운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명서아는 그녀의 반응이 마음에 드는 듯했다. 가슴 앞의 펜던트를 무심한 척 손으로 어루만지며 환하게 웃었다.“언니, 뭘 그렇게 봐요? 이 펜던트 예쁘죠?”심해린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명서아의 얼굴을 쳐다봤다.“그걸 왜 서아 씨가 하고 있어요?”심해린의 목소리가 아주 낮았다. 한 글자 한 글자 이를 악물고 내뱉어서 무서운 살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그 눈빛에 명서아는 순간 움찔했다. 하지만 곧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오히려 더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그녀는 펜던트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자랑하듯 심해린에게 보여주었다.“상윤 오빠가 준 거예요.”명서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천진난만하면서도 잔인한 말투로 말했다.“이 색이 내 피부랑 잘 어울린대요. 오빠가 본 것 중에서 제일 예쁘다고 하던데. 어때요? 예쁘죠?”고상윤이 줬다고 했다. 게다가 예쁘다고까지...그 몇 글자가 녹슨 둔탁한 칼처럼 이미 너덜너덜해진 심해린의 심장을 한 번 또 한 번 베어버렸다.심

  • 그림자 아내, 떠나는 방식   제28화

    심해린이 택시를 타고 병원에 도착했다. 병원 안에 들어서자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가뜩이나 좋지 않던 속이 그 냄새 때문에 더 울렁거렸다.복도가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얬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솜 위를 밟는 것처럼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병실로 들어와 보니 할머니가 침대에 조용히 누워있었다. 간병인이 심해린에게 말했다.“아까 의사 선생님이 보호자를 찾으시더라고요. 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았어요.”간병인 장인숙은 예전에 병원에서 청소 일을 하던 아주머니였다. 심해린은 장인숙에게 감사 인사를 한 뒤 곧바로 의사 사무실로 향했다.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갔다.“안녕하세요, 선생님. 전 39번 베드 환자의 손녀인데요. 할머니 상태가 어떤지 여쭤보려고요.”“할머니가 입원하신 뒤로 보호자를 몇 번이나 찾았는데 계속 안 계시더군요. 지금은 일단 상태가 안정됐습니다. 외상도 괜찮아졌고 각종 수치도 안정적이에요.”의사가 금테 안경을 밀어 올리며 차분하게 말했다.심해린이 옷자락을 꽉 움켜쥐고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제가 일이 좀 있어서 못 왔어요. 그럼 할머니는 언제쯤 깨어나실 수 있을까요?”의사는 들고 있던 필름을 빛에 비춰 보았다가 내려놓았다.“뇌에 혈종이 있어서 신경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언제 깨어나실지는 단정하기 어려워요. 현재 상황으로 보면 깨어날 확률은 대략 50% 정도입니다.”‘50%라...’심해린은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지만 의사의 입에서 직접 그 말을 듣자 가슴이 무거워졌다.그녀는 더 묻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그러고는 의사 사무실을 나왔다.병실 안이 아주 조용했다. 모니터에서 들려오는 규칙적인 소리만이 공기를 채우고 있었다.할머니가 산소마스크를 쓴 채 침대에 누워있었고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 누렇게 뜬 이마에 달라붙었다.언제나 다정한 미소로 그녀를 바라보던 그 눈은 지금 굳게 감겨 있었다. 그리고 눈가에 깊은 피로와 쇠약함이 내려앉았다.심해린은 의자를 끌어와 침대 옆에 앉은

  • 그림자 아내, 떠나는 방식   제27화

    고상윤은 순간 가슴이 막힌 듯 답답해졌고 이유 모를 분노가 거세게 타올랐다.밖에서 더 이상 고상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심해린은 지친 몸을 이끌고 바닥에 누웠다.정말 너무 피곤했다.배터리가 꺼져 있던 휴대폰이 조금 충전된 후 전원을 켰다.바로 그때 수많은 문자와 부재중 전화 알림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와 휴대폰이 끊임없이 윙윙거리며 진동했다.화면에 고상윤의 이름이 도배되어 있었다.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와 심해린이 어디에 있는지 묻는 문자가 열몇 통 와있었다.심해린은 화면을 보면서도 마음에 조금의 파문도 일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 초조해 보이는 문자들이 단지 통제하던 물건이 사라졌을 때 주인이 찾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그 안에는 사랑이 아니라 죄책감과 소유욕이 섞여 있을 뿐이었다.그녀는 문자를 넘기다가 한 낯익은 프로필 사진 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고혜연이었다.대화창을 열자 링크 하나와 밑에 짧은 글이 덧붙여 있었다.[해린아, 진일 그룹의 스타라이트컵 디자이너 대회가 시작됐어. 여기 응모 사이트야. 확인해봤는데 주제 제한은 없고 요구가 딱 하나야. 작품 안에서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한대. 지금 많이 힘든 거 알지만 그래도 이건 기회야. 포기하지 마.]‘진일 그룹, 사랑...’심해린은 그 두 단어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지금 그녀의 마음속에 증오만 가득한데 사랑이 남아 있을까?하지만 이건 고혜연의 마음이자 심해린이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잠시 스스로를 다잡은 뒤 고혜연에게 알았다는 의미로 뽀뽀 이모티콘을 보냈다.휴대폰 배터리가 20%까지 충전됐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충전기를 뽑고 외투를 집어 들었다. 이곳에 단 한 순간도 더 있고 싶지 않았다.할머니가 걱정되어 병원에 가볼 생각이었다.그런데 별장 문을 나서자마자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고상윤이라는 세 글자가 떴다.심해린이 전화를 받자마자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심해린, 지금 몇 시인지 알아? 왜 아직도 출근 안 해? 이번 달 개근 수당은

  • 그림자 아내, 떠나는 방식   제26화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고상윤의 표정이 잠시 멍해졌다가 이내 조금 부드러워졌다.“어제 회사에 일이 너무 많았어. 계속 처리하느라 끝이 안 났거든. 나중에 나도 본가로 갔었어.”심해린이 코웃음을 쳤다.“회사 일이었어요, 아니면 서아 씨 일이었어요?”고상윤의 목소리가 몇 톤이나 높아졌다.“넌 왜 항상 서아한테 이렇게 적대적이야? 여기에 가족도 없는 애를 우리가 조금 더 챙겨주는 게 뭐가 문제인데?”심해린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늘 이렇게 명서아의 편을 들었다.그녀는 등을 곧게 세우고 소파에 앉아 있는 고상윤을 쳐다봤다. 밤새 잠을 못 잔 탓에 눈 밑에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서 풍기는 압박감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어디 갔었어?”고상윤이 다시 입을 열었다. 밤을 새워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심해린은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창고 방으로 돌아가 휴대폰을 충전기에 꽂았다.고상윤이 뒤따라 들어왔다.“묻잖아. 어젯밤에 어디 갔었냐고.”심해린이 계속 무시하자 그녀를 잡으려 했다. 그녀는 지금 무릎을 다친 상태였다. 고상윤이 잡아당긴 바람에 중심을 잃고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고상윤이 재빨리 그녀의 바지를 걷어 올렸다. 멍으로 가득한 무릎을 본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시뻘게진 두 눈으로 쳐다봤다.“내가 본가에 가면 어떤 취급을 받는지 당신도 알잖아요. 전화로 뭐라고 했었죠? 일 끝나면 본가로 오겠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해명 영상도 당신들이 찍으라고 해서 찍었고 난 협조 다 했어요. 그런데 왜 당신 할머니는 아직도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건데요?”목소리가 높지 않았지만 정확하게 고상윤의 마음속 가장 약한 부분을 찔렀다. 고상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준비해두었던 비난의 말들이 목구멍에 막혀버렸다.창고 방에 정적이 내려앉았고 고상윤도 입을 굳게 다물렸다.바로 그때 명서아가 다가와 고상윤의 옆에 서더니 힘없이 그에게 기댔다.“언니, 어떻게 오빠한테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어요?”명서아의 목소리

  • 그림자 아내, 떠나는 방식   제25화

    진성혁이 고개를 저었다.“별거 아니니까 괜찮아요.”당장이라도 도망칠 것 같은 심해린의 모습에 진성혁이 물었다.“도움이 필요하신가요? 아니면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까요?”“아니요. 저를 구해주신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감사해요.”심해린이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부모님은요?”그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저 고아예요.”진성혁은 무언가 더 묻고 싶은 듯 잠시 생각에 잠겼다.그때 심해린이 벽을 짚으며 문 쪽으로 절뚝절뚝 걸어갔다.“하룻밤 재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가볼게요.”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무릎에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전해졌다.심해린이 이를 악물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지만 낯선 사람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등을 곧게 세우고 걸어갔다.진성혁은 자리에 서서 그녀를 조용히 지켜보기만 할 뿐 붙잡지는 않았다. 그녀가 문 앞에 다다랐을 때 한마디 덧붙였다.“휴대폰 배터리가 다 된 것 같던데 거실에 충전기가 있어요.”심해린이 발걸음은 멈췄지만 고개는 돌리지 않았다.“괜찮아요.”그리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강이 내려다보이는 고급 아파트에서 나온 뒤에야 심해린은 이곳이 가장 유명한 부유층 주거 지역이라는 걸 알았다. 그녀는 길가에 서서 택시를 잡았다.“누리안으로 가주세요.”택시 운전사가 백미러로 심해린을 힐끗 쳐다봤는데 눈빛이 조금 이상했다.심해린은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초라한지 잘 알고 있었다. 머리가 헝클어져 있었고 옷은 절인 배추처럼 구겨져 있었으며 얼굴빛도 아마 핏기없이 창백할 것이다.그녀는 유리창에 기대어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거리 풍경을 바라보았다. 무릎의 통증이 계속 올라왔다. 이 통증은 어제 고씨 가문 본가에서 겪었던 모든 일을 떠올리게 했다.모욕과 고통들... 하지만 지금 떠올려도 마음에는 거의 아무런 파문이 일지 않았다.이젠 아마 무뎌졌을 것이다. 차라리 잘됐다. 마음이 식어버리면 더 이상 아프지도 않을 테니까.택시가 누리안 별장 단지 입구에 멈췄다. 심해린이 요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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