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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مؤلف: 김빠진 콜라
심해린은 다시 청하구로 돌아가 거리를 찾아 헤맸다.

한참이 지난 후 이성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거리 CCTV가 전부 고장 나서 할머님의 행방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이성록도 고상윤처럼 말투가 냉랭했다. 밤중에 할머니를 찾아달라고 한 것에 대해 불만이 많은 모양이었다.

심해린은 다시 한번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귓가에 맴도는 안내음에 마음이 점점 조급해졌다.

어느덧 동이 트기 시작했다.

경찰에 신고해야겠다는 생각에 심해린은 택시를 잡고 경찰서로 향했다. 할머니의 인상착의를 설명하자마자 경찰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법원 앞에 노인 한 분이 쓰러져 있다는 신고가 들어왔는데 혹시 찾으시는 할머니가 아닐까요?”

심해린은 심장이 철렁했다. 할머니가 심건우의 일을 알게 된 후 집을 나갔다고 했다. 심건우의 판결이 어제 내려졌으니 그 사람이 바로 할머니일 가능성이 컸다.

경찰차가 사이렌 소리를 내며 법원 앞에 도착했다.

할머니가 차가운 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다. 희끗희끗한 머리칼 사이로 상처가 선명하게 파여 있었고 흘러내린 피가 검붉게 굳어버렸다.

심해린은 비틀거리며 할머니에게 다가가 무릎을 털썩 꿇었다. 할머니의 얼굴에 묻은 핏자국과 흙먼지를 본 순간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구급차! 빨리 구급차 불러주세요!”

그녀가 가방에서 휴대폰을 찾아 떨리는 손으로 119를 누르려 하자 상황을 파악한 경찰이 병원으로 이송하겠다고 했다. 심해린은 할머니의 손을 잡고 경찰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

해경 병원 응급실 앞.

심해린의 옷에 할머니의 피가 묻어 있었다. 쉴 새도 없이 바로 병원비를 내러 갔다.

그 시각 복도 끝의 VIP 병실, 명서아가 거울을 보며 불만 가득한 얼굴로 툴툴거렸다.

“선생님, 아직도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가슴이 답답해요.”

그녀는 회진 중인 의사에게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며칠 더 입원해서 경과를 지켜보고 싶어요. 상윤 오빠도 후유증이 남을까 봐 걱정하고 있거든요.”

의사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병실을 나섰다.

명서아가 우쭐거리면서 코웃음을 쳤다. 침대에 누우려던 찰나 낯익은 실루엣 하나가 병실 문밖을 지나갔다.

‘심해린? 저 여자가 왜 여기 있지? 꼴은 왜 또 저렇게 초라한 거야?’

명서아의 눈동자가 빠르게 굴러가더니 휴대폰을 꺼내 고상윤에게 전화를 걸어 가녀린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나 방금 병실 앞에서 해린 씨를 본 것 같아. 심건우 일 때문에 아직도 날 탓하고 있는 거 아니야?”

휴대폰 너머로 짧은 침묵이 흘렀다가 이내 그녀를 안심시키는 고상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걱정하지 마. 지금 바로 갈게.”

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에 도착한 고상윤은 수납 창구 앞에서 넋이 나간 채 서 있는 심해린을 발견했다.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차가운 기운을 내뿜으면서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심해린,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병원까지 쫓아왔어?”

얼음장처럼 차가운 고상윤의 목소리가 심해린의 귓가에 맴돌았다.

심해린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이 이미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하지만 고상윤은 속상해하는 그녀를 보고도 동정하기는커녕 오히려 짜증을 냈다. 그의 동정심을 사려는 연기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경고하는데 서아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마.”

그는 심해린의 앞에 꼿꼿이 서서 윽박질렀다.

“심건우는 살인범이야. 증거도 확실하다고. 서아는 좋은 마음으로 변호를 맡았다가 안 좋은 소리까지 들었어. 대체 뭘 더 어쩌겠다는 거야?”

고상윤이 심해린을 내려다보면서 일방적으로 명령했다.

“당장 서아한테 가서 사과해. 그리고 인터넷에 떠도는 루머들 전부 해명해야 하니까 영상도 찍어서 올려.”

그 말에 심해린은 세상에서 가장 우스꽝스러운 얘기를 들은 기분이었다. 고상윤의 어깨너머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명서아를 쳐다봤다. 마음속에서 쓰린 통증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과 안 해요.”

심해린의 목소리가 높진 않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하게 들렸다.

“내 동생은 아무 잘못이 없어요. 반드시 내 힘으로 증거를 찾아서 당당하게 걸어 나오게 할 테니까 똑똑히 지켜봐요.”

고상윤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심해린이 이 지경까지 몰리고도 포기하지 않을 줄은 몰랐다.

“주제 파악 좀 해.”

그는 이 싸늘한 한마디를 툭 던지고는 더는 심해린을 쳐다보지 않고 명서아에게 걸어갔다.

심해린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병원의 소독약 냄새에 당장이라도 토할 것만 같았다. 사건이 일어난 술집에 가봐야 했기에 숨을 깊게 들이쉬면서 마음을 진정했다.

반드시 CCTV를 확보해야 했고 동생에게 누명을 씌운 사람을 찾아내야 했다.

병원비를 내고 응급실로 돌아왔을 때 마침 의사가 할머니를 병실로 옮기고 있었다. 지금은 잠시 안정됐지만 연세가 많아 더 이상 충격을 받으면 안 된다고 했다.

할머니를 병실로 옮기고 간병인까지 구한 뒤 심해린은 곧장 술집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술집 매니저가 사건 당일의 CCTV가 고장 났다며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심해린이 아무리 애원하고 매달려 봐도 매니저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으면서 보안 요원더러 그녀를 내쫓으라고 했다.

그녀는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다.

할머니의 병실 앞에 서서 문손잡이를 잡았는데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텅 비어 있었다.

침대 위에 아무도 누운 적이 없었던 것처럼 이불이 정갈하게 개어져 있었다.

심해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재빨리 간호사 데스크로 달려가 간호사의 손을 붙잡고 물었다.

“여기 있던 환자분 어디 갔나요? 아까 응급실에서 나온 할머니 말이에요.”

간호사는 기록을 확인하더니 사무적인 말투로 대답했다.

“아, 그 환자분요. 보호자가 전원 조치했습니다.”

“보호자요?”

심해린이 멍한 얼굴로 물었다.

“누가요?”

“고 씨 성을 가진 남자분이셨어요. 환자분의 손녀사위라고 하시던데요? 절차는 이미 다 마치셨어요.”

고상윤의 이름 석 자가 벌겋게 달궈진 쇠꼬챙이처럼 심해린의 심장을 후벼 팠다. 그제야 모든 게 이해되었다.

심해린은 미친 듯이 명서아의 병실로 달려가 발로 문을 걷어찼다.

병실 안, 명서아가 침대 머리에 기대어 있었고 고상윤이 옆에 앉아 과도로 사과를 깎고 있었다. 껍질이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깎았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그가 움직임을 멈추더니 고개를 들어 문 앞에 서 있는 심해린을 차갑게 쳐다봤다.

심해린이 핏발이 선 두 눈으로 이를 악물고 말했다.

“우리 할머니는요? 할머니를 어디로 보냈어요?”

고상윤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느릿느릿 사과 한 조각을 잘라 이쑤시개를 꽂은 다음 명서아의 입가로 가져갔다.

명서아는 심해린을 의기양양하게 쳐다봤다가 그 사과를 받아먹었다.

모든 걸 마치고서야 고상윤은 과도를 내려놓고 냅킨으로 손을 닦으며 천천히 일어섰다. 심해린 앞으로 다가서자 거대한 그림자가 그녀를 완전히 덮쳤다.

“알고 싶어?”

고상윤이 한겨울의 추위보다도 더 차가운 말을 내뱉었다.

“영상 찍어서 서아 대신 해명해. 마음에 들면 할머니가 어디 있는지 알려줄게.”

그는 심해린의 유일한 가족으로 그녀를 굴복시키려 했다.

분노와 증오로 심해린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3년 동안 사랑했던 얼굴이 지금은 낯설다 못해 흉물스럽게 느껴졌다.

그녀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나마 통증이라도 느껴졌기에 마지막 한 가닥의 정신줄을 잡을 수 있었다.

심해린은 고상윤의 눈동자에 서린 노골적인 경멸을, 그리고 명서아가 짓고 있는 승리 어린 미소를 똑똑히 보았다.

한참 정적이 흐른 후 그녀는 고개를 들어 고상윤의 차가운 시선을 마주했다. 목구멍에서 피비린내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이를 꽉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알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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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자 아내, 떠나는 방식   제30화

    명서아의 말에 심해린이 경악하며 바로 반박했다.“팔았다간 절대 가만 안 둬요.”“그러니까 더 팔기 싶은데요? 이건 오빠가 이미 나한테 준 거예요. 음... 색깔도 좋고 품질도 좋네요.”명서아의 목소리에 과시가 은근히 섞여 있었다.심해린이 흠칫하더니 더는 참지 않고 협박했다.“팔아버렸다간 두 사람이 나한테 해명 영상을 강요했던 일을 전부 다 폭로해버릴 거예요.”이 펜던트는 그녀가 기억을 하는 순간부터 항상 몸에 지녔던 물건이었다. 심씨 가문에 온 뒤 할머니도 비취의 상태가 좋다는 걸 알아보고 잘 간직하라고 당부했었다.심해린은 한때 진짜 사랑을 찾았다고 믿었다. 하여 더는 가족을 찾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펜던트를 고상윤에게 선물했다. 그런데 고상윤이 그녀가 선물한 걸 명서아에게 줘버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돌려줘요.”심해린이 명서아를 빤히 쳐다봤다.명서아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보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러고는 다시 펜던트를 꺼내 흔들어 보였다.“지금 나한테 명령하는 거예요? 심해린 씨?”‘드디어 심해린한테서 무표정 말고 다른 표정을 봤어.’이 상황이 재미있었던 명서아는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쁜 장난기가 발동했다. 심해린이 어떻게 할지 너무나 궁금했다.“내 거라고 했어요.”심해린이 한 걸음씩 다가갔다. 시선이 펜던트에서 단 한 번도 떨어지지 않았다.“돌려줘요.”“해린 씨 거라고요?”명서아가 피식 웃더니 펜던트를 손바닥 안에 숨겼다.“지금은 내 손에 있잖아요. 그럼 내 거죠.”그녀의 눈에 노골적인 도발과 경멸이 담겨 있었다. 명서아는 심해린이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심해린은 감옥에 있는 동생을 위해, 거의 죽어가는 할머니를 위해 뭐든 참고 견디는 사람이었으니까.“돌려달라고 분명히 말했어요.”심해린이 이를 악물고 글자마다 분노를 눌러 담아 내뱉었다.“싫어요.”명서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일부러 심해린의 앞까지 걸어가 펜던트를 들어 올렸다.“어쩔 건데요? 상윤 오빠한테 가서 고자질할 거예요?

  • 그림자 아내, 떠나는 방식   제29화

    ‘차라리 잘됐어. 지금 가장 보기 싫은 사람이 고상윤인데.’심해린은 지친 몸을 이끌고 습관처럼 창고 방으로 이어지는 복도를 향해 걸어갔다. 그곳이 지금 그녀에게 허락된 유일한 공간이었다.두 걸음쯤 걸었을 때 2층 계단 쪽에서 부드럽고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언니, 왔어요? 할머니는 좀 어떠세요?”심해린이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명서아가 맨발로 계단 위에 느긋하게 서 있었다. 이 집의 여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리고 얼굴에 걱정이 적당하게 걸려 있었다.그녀와 연기할 생각이 없었던 심해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지나치려 했다.그런데 스쳐 지나가던 순간 심해린이 갑자기 굳어버렸다.명서아가 목에 붉은 실을 하고 있었는데 붉은 실 끝에 맑고 투명한 비취 펜던트가 달려 있었다.이건 심해린이 예전에 고상윤에게 선물한 펜던트였다.심해린은 순간 머리가 윙 했다. 몸이 통제되지 않을 정도로 떨리기 시작했고 발바닥에서 올라온 차가운 기운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명서아는 그녀의 반응이 마음에 드는 듯했다. 가슴 앞의 펜던트를 무심한 척 손으로 어루만지며 환하게 웃었다.“언니, 뭘 그렇게 봐요? 이 펜던트 예쁘죠?”심해린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명서아의 얼굴을 쳐다봤다.“그걸 왜 서아 씨가 하고 있어요?”심해린의 목소리가 아주 낮았다. 한 글자 한 글자 이를 악물고 내뱉어서 무서운 살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그 눈빛에 명서아는 순간 움찔했다. 하지만 곧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오히려 더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그녀는 펜던트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자랑하듯 심해린에게 보여주었다.“상윤 오빠가 준 거예요.”명서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천진난만하면서도 잔인한 말투로 말했다.“이 색이 내 피부랑 잘 어울린대요. 오빠가 본 것 중에서 제일 예쁘다고 하던데. 어때요? 예쁘죠?”고상윤이 줬다고 했다. 게다가 예쁘다고까지...그 몇 글자가 녹슨 둔탁한 칼처럼 이미 너덜너덜해진 심해린의 심장을 한 번 또 한 번 베어버렸다.심

  • 그림자 아내, 떠나는 방식   제28화

    심해린이 택시를 타고 병원에 도착했다. 병원 안에 들어서자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가뜩이나 좋지 않던 속이 그 냄새 때문에 더 울렁거렸다.복도가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얬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솜 위를 밟는 것처럼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병실로 들어와 보니 할머니가 침대에 조용히 누워있었다. 간병인이 심해린에게 말했다.“아까 의사 선생님이 보호자를 찾으시더라고요. 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았어요.”간병인 장인숙은 예전에 병원에서 청소 일을 하던 아주머니였다. 심해린은 장인숙에게 감사 인사를 한 뒤 곧바로 의사 사무실로 향했다.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갔다.“안녕하세요, 선생님. 전 39번 베드 환자의 손녀인데요. 할머니 상태가 어떤지 여쭤보려고요.”“할머니가 입원하신 뒤로 보호자를 몇 번이나 찾았는데 계속 안 계시더군요. 지금은 일단 상태가 안정됐습니다. 외상도 괜찮아졌고 각종 수치도 안정적이에요.”의사가 금테 안경을 밀어 올리며 차분하게 말했다.심해린이 옷자락을 꽉 움켜쥐고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제가 일이 좀 있어서 못 왔어요. 그럼 할머니는 언제쯤 깨어나실 수 있을까요?”의사는 들고 있던 필름을 빛에 비춰 보았다가 내려놓았다.“뇌에 혈종이 있어서 신경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언제 깨어나실지는 단정하기 어려워요. 현재 상황으로 보면 깨어날 확률은 대략 50% 정도입니다.”‘50%라...’심해린은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지만 의사의 입에서 직접 그 말을 듣자 가슴이 무거워졌다.그녀는 더 묻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그러고는 의사 사무실을 나왔다.병실 안이 아주 조용했다. 모니터에서 들려오는 규칙적인 소리만이 공기를 채우고 있었다.할머니가 산소마스크를 쓴 채 침대에 누워있었고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 누렇게 뜬 이마에 달라붙었다.언제나 다정한 미소로 그녀를 바라보던 그 눈은 지금 굳게 감겨 있었다. 그리고 눈가에 깊은 피로와 쇠약함이 내려앉았다.심해린은 의자를 끌어와 침대 옆에 앉은

  • 그림자 아내, 떠나는 방식   제27화

    고상윤은 순간 가슴이 막힌 듯 답답해졌고 이유 모를 분노가 거세게 타올랐다.밖에서 더 이상 고상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심해린은 지친 몸을 이끌고 바닥에 누웠다.정말 너무 피곤했다.배터리가 꺼져 있던 휴대폰이 조금 충전된 후 전원을 켰다.바로 그때 수많은 문자와 부재중 전화 알림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와 휴대폰이 끊임없이 윙윙거리며 진동했다.화면에 고상윤의 이름이 도배되어 있었다.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와 심해린이 어디에 있는지 묻는 문자가 열몇 통 와있었다.심해린은 화면을 보면서도 마음에 조금의 파문도 일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 초조해 보이는 문자들이 단지 통제하던 물건이 사라졌을 때 주인이 찾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그 안에는 사랑이 아니라 죄책감과 소유욕이 섞여 있을 뿐이었다.그녀는 문자를 넘기다가 한 낯익은 프로필 사진 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고혜연이었다.대화창을 열자 링크 하나와 밑에 짧은 글이 덧붙여 있었다.[해린아, 진일 그룹의 스타라이트컵 디자이너 대회가 시작됐어. 여기 응모 사이트야. 확인해봤는데 주제 제한은 없고 요구가 딱 하나야. 작품 안에서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한대. 지금 많이 힘든 거 알지만 그래도 이건 기회야. 포기하지 마.]‘진일 그룹, 사랑...’심해린은 그 두 단어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지금 그녀의 마음속에 증오만 가득한데 사랑이 남아 있을까?하지만 이건 고혜연의 마음이자 심해린이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잠시 스스로를 다잡은 뒤 고혜연에게 알았다는 의미로 뽀뽀 이모티콘을 보냈다.휴대폰 배터리가 20%까지 충전됐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충전기를 뽑고 외투를 집어 들었다. 이곳에 단 한 순간도 더 있고 싶지 않았다.할머니가 걱정되어 병원에 가볼 생각이었다.그런데 별장 문을 나서자마자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고상윤이라는 세 글자가 떴다.심해린이 전화를 받자마자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심해린, 지금 몇 시인지 알아? 왜 아직도 출근 안 해? 이번 달 개근 수당은

  • 그림자 아내, 떠나는 방식   제26화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고상윤의 표정이 잠시 멍해졌다가 이내 조금 부드러워졌다.“어제 회사에 일이 너무 많았어. 계속 처리하느라 끝이 안 났거든. 나중에 나도 본가로 갔었어.”심해린이 코웃음을 쳤다.“회사 일이었어요, 아니면 서아 씨 일이었어요?”고상윤의 목소리가 몇 톤이나 높아졌다.“넌 왜 항상 서아한테 이렇게 적대적이야? 여기에 가족도 없는 애를 우리가 조금 더 챙겨주는 게 뭐가 문제인데?”심해린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늘 이렇게 명서아의 편을 들었다.그녀는 등을 곧게 세우고 소파에 앉아 있는 고상윤을 쳐다봤다. 밤새 잠을 못 잔 탓에 눈 밑에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서 풍기는 압박감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어디 갔었어?”고상윤이 다시 입을 열었다. 밤을 새워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심해린은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창고 방으로 돌아가 휴대폰을 충전기에 꽂았다.고상윤이 뒤따라 들어왔다.“묻잖아. 어젯밤에 어디 갔었냐고.”심해린이 계속 무시하자 그녀를 잡으려 했다. 그녀는 지금 무릎을 다친 상태였다. 고상윤이 잡아당긴 바람에 중심을 잃고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고상윤이 재빨리 그녀의 바지를 걷어 올렸다. 멍으로 가득한 무릎을 본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시뻘게진 두 눈으로 쳐다봤다.“내가 본가에 가면 어떤 취급을 받는지 당신도 알잖아요. 전화로 뭐라고 했었죠? 일 끝나면 본가로 오겠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해명 영상도 당신들이 찍으라고 해서 찍었고 난 협조 다 했어요. 그런데 왜 당신 할머니는 아직도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건데요?”목소리가 높지 않았지만 정확하게 고상윤의 마음속 가장 약한 부분을 찔렀다. 고상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준비해두었던 비난의 말들이 목구멍에 막혀버렸다.창고 방에 정적이 내려앉았고 고상윤도 입을 굳게 다물렸다.바로 그때 명서아가 다가와 고상윤의 옆에 서더니 힘없이 그에게 기댔다.“언니, 어떻게 오빠한테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어요?”명서아의 목소리

  • 그림자 아내, 떠나는 방식   제25화

    진성혁이 고개를 저었다.“별거 아니니까 괜찮아요.”당장이라도 도망칠 것 같은 심해린의 모습에 진성혁이 물었다.“도움이 필요하신가요? 아니면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까요?”“아니요. 저를 구해주신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감사해요.”심해린이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부모님은요?”그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저 고아예요.”진성혁은 무언가 더 묻고 싶은 듯 잠시 생각에 잠겼다.그때 심해린이 벽을 짚으며 문 쪽으로 절뚝절뚝 걸어갔다.“하룻밤 재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가볼게요.”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무릎에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전해졌다.심해린이 이를 악물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지만 낯선 사람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등을 곧게 세우고 걸어갔다.진성혁은 자리에 서서 그녀를 조용히 지켜보기만 할 뿐 붙잡지는 않았다. 그녀가 문 앞에 다다랐을 때 한마디 덧붙였다.“휴대폰 배터리가 다 된 것 같던데 거실에 충전기가 있어요.”심해린이 발걸음은 멈췄지만 고개는 돌리지 않았다.“괜찮아요.”그리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강이 내려다보이는 고급 아파트에서 나온 뒤에야 심해린은 이곳이 가장 유명한 부유층 주거 지역이라는 걸 알았다. 그녀는 길가에 서서 택시를 잡았다.“누리안으로 가주세요.”택시 운전사가 백미러로 심해린을 힐끗 쳐다봤는데 눈빛이 조금 이상했다.심해린은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초라한지 잘 알고 있었다. 머리가 헝클어져 있었고 옷은 절인 배추처럼 구겨져 있었으며 얼굴빛도 아마 핏기없이 창백할 것이다.그녀는 유리창에 기대어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거리 풍경을 바라보았다. 무릎의 통증이 계속 올라왔다. 이 통증은 어제 고씨 가문 본가에서 겪었던 모든 일을 떠올리게 했다.모욕과 고통들... 하지만 지금 떠올려도 마음에는 거의 아무런 파문이 일지 않았다.이젠 아마 무뎌졌을 것이다. 차라리 잘됐다. 마음이 식어버리면 더 이상 아프지도 않을 테니까.택시가 누리안 별장 단지 입구에 멈췄다. 심해린이 요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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