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정은소는 장군부에서 점점 멀어졌다.사람의 눈에 띄지 않도록 일부러 작은 길만 골라 다녔다. 좁은 골목과 구불구불한 뒷길을 돌고 또 돌며, 야간 순찰을 도는 관병과 마주칠 만한 곳은 모조리 피했다.배가 불러 빠르게 걸을 수는 없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밑을 조심스럽게 살펴야 했다.그래도 상관없었다.다시 붙잡혀 장군부로 끌려가지만 않는다면 아무리 느려도 계속 걸을 수 있었다.그런데 지나치게 예민해진 탓일까.조금 전부터 등 뒤에서 누군가 자신을 줄곧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정은소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하지만 어두운 골목은 텅 비어 있었다. 마른 잎 몇 장만이 바람에 휩쓸려 빙글빙글 돌다가 청석길 위로 떨어졌다.아무도 없었다.정은소는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그러나 몇 걸음도 채 옮기지 않아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는 듯한 느낌이 또다시 들었다. 어둠 속에 무언가가 몸을 숨긴 채 서두르지도, 뒤처지지도 않고 조용히 따라오는 듯했다.정은소는 이를 악물고 걸음을 재촉했다.모퉁이를 돌아서자 앞에는 더욱 좁은 골목이 나타났다. 양옆으로 높은 담장이 솟아 있어 달빛조차 제대로 스며들지 않았다. 눈앞의 길만 희미하게 분간할 수 있을 정도였다.정은소는 한 손으로 담을 짚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그러다 발밑의 흔들리는 돌을 잘못 밟아 넘어질 뻔했다. 그녀는 다급히 중심을 되찾고 양팔로 배부터 감쌌다.바로 그때, 골목 깊은 곳에서 비틀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정은소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담장 밑에 바짝 붙은 채 숨을 죽였다.이윽고 검은 그림자 하나가 골목 안쪽에서 휘청거리며 나타났다.온몸에서는 지독한 술 냄새가 풍겼고,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몸이 몇 번씩 옆으로 기울었다. 입으로는 가락조차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를 웅얼거리고 있었다.술에 취한 사내였다.정은소는 그가 먼저 지나가도록 몸을 옆으로 돌렸다.그러나 가까이 다가온 취객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그의 시선이 정은소의 몸을 훑었다.크게 불러온 배
문을 밀자 경첩에서 희미한 삐걱 소리가 흘러나왔다.작은 소리에 불과했지만, 깊은 적막에 잠긴 밤에는 유난히 날카롭게 울렸다.정은소는 숨을 죽인 채 몸을 옆으로 틀어 좁게 열린 문틈으로 빠져나갔다.후문 밖은 장군부 뒤편의 인적 없는 거리였다. 깊숙이 이어진 골목에는 등불 하나 밝혀져 있지 않았다. 머리 위에 걸린 초승달만이 싸늘한 빛을 흘리며 청석이 깔린 길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정은소는 잠시도 머물지 못하고 보퉁이를 든 채 서둘러 앞으로 나아갔다.만삭에 가까운 배가 무거워 빠르게 걸을 수는 없었다. 한 걸음씩 신중하게 발을 내디딜 때마다 몸이 좌우로 흔들렸다.장군부를 나왔다.마침내…… 그 장군부를 벗어났다.정은소의 눈가가 갑자기 시큰해졌지만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여기서 멈춰서는 안 되었다.조금이라도 더 멀리, 더 멀리 가야 했다. 날이 밝을 때까지 계속 걸어 마차를 빌릴 수 있는 곳에 닿은 다음, 어머니와 동생이 기다리는 작은 마을로 가야 했다.그러나 정은소가 별채를 떠난 직후, 어둠 속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소리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한 사람은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정은소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갔고, 다른 한 사람은 고시언의 처소를 향해 빠르게 사라졌다.두 사람은 주강이 별채 주변에 배치해 둔 암위였다.*앞마당의 서재는 늦은 시각까지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손님 몇 사람을 배웅하고 막 돌아온 주강은 자신을 기다리던 암위에게 가로막혔다.“주 부장!”암위가 다급히 다가와 주강의 귓가에 몇 마디를 속삭였다.주강의 낯빛이 순식간에 변했다.“나갔다는 게 무슨 말이냐?”그는 목소리를 낮추어 다급히 되물었다.“지금 이 시각에?”암위가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정 낭자가 보퉁이를 들고 혼자 몰래 별채를 빠져나왔습니다. 그 모습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작정으로 달아나는 듯했습니다.”주강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는 성큼성큼 서재로 달려가 문을 열고 뛰어 들어갔다.“장군!”고시언은 탁자 위에 펼쳐진 지도를
고시언은 문득 지난 기억을 떠올렸다. 깊은 눈동자에 알아차리기 어려운 욕망이 희미하게 피어올랐다.변방에서 함께 지낸 날들을 돌이킬 때마다 가장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정은소의 탄탄한 두 다리가 자신의 허리를 휘감던 감각이었다.그 감각에 한 번 맛을 들인 뒤로는 몇 번을 품어도 만족할 수 없었다.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을 만큼 깊이 빠져들었다.사실 자신에게는 정은소 하나면 충분했다.고시언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언젠가 그녀를 품에 안고 말했던 것처럼, 앞으로 함께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니 정은소가 아이를 낳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그 뒤로 두 사람은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저녁 식사는 고요한 침묵 속에서 끝났다.고시언은 자리에서 일어나 거의 줄지 않은 음식을 바라보았다.“여전히 먹는 양이 너무 적구나.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이래서는 안 된다.”정은소도 따라 일어나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예, 명심하겠습니다.”고시언은 정은소를 잠시 바라보았다.어딘가 평소와 다르다는 느낌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무엇이 이상한지는 정확히 짚어 낼 수 없었다.게다가 지금 그에게는 온 신경을 쏟아야 할 일이 있었다. 오늘 큰 진전이 있기는 했지만,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일이었다.조금이라도 잘못된다면…… 장군부 전체가 다시는 헤어 나올 수 없는 파멸에 빠질 수도 있었다.고시언은 더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정은소에게 몸을 잘 돌보라고 몇 마디 더 당부한 뒤 서둘러 별채를 떠났다.정은소는 문 앞까지 나가 그를 배웅했다.고시언의 뒷모습은 어두운 마당을 가로질러 걸어가더니, 이내 샛문 모퉁이 너머로 완전히 사라졌다.정은소는 마음속으로 그에게 조용히 작별을 고했다.‘이제 정말 작별이에요.’어멈은 남은 그릇들을 모두 치운 뒤 방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정은소는 옷을 입은 그대로 침상에 누웠다. 눈을 크게 뜬 채 머리 위로 드리워진 캄캄한 휘장만 바라보며 미동도 하
이제 움직일 때였다.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반드시 이 위험천만한 곳을 떠나야 했다.그날도 겉보기에는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정은소는 아침에 일어나 늘 하던 대로 마당을 두 바퀴 거닐었다. 방으로 돌아와 한나절 동안 책을 읽고 잠시 낮잠을 잔 뒤, 오후에도 의서를 몇 장 더 넘겼다.날이 어두워질 무렵, 어멈이 저녁상을 가져왔다.쌀죽 한 그릇과 소박한 반찬 두 접시, 향긋한 계화떡 한 접시가 전부였다.정은소가 막 젓가락을 들었을 때 문발이 걷히며 고시언의 훤칠한 모습이 나타났다.그는 대나무 잎처럼 푸른빛이 도는 평상복을 입고, 허리에는 달빛처럼 흰 가죽띠를 두르고 있었다. 평소의 날카롭고 위압적인 모습은 한결 누그러지고 드물게 여유로운 기색이 감돌았다.뜻밖의 등장에 놀란 정은소는 들고 있던 젓가락까지 탁자 위로 떨어뜨렸다.고시언이 미간을 찌푸렸다.“어찌 그리 놀라는 것이냐?”그의 뒤를 따라 들어온 주강은 손에 든 찬합을 열어 음식을 한 접시씩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윤기가 흐르도록 푹 조린 돼지족발과 담백한 농어찜, 따뜻한 닭고기탕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제비집죽까지.하나같이 정갈하고 먹음직스러운 음식이었다. 고소하고 진한 냄새가 퍼지자 소박했던 저녁상이 순식간에 풍성해졌다.“먹거라.”고시언은 제비집죽을 정은소 앞으로 밀어 주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부드러운 것을 보니 기분도 나쁘지 않은 듯했다.정은소는 눈앞에 놓인 제비집죽을 바라보며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고시언은 일부러 자신을 만나러 온 것일까?아니면 다른 길에 잠시 들른 것뿐일까?혹시 자신이 달아나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아닐까?심장이 금방이라도 가슴을 뚫고 튀어나올 듯 세차게 뛰었다. 정은소는 고시언이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릴까 두려워 고개를 깊이 숙인 채 죽을 조금씩 떠먹었다.고시언도 젓가락을 들어 농어 살점을 한 점 집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식사를 시작했다.두 사람은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조용히 밥을 먹었다.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
정은소는 고시언이 손을 뻗는 것을 알아차리자 거의 본능적으로 손을 거두어 이불 아래로 감췄다.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녀는 자신의 행동이 예법에 어긋났음을 깨닫고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허공에 멈춘 고시언의 손이 잠시 굳었다. 이윽고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미간에는 옅은 주름이 잡혔다.자신에게 화가 난 것일까?낮에 집으로 가던 길을 가로막아 억지로 장군부에 데려왔기 때문에?고시언은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정은소가 다른 사내와 정을 통한다고 의심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어디를 가려 했다면 적어도 자신에게는 알려야 하지 않았겠는가.물론 정은소가 왜 말하지 않았는지도 알고 있었다.그저 바쁜 자신에게 또 다른 걱정을 안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그 생각이 들자 고시언은 이 여인이 때로는 지나치게 손이 가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무엇이든 혼자 감당하고 참아 내니, 오히려 그가 알아차릴 틈조차 없었다.“되었다. 밤이 깊었으니 일찍 쉬어라.”고시언은 더 다가가 그녀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났다.“나는 돌아가겠다.”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정은소는 침상 머리맡에 기대어 문발 너머로 사라지는 고시언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기척이 완전히 멀어진 뒤에야 이불 아래에 감췄던 손을 천천히 꺼냈다.가느다란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두려워서가 아니었다.조금 전 고시언의 손이 다가온 순간, 자신이 보인 반응이 생각보다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아무리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그가 남아 있었다.정은소는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에 번지는 쓰라림을 애써 깊숙이 눌러 삼켰다.*그 뒤 며칠 동안 정은소는 모처럼 조용한 나날을 보냈다.대부분의 시간은 방 안에 머물며 책을 읽었다. 고명원이 가져다준 의서도 어느새 절반 이상 읽었다. 이해하지 못한 부분은 책장 귀퉁이를 살짝 접어 두었다가, 다음에 고명원이 찾아오면 물어볼 생각이었다.하지만 하루에 한 번은
정은소는 잠시 침묵했다.고명원에게만큼은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다.“연아가 한 짓이 아니에요.”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아주 작은 목소리로 고백했다.“제가…… 일부러 먹은 거예요.”“뭐라고 하셨소?”고명원이 놀라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곧바로 소리를 낮추기는 했지만, 정은소를 바라보는 얼굴에는 믿기지 않는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직접 먹었다고 했소? 제정신이오? 그 약초는 성질이 몹시 차서 조금만 잘못 먹어도 산모와 아이, 둘 다 모두 목숨을 잃을 수 있소. 그걸 몰랐던 것이오?”“알고 있었어요.”정은소는 고개를 들어 고명원을 바라보았다. 눈빛은 흔들림 없이 차분하고 단단했다.“아이에게 해가 가지 않도록 양을 미리 계산했어요.”고명원은 무언가 말하려 입을 벌렸으나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동안 자신이 보아 온 정은소는 언제나 온순했다. 아무리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묵묵히 참으며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는 여인이었다.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고명원은 정은소에게서 광기마저 느껴질 만큼 단호한 결의를 처음으로 보았다.“어째서…….”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왜 형님께 말씀드리지 않은 것이오? 연아를 내보내 달라고 부탁하면 될 일이었잖소. 무엇 때문에 자신과 아이를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이런 일을 벌인 것이오?”정은소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입가에는 쓰디쓴 미소가 걸렸다.“연아는 아가씨의 사람이고, 아가씨는 곧 장군의 정실이 되실 분이잖아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더욱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장군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물론 겉으로 내세운 말에 불과했다.정은소는 알고 있었다. 고시언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았어도 그는 자신을 위해 연아를 쫓아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일로 조청아의 심기를 거스르려 하지도 않았을 터였다.고명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침묵했다.“공자.”정은소는 고개를 들어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오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으면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