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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Author: 송이나경
고명원은 약상자를 들고 연아가 안내한 처소에 도착했지만, 고시언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뜰 안은 고요했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시녀 하나가 그를 발견하자 서둘러 발을 걷어 올리고 안으로 안내했다.

조청아는 안쪽 방의 침상에 누워 비단 이불을 덮고 있었다. 얼굴에 다소 핏기가 없기는 했지만 정신은 맑아 보였다. 그녀는 고명원이 들어오자 힘없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고 태의께서 오셨군요. 괜히 번거롭게 발걸음하시게 했네요.”

고명원은 허리를 숙여 예를 올린 뒤 침상 앞의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약상자에서 진맥용 받침을 꺼냈다.

조청아는 그 위에 손목을 올려놓으면서도 줄곧 고명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내 별 뜻 없이 묻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고 태의께서 요 며칠 별채를 자주 찾으시는 것 같던데, 정 낭자의 몸은 좀 어떻던가요?”

고명원은 손끝으로 맥을 짚은 채 차분하게 대답했다.

“태기는 안정되었습니다. 다만 당분간은 조용히 몸조리해야 해야 합니다. 다시 자극을 받아서는 안 되거든요.”

“그렇다니 다행이네요.”

조청아는 더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도 줄곧 정 낭자와 아이를 걱정하고 있었어요. 아무래도 장군의 핏줄이니 무슨 일이라도 생겨서는 안 되잖아요.”

고명원은 대꾸하지 않고 진맥에만 집중했다.

그러나 조청아는 이야기를 그만둘 생각이 없는 듯했다.

“정 낭자가 어제 또 쓰러졌다면서요? 별채의 어멈도 참 너무했어요. 아이를 밴 사람에게 어찌 빨래를 시킬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 자는 반드시 엄하게 벌해야 한다고 장군께도 말해 두었어요.”

고명원은 진맥을 마치고 손을 거두었다.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소저의 맥은 안정되어 있습니다. 찬 기운을 조금 받은 것뿐이니 몸을 덥히는 약을 두 첩 정도 드시면 괜찮아질 겁니다. 별채의 일은 형님께서 알아서 처리하실 테니, 소저께서는 우선 몸을 돌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빈틈을 찾을 수 없는 대답이었다. 조청아가 꺼낸 이야기에 휩쓸리지도 않았고, 정은소의 상태에 관해서도 아무것도 더 알려 주지 않았다.

조청아의 미소가 순간 굳었다. 눈동자 깊은 곳으로 불쾌한 기색이 스쳐 갔지만, 이내 다시 온화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럼 고 태의께 감사드리지요.”

고명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올리고 방을 나섰다. 뜰 밖으로 나온 뒤에야 그는 남몰래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는 정은소의 몸이 조청아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좋지 않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기혈이 모두 쇠한 데다 태아의 위치도 바르지 않아, 조금만 잘못되면 산모와 아이 모두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정은소를 향한 조청아의 ‘걱정’이 진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너무도 분명했다.

*

정은소는 그날 하루 종일 침상에 누워 지냈다.

고시언이 보내 준 두 어멈은 쉴 새 없이 방 안팎을 오갔다. 살갑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따뜻한 밥을 제때 가져다주었고, 차갑기만 하던 방 안에도 마침내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정은소의 몸도 제법 빠르게 회복되었다. 이제는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지 않고 혼자 침상에서 내려와 걸을 수 있었다.

해 질 무렵이 되자 하루 종일 모습을 보이지 않던 연아가 발을 걷고 들어왔다.

“정은소, 아가씨께서 물에 빠져 크게 놀라셨어. 그러니 통방인 너도 한 번쯤 문안을 드리러 가야 하지 않겠어?”

정은소는 연아를 바라보았다.

조청아의 뜻이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렸지만, 거절할 만한 이유가 없었다. 조청아는 장차 장군부의 안주인이 될 사람이었다. 통방인 자신이 문안조차 가지 않는다면 도리상 말이 나오기 충분했다.

“그래.”

정은소는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흐트러진 머리도 간단히 빗어 정돈했다. 그러고는 연아를 따라 별채 밖으로 나섰다.

고시언의 처소로 향하는 내내 연아는 잠시도 입을 다물지 않았다.

“장군께서 지난밤 얼마나 지극하게 아가씨를 보살피셨는지 몰라. 직접 옷도 갈아입혀 주시고 약도 먹여 주시면서 밤새 곁을 지키셨다니까.”

연아는 정은소의 반응을 살피며 더욱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네가 직접 보지 못해서 그렇지, 아가씨를 바라보시는 장군의 눈빛이 어찌나 다정하던지 꿀이라도 뚝뚝 떨어지는 줄 알았어.”

비아냥거리는 말투에는 숨길 생각조차 없는 악의가 가득했다.

“장군께서는 아가씨만을 한결같이 사랑하시나 봐. 네가 보기에도 그렇지 않아?”

정은소는 연아의 뒤를 따르며 무표정한 얼굴로 이야기를 들었다. 한참 뒤에야 담담하게 대답했다.

“장군께서 아가씨를 아끼시는 데다 아가씨는 곧 장군의 정실이 되실 분이니, 그 정도는 당연한 일이지.”

연아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뒤를 돌아 정은소를 바라보던 그녀는 허리까지 숙일 만큼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하다고?”

연아는 웃느라 맺힌 눈물을 손끝으로 훔치고 정은소에게 바짝 다가섰다.

“정은소,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해 봐.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목소리에는 노골적인 악의가 가득했다.

“변방에서 장군께서 너한테 얼마나 잘해 주셨는데. 말 타는 법도 가르쳐 주고 글도 가르쳐 주셨지. 밤에는 오직 너 하나만 시중을 들게 하셨고, 너는 장군의 아이까지 품었잖아.”

연아는 정은소의 얼굴에서 애써 감추고 있는 상처를 찾아내려는 듯 빤히 들여다보았다.

“너도 장군께서 자신을 특별히 여긴다고 생각했겠지. 당연히 너를 아끼고 지켜 주실 줄 알았을 테고.”

연아의 입가에 비웃음 어린 미소가 번졌다.

“헌데 결국 어떻게 됐어? 장군께서는 도성으로 돌아온 뒤 한 달 동안 너를 거들떠보지도 않으셨잖아. 이제 네 처지는 나처럼 평범한 시녀보다도 못해.”

연아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 한마디 한마디 힘을 실어 내뱉었다.

“인정해, 정은소. 너는 질투 때문에 미칠 것 같잖아.”

뒤이어 더욱 날카로운 말이 그녀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너는 그저 웃음거리일 뿐이야. 이 모든 건 네가 자초한 일이니까.”

정은소는 소매 안에서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깊게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연아를 지나쳐 묵묵히 앞으로 걸어갔다.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었다.

연아가 내뱉은 말들은 하나같이 정은소의 상처를 정확히 찔렀다.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그렇다고 연아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도 없었다.

고시언의 처소에 도착한 정은소는 곧 안쪽 방으로 안내되었다.

조청아는 침상 머리맡에 기대앉아 있었다. 달빛처럼 은은한 흰색 잠옷을 걸친 채 검은 머리카락을 어깨 위로 길게 늘어뜨리고 있어, 안 그래도 여린 얼굴이 더욱 가냘프고 가련해 보였다.

정은소가 들어오자 조청아는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정 낭자가 왔군요. 어서 앉아요.”

정은소는 먼저 예를 올린 뒤 공손하게 안부를 물었다.

“아가씨께서 물에 빠지셨다는 말을 듣고 문안을 드리러 왔습니다. 지금은 몸이 좀 어떠십니까?”

“괜찮아요. 내가 부주의해서 그런 것이지요. 괜히 시언에게 밤새 나를 돌보게 하고, 정 낭자까지 걱정하게 만들었네요.”

조청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이어 연아와 다른 시녀들에게도 모두 물러가라고 명했다.

사람들이 나가자 안쪽 방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

“정 낭자.”

조청아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조금 난처한 듯 말을 꺼냈다.

“따뜻한 물을 좀 마시고 싶은데, 번거롭더라도 한 잔만 따라 주겠어요?”

정은소는 순간 멈칫했다.

배가 이토록 불러 움직이는 것조차 힘든 자신을 두고, 조청아는 굳이 시녀들을 모두 물린 뒤 물을 따라 달라고 했다. 명백히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려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정은소에게는 거절할 수 있는 권리가 없었다.

그녀는 탁자를 짚고 천천히 일어났다. 조심스럽게 따뜻한 물 한 잔을 따른 뒤 몸을 돌려 조청아에게 내밀었다.

조청아는 잔을 받아 들면서도 정은소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다 일부러 제대로 잡지 않은 듯 잔을 한쪽으로 기울였다. 따뜻한 물이 흘러나와 비단 이불 위를 흠뻑 적셨다.

“어머나.”

조청아는 깜짝 놀란 듯 작게 숨을 삼켰다.

그녀가 막 정은소에게 죄명을 씌우려던 순간, 곁눈질로 문발이 걷히는 것이 보였다.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고시언이었다.

이렇게 때마침 돌아오다니?

조청아는 곧바로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죄책감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 낭자, 몸도 불편한데 정말 나를 보러 올 필요 없었어요. 내 곁에는 시중들 시녀들도 있으니, 정 낭자가 직접 무언가 해 줄 필요도 없고요.”

조청아는 마치 이제야 고시언을 발견한 듯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려 했다.

“나는 괜찮아요. 정 낭자를 나무라지 마세요.”

정은소는 여전히 물잔을 든 채 침상 곁에 서 있었다. 입술은 희미하게 핏기를 잃어 가고 있었다.

그녀는 해명하고 싶었다.

자신이 원해서 이곳에 온 것이 아니며, 조청아에게 굳이 물을 따르겠다고 나선 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고시언의 차갑고 굳은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은 다시 가슴속으로 가라앉았다.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어제 연아가 자신을 밀었다고 말했을 때도 고시언은 믿어 주지 않았다.

오늘 조청아가 일부러 자신을 불러 시중을 들게 했고, 고의로 물잔을 기울였다고 말한다면 이번에는 믿어 줄까?

정은소는 결국 고개를 숙이고 침묵을 택했다.

고시언의 시선이 정은소의 얼굴에 머물렀다.

하지만 그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그저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회임한 몸이니 함부로 돌아다녀서는 안 된다. 사람을 시켜 별채로 돌려보내겠다.”

정은소는 눈을 내리깔고 가볍게 허리를 굽혔다.

“예,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몸을 돌리는 순간, 정은소의 눈시울이 끝내 붉어졌다.

고시언은 조청아의 말을 믿었다.

자신이 일부러 조청아의 불행을 구경하러 왔다고 생각한 것일까. 아니면 고의로 물을 쏟아 조청아에게 모욕을 주려 했다고 여긴 것일까.

그렇다면 자신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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