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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Author: 송이나경
다음 날 아침 일찍 고명원이 별채를 찾아왔다.

정은소는 침상 머리맡에 기대앉아 안태약을 마시고 있었다. 고시언이 보내 준 어멈들은 손놀림이 조금 굼뜨기는 했지만, 그래도 진심으로 그녀를 보살피고 있었다.

따뜻한 약물은 혀가 저릴 만큼 썼다. 정은소가 단숨에 약을 삼키고 사발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문 앞에 나타난 고명원이 눈에 들어왔다.

“고 태의께서 오셨군요.”

그녀는 약사발을 내려놓으며 옅게 미소 지었다.

어제보다는 안색이 조금 나아져 있었다. 적어도 창백하던 입술에는 희미하게나마 혈색이 돌아왔다. 그러나 두 눈 아래에 드리운 짙은 그늘은 여전했다.

고명원은 먼저 정은소의 몸을 꼼꼼히 살폈다. 진맥을 마친 뒤에야 소매 안에서 남빛 주머니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물건은 모두 팔았소. 은자는 여기에 들어있소.”

“벌써요?”

정은소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번졌다. 주머니를 받아 열어 보니 안에는 은자 한 덩이와 잘게 나뉜 은 조각들이 들어 있었다. 모두 합하면 대략 스무 냥쯤 되었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금액이었다.

정은소는 잠시 굳어 있다가 고명원을 올려다보았다.

“이렇게나 많이 받았습니까?”

자신이 맡긴 물건들의 품질이 아주 뛰어나지 않다는 것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아무리 후하게 값을 쳐도 열다섯 냥이나 열여섯 냥을 받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명원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담담하게 설명했다.

“옷감이 소주와 항주에서 온 상품이더군. 정 낭자가 시세를 잘 몰랐던 모양이오. 옥팔찌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품질이 좋아서 제법 괜찮은 값을 받았소.”

정은소는 고명원을 바라보며 무언가 말하려 했다.

하지만 고명원은 그녀가 캐묻기도 전에 다시 말을 이었다.

“염려하지 말고 받으시오. 모두 정 낭자의 물건을 팔아 받은 은자이니.”

물론 사실이 아니었다.

그 옷감은 좋은 값을 받을 만한 물건이 아니었고, 옥팔찌의 품질도 중간 정도에 불과했다. 고명원이 남몰래 자신의 은자 여덟 냥을 보태 스무 냥을 맞춘 것이었다.

더 많이 보탤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정은소가 의심할까 염려했고, 무엇보다 진실을 알게 되면 받지 않으려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정은소도 그가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음을 짐작했다. 그녀는 손안의 주머니를 꼭 쥔 채 감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고 태의.”

스무 냥에 지난 한 달 동안 조금씩 모아 둔 은자까지 합하면 대략 스물다섯 냥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았지만, 앞으로 필요한 돈을 생각하면 턱없이 부족했다.

아이와 함께 장군부를 떠나야 했다.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먼 곳으로 가서 새로운 거처를 구하고, 홀로 아이를 길러야 했다. 그런 일을 고작 스물다섯 냥으로 해결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고명원에게 더는 폐를 끼칠 수 없었다.

그는 이미 자신을 충분히 도와주었다. 더구나 자신이 도망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의 성정상 반드시 만류할 터였다. 어쩌면 고시언에게 알릴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해서 고명원은 자신을 해칠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장군부를 떠나면 자신이 살아갈 수 없으리라 여길 뿐이었다.

정은소는 속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어쩌면 그의 판단이 옳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장군부에 남는다고 해서 자신의 앞날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아이가 조청아의 손에 맡겨진다면, 그 아이마저 언제 또 위협받을지 모른 채 살아가야 할 터였다.

고명원은 정은소가 주머니를 쥔 채 생각에 잠긴 모습을 바라보다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결국 염려를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정 낭자, 대체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이오? 그 은자로… 충분하긴 하오?”

정은소는 상념에서 깨어나 주머니를 잘 갈무리했다. 얼굴에는 다시 아무렇지 않은 듯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충분합니다. 시녀와 어멈들에게 조금씩 나누어 주어 제게 더 마음을 쓰도록 하려는 것뿐입니다. 고 태의께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명원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더는 캐묻지 않았다.

바로 그때, 마당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고 태의! 고 태의!”

하룻밤 내내 모습을 감추었던 연아가 그제야 나타났다. 고명원을 발견한 연아는 눈을 반짝이며 서둘러 다가가 공손히 예를 올렸다.

“고 태의, 이제야 찾았습니다. 아가씨께서 어제 물에 빠지셨습니다. 장군께서 고 태의를 모셔 와 아가씨의 몸을 자세히 살펴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연아는 말을 하다 침상 위의 정은소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정은소가 듣지 못할까 봐 걱정이라도 되는 듯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장군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아가씨를 맡기면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며 지난밤 내내 직접 곁을 지키셨습니다. 아가씨를 향한 장군의 마음이 참으로 지극하시지요.”

고명원의 얼굴빛이 미세하게 변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정은소를 돌아보았다.

정은소는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불 아래에 감춘 손은 아플 만큼 꽉 쥐고 있었다.

조청아는 어젯밤 장군부에서 묵은 모양이었다. 그것도 고시언과 함께.

어제 황급히 별채를 떠나던 고시언의 뒷모습을 떠올리자, 정은소의 가슴속으로 가늘고 촘촘한 통증이 번졌다. 가슴이 꽉 막힌 듯 숨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고 태의, 어서 가시지요.”

고명원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자 연아가 재촉했다.

“장군과 아가씨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정은소도 곧바로 입을 열었다.

“고 태의께서는 어서 가 보십시오. 아가씨의 몸이 더 중요합니다. 저는 이제 괜찮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명원은 몇 번이나 말을 꺼내려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약상자를 챙겼다.

연아와 함께 방을 나서려던 그는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뒤를 돌아보았다.

정은소는 이미 벽을 향한 채 다시 누워 있었다. 고명원에게 보이는 것은 그저 가늘고 쓸쓸한 그녀의 뒷모습뿐이었다.

고명원은 나직이 한숨을 내쉰 뒤 몸을 돌려 떠났다.

두 사람이 사라지자 방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정은소는 눈을 뜬 채 얼룩지고 갈라진 벽을 바라보았다. 미동조차 하지 않았지만 머릿속에서는 같은 말이 끝없이 맴돌았다.

고시언은 밤새 조청아의 곁을 지켰다.

두 사람은 함께 무엇을 했을까.

고시언은 조청아에게 어떤 말을 건넸을까.

변방에서 자신을 품에 안았던 것처럼 조청아를 끌어안고, 귓가에 낮고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정은소의 기억은 자연스럽게 두 사람이 처음으로 밤을 함께 보냈던 때로 흘러갔다.

그때 정은소가 고시언의 군영에 들어온 지도 어느덧 두 달이 넘은 뒤였다. 하지만 통방 몸종이라는 명목만 있을 뿐, 두 사람 사이에는 여전히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군영에 자객이 잠입했다.

혼란이 빚어진 틈에 정은소는 잘못 휘두른 칼에 팔을 베이고 말았다. 길게 벌어진 상처에서는 피가 좀처럼 멎지 않았다.

고시언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을 때는 이미 상처를 모두 싸맨 뒤였다. 그는 정은소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곧바로 주강에게 명해 군영 주변의 경계를 세 배로 늘렸다.

그리고 그날 밤, 고시언은 정은소를 자신의 침상에 눕혔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뒤에서 그녀를 품에 안은 채, 턱을 그녀의 머리 위에 살며시 얹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인가 깊은 밤 잠에서 깬 정은소는 자신을 끌어안은 고시언에게서 억누르고 있는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가 먼저 손을 내밀 때마다, 고시언은 끝내 그녀를 밀어내듯 막아섰다.

“서두를 것 없다.”

그는 잠긴 듯 낮고 나른한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우리에게는 앞으로 시간이 많으니, 천천히 하면 된다.”

당시 정은소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믿었다.

팔의 상처가 모두 아문 날 밤, 두 사람은 마치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서로를 받아들였다.

정은소는 아직도 그날의 모든 것을 생생히 기억했다.

입술 위에 내려앉았던 그의 뜨거운 입맞춤도, 굳은살 박인 거친 손길이 피부를 스칠 때마다 번져 오던 떨림도, 감정이 깊어진 순간 귓가에 낮게 속삭이던 말도.

“정은소, 네 몸을 잘 지키거라. 절대 나를 두고 가서는 안 된다.”

나를 두고 가서는 안 된다.

그토록 간절하고 낮은 부탁이 천하를 호령하는 대장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정은소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어쩌면 그는 지난밤 조청아에게도 똑같은 말을 했을지 몰랐다.

아니, 자신을 만나기 훨씬 전부터 조청아에게 그런 말을 해 왔을지도 모른다.

정은소는 몸 위의 이불을 힘껏 움켜쥐었다.

그런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눈물로 베개가 흠뻑 젖어 있었다.

그녀는 흠칫 놀라 몸을 일으켰다. 손등으로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거칠게 닦아 내고는, 정신을 붙잡으려는 듯 제 팔을 세게 꼬집었다.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생각한들 무엇이 달라지는가.

울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눈물이나 가슴을 찢는 아픔은 자신과 아이가 살아갈 길을 만들어 주지는 못한다.

정은소는 베개 아래 숨겨 둔 남빛 주머니를 더듬어 찾아냈다. 손안에 쥔 주머니가 구겨질 정도로 힘껏 움켜쥔 채 한참을 놓지 못했다.

아직은 은자가 턱없이 부족했다.

빈틈없는 탈출 계획도 필요했고, 추격을 피해 안전하게 몸을 숨길 곳도 찾아야 했다.

그러려면 반드시 집에 한 번 다녀와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장군부를 빠져나갈 수 있을까?

다시 고명원에게 부탁해야 할까?

정은소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

고명원은 지나치게 영리했다. 이미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정은소도 느끼고 있었다.

다시 도움을 청한다면 이번에는 반드시 끝까지 이유를 물을 것이다.

그러나 고명원 말고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또 누가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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