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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가시 돋친 말들

Autor: 연월담
last update Fecha de publicación: 2026-09-27 18:21:41

그날 이후로 호정은 되도록 사랑채 근처를 피해 다녔다. 그러나 넓은 집이라도 한 지붕 아래 사는 이상, 마주치지 않을 도리는 없었다. 게다가 이상하게도, 피하려 할수록 시경은 자꾸만 그녀의 눈에 띄었다.

"조카는 아침마다 어딜 그리 바삐 다니느냐."

후원을 가로질러 가던 호정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시경이 나무 그늘 아래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침부터 술 냄새는 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할 일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 한량의 모습 그대로였다.

"어머니께 문안을 드리러 가는 길이옵니다."

"기특하구나. 청나라에서 자란 것치고는."

또 그 소리였다. 청나라, 청나라. 마치 그 말이 그녀를 놀리는 데 가장 손쉬운 무기라도 되는 양, 시경은 기회가 될 때마다 그 단어를 꺼내 들었다. 호정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숙부님께서는 청나라에 가 보신 적이 있으시옵니까."

"없다."

"하면 가 보지도 않으신 곳을 어찌 그리 잘 아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는지요."

시경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나무에 기대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말대꾸하는 버릇이 여전하구나."

"숙부님께서 먼저 시비를 거시는 버릇을 고치지 않으시니, 소녀도 어쩔 수가 없사옵니다."

그 말에 시경은 소리 내어 웃었다.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나른하고 냉소적인 표정 뒤에 감춰져 있던, 뜻밖에 젊고 개운한 웃음소리였다. 호정은 그 웃음에 순간 당황해 말을 잃었다.

"됐다. 가던 길 가거라."

시경이 몸을 돌려 걸어가며 손을 휘휘 저었다. 호정은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자신이 왜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어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그런 일이 있고 며칠 뒤, 집안에 작은 잔치가 열렸다. 김정 대감의 생신을 기념하는 자리로, 일가친척들뿐 아니라 고관대작들 모두 모여드는 큰 행사였다. 호정은 어머니를 도와 손님을 맞이하느라 분주했다.

"저기 저 낭자가 청나라에서 왔다는 그 아이인가?"

먼 친척뻘 되는 부인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정은 못 들은 척 고개를 숙이고 예를 갖추었지만, 귀는 여전히 그쪽을 향해 열려 있었다.

"그런데 어찌 저리 곱게 생겼누. 시헌 나리 내외를 반반씩 닮았다더니, 과연 헛말이 아니었구먼."

"시경 도련님과 나이 차이가 얼마 안 난다지? 삼촌 조카 사이라기엔 우습기도 하지."

그 말에 호정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애써 태연한 척 자리를 옮기려는데, 마침 안쪽에서 걸어 나오던 시경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도 그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소문이 벌써 그리 났나 보구나. 삼촌 조카 사이가 우습다고."

시경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나른함 대신 조금은 날 선 기색이 섞여 있었다. 호정은 그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레 답했다.

"신경 쓰지 않으시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그저 지나가는 말들이니까요."

"내가 신경을 쓴다고 누가 그러더냐."

말투는 퉁명스러웠지만, 그 순간 시경의 눈빛에 스친 무언가를 호정은 놓치지 않았다. 짜증도, 무심함도 아닌,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었다.

"숙부님."

"왜."

"제가 어려서 청나라로 떠났다가 이제야 돌아온 것이 그리도 못마땅하십니까? 계속해서 그 이야기만 꺼내시니 여쭙는 것이옵니다."

호정의 물음에 시경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그러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못마땅한 것이 아니다."

"하오면…"

"신경이 쓰이는 것이지."

그 짧은 대답을 남기고 시경은 그대로 몸을 돌려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호정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방금 들은 말의 의미를 곱씹었다. 신경이 쓰인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못마땅함과는 다른, 그러나 무엇인지 정확히 짚어낼 수 없는 그 말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그날 밤, 잔치가 끝나고 손님들이 하나둘 돌아간 뒤, 호정은 잠이 오지 않아 뜰을 거닐었다. 달빛이 밝은 밤이었다. 연못가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 먼저 나와 있는 사람이 있었다. 시경이었다.

"숙부님도 잠이 안 오시옵니까."

호정이 다가가며 묻자, 시경은 돌아보지도 않고 답했다.

"이 시각에 처녀가 혼자 뜰을 나다니는 것이 아니다."

"숙부님이야말로 이 시각에 어찌 이곳에 계시온지요."

"...생각할 것이 있어서."

시경의 목소리에서 낮 동안의 날 선 기색은 사라지고 없었다. 호정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의 옆에, 조금 떨어진 자리에 섰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달빛에 비친 연못 수면을 바라보았다.

"청나라에서의 삶은 어떠하였느냐."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시경이었다. 호정은 조금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처음으로 그가 조롱이나 시비가 아닌, 진심 어린 물음을 던진 것이었다.

"...낯설고, 두렵고, 그러다 익숙해지고. 그런 나날이었사옵니다.

"돌아오니 좋으냐."

"모르겠사옵니다. 조선도, 청나라도, 어느 쪽도 온전히 제 것 같지가 않아서요."

그 말에 시경은 처음으로 그녀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달빛 아래 드러난 그의 눈빛에는 낮에 보였던 나른함도, 조롱기도 없었다. 다만 무언가를 이해하는 듯한, 어쩌면 그 자신도 비슷한 감정을 알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 마음, 조금은 알 것도 같구나."

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은 채, 몸을 돌려 걸어갔다. 호정은 홀로 남아 연못가에 서서, 방금 전 그의 눈빛을 떠올리며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을 느꼈다. 그것이 무엇인지 이름 붙이기에는, 아직 너무 이른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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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기   9화 심장이 뛰는 이유

    한가위가 지나고 며칠 뒤,호정은 한양의 장터가 궁금하기도 하고 답답함도 잊고자 청아만을 데리고 저잣거리 구경에 나섰다. 어머니께는 필요한 노리개와 빗을 사러 간다는 핑계를 댔지만, 실은 명절 내내 집안 어른들 사이에 치이고 숙부와도 신경전을 벌인 탓에 바람이라도 쐬고 싶었던 것이었다."아씨, 오랜만에 나오시니 걸음이 다 가벼워 보이십니다."청아가 앞장서며 웃었다. 호정도 모처럼의 나들이에 기분이 한결 나아진 표정이었다. 저잣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포목전, 지전, 방물전이 늘어선 거리를 지나 이곳 저곳을 기웃거렸다. 호정은 처음으로 보는 한양의 점포들이 낯설고 신기했다."이 노리개는 어떻습니까, 아씨."청아는 작은 백옥에 연분홍 매듭이 곱게 지어진 노리게를 호정에게 보여주었다."아주 곱구나. 그것으로 하자."값을 치르고 물건을 받아 든 호정은 다음 가게로 발길을 옮기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맞은편 거리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기생 서넛이 한 사내를 둘러싸고 교태를 부리며 걸어오고 있었다."도련님, 이쪽 가게에 좋은 노리개가 있다던데 소녀 노리개하나 사주시면 안되겠습니까?.""어머, 저는 저쪽 방물전에 새로 들어온 연지가 갖고 싶슴니당~."기생들이 저마다 사내의 팔짱을 끼려 애쓰며 재잘거렸다. 호정은 무심코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그대로 얼굴이 굳었다. 그 한가운데, 나른한 걸음으로 기생들에게 둘러싸여 걷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시경이었다."...숙부님?"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호정의 목소리에, 시경이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호정은 예를 갖추어 짧게 고개를 숙였다."숙부님을 이런 곳에서 뵙는군요."그러나 인사를 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이미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기방 출입을 금하겠다던 할아버지의 엄명이 있었건만, 대낮 저잣거리에서 기생들을 줄줄이 이끌고 다니는 꼴이라니. 호정은 순간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어머, 저 아가씨는 뉘신지요? 도련님의 조카분이십니까?.""조카가 도련님을

  • 금기   8화 그에게도 진중함이..

    축문이 낭독되고, 절이 이어졌다. 향 연기가 사당 안에 자욱하게 퍼지는 가운데, 호정은 어머니 곁에 서서 조상님께 절을 올리는 오라버니와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사이, 시경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평소의 나른하고 심드렁한 표정은 어디로 갔는지, 이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진중한 얼굴로 절을 올리고 있었다. 호정은 그 낯선 모습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제사가 끝나고 음복이 이어졌다. 온 집안이 마당에 상을 펴고 둘러앉아 함께 음식을 나누는 자리였다. 아이들이 뛰어놀고, 어른들은 오랜만에 모인 친척들과 담소를 나누었다. 이번 한가위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먼 친척들도 여럿 자리를 함께하였다. 평안도, 충청도 등지에서 온 일가붙이들 중에는 호정을 처음 보는 이들이 대부분이었고, 어려서 보았으나 오랜 세월이 흘러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도 꽤 있었다. 그런 만큼 그녀를 향한 시선과 궁금증이 유독 뜨거웠다. "저 아이가 그 청나라에서 돌아왔다는 이 댁 손녀딸인가?“ "그렇다네. 여덟 살에 갔다가 이제야 돌아왔다지.“ "어쩐지, 낯빛이며 몸가짐이 여느 규수들과는 사뭇 다르구먼.“ 호정이 인사를 올리러 다가가는 자리마다 어른들은 그녀를 붙잡고 이것저것을 물었다. "심양에서는 어찌 지냈느냐. 그곳 음식은 입에 맞더냐.“ "조선말은 잊지 않고 다 기억하고 있었느냐.“ "듣던 대로 참으로 곱게 생겼구나. 어느 댁에서 며느리로 데려가려 눈독을 들이겠어." 질문이 끝없이 이어지자 호정은 웃는 낯으로 하나하나 답하면서도 속으로는 조금 지친 기색이었다. 사촌 언니들이 그런 그녀를 보다 못해 슬쩍 끼어들었다. "할머님들, 그만 놓아주셔요. 호정이도 좀 쉬어야지요.“ "허허,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라 그런다. 어여 가서 쉬거라." 간신히 자리를 벗어난 호정은 사촌들 무리에 섞여서야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호정아, 이리 와서 이것 좀 먹어 보아라." 사촌 언니가 부르는 소리에 자리를 옮기며 호정도 오랜만에 여유로운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 금기   7화. 한가위 

    추석이 다가오자 김정 대감댁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이번 한가위는 예년과 달랐다. 청나라에서 돌아온 둘째 아들 시헌의 가족들이 처음으로 함께 지내는 명절이었던 까닭에, 대감은 조상님께 그 소식을 알리는 뜻에서 예년보다 더 성대하게 제청을 차리라 일렀다. "이번 제사에는 집안 가솔들이 모두 모여야 한다. 아무도 빠짐없이 참례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먼 곳에서 오시는 친지들도 계시니 그 분들 또한 최선을 다해 맞이해야 할 것이야." 대감의 엄명에 사랑채도 안채도 며칠 전부터 집안일을 하는 노비들의 손이 바빴다. 엄청난 양의 음식들이며 집안 대청소까지 빈틈없이 모든 일이 차근차근 이루어 졌다. 호정은 어머니의 처소에서 일가친척들에 관해 하나하나 교육을 받아야 했다. 행여 멀리 청나라에서 지내다 왔다 하며 작은 흠이라도 잡힐까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또한 호정에게 제사의 전반적인 것들에 관해 알려주었다. 앞으로 호정이 역시도 어느 댁 며느리가 되어야 할 터, 양반집인 만큼 실제 손이 가는 일은 모두 노비들의 몫이었으나, 그렇다 해도 안주인 될 이로서 제청이 어떻게 차려지고 절차가 어떻게 이어지는지는 알아 두어야 했다. "제상은 이리 놓이고, 지방은 저리 모시는 것이다. 이리 크게 제사를 모시는 것이 낯설겠지만, 명색이 이 집안의 손녀인데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서야 되겠느냐.“ "예, 어머니. 잘 새겨듣겠습니다." 호정은 어머니가 짚어 주는 제상의 위치, 축문을 읽는 순서, 절하는 예법 하나하나를 열심히 익혔다. 조선의 예법은 누누이 어머니의 교육으로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큰 규모의 제사를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짚어 가며 배우는 것은 또 달랐다. "명절 음식 또한 집안의 어멈들이 담당하겠지만 앞으로 네가 시집을 가게 되면 알아야 부릴수도 있는 것이니 잘 익혀두어야 한다..“ "예. 어머님!" 호정은 짧게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어머니는 이번 명절에 외지에 사는 친척들도 여럿 다녀갈 것이라며, 그들 앞에서 흠 잡힐 일이 없도록 각별히

  • 금기   6화 한량

    한양의 남촌 뒷골목, 홍등이 화려하게 걸려있는 '연화루'의 별채에서는 밤이 깊어 갈수록 풍악 소리가 더 높아지고 있었다.가야금 줄이 튕겨지는 소리, 장구 장단, 그 사이사이로 사내들과 술따르는 기생들의 웃음소리가 묘하게 섞여 담장 너머까지 흘러나왔다."자, 한 잔 더 받으시지요, 도련님.“기생 월향이 나긋한 손길로 술병을 기울였다.상석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시경은 잔을 내밀어 술을 받으며 흐드러지듯 풀어진 눈으로 실내를 둘러보았다. 이미 상 위에는 빈 술병이 여럿 나뒹굴고 있었다."시경이 자네, 오늘따라 유독 말이 없구먼."맞은편에 앉은 한도윤이 술잔을 든 채 킬킬 웃었다. 병조참판 댁 아들로, 시경과는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벗이었다. 그 옆에서 서진이 거들었다."말이 없는 게 아니라 원래 술자리에서는 말을 아끼는 놈이지.""시끄럽다, 이것들아."시경은 잔을 단숨에 비우고 탁 내려놓았다. 월향이 재빨리 다시 잔을 채웠다.한양의 둘째 가라면 서러울 이름난 한량 김시경의 술버릇쯤은 이 집 기생들 중 모르는 이가 없었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는 법이 없고, 아무리 절세가인을 앉혀도 술을 따르게 하는 그 이상은 결코 곁을 주지 않았다."도련님, 오늘은 소녀가 밤새 곁을 지켜도 되겠사옵니까."월향이 은근한 눈웃음을 지으며 시경의 귀에 가까이 속삭였다. 그러고는 시경의 옷섭이 살짝 벌어진 틈으로 자신의 손을 살며시 밀어넣었다.시경은 그 손을 무심히 내려다보다가 조용히 그녀의 소매 끝을 손가락으로 살짝 집어 옮겨 놓았다."술이나 따르거라. 거기까지다.""어머, 도련님~ 제가 어여쁘지 않으신가 봅니다~ 만리장성을 쌓아도 수백 번은 쌓았겠구만."월향은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물러서서 다시 술병을 들었다. 이런 거절이 처음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시경이 무례하게 구는 것도 아니었기에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도윤이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참 이해가 안 가는 사람이야. 이 바닥에서 소문이 자자한 한량이라면서 기생 하나 건드리지 않으니. 자네가 정말 방

  • 금기   5화. 낯선 손님

    연회가 있던 날로부터 며칠이 지나도록, 김정 대감댁 안팎은 호직과 보암의 혼담 이야기로 시끌시끌했다. 그러나 정작 시경은 그런 화제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심드렁한 얼굴로 사랑채에 틀어박혀 지내는 날이 많아졌다.호정은 여전히 그를 피해 다니는 방법들을 연구해 시경과는 최대한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아침 문안도, 저녁 밥상머리도, 되도록 시경과 마주치지 않을 시각을 골라 움직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오히려 시경 쪽에서 먼저 트집을 잡으러 찾아오는 일이 잦아졌다."조카는 요즘 어찌 그리 코빼기도 안 비치느냐."별당 앞을 지나던 호정의 앞을 시경이 가로막아 섰다. 호정은 한숨을 삼키며 예를 갖추었다."딱히 숙부님을 뵐 일이 없어서요.""뵐 일이 없다니. 한 집안에 살면서 어찌 그런 말을 하느냐.""숙부님께서 저를 보실 때마다 좋은 말씀을 하시는 것도 아니온데, 굳이 마주칠 이유가 있사옵니까."호정의 대꾸에 시경은 잠시 미간을 좁혔다. 그러다 팔짱을 끼며 심드렁하게 답했다."흥, 어른을 그리 피해 다니는 것부터가 예법에 어긋나는 것이다.""숙부님께서 예법을 논하실 처지는 아니신 듯한데요.""뭐라?""낮부터 술 냄새를 풍기고 다니시는 분이 조카에게 예법을 가르치려 드시니 하는 말씀이옵니다."호정의 말에 시경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다른 화제로 말을 돌렸다."그건 그렇고, 네 오라비 혼담이 그리 잘 풀리는 것을 보니 배가 아프지도 않느냐.""어찌 오라버니의 경사에 배가 아프겠사옵니까.""내 말은, 너도 슬슬 혼처를 알아보아야 할 나이가 아니냐는 것이다."뜻밖의 화제에 호정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시경이 그런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던 까닭이었다."...아직 그런 생각은 해 본 적 없사옵니다.""생각이야 안 해 봤어도, 나이가 차면 어른들이 알아서 정해 줄 것이다."시경의 말투는 여전히 심드렁했지만, 어딘가 그답지 않게 그 화제를 오래 붙들고 있는 듯했

  • 금기   4화. 궐 안의 연회

    같은 시각, 궐에서는 작은 술렁임이 일고 있었다. 청나라에서 볼모로 갔던 세자 내외를 비롯하여, 그들과 함께 심양에서 돌아온 김대감댁 둘째 아들과 그 가솔들을 위로하기 위해 중전이 친히 연회를 베풀기로 하였다는 전갈이 각 대감 댁으로 전해진 것이었다."중전마마께서 친히 연회를 여신다니, 이는 실로 큰 영광이 아닐 수 없구나."김정 대감은 소식을 전해 듣고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노론 실세로서의 입지를 다지는 데 있어, 중전의 눈에 드는 것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다. 더구나 이번 연회에는 둘째 아들 시헌의 가솔들, 즉 심양에서 돌아온 손자 손녀들도 함께 참석하게 될 터였다."호직아, 호정아. 이번 연회에는 너희도 함께 참석하게 될 것이니, 부디 예를 갖추어 흠 잡힐 일이 없도록 하여라."할아버지의 당부에 호직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고, 호정은 살짝 긴장한 기색으로 예를 갖추었다. 궐 안의 연회라니, 청나라에서 돌아온 이후 처음 있는 큰 나들이였다.연회를 앞두고 집안은 분주해졌다. 호정은 어머니와 함께 새로 지은 당의를 입어 보며 매무새를 다듬었고, 호직은 사랑채에서 아버지와 함께 궐에서 지켜야 할 예법을 다시금 익혔다. 시경은 그런 소란과는 무관하다는 듯 평소처럼 술병을 옆에 끼고 지냈지만, 이번 연회에는 그도 예외 없이 참석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못마땅한 얼굴을 감추지 않았다."내가 굳이 그런 자리에 왜 가야 하는지 모르겠구나.""숙부님도 대감마님의 아들이시니 당연히 함께 가셔야지요."호직이 대꾸하자 시경은 코웃음을 쳤다."그런 자리에 가 봐야 서로 눈치나 살피고 아부나 떠는 것이 전부일 터인데, 재미도 없는 것을.""그리 말씀하셔도 결국은 가시게 될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호직의 말에 시경은 대답 대신 술잔을 기울일 뿐이었다.드디어 연회 날이 밝았다. 궐의 후원, 넓은 마당에 차일이 드리워지고 그 아래로 화려한 잔칫상이 줄지어 놓였다. 청나라에서 돌아온 관리들과 그들을 환영하기 위해 초대된 종친과 대신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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