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우의정을 만난 다음 날 밤, 시경은 반촌 주막 뒷방에서 청운을 마주 앉혔다. 호롱불이 방 안에서 흔들렸다."덕쇠를 우리 쪽으로 돌릴 것이다.""그자가 순순히 넘어올까요.""속량이 목적이니 그 마음을 파고들면 되지 않겠느냐.""예.""속량 값은 내가 치르겠다. 아버님께 지금은 사정을 말씀드릴 수 없으나, 증거를 쥔 뒤에는 거절하지 못하실 것이다. 그리고 지난번 단오의 일도 봉선이 가담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흘리거라. 그년의 목숨줄도 우리가 쥐고 있다고 말이야.""예, 도련님!"시경이 청운에게 계획을 낱낱이 일러 주었다. 육보정이 서찰을 남기게 할 미끼, 그 서찰이 필요해지는 때, 그리고 그것을 쥐고 우의정을 만나는 방법까지. 청운은 말없이 듣다가 한 가지를 물었다."도련님. 만약 그 낭자가 서찰을 남기지 않으면 어찌할까요.""남기게 해야지. 그 사람은 자신이 잃을 것이 많다고 느낄 때 가장 대담해지는 사람인 듯하더구나. 안 되면 그때 가서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자."시경은 말을 마치고 창밖을 보았다. 눈은 그쳐 있었고 별이 맑았다.새벽 인경이 울리기 전, 덕쇠는 마구간 뒤 쪽문으로 몰래 들어서고 있었다. 숯막에서 봉선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발소리를 죽여 마구간 모퉁이를 도는 순간, 어둠 속에서 손 하나가 불쑥 나와 덕쇠의 멱살을 잡았다."으억!""소리 내지 마라."청운이었다. 덕쇠는 입을 벌린 채 얼어붙었다. 청운이 말없이 그를 마구간 벽에 밀어붙였다."숯막에서 누구를 만나고 오는 것이냐.""그, 그건... 나리, 사람을 잘못 보셨습니다. 그냥 잠시 뒷간에...""봉선이! 그년을 만나고 온 것을 모를 줄 아느냐?"덕쇠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무릎이 꺾이려는 것을 청운이 붙들어 세웠다."안심해라. 죽이려 했다면 이미 너희는 숯막에서 잡혔을 것이다. 대감마님께 고하면 너는 곤장을 맞고 어디론가 팔려 갈 것이고, 봉선은 관아로 끌려가겠지. 네가 오늘 이 새벽에 살아서 이곳을 걸어 나가는 것은 도련님의 뜻이다.""도, 도
우의정 댁 별당에는 사흘째 눈이 녹지 않았다. 육보정은 화로를 곁에 두고도 손을 펴지 않았다. 방물장수 차림으로 뒷문을 넘어온 봉선이 문 앞에 엎드려 아뢰었다."덕쇠가 전한 이야기입니다. 영상 댁 아가씨가 허혈로 앓아누웠는데, 도련님이 성균관을 박차고 나와 방문 앞을 밤새 지켰다 합니다.""밤새라고."보정이 가만히 웃었다. 입가만 올라갔고 눈은 얼어 있었다. 서안 위에는 혼담이 오가던 무렵 시경이 보내온 답서들이 펼쳐져 있었다. 짧고 차가운 글씨를 보정은 손끝으로 천천히 쓸었다."조카가 앓는다 하니 대과 공부까지 팽개치고 달려가셨구나.""소문을 퍼뜨릴까요.""아니다. 소문은 우리 한테서 나면 안된다."보정이 고개를 저었다."혼담이 하루빨리 성사되면 그 아이는 이 땅을 떠날 것이다. 영상 댁이 스스로 그리 결정하게 만들면 된다. 그러려면 이 일에 힘을 실어 줄 분이 필요해."그날 저녁, 보정은 아버지 우의정의 사랑을 찾아갔다. 어머니의 상 이후로 부쩍 야윈 우의정이 서안 앞에서 서책을 보고 있었다."아버님, 여쭐 것이 있습니다.""무슨 일이냐.""영상 댁 혼담 소식을 들었습니다. 청나라 사신단 부사 댁과 사돈을 맺는다 하더이다. 아버님께서 넌지시 영상 대감께 어찌 되어 가는지 물어봐 주시면 좋겠습니다.""네가 그것을 어찌 아느냐.""소문이 자자합니다. 그리고 대외적인 위신과 청나라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영상 대감께서 이 혼담을 승낙하시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아버님께서 그리 권하여 주시면 영상 댁도 체면이 서지 않겠습니까."우의정이 서책을 덮고 딸을 오래 바라보았다."보정아.""예.""내가 영상의 가문 혼사에 어찌 입을 댄단 말이냐. 무슨 명분이 있어 영상 대감 댁 혼사에 관여를 하라는 말이야. 더구나 나는 상중이다. 남의 집 혼담에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이 체통에 맞는 일이냐. 네가 감히 조정의 일에까지 입을 대느냐."호통에 보정이 입술을 깨물었다.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우의정은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너무 몰아세웠구나. 네
이튿날 아침, 시경은 마당 한구석에 쪼그려 앉아 눈과 씨름하고 있었다. 청운이 멀찍이서 보다 못해 한마디 했다."도련님, 그것은 무엇입니까?""토끼다.""쥐 같습니다.""토끼라고 했다."시경은 남천 열매로 눈을 박고 솔잎으로 귀를 꽂았다. 귀 한쪽은 길고 한쪽은 짧아 영 모양이 나오지 않았다. 시경은 한참 들여다보다가 포기하고 쟁반에 얹었다.호정의 방 앞에서 인기척을 내자 어머니가 문을 열었다."도련님, 벌써 일어나셨습니까.""예 형수님. 호정이는 어떠합니까.""많이 나았습니다. 허나 아직 일어나지는 못해요.""잠시 얼굴만 보겠습니다.""들어 오시어요. 밖이 춥습니다."어머니는 자리를 내주었다."저는 약을 살피고 오겠습니다. 편히 이야기 나누세요."이불에 몸을 감싸고 앉은 호정이 시경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얼굴에 혈색이 돌아와 양쪽 볼이 발그래했다."숙부님! 그것은 무엇입니까.""토끼다. 약속하지 않았느냐."호정이 쟁반 위를 한참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쥐입니까?""토끼다!""귀가 짝짝이입니다. 희도 도련님이 만든 것보다 더 심하게 짝짝이인걸요!""이건 내가 처음으로 만든 것이니 봐주어라."호정이 입을 가리고 웃다가 아이고, 하며 배를 짚었다. 시경이 놀라 일어서려 하자 호정이 손을 저었다."괜찮습니다. 웃으면 조금 땅길 뿐입니다.""웃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숙부님이 이리 웃기게 만드셨으니 웃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이름을 짓겠습니다. 짝짝이입니다.""좋을 대로 해라.""짝짝이가 녹지 않으면 좋겠는데..."호정이 짝짝이를 창가에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이어 배를 쓰다듬으며 입맛을 다셨다."숙부님, 매운 국밥이 먹고 싶습니다. 산초 가루를 듬뿍 넣은 것으로요.""안 된다. 오늘은 너무 매운 것을 먹으면 안된다. 미음이나 먹거라.""의원이 정말 그리 말했습니까?""내가 정했다."호정이 입을 비죽였다가 눈을 반짝였다."그럼 반촌에 있는 국밥집은 언제 데려 가시려구요?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이튿날 아침, 호정은 약속대로 마당에서 눈토끼를 만들었다. 이번에는 귀를 짝이 맞게 다듬고 눈에는 붉은 열매를 박았다. 쟁반을 받아 든 시경은 한참 들여다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귀가 어제 것보다 낫구나.""숙부님 몫이니까요. 녹기 전에 많이 보아 두십시오.“"흠... 누구를 닮은 것이냐!!""숙부님을 닮았습니다. 숙부님을 생각하며 만들었으니 숙부님을 닮는게 당연하지요.""난 너 닮은 아이가 좋은데..." 시경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가 듯 작아졌다.시경은 쟁반을 마루 끝에 올려 두고 몇 번이나 돌아보다 성균관으로 돌아갔다.사흘 뒤, 호정은 서고에서 언문을 쓰다가 갑자기 눈앞이 하얘졌다. 붓이 손에서 떨어지고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청아가 달려왔을 때 호정은 얼굴이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린 채 정신을 잃었다.안채는 발칵 뒤집혔다. 급히 불려 온 의원이 발 너머에서 맥을 짚고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기가 쇠하고 피가 부족한 허혈입니다. 처음 달거리가 시작되었는데 몸이 이를 감당하지 못한 듯합니다. 아랫배를 따뜻하게 해드리고 푹 쉬게 하십시요. 그리고 이 약을 달여서 따뜻할 때 드시게 하면 됩니다."어머니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열일곱이 되도록 소식이 없어 걱정하던 터였다. 좋은 일이라 기뻐할 겨를도 없이 어머니는 호정의 머리맡에 앉아 이마를 짚었다.어머니는 의원을 배웅하고 돌아와 호정의 배 위에 따뜻한 수건을 얹었다. 미음을 쑤고 약탕관을 지키며 밤이 깊도록 곁을 떠나지 않았다. 호정이 잠결에 몸을 뒤척일 때마다 이불을 여며 주며 어머니는 눈가를 훔쳤다. 이제야 이 아이도 여느 아이처럼 자라는구나 싶었다. 워낙 몸이 약골인 터라 키우는 내내 마음을 졸이던 아이였다."집안에는 허혈로 앓는다고만 해 두어라. 그 외에는 입 밖에 내지 말고."어머니가 청아에게 당부했다. 하지만 청아는 곧바로 청운에게 호정이 앓아누웠다는 소식을 전했고, 청운은 한달음에 성균관으로 달렸다. 시경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대사성에게 달려가 집안 아이가 위독하다 하여 특별 말
눈 쌓인 나무 그늘에 웅크리고 있던 덕쇠는 입김을 손으로 막았다. 서고 창호지에 등잔 불빛이 번져 있었다. 그 위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겹쳐 보였다. 키 큰 그림자가 몸을 숙여 작은 그림자의 어깨에 무언가를 둘러 주었다."흠... 역시 둘이 보통 사이가 아닌게로군."덕쇠가 침을 삼켰다. 겨우 그것뿐이었으나 어둠 속에서는 무엇이든 크게 보이는 법이었다. 덕쇠는 눈 위에 발자국이 남지 않도록 조심하며 뒷걸음질로 물러났다.같은 시각, 호직의 사랑채 곁방에서는 희도가 서책을 펼쳐 놓고 한 줄도 읽지 못하고 있었다. 내년 봄 생원시를 앞두고 달포가 넘도록 방에 틀어박혀 지낸 터였다. 창밖으로 눈송이가 날리는 것을 보고서야 붓을 놓았다."첫눈이군.""눈? 벌써 시간이 이리 흘렀군!!"희도는 마당으로 나가 눈을 한 줌 뭉쳤다. 호직이 팔짱을 끼고 문설주에 기댔다."서고에 호정이 있을 게다.""왜 내게 그걸 말하나.""네 얼굴에 쓰여 있으니까. 혼담 소식은 들었지?""들었네. 나는 벗일세. 그저 눈이 오니 보여 주고 싶은 것이 있을 뿐이야."희도는 쟁반에 눈토끼를 만들어 얹었다. 눈은 남천 열매로, 입은 마른 솔잎으로 했다. 귀가 짝짝이가 되자 한참 고쳐 보다가 포기했다.서고 문 앞에서 희도는 숨을 한 번 골랐다. 나직한 기침 소리를 내었다."호정 낭자, 계십니까. 희도입니다."안에서 호정이 놀라 시경을 쳐다보았다. 시경은 두루마기를 어깨에서 걷어 제 팔에 걸치며 짧게 말했다."들어오시오."문이 열리고 어깨에 눈을 얹은 희도가 들어섰다. 얼굴은 해쓱했으나 눈빛은 맑았다."숙부님도 계셨군요. 방해가 된 것은 아닌지요?""괜찮네. 오랜만이군."희도가 쟁반을 호정 앞에 내려놓았다. 호정의 눈이 둥글어졌다."눈토끼입니까? 참 곱습니다. 도련님이 만드셨어요?""서툴러서 귀가 짝짝이입니다. 고향 안주에서는 첫눈이 오면 아이들이 이것부터 만들었지요.""안주의 눈은 이곳보다 많이 오나요?""발목까지 쌓이는 날이 열흘은 이상이 됩니다. 언젠가 낭자
지난 보름 동안 호정은 밤마다 등잔불 아래 앉아 있었다. 종이는 쓰고 구기고 또 쓰고 구긴 것들로 쌓여 갔다. 청아가 구겨진 종이를 하나 집어 들고 한참 들여다보다 웃음을 참았다."아가씨, 숙부님 안영하십니까. 이건 영이 아니라 녕이라고 쓰셔야 합니다.""청아는 어찌 그런 것까지 아느냐. 다시 쓰겠다.""언문은 어릴 적에 어깨 너머로 배워서 몇 글자 압니다. 그 아는 글자 중 하나여요."호정은 귓불이 붉어진 채 다시 붓을 들었다. 마침내 한 장을 곱게 접어 품에 넣고서야 잠자리에 들었다.말미를 받은 시경은 순호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먼 고을에 집이 있어 말미 때마다 반촌에 홀로 남는 순호를 시경이 청한 것이었다. 순호는 사랑채에 큰절을 올린 뒤 안채 방으로 들어와 화로 곁에 앉았다."과연 영상 댁이라 방이 다르구나. 반촌 방에서는 손이 곱아 붓을 못 쥘 지경인데."호정이 차를 내왔다. 숙부가 늘 말하던 순호가 궁금했다. 순호는 입이 쉬지 않는 사내였다."도련님 안녕하십니까? 소녀는 숙부님의 조카인 호정이라 하옵니다.""아...안녕하십니까? 낭자!""이런 말씀 드리면 실례인 줄 압니다만... 정말 정말 이렇게 선녀처럼.. 아니 선녀보다 고운 분은 난생 처음 봅니다."순호의 입이 다물어 질 줄 몰랐다. 시경이 헛기침을 했다."순호!! 그만 쳐다 보시게!!"순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친화력은 대단했다."호정 낭자 제가 재미있는 이야기 해 드릴까요?"호정이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사형이 요즘 반촌에서 인기가 대단하답니다. 국밥집 주모 따님이 사형만 보면 달려 나와서 엿을 쥐여 주고 간답니다. 얼마나 살뜰한지...""순호, 쓸데없는 소리를..."시경이 눈짓을 했으나 순호는 눈치 없이 웃기만 했다. 호정의 찻잔이 달그락 소리를 냈다."그러하군요. 그 아가씨와 가깝게 지내시나 봅니다, 숙부님."호정이 환하게 웃었는데 눈은 웃지 않았다. 시경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오후 시간 다과상에서도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