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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26 10:07:41

“어딘데요?”

어느새 눈발이 제법 굵어져 있었다. 지유의 코트 어깨에 내려앉은 눈이 가로등 불빛을 받아 희게 빛났다. 몇 걸음 앞서가던 지유가 돌아섰다. 조금 전까지 굳어 있던 입가가 풀리더니, 이내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어깨 위에 쌓인 눈을 털 생각도 없는지, 지유는 그저 웃고 있었다.

“나만 따라와요.”

태오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뭐야. 예쁘네.

지유가 다시 걸음을 옮기고 나서야 태오도 발을 뗐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골목을 두어 번 꺾어 들어가자 오래된 선술집 하나가 나타났다.

빛바랜 나무 간판에 노란 불빛이 새어 나오는 창문. 낡았지만 깨끗하게 닦인 유리문에는 손으로 쓴 영업시간이 붙어 있었다. 문을 열자 따뜻한 공기와 함께 음식 냄새가 훅 밀려왔다. 벽에는 메뉴를 적은 나무패들이 빼곡하게 걸려 있었다. 계란말이, 닭껍질 교자, 소 힘줄 조림, 명란구이. 오래된 메뉴 사이로 새로 끼워 넣은 나무패 몇 개가 유난히 밝았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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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지된 이름으로 너를 부른다   39화

    오피스텔 맞은편 편의점 창가에서 지유는 커피를 한모금 마시고 길가에 정차한 차를 무심코 바라봤다. 운전석 쪽을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이 분명하게 보였다. —태오? 지유는 반가운 마음에 눈이 커졌다. 차 안에 앉은 여자가 태오를 바라보다가 정면을 보면서 웃었다. —엄마랑 있네. 아침부터 어디 다녀온건가? 여자가 손을 뻗어 태오의 머리를 만졌다. — 사이 진짜 좋네. 그 순간 여자의 손이 태오의 뺨으로 내려가더니,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보았다. 거리감이 헷갈릴 정도로 먼 거리도 아니었다. 분명히 여자가 태오에게 입을 맞추었다. 지유는 들고 있던 커피를 천천히 내렸다. 태오는 웃고 있었다. 놀라지도, 피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익숙해 보였다. 얼마 뒤 차가 출발했다. 태오는 한참을 그 차 뒷모습을 보다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지유는 그제야 긴숨을 토해냈다. 이른 아침 태오의 집에서 그 여자가 나오는 것을 보았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는 자신이 오해했다고 생각했다. 그날 여자의 얼굴에 어려 있던 묘한 홍조까지. “……뭐야.” 손에 들린 커피가 속절없이 식어가고 있었다. —- 지유는 파스타를 포크로 돌돌 말다가 다시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맞은편에 앉은 친구는 벌써 접시를 절반이나 비운 참이었다. “야, 너 오늘 왜 이렇게 안 먹어?” “먹고 있거든.” “아까부터 면만 감고 있잖아.” “생각 좀 하느라.” “무슨 생각?” 지유는 물잔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너희 집은 가족끼리 스킨십 많이 해?” 친구가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그냥 궁금해서.” “많이 하는 편이지. 왜?” “다 컸는데도?” 친구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우리 아빠는 아직도 나 애 취급하는데.” “어떻게?” “손잡고 다니고, 팔짱 끼고. 가끔 볼에 뽀뽀도 하고.” 지유가 눈을 들었다. “볼에 뽀뽀도 해?” “응. 왜?” “아니. 그냥.” “우리 아빠 외국에서 오래 살았잖아. 그런 거 별로 신경 안

  • 금지된 이름으로 너를 부른다   38화

    온몸이 노곤했다. 하지만 어깨와 허벅지에 기분 좋은 피로가 남아 있었다. 시동을 걸면서 젖은 머리를 매만지던 태오를 돌아본다. 샤워를 마치고 머리까지 말린 뒤 로비로 나오자 태오가 벤치에 앉아 있었다.그는 혜진을 보자 자리에서 일어났다.“오래 기다렸어?”“아니요. 저도 방금 나왔어요.”“어땠어?”“물을 좀 먹었어요.”“얼마나?”“배부를 만큼.”혜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태오가 혜진의 가방을 받아 들었다.“잘 하던데요?”“봤어?”혜진은 그의 팔을 가볍게 쳤다.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윤혜진 회원님.”“네, 선생님, 오늘 수고 많으셨어요.”“모레 뵐게요.”눈을 반달처럼 휘어 웃으며 태오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지나갔다.혜진은 태오를 올려다봤다.“표정이 왜 그래?”“어떤데요?”“꼭 뭐가 마음에 안 드는 사람처럼.”태오는 잠시 혜진을 바라보다가 웃었다.“선생님이 참 친절하시네요.”“웃겨.”주차장에 도착해서 혜진이 차 키를 꺼내며 물었다.“아침 먹으러 갈래?”“잠깐만요.”태오가 가방을 열었다.“뭐야?”“아침 가져왔어요.”그가 꺼낸 것은 작은 보냉 가방이었다. 혜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설마 도시락? 네가 쌌어?”“그럼 누가 싸요.”태오는 웃으며 가방을 열었다. 안에는 샌드위치 두 개와 작은 과일 통, 보온병이 들어 있었다. 혜진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너 이거 언제 만들었어?”“아침에요.”“몇 시에 일어났는데?”“네 시 반쯤?”“수영하러 온다고 네 시 반에 일어나서 도시락까지 싸?”“배고플 것 같아서요.”혜진은 샌드위치를 내려다봤다. 통밀빵 사이로 달걀과 토마토, 양상추가 가지런히 들어 있었다. 한쪽에는 얇게 구운 닭고기까지 보였다.“완전 제대로 만들었네.”“먹어봐요.”혜진은 운전석에 앉았고, 태오는 조수석에 올랐다. 차 안에는 아직 새벽의 서늘함이 남아 있었다. 태오는 보온병을 열어 작은 컵에 따뜻한 차를 따라주었다.“이것도 마셔요.”“뭔데?”“보리차요.”“너 정말

  • 금지된 이름으로 너를 부른다   37화

    —— 탈의실 거울 앞에서 혜진은 수영복을 펼쳐 들었다. 검은색 원피스 수영복이었다.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에 등 부분이 깊게 파여 있었다. - 오랜만이네 대학 시절에는 물속에서 보내는 시간이 적지 않았다. 바다에 들어갈 때면 두꺼운 잠수복을 입었지만, 실내 수영장에서는 늘 이런 단순한 수영복을 즐겨 입었다. 혜진은 옷을 갈아입고 거울 앞에 섰다. 검은 천이 몸의 굴곡을 따라 매끄럽게 붙었다. 어깨에서 허리로 내려오는 선은 여전히 곧았고, 허벅지에는 오랫동안 걷고 서서 일한 사람 특유의 단단함이 남아 있었다. 혜진은 거울 속 자신을 잠시 바라봤다. 오히려 예전보다 지금의 몸이 마음에 드는 부분도 있었다. 무턱대고 마르기만 했던 시절과 달리, 지금은 제 몸이 가진 무게와 균형을 알았다. 그녀는 수모를 쓰고 머리칼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어휴. 춥겠다.” 혼잣말을 하고는 샤워실로 향했다. 수영장 안은 이미 사람들로 북적였다. 물 위로 희뿌연 수증기가 떠올랐고, 천장에 매달린 조명이 잔잔한 물결을 따라 일렁였다. 일정한 간격으로 물을 가르는 소리와 강사의 호루라기 소리가 울렸다. 혜진은 샤워실에서 나와 풀장 쪽으로 걸었다. 그리고 태오를 발견했다. 그는 레인 끝에 서서 수모를 고쳐 쓰고 있었다. 짙은 남색 수영복이 허벅지 중간까지 내려왔다. 평소 헐렁한 티셔츠나 작업복에 가려져 있던 몸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혜진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늦췄다. 태오의 어깨는 흡사 접영 선수처럼 넓었다. 목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선이 시원하게 뻗어 있었고, 팔을 들어 올릴 때마다 등과 옆구리의 근육이 유연하게 움직였다. 팔뚝에는 잔근육이 선명했고, 허리는 군살 없이 좁았다. 반면 허벅지는 단단했다. 무작정 운동으로 부풀린 몸이 아니라, 일상에서 수없이 움직이며 만들어진 몸, 그래서 혜진이 좋아하는 거였다. 그가 몸을 돌리자 혜진과 눈이 마주쳤다. 태오가 웃었다. “왜 그렇게 봐요?” “뭘.” “나 보고 있었잖아요.” 태오가 웃으며 다가왔다.

  • 금지된 이름으로 너를 부른다   36화

    마지막으로 그 여자애를 보았던 밤이었다. 정우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던 여자애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난 말이지.” “응.” “내 애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줄 거야.” 정우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냥.” 여자애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절대 혼자 안 둘 거야.” 그 말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결연했다. 정우는 웃으며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너부터 좀 챙겨.” “난 괜찮아.” “넌 맨날 괜찮대.” “진짜 괜찮으니까.” 정우는 더 묻지 않았다. 그 애는 언제나 그랬다. 제게 닥친 불행에 대해서는 좀처럼 말하지 않으면서,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누군가의 불행을 먼저 걱정했다. 그보다 더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정우는 그 애가 정말로 제 목숨을 내어주고 아이를 살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제 아이를 지키겠다는 약속은 목숨과 맞바꾸어 지켰으나, 절대 혼자 두지 않겠다는 약속만은 끝내 이루지 못했다. 정우는 찻잔 너머로 피어오르던 김이 서서히 흩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 내가 같이 있어줄게. —— “그 아이가 참 정이 많았지.” 원장의 목소리에 정우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정우는 손끝으로 찻잔의 가장자리를 문질렀다. “그랬죠.” “자기 것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하면서 남부터 챙겼으니까.” 정우는 희미하게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태오가 어머니를 많이 닮았습니다.” 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김새보다는 하는 짓이 더 닮았지.” 정우는 창밖을 바라봤다. 겨울 햇빛이 운동장 한편에 길게 내려앉아 있었다. 오래전에는 저곳에 낡은 미끄럼틀이 하나 있었다. 또래보다도 덩치가 컸던 태오는 늘 미끄럼틀 아래에 서서 다른 아이들이 내려오는 것을 받아주었다. 정우는 식어가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원장이 책장 아래쪽에서 두꺼운 앨범을 꺼냈다. “옛날 사진이 조금 남아 있더라고.” 정우는 앨범을 받아 들었다. 사진 속 아이들은 하나같이 작고 앳되었다.

  • 금지된 이름으로 너를 부른다   35화

    고아원에 도착한 것은 오전 열한 시가 조금 넘어서였다.정우는 차에서 내려 건물 외벽을 올려다봤다. 십여 년 전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만 해도 건물은 낡고 초라했다. 겨울이면 복도에 찬바람이 들었고, 장마철에는 천장에서 물이 샜다.지금은 제법 그럴싸하다. 새로 칠한 외벽은 깔끔했고, 운동장에는 작은 놀이기구도 들여놨다. — 보람이 있네.“한회장.”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원장이 반갑게 다가왔다.“오랜만이야.”“잘 지내셨습니까?”“덕분에. 이번에도 이렇게 신경 써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별말씀을요.”정우는 뒤편의 화물차를 돌아봤다. 직원들이 상자를 내리고 있었다. 얇은 침구와 새 학기를 맞은 아이들을 위한 학용품도 있었고, 제철과일들을 가득 담은 나무 상자도 연신 내려졌다. “노트북은 다음 주에 들어올 겁니다.”“아이고, 그것까지?”“아이들이 쓰는 게 많이 낡았더군요.”원장은 연신 고맙다고 하자, 정우는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안으로 들어가시죠.”원장실은 예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낡은 책장이 벽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고, 창가에는 잎이 무성한 화분이 놓여 있었다. 정우는 소파에 앉아 차를 받았다.“태오 군은 잘 지내?”정우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네. 대학에도 들어갔습니다.”“아, 정말? 역시.”“조리 쪽으로요. 본인이 워낙 하고 싶어 했던 일이라.”“그 아이가 유독 손재주가 좋았지.”원장이 반가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어릴 때부터 고장 난 물건을 보면 그냥 지나치질 못했지. 식당 아주머니들 일도 곧잘 도왔었고.”정우는 찻잔을 내려놓았다.“그랬습니까?”“그럼. 말수는 적어도 속이 깊은 아이였어.”원장은 잠시 옛날을 떠올리는 듯했다.“엄마를 많이 닮았지.”괜히 눈시울이 시큰해지는지 원장은 안경을 벗어 눈가를 비볐다.정우도 찻잔 위로 피어오르는 김을 바라보며 태오의 엄마를 떠올렸다.자신보다 세 살이나 어리면서도 늘 자신을 챙겨주던 아이.태오에게서 가끔 그 애의 마음결을 느끼고는 놀랄 때가 종종 있

  • 금지된 이름으로 너를 부른다   34화

    그리고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 혜진은 맞은편에 앉은 지유와 제 옆의 태준을 번갈아 바라봤다.—- 한 번 보고 끝낼 여자에게 이렇게까지 시간을 쓴다고?“왜.”태준이 물었다. 혜진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아니.”혜진은 물잔을 들었다.“그냥 신기해서.”“뭐가.”혜진의 시선이 지유에게 한번 갔다가 돌아왔다.“그냥.”혜진은 웃으며 물을 마셨다. 오래전 동아리방 앞에 서 있던 여자의 얼굴은 지금도 선명했지만, 이름만은 기억이 안났다. 그리고 뽑아준 커피에는 한모금도 대지 않고 돌아갔다는 것만. 지유와 태오는 꽤 친해 보였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스스럼없는 터치가 몇 번이나 오갔고,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웃음이 이어졌다. 유독 그 시간이 길어 보였다.— 잘 어울리네.아무런 사심 없는 솔직한 감상이었다. 비슷한 나이. 같은 일터. 같은 관심사. 둘 사이에는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가벼움이 있었다.혜진은 물잔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그사이 태준은 오래전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그때 진짜 웃겼는데. 다이빙 처음 배우면서—”“선배.”혜진이 눈을 흘겼다.“왜. 사실이잖아.”“뭔데요?”태오가 곧장 물었다. 꽤 진지한 얼굴이었다.태준이 들려주는 대학 시절의 이야기부터 태오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혜진의 옛 친구들 이름까지. 하나라도 빠뜨리지 않고 기억해두려는 사람처럼 귀를 기울였다.“그때 어땠어요?”태준이 혜진을 한번 보고 웃었다.“지금이랑 똑같았지, 고집세고 자유분방하고.”“선배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혜진에게는 시답잖은 옛날 이야기였다. 태오는 맞은편의 혜진을 잠시 바라봤다.자신이 알기 전의 윤혜진.— 내가 모르는 시간들이 너무 많네.자신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존재했던 사람의 시간을 이제 와 따라잡으려는 것처럼, 태오는 다시 태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식사가 끝날 무렵에는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태준이 탁자 위에 놓인 계산서를 집어 들었다. “내가 할게.”“선배, 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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