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마지막으로 그 여자애를 보았던 밤이었다. 정우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던 여자애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난 말이지.” “응.” “내 애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줄 거야.” 정우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냥.” 여자애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절대 혼자 안 둘 거야.” 그 말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결연했다. 정우는 웃으며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너부터 좀 챙겨.” “난 괜찮아.” “넌 맨날 괜찮대.” “진짜 괜찮으니까.” 정우는 더 묻지 않았다. 그 애는 언제나 그랬다. 제게 닥친 불행에 대해서는 좀처럼 말하지 않으면서,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누군가의 불행을 먼저 걱정했다. 그보다 더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정우는 그 애가 정말로 제 목숨을 내어주고 아이를 살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제 아이를 지키겠다는 약속은 목숨과 맞바꾸어 지켰으나, 절대 혼자 두지 않겠다는 약속만은 끝내 이루지 못했다. 정우는 찻잔 너머로 피어오르던 김이 서서히 흩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 내가 같이 있어줄게. —— “그 아이가 참 정이 많았지.” 원장의 목소리에 정우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정우는 손끝으로 찻잔의 가장자리를 문질렀다. “그랬죠.” “자기 것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하면서 남부터 챙겼으니까.” 정우는 희미하게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태오가 어머니를 많이 닮았습니다.” 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김새보다는 하는 짓이 더 닮았지.” 정우는 창밖을 바라봤다. 겨울 햇빛이 운동장 한편에 길게 내려앉아 있었다. 오래전에는 저곳에 낡은 미끄럼틀이 하나 있었다. 또래보다도 덩치가 컸던 태오는 늘 미끄럼틀 아래에 서서 다른 아이들이 내려오는 것을 받아주었다. 정우는 식어가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원장이 책장 아래쪽에서 두꺼운 앨범을 꺼냈다. “옛날 사진이 조금 남아 있더라고.” 정우는 앨범을 받아 들었다. 사진 속 아이들은 하나같이 작고 앳되었다.
고아원에 도착한 것은 오전 열한 시가 조금 넘어서였다.정우는 차에서 내려 건물 외벽을 올려다봤다. 십여 년 전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만 해도 건물은 낡고 초라했다. 겨울이면 복도에 찬바람이 들었고, 장마철에는 천장에서 물이 샜다.지금은 제법 그럴싸하다. 새로 칠한 외벽은 깔끔했고, 운동장에는 작은 놀이기구도 들여놨다. — 보람이 있네.“한회장.”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원장이 반갑게 다가왔다.“오랜만이야.”“잘 지내셨습니까?”“덕분에. 이번에도 이렇게 신경 써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별말씀을요.”정우는 뒤편의 화물차를 돌아봤다. 직원들이 상자를 내리고 있었다. 얇은 침구와 새 학기를 맞은 아이들을 위한 학용품도 있었고, 제철과일들을 가득 담은 나무 상자도 연신 내려졌다. “노트북은 다음 주에 들어올 겁니다.”“아이고, 그것까지?”“아이들이 쓰는 게 많이 낡았더군요.”원장은 연신 고맙다고 하자, 정우는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안으로 들어가시죠.”원장실은 예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낡은 책장이 벽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고, 창가에는 잎이 무성한 화분이 놓여 있었다. 정우는 소파에 앉아 차를 받았다.“태오 군은 잘 지내?”정우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네. 대학에도 들어갔습니다.”“아, 정말? 역시.”“조리 쪽으로요. 본인이 워낙 하고 싶어 했던 일이라.”“그 아이가 유독 손재주가 좋았지.”원장이 반가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어릴 때부터 고장 난 물건을 보면 그냥 지나치질 못했지. 식당 아주머니들 일도 곧잘 도왔었고.”정우는 찻잔을 내려놓았다.“그랬습니까?”“그럼. 말수는 적어도 속이 깊은 아이였어.”원장은 잠시 옛날을 떠올리는 듯했다.“엄마를 많이 닮았지.”괜히 눈시울이 시큰해지는지 원장은 안경을 벗어 눈가를 비볐다.정우도 찻잔 위로 피어오르는 김을 바라보며 태오의 엄마를 떠올렸다.자신보다 세 살이나 어리면서도 늘 자신을 챙겨주던 아이.태오에게서 가끔 그 애의 마음결을 느끼고는 놀랄 때가 종종 있
그리고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 혜진은 맞은편에 앉은 지유와 제 옆의 태준을 번갈아 바라봤다.—- 한 번 보고 끝낼 여자에게 이렇게까지 시간을 쓴다고?“왜.”태준이 물었다. 혜진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아니.”혜진은 물잔을 들었다.“그냥 신기해서.”“뭐가.”혜진의 시선이 지유에게 한번 갔다가 돌아왔다.“그냥.”혜진은 웃으며 물을 마셨다. 오래전 동아리방 앞에 서 있던 여자의 얼굴은 지금도 선명했지만, 이름만은 기억이 안났다. 그리고 뽑아준 커피에는 한모금도 대지 않고 돌아갔다는 것만. 지유와 태오는 꽤 친해 보였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스스럼없는 터치가 몇 번이나 오갔고,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웃음이 이어졌다. 유독 그 시간이 길어 보였다.— 잘 어울리네.아무런 사심 없는 솔직한 감상이었다. 비슷한 나이. 같은 일터. 같은 관심사. 둘 사이에는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가벼움이 있었다.혜진은 물잔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그사이 태준은 오래전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그때 진짜 웃겼는데. 다이빙 처음 배우면서—”“선배.”혜진이 눈을 흘겼다.“왜. 사실이잖아.”“뭔데요?”태오가 곧장 물었다. 꽤 진지한 얼굴이었다.태준이 들려주는 대학 시절의 이야기부터 태오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혜진의 옛 친구들 이름까지. 하나라도 빠뜨리지 않고 기억해두려는 사람처럼 귀를 기울였다.“그때 어땠어요?”태준이 혜진을 한번 보고 웃었다.“지금이랑 똑같았지, 고집세고 자유분방하고.”“선배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혜진에게는 시답잖은 옛날 이야기였다. 태오는 맞은편의 혜진을 잠시 바라봤다.자신이 알기 전의 윤혜진.— 내가 모르는 시간들이 너무 많네.자신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존재했던 사람의 시간을 이제 와 따라잡으려는 것처럼, 태오는 다시 태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식사가 끝날 무렵에는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태준이 탁자 위에 놓인 계산서를 집어 들었다. “내가 할게.”“선배, 됐
태오가 뒤를 돌아봤다. 지유, 그리고 그 뒤에 선 남자. 두 사람을 차례로 확인하는 눈동자에 놀라움과 의문이 동시에 번졌다.네 사람의 시선이 묘하게 한가운데서 엉켰다. 가장 먼저 웃은 건 태준이었다.“이게 무슨 조합이야.”태준이 태오에게 눈짓했다.“그때 봤죠?”“네.”둘은 가볍게 목례를 주고받았다. 혜진이 눈을 조금 크게 떴다.“둘이 구면이야?”“그렇게 됐네.”태준이 빈자리를 한번 내려다봤다.“합석해도 되나?”대답을 기다릴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던 모양이었다. 재킷을 벗어 들고 자연스럽게 혜진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지유도 얼떨결에 태오의 옆자리에 앉았다.“선배, 여긴 제 아들…… 태오예요.”“아들?”태준의 눈이 태오에게 향했다.—그때 그 애가 벌써 이렇게 컸나.지유 역시 태오를 바라봤다.—아, 엄마였구나.서로 전혀 다른 이유로 두 사람의 시선이 태오에게 머물렀다. 지유는 며칠째 손이 닿지 않던 곳의 가려움이 단번에 긁힌 기분이었다. 새벽에 오피스텔에서 나오던 것도, 같은 층에서 몇 번이나 마주쳤던 것도 이제야 전부 설명이 됐다.“네. 한태오입니다.”태오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혜진의 시선이 지유에게 향했다.“그런데 이쪽은……?”태준이 지유를 돌아봤다.“정지유 씨. 아는 동생이야.”“안녕하세요. 정지유예요.”지유가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혜진과도 이미 몇 번이나 얼굴을 마주친 사이였다. 제대로 이름을 주고받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지만.“안녕하세요.”혜진도 마주 인사했다. 태준이 메뉴판을 집어 들었다.“야, 이렇게 또 만났는데 그냥 갈 것도 아니고. 요리 하나 더 시켜서 천천히 얘기나 하자고.”--------태준과 지유가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만난 사이라는 걸 알고 혜진은 적잖이 놀랐다. 기억 속 태준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동아리방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 받은 강렬한 인상은 함께 활동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오히려 짙어졌다.자신을 유심히 바라보는 태준의 눈에는 분명 성적인 관심도 있었다.
납골당은 평일 오전이라 한산했다. 태오는 한참 동안 유리 너머의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사진 속 여자는 스물한 살이었다. 자신보다 겨우 한 살 많을 뿐이었는데,..어릴 때는 엄마가 아주 큰 어른인 줄 알았다. 뭐든 알고, 뭐든 할 수 있는 사람. 세상에 둘밖에 없었으니 비교할 대상도 없었다. 그런데 점점 커가면서 알게 되었다. 엄마가 얼마나 어렸는지. 태오는 유리문을 열어 꽃다발을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유골함 옆으로 꽃을 가지런히 세우고, 비뚤어진 사진을 손끝으로 바로잡았다.“나왔어.”대답이 있을 리 없는데도 매년 같은 말을 했다.“올해도.”사진 속 엄마는 여전히 같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함께 찍힌 사진 속 태오는 형편없이 어렸다. “나 대학 가.”조금 우습게 웃었다.“알고 있나.”그리고 이번에는 조금 뜸을 들였다.“요리해.”엄마가 살아 있었다면 좋아했을까, 잘했다고 했을까. 내가 해준 요리를 먹고는 엄지 척을 했겠지. “엄마.”심각한 전신화상을 입고도 엄마가 일주일이나 중환자실에서 버텼던 이유를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였다. 자신이 들어간 바로 그 보육원에서 엄마 역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였다.그날 태오는 엄마가 죽은 뒤 처음으로 펑펑 울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입을 틀어막은 채 한참을 울었다.내가 유일한 가족이었구나. 그래서 그렇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구나.혼자 남을 자신이, 엄마처럼 외롭게 자랄까 봐. 유리문에 비친 태오의 얼굴이 사진 속 엄마의 얼굴 위로 희미하게 겹쳤다.“나도 이제 가족이 있어. 너무 걱정하지마.”물론 자신의 친아버지에 대한 궁금증은 가슴 한쪽에 있었다. —그 사람은 내가 있다는 걸 알았을까.딱 거기까지. 원망도 그리움도 아닌, 타인보다도 더 먼 그런 감정이었다. “나 갈게. 다음에 올땐 디저트 좀 싸올게.”농담처럼 말하고 납골당을 나왔다.밖은 눈이 부실 만큼 맑았다.태오는 계단을 내려가며 주머니를 더듬어 휴대폰을 꺼냈다.[나
검은 패딩을 걸친 남자가 지유와 나란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훤칠한 키에 제법 다부진 체격. 지유가 무슨 말을 했는지 남자가 고개를 숙여 듣다가 웃었다.태준의 시선이 잠시 그에게 머물렀다. 지유가 먼저 태준을 발견하고는 걸음이 뚝 멎었다.“어?”태오도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는 사이 태준이 천천히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퇴근했어요?”지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여긴 어떻게…”“세탁비 받으러 왔는데,”손목 시계를 흘끔 보고는,“너무 늦었으니까 30분만 빌리지?”“아…”지유는 잠시 태준을 바라봤다. 뜬금없긴 했다. 그 날 처음 본 손님이 퇴근 시간에 맞춰 레스토랑 앞까지 찾아온 것도, 다짜고짜 삼십 분을 달라는 것도. 지유는 짧은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럴게요.”그리고 태오를 돌아봤다.“먼저 들어가.”그제야 태준은 지유가 태오의 패딩 자락을 가볍게 잡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태오가 괜찮겠느냐는 듯 지유를 바라봤다. 지유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떨궜다. 그도 더 묻지 않았다.“내일 봐.”“응. 잘 가.”태오는 태준에게 가볍게 목례한 뒤 지나갔다. 태준도 별생각 없이 목례를 받아주었다.”어디 가게요?“”일단 차에 타지?“지유의 시선이 길가에 세워진 차로 향했다.갑자기? 아무리 손님으로 만났다고 해도 선뜻 올라타기에는 조금 꺼림칙했다. 태준은 먼저 조수석 문을 열어주는 대신 제 차 옆에 기대선 채 가만히 기다렸다. 그게 오히려 지유의 경계심을 조금 누그러뜨렸다.“진짜 딱 삼십 분요.”태준이 웃었다.“원하면 이십 분도 되고.”“십 분은요?”“그건 좀 아까운데.”지유가 결국 피식 웃었다.“뭐가 그렇게 아까워요?”“기다린 시간이 있어서.”“……기다렸어요?”지유가 눈을 가늘게 떴다. ----------차 안에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차창을 스치는 바람 소리만 잔잔하게 섞여 있었다. 재즈인지 클래식인지 모를 느린 리듬. 처음 타는 남자의 차인데도 이상하게 긴장이 풀렸다. 딱히 낯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