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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회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1-04 08:57:44

어느 순간부터 편지의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보고 싶다는 말이 부쩍 많아졌다.

그런데도 수연은 좀처럼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다. 오늘 무엇을 먹었는지, 어디에 다녀왔는지, 길을 걷다가 어떤 노래를 들었는지. 그리고 그때마다 태준이 생각났다는 이야기뿐이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러나 날짜 사이의 간격은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지유는 편지 한 장을 내려놓고 다음 편지를 집어 들었다.

그러다 마지막 두 통에 이르렀을 때, 잠시 숨을 멈췄다.

<보육원을 나왔어>

짧은 문장이었다.

지유는 그 아래를 읽었다.

수연은 앞으로 어디에서 지낼지, 무엇을 하며 살아갈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럼에도 태준을 원망하는 말은 없었다.

마지막 편지는 유독 짧았다.

<나중에 아들을 낳으면 이름은 태오라고 지을 거야>

지유는 그 문장을 다시 읽었다.

태오.

왜 하필 그 이름이었을까.

편지에는 수연이 실제로 임신했는지 알 만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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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지된 이름으로 너를 부른다   70회

    “알아요.” “아니. 제대로 들어.” 혜진은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네가 아무리 원해도, 나는 내 가정을 버리지 않아.” — 넌 잃을 것이 없잖아. 순간 혜진은 흠칫했다. 태오의 상황을 자기 입맛대로 해석하고 있었구나. 태오는 씁쓸하게 웃었다. “당신한테는 남편도 있고, 가족도 있고, 돌아갈 집도 있으니까.” “태오야.” 당신이 그토록 지키고자 하는 그곳에는 대체 무엇이 있는데. 태오의 머릿속에 정우와 수진의 모습이 떠올랐다. 서로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던 두 사람. 실체도 없는 신기루를 움켜쥔 채, 그것을 세상에 둘도 없는 보석인 양 애지중지하는 모습이 태오에게는 못내 안타까웠다. 그녀는 자신이 정해 놓은 선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남편과의 생활도, 태오와의 관계도. 어느 하나 포기하지 않으면서 어느 쪽에도 상처 입지 않기를 원했다. 그런데 정작 그 선을 가장 자주 넘나드는 사람은 혜진 자신이면서. 제 뜻대로 관계를 끌고 가려 하면서도 끝내 자신을 놓지 못하는 모습이, 태오에게는 애처롭기까지 했다. “그런데 나는요?” 태오는 잠시 말을 멈췄다. “나는 당신을 잃으면 뭘 남겨야 하는데요?” 혜진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건…….” “당신이 원할 때만 만나고, 남편 앞에서는 아무 사이도 아닌 척하고, 그러다 당신이 그만하자고 하면 그만두는 거? 그게 당신이 원하는 거예요?” 혜진은 폐부를 찔린 기분이었다. “알겠어요.” 태오가 의자를 뒤로 밀었다. 혜진은 뜻밖의 반응에 그를 바라보았다. “뭘 알겠다는 거야?” “당신이 뭘 원하는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으로 정우 씨 앞에서 그런 말 안 할게요. 곤란하게 만드는 일도 없을 거예요.” 혜진은 안도해야 했다. 자신이 원하던 대답이었으니까. 그런데 태오가 돌아서자 이상하게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태오야.” 그가 걸음을 멈췄다. “그럼 우리…….” 혜진은 말을 끝맺지

  • 금지된 이름으로 너를 부른다   69회

    어느 순간부터 편지의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보고 싶다는 말이 부쩍 많아졌다. 그런데도 수연은 좀처럼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다. 오늘 무엇을 먹었는지, 어디에 다녀왔는지, 길을 걷다가 어떤 노래를 들었는지. 그리고 그때마다 태준이 생각났다는 이야기뿐이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러나 날짜 사이의 간격은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지유는 편지 한 장을 내려놓고 다음 편지를 집어 들었다. 그러다 마지막 두 통에 이르렀을 때, 잠시 숨을 멈췄다. 짧은 문장이었다. 지유는 그 아래를 읽었다. 수연은 앞으로 어디에서 지낼지, 무엇을 하며 살아갈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럼에도 태준을 원망하는 말은 없었다. 마지막 편지는 유독 짧았다. 지유는 그 문장을 다시 읽었다. 태오. 왜 하필 그 이름이었을까. 편지에는 수연이 실제로 임신했는지 알 만한 내용이 없었다. 다만 편지들이 끝을 향해 갈수록 수연이 얼마나 외로웠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태준은 답장은 물론 수연의 모든 연락을 차단했던 거 같았다. 수연의 편지에서는 시간이 흐를수록 혼자 말을 건네는 사람의 쓸쓸함이 짙게 배어 나왔다. 지유는 마지막 편지를 내려놓았다. 편지 속 글자 한 획 한 획마다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이 스며 있는 것 같았다. — 태오. 지유는 마음속으로 그 이름을 다시 불러보았다. 그리고 문득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태오. 레스토랑에서 늘 마주치는 그 얼굴이었다. 지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멀쩡히 가족이 있는데. — 설마. 그녀는 다시 폴라로이드 사진을 집어 들었다. 사진 속 수연은 여전히 환하게 웃고 있었다. ------------- [고객님이 지금 전화를 받으실 수 없어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몇 번째 전화인지도 모르겠다. 혜진은 자신의 전화뿐만 아니라, 문자까지 모두 외면 중이

  • 금지된 이름으로 너를 부른다   68회

    지유는 태준의 커다란 티셔츠 한 장을 걸친 채 서재에 앉아 있었다. 벽과 천장, 책장까지 온통 나무로 마감된 공간이었다. 제법 넓은 방이었지만 차갑거나 휑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오래된 목재 특유의 색감과 은은한 향 덕분에 아늑했다. 간간이 다이닝룸 쪽에서 도마를 두드리는 칼질 소리가 들려왔다. 탁, 탁, 탁.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지는 그 소리마저 지유의 마음을 고요하게 했다. 지유는 의자를 뒤로 돌려 책장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경제서와 역사서, 두꺼운 외국어 원서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그사이에서 유독 낡은 양장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책등에는 아무런 제목도 적혀 있지 않았다. — 무슨 책이지? 호기심에 책을 꺼내 펼쳤다. 그 순간, 책장 사이에서 편지와 쪽지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어?” 지유가 놀라 몸을 숙였다. — 뭐야. 학창 시절에 주고받은 연애편지라도 되는 걸까. 그런 생각에 피식 웃으며 바닥에 흩어진 종이들을 하나씩 주워 담았다. 누렇게 바랜 편지 봉투, 반으로 접힌 메모지, 모서리가 닳은 작은 종이들. 그사이에 사진 한 장이 섞여 있었다. 폴라로이드 사진이었다. 지유는 무심코 사진을 집어 들었다. 어느 레스토랑에서 찍은 듯했다. 두 사람의 뒤로 테이블과 조명이 희미하게 보였다. 사진 속 여자는 꽤 어려 보였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과 앳된 얼굴.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웃음이었다. 카메라를 향해 활짝 웃고 있었는데, 그 표정이 어찌나 밝은지 사진을 보는 사람마저 따라 웃게 만들 정도였다. 그 옆에는 태준이 있었다. 지금보다 훨씬 젊은 얼굴이었다. 표정은 여전히 무뚝뚝했지만, 입가와 눈매에는 희미한 웃음이 어려 있었다. 지유는 사진을 조금 더 가까이 가져갔다. — 이렇게 웃는 사람이었나. 사진 아래쪽의 흰 여백에는 작고 동그란 글씨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태준 오빠, 내가 많이 사랑하는 거 알지? 한 장뿐인 이 사진은 오빠가 간직해.

  • 금지된 이름으로 너를 부른다   67회

    “이건요?” 지유가 장식장 위의 작은 물건을 가리켰다. 태준은 잠시 그것을 바라봤다. “그건…….”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지유의 질문에는 단순히 물건의 이름을 묻는 것 이상의 호기심이 있었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왜 이런 것을 샀는지, 어째서 여기에 두었는지. 그러고 보면 태준 자신도 이유를 잊어버린 채 가지고 있는 물건들이 적지 않았다. 필요해서 샀던 것인지, 누군가에게 선물받았던 것인지조차 가물가물한 것들. 지유가 묻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별생각 없이 그 자리에 두었을 것이다. “왜요? 기억 안 나요?” “그러게. 이걸 왜 샀더라.” 태준이 웃자 지유도 따라 웃었다. “집에 있는 물건인데도 몰라요?” “오래 살다 보면 그래.” “얼마나 오래 사셨는데요?” “십 년은 넘었지?” “와.” 지유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더니 통창 너머 정원으로 시선을 돌렸다. 넓게 펼쳐진 잔디밭 가장자리에는 키가 제법 큰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정원 한편에는 야외용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고, 그 뒤로 낮은 담장이 이어졌다. 혼자 살기에는 꽤 넓은 단독주택이었다. 아마도 넷, 아니 그 이상의 가족 구성원을 염두에 두고 구입한 집이리라. 5개의 방과 4개의 욕실은 좀 오버야. “안 무서워요?” “뭐가?” “이렇게 넓은 집에 혼자 있으면.” 무섭지는 않았지만, 가끔 지나치게 조용했다. “익숙해지면 괜찮아.” “나라면 맨날 거실에만 있을 것 같아요. 다른 방은 들어갈 일도 없겠는데요?” “나도 그래.” “그럼 나머지 방은 왜 있어요?” 태준은 웃으며 거실 통창 앞에 서있는 지유의 실루엣을 눈에 담았다. 정원에서 스며든 오후의 햇빛이 그녀의 어깨와 머리카락 가장자리에 엷게 내려앉아 있었다. 지유가 고개를 돌렸다. “왜 그렇게 봐요?” “그냥.” 태준은 느릿하게 웃었다. “잘 어울려서. 우리 집이랑.” 지유는 입술을 샐쭉 내밀더니 소파 쪽으로 걸어왔다.

  • 금지된 이름으로 너를 부른다   66회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정우는 셔츠를 벗어 던졌다.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걸까. 아직 확인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태오의 침대 밑에서 발견한 목걸이와 혜진의 목덜미에 남아 있던 붉은 흔적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정우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어느새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혜진은 주방에서 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전기포트에 물을 올리고 찻잔을 꺼내는 뒷모습이 평소와 다름없이 익숙했다. 정우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태오 집에는 가끔 가?” “응?” 혜진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아직 식당에서 있었던 일을 곱씹고 있었다. 태오의 아슬아슬한 질문이 못내 화가 났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꺼낸 것일까. 정우가 조금만 더 예민하게 받아들였더라면 어쩔 뻔했는가. 어디까지 허용하고, 언제 끝낼 것인지. 이제는 분명한 선을 그어야 했다. 자신은 결국 이 세계에 속한 사람이었다. 남편이 있고, 아들이 있고, 오랫동안 일구어 온 생활이 있는 세계. 잠시 다른 곳에 마음을 빼앗겼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을 버릴 수는 없었다. “거의 안 가지. 그건 왜?” “아니, 뭐. 태오 혼자 있으면 적적하잖아. 민재도 없고, 나도 거의 일에 매여 있고.” 정우는 주방 조리대에 한 손을 짚었다. “당신은 카페 오가는 길에 가끔 들러 주면 좋을 것 같아서.” 말투도, 내용도 한없이 다정했다. 그러나 혜진을 바라보는 눈빛만은 달랐다. 사소한 표정 변화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집요하고 날카로웠다. 혜진은 티백을 꺼내 찻잔에 넣느라 그 눈빛을 보지 못했다. 아마 보았더라면 알아차렸을 것이다. 지금 정우가 걱정하는 것은 태오의 외로움 따위가 아니다. 그리고 혜진 자신이 경계해야 할 사람은 태오가 아니라는 것을. 정우가 조리대를 돌아 혜진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그리고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붉은 흔적은 티셔츠의 목선에 반쯤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화장이 거의 지워진 탓에 오히려 아까보다 선명했다

  • 금지된 이름으로 너를 부른다   65화

    그날 혜진이 먼저 정우에게 다가온 이후로,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의 섹스는 없었다. 물론 수진을 만나는 간격이 유독 짧아진 탓에 정우로서는 아쉬울 겨를도, 안하게 된 기간을 생각할 이유도 없었다. 혜진과는 잘 맞았다. 첫 만남부터 혜진은 섹스에 있어서는 꽤 대담했고, 즐겼다. 하지만 평소의 그녀는 조신하고 단정한 축에 속했다. 낮과 밤의 온도 차가 확연한 여자. 정우는 그 이중적인 면이 유독 마음에 들었다. 혜진 역시 정우와의 관계를 꽤 만족해했었다. 한 번으로 만족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정우가 먼저 지쳐 나가떨어지고 나서야 혜진은 아쉬운 듯 웃으며 그의 몸을 꼭 끌어안곤 했다. —그런데 정우는 올리브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안 먹어? 회사에서 뭐 먹고 왔어?” 혜진이 의아한 듯 정우의 접시를 들여다봤다. 음식은 반 넘게 남아 있었다. 어느새 다음 메뉴가 테이블 위에 놓이고 있었다. “점심 먹은 게 아직 소화가 안 됐나 봐.” “뭐 먹었는데?” “삼계탕” 정우의 시선이 문득 혜진의 목덜미에 머물렀다. 목걸이 하나 걸려 있지 않은 공허한 목덜미에서 쇄골까지 시선이 천천히 내려갔다. 화장에도 채 가려지지 않은 붉은 반점이 눈에 들어왔다. 모를 수가 없다. 상대의 입술이 집요하게 머물렀을 때, 특히 피부가 연약한 여자에게 남곤 하는 흔적이었다. 정우 자신도 수없이 보아 왔고, 남기기도 했던 자국. 울혈. 정우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왜?” 혜진이 그를 바라봤다. 정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시선은 여전히 그녀의 목덜미에 머물러 있었다. “어디 아파?” 혜진이 물었다. 그제야 정우는 눈을 거두었다. “아니.” 그는 레몬수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올리브의 짠맛과 레몬의 신맛이 전혀 어우러지지 않은 채 입 안을 맴돌았다. “참, 다음 주에 부부 동반 모임 있는 거 알지?” 혜진은 새로 서빙된 도미 필레를 눈으로 훑으며 말했다. 껍질은 노릇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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